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년~1806년)가 그린 25점의 풍속화를 모아놓은 화첩으로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총 27점이었으나 뒷부분에 존재하던 군선도 2점이 별도의 족자로 만들면서 총 25점이 되었다.

[서당]은 씨름, 무동과 함께 김홍도 풍속화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게 이 작품들은 위작 논란에 싸여있다.

나는 이 작품들이 김홍도의 진품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김홍도가 직접 그리지는 않았다.

김홍도 풍속화첩 속에 있는 [서당]이라는 작품이다. 모작 흔적이 역력하다. 모작은 국가에서 주도했으며, 이런 문화를 수용해야 조선시대 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김홍도 풍속화첩 속에 있는 [서당]이라는 작품이다. 모작 흔적이 역력하다. 모작은 국가에서 주도했으며, 이런 문화를 수용해야 조선시대 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뭔 말이냐고?
먼저 조선의 풍속화에 대해 알아보자.

풍속화는 민본정치라는 정치적 요구에 따른 그림이자 국가사업이다.
당연히 많은 인력과 자금이 들어간다.
이러한 풍속화 사업은 왕의 비서실인 규장각이 주관하고 집행은 도화서에서 했다.
도화서에서는 당대 최고 화원인 김홍도를 중심으로 여러 화원을 조직했다.

제작 기간은 최소 6개월 이상이었다.
한양을 중심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관찰, 조사하고 수백 장 이상의 밑그림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밑그림은 규장각 관리와 도화서에서 검증하고 취사선택했다.

선택한 작품은 대략 30점 내외였을 것이다.
이 중에서 비단에 옮겨 그리고 채색할 10점을 따로 선별한다.
병풍을 만들기 위함이다. 하나의 원본으로 10좌를 모사하여 제작했다.
세로로 긴 화면에 그릴 수 있는 구도의 그림이어야 한다.
궁궐이나 관청에 두거나 고위직 관리에게 하사할 병풍 그림이기에 묵직하고 정갈한 형식으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화첩 그림에는 없는 건물이나 산수풍경을 넣어 빈 곳을 채운다.
족자 그림으로 만들 작품도 10점 선별한다.
최종 선별한 30점 중에서 고르기도 하고 병풍용 그림을 중복하여 사용했다.
병풍 그림보다는 엄격하지 않지만, 담채 이상의 채색을 했다.
각기 다른 10점을 원본으로 3점씩 모사하여 30점을 만들었다.

30여 점 중에서, 25점을 선발하여 화첩으로 만든다.
화첩의 분량은 100여 점으로 추정한다.
서책의 비율에 맞게 풍속화 구도를 짜야 한다.
총감독 김홍도는 천재답게 원형 구도를 사용하여 화첩에 최적화된 작품을 창작했다.

모든 원본은 김홍도가 직접 그렸다. 병풍 그림의 선묘나 주요 장면도 김홍도가 직접 그렸다. 하지만 채색이나 산수화 부분은 채색에 뛰어난 화원과 협업했다.
작품 제작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즉흥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화서를 중심으로 철저한 분업과 협업으로 제작한다.

김홍도는 완성된 원본을 다른 화원이 모사할 수 있도록 모사용 화본(畫本)을 만든다.
최소 10여 명의 도화서 화원이 몇 개월에 걸쳐 병풍, 족자 그림, 화첩 그림을 모사한다.

도화서에서 풍속화를 제작한다는 소문이 광통교를 강타했다.
수십 년 만에, 그것도 당대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가 그린다는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조선팔도의 화랑가에 퍼졌다.
광통교 큰손 화상들은 도화서 화원에게 술과 뇌물을 먹였다. 풍속화 모사본을 구하기 위해서다.
모사본을 빼돌리다가 걸리면 문책당한다. 하지만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구매자들이 있었다.
국가사업으로 그린 풍속화는 정부 관리가 아니면 받을 수 없다.
전직 관리나 관직이 없는 부자, 족보용 명예 관직을 받은 중산층이 주요 고객이다.

조선에서 그림은 권위와 위세, 명예, 유행의 상징이었다.
조선을 이끌어가는 왕과 왕실, 고위 관료만 받을 수 있는 그림을 소장하는 것은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1918년 개인이 소장하던 화첩을 구매했다. 원래 27점이었으나 뒷부분에 붙어있던 군선도를 따라 분리하면서 25점의 화첩이 되었다. 작품마다 편차가 있고 시기도 모호해서 위작 논란이 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1918년 개인이 소장하던 화첩을 구매했다. 원래 27점이었으나 뒷부분에 붙어있던 군선도를 따라 분리하면서 25점의 화첩이 되었다. 작품마다 편차가 있고 시기도 모호해서 위작 논란이 있다. [사진 제공 - 심규섭]

화공들이 바빠졌다.
전직 도화서 화원 출신, 광통교 서화사 소속 출신, 도화서 화원 제자 출신처럼 여러 경로로 그림을 배워 직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도화서 출신 화원이 빼돌린 모사본으로 수십 장의 모사본으로 만든다.
이 모사본을 팔도의 큰 화상에게 판매하고, 큰 화상들은 모사본의 모사본을 만들어 더 작은 화상에게 재판매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원본 작품과는 다른 변주가 일어난다.
팔도의 화공들은 모사본을 보면서 필법과 채색법을 연습한다. 모사본과 가장 근접하게 그리는 화공이 중심이 되어 수십, 수백 점의 작품을 모사한다.
모사 과정을 거치면서 화공의 실력은 향상되고 커다란 유행을 만들어낸다.
모사는 분업과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선묘만 그리는 화공, 채색만 하는 화공으로 구분한다.
인물 선묘, 산수 선묘와 채색도 구분한다.

모사한 작품들은 수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가격이 결정된다.
도화서에서 풍속화 제작이 완성되어 궁궐과 관청에 걸리고 왕실을 비롯한 고위 관직자에게 하사될 무렵, 광통교에서 제작한 풍속화 모사품도 유통되기 시작한다.

“위 이야기가 사실인가?”

“소설일세. 기록도, 전해오는 이야기도 없으니 소설을 쓸 수밖에 없네.
하지만 근거는 충분하네. 우리 그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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