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조선의 여류화가들
역사상 고려와 조선에 여류화가가 몇 분 있다. 고려말의 명유(名儒)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손녀이며 좌의정 홍응(洪應, 1428~1492)의 외조모 ①이씨(李氏)1)가 그림에 뛰어났다고 한다.
조선전기, 특히 15세기의 여류화가로는 우선 세종조의 화원 ②홍천기(洪天起)2)가 있고, 신말주(申末舟, 1429~1503)의 부인 ③‘순창설씨(淳昌薛氏, 1429~1508)’가 있으며, 인재 강희안(姜希顔, 1418~1465)의 딸이자 교감 김맹강(金孟鋼, 성종조)의 처 ④‘진주강씨(晉州姜氏)’도 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모친 ⑤‘신사임당(申師任堂)’과 그의 딸 ⑥이매창이 있고, 허균의 누이 ⑦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도 현전하는 작품이 있다. 이들은 모두 양가집 규수(閨秀)로서 학문과 재주가 뛰어났다.3)
임진왜란 이후 조선중기에 활동한 여류화가로는 경당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딸이며 석계 이시명의 처이자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어머니인 ⑧‘안동장씨(安東張氏)’, 육오재 정경흠(鄭慶欽, 1620~1678)의 누이며 현감 권육의 아내이자 권경의 조모인 ⑨‘하동정씨’가 그림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조선중기 영조조에 강희맹의 10대 손부이며 강인환의 어머니 ⑩‘경주김씨’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 순조조에 ⑪‘김경혜(金景蕙)’로 기록된 권상신(權常愼, 1759~1824)의 첩은 시와 그림, 거문고와 바둑에 뛰어났다고 되어있다. 강희맹의 12대 손녀, 탄재 윤광연의 처 ⑫‘정일당 진주강씨(1772~1832)’는 초서와 해서를 잘 쓰고 시에도 능하였다. 그리고 평양기생 ⑬‘죽향(竹香)’4)은 낭간(琅玕)이라는 호를 썼으며 그가 그린 난초와 묵죽 난죽 등의 그림 등이 현전하고 있다.
2. 사임당의 가문과 자손
사임당 신씨(申師任堂, 1504~1551)의 본관은 평산(平山)인데,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申崇謙, ?~927)의 후손이다. 그의 고조부는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1374~1446)이다. 고조부 신개는 세종대왕 시절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도총제 등등을 지냈고, 나중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할아버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지냈고, 아버지 신명화(申命和, 1476~1522)는 진사에 그쳤다. 사임당의 어머니는 용인이씨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신명화는 몇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16년(중종11년) 한양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당시 조광조가 등용되어 급진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면서 신명화와 그의 사촌 동생 신명인 등도 이들 신진 사류와 상당한 교류를 하였고, 동생 신명인은 그 중요한 성원이 되었다. 1519년(중종4년)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그날 신명인은 대전 뜰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중종에게 간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도 친구 유생들 틈에 같이 있다가 붙잡혀 나흘 동안이나 옥고를 치른다. 그 뒤 신명화는 관직을 단념하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장인 이사온 내외를 모셨다.
사임당 신씨는 19세에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 1501~1561)에게 출가했으니, 그 시부가 이천(李蕆)이고 시조부는 이의석(李宜碩)이다. 이의석은 조선전기 노비 출신의 화원 이상좌(李上佐, 대략 1480경~1549~?)의 주인이었다.
사임당 신씨는 16세기 조선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와 여류 문인 이매창(李梅窓, 1529~1592), 옥산 이우(李瑀, 1542~1609) 등 7남매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시와 그림 및 글씨에 능했는데, 그의 자녀 가운데 이매창과 이우는 사임당 풍의 그림을 그렸다.
특히 이매창은 어머니를 닮아 시(詩) 서(書) 화(畫)에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조선전기의 명필로 유명한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67)로부터 ‘부녀자 중의 군자(君子)’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매창은 특히 풀벌레 그림을 잘 그렸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이매창의 둘째 아들인 조영(趙嶸, 1572~1606)도 글씨와 그림에 능했다.
3. 사임당의 일생에 관하여
조선시대의 다른 여성들처럼 율곡의 모친 평산신씨도 이름이 없었다.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 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사임당이라는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文王, BC. 1152년~1056년)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임당은 외가가 있는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신명화는 신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딸이 출가한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다. 이에 신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며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 신명화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신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이어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시집의 터전인 파주 파평면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1541년(중종36) 38세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왔으며,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종로구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1551년(명종6‘ 48세 시) 봄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4. 사임당의 예술
사임당은 율곡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어머니이다. 그런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모범 여성상에 맞추어 사임당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임당의 미술에 관한 평가도 그렇다.
사임당은 이미 7세(1510년경)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했다고 하는데, 그 시기에 안견의 그림은 매주 고가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임당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한 부유한 환경이 있었다.
사임당의 그림과 글씨, 시에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성을 보인다. 사임당의 그림은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魚竹) 매화 난초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畫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이나 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絶讚)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사임당의 전칭작품으로는 채색화와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현전하고 있다. 16세기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山水)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사임당의 산수가 ‘안견 다음에 간다’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사임당의 산수가 안경화풍을 따랐음을 의미한다. 사임당의 「산수도」는 매우 희소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2점(소장품 번호; 신수7596)이 현전하고 있다. 지본수묵에 크기는 세로 34.2cm, 가로 62.2cm이다. 이 「산수도」는 15세기의 안견파 화풍이라기보다는 16세기 전반기에 들어와 변화한 안견화풍의 영향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임당의 이 산수를 통하여 안견의 작품으로 전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소상팔경도」 8폭이 16세기의 작품이 아니라 15세기의 작품이라는 점, 즉 「소상팔경도」 8폭은 안견의 생존연대로 올라가는 작품이라는 점을 유추하게 한다.
사임당의 그림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초충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신사임당초충도(申師任堂筆草蟲圖)」 8곡병(소장품 번호: 신수3550)이 소장되어 있다. 그림은 지본채색이며 모두 8점이고, 두 장에는 후손 신경(申暻, 1696~?)의 발문과 당대 최고의 감식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1946년에 쓴 배관(拜款)이 들어가 있다. 그림 한 폭의 크기는 세로 32.8cm, 가로 28.0cm이다.
그림의 각 폭마다 화면의 중앙에 두 세 가지의 식물을 그린 다음에, 그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풀벌레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그림에 좌우 균형과 변화를 주었다. 그려진 형태가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여러 가지 식물과 풀벌레를 실물에 가깝게 섬세하고 선명한 필선으로 정확하게 묘사하여 여성 특유의 청초하고 산뜻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하는 거의 모든 작품에는 관지나 낙관(落款)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그림에 낙관을 찍는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보편화 되었고,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 이름이 없어 인장을 새기는 일도 흔치 않았다. 따라서 사임당의 작품에 낙관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성의 작품인 경우 전래한 내력을 살피는 일은 필수적인 일이다.
사임당의 글씨로 현전하는 작품은 초서 6폭과 해서 1폭이 있다. 그 가운데 「신사임당초서병풍(申師任堂草書屛風)」 6폭병은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 1541~1620)이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 1573~?)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해 온 것이다. 6폭병은 1973년 7월 31일 강원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신사임당의 글씨를 새긴 판목이 오죽헌에 소장되어 있다. 이 판목은 고종 때의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 1805~1886)가 병풍의 글씨를 베끼어 판목을 만든 것으로 이 판목에서 많은 목판본을 인쇄하였다.
5. 맺음말
사임당의 작품은 대부분이 전칭작품이다. 그 전칭작품 가운데 유래가 분명한 작품도 상당수 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2점과 「신사임당초충도(申師任堂筆草蟲圖)」 8곡병, 「신사임당초서병풍(申師任堂草書屛風)」 6폭병은 사임당의 그림과 글씨에서 대표작으로 비정(比定)하여야 한다.
사임당의 전칭작품 가운데는 아들 옥산 이우나 딸 이매창의 작품도 섞여 있을 것이다. 사임당 자녀 남매는 모친으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임당의 전칭작품 모두를 회의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서두에서 언급한 조선의 여류화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는 전칭작품이기는 하지만 사임당이다. 그러한 만치 사임당의 작품세계를 연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다른 자매들보다도 일찍 글을 깨쳤다.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성리학과 글씨,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는데, 딸 중에서도 사임당의 재능을 높이 본 신명화는 사임당을 각별히 아꼈다.
신말주의 부인 순창설씨가 15세기의 대표적인 여류화가라면, 사임당 평산신씨는 16세기의 대표적인 여류화가이다. 순창설씨의 작품이 1점5) 현전하고 있고, 사임당의 유래 있는 전칭작품도 여러 점 전한다.
주(註)
주1) 홍응(洪應, 1428~1492)의 외조모 이씨에 관해서는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해동명적」을 인용하여 채록되어 있다. 홍응은 홍심(洪深, 1398~1456)의 아들이자 홍덕보(洪德輔)의 손자이다. 홍응의 외조모는 어머니의 어머니를 의미하므로, 홍응의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 홍심의 부인)는 이조참의를 지낸 윤규(尹珪, 1365~1414)의 딸이다. 윤규의 부인이 이제현의 손녀이어야 홍응의 외조모가 되는데, 아직 이제현(李齊賢, 경주이씨) 의 어느 아들과도 연결점을 찾을 수가 없다. 향후 이 이씨가 누구인지 세밀한 탐색이 요구된다.
주2)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권1에는 ‘홍천기녀(洪天起女)’라고 언급하고 있어 ‘홍천기의 딸’이라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홍천기’‘최저’를 언급한 부분이 있어. ‘홍천기의 딸’이라기보다는 ‘홍천기(여)’하고 이해된다. 즉 홍천기는 흔치 않은 여성 이름으로 보인다. ‘홍천기’는 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으로 종7품 화사(畫史)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권6에 의하면, 절세미인이었으며,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인용된 「해동명적」에는 최저(崔渚)와 함께 언급하며 “산수화에 이름이 있었으나 화격이 높지 못한 용품이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이들의 현전 작품은 없다.
주3) 16세기의 기생 황진이(黃眞伊, 1506~1567)가 시, 서, 화에 모두 능통한 기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화에 능하였을 가능성은 높지만, 이를 증빙할 만한 당대의 기록이나 작품이 없다.
주4) 죽향의 호는 낭간(浪玕), 용호어부(蓉湖漁夫). 평양에서 19세기 전반에 활동하였다. 그녀에 대한 언급은 신위(申緯)의 『경수당집(警修堂集)』, 이만용의 『동번집(東樊集)』,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집(阮堂集)』 등 여러 문집에 보인다. 이 중 죽향의 『묵죽첩(墨竹帖)』에 묵죽의 대가인 신위가 제시(題詩)를 쓴 사실은 크게 주목된다. 김정희도 칠언시 두 수를 장난삼아 써 주었다[戱贈]고 한 점 등에서 당시 그녀에 대한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10폭과 3폭으로 된 두 「화훼초충첩(花卉草蟲帖)」이 죽향의 전칭 작품으로 현전한다. 이 전칭 화첩은 같은 크기(견본채색, 24.8×25.4㎝)로 보아 하나의 화첩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이 화첩의 작품을 보면 19세기 일반 화훼 초충과 동일한 시대 양식을 보이며 대체로 섬세한 필치, 고른 선묘(線描), 화사한 설채(設彩), 화면 구성의 단순성과 동일성 등을 보여준다.
주5) 필자, 「조선초기의 여류화가 순창설씨부인」, 2025.01.13., 통일뉴스.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557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