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양송당 김시는 16세기 후반의 조선 화단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인(士人, 선비)화가이다.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때의 사인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김시를 안견(安堅)에 버금가는 화가로 크게 평가하였다. 즉 우리가 조선전기 회화사를 논할 때 양송당 김시는 반드시 논하여야 할 화가이다.
그러나 양송당 김시의 작품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고, 대개가 전칭(傳稱)작품으로 취급되고 있으나 거의 공개하지를 않아 실물을 확인하고 연구하기가 어렵다. 이번에는 양송당 김시와 그 작품의 대요(大要)를 논하는 선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1. 양송당 김시와 그 집안의 몰락
양송당(養松堂) 김시(金禔, 1524~1593)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자는 계수(季綏)이고, 호는 양송당(養松堂) 양송헌(養松軒) 양송거사(養松居士) 취면(醉眠)을 사용하였다.
그는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1)의 저자인 희락당(喜樂堂)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연안김씨 11세) 의 넷째 아들이자 청백리(淸白吏) 안락당(顔樂堂) 김흔(金訢, 1448~1492)2)의 손자이다. 또한 그림을 잘 그린 김기(金祺, 1509~?)의 아우이자, 조선중기의 형제 문인화가 김집(金㙫, 1576~?)과 퇴촌(退村) 김식(金埴, 1579~1662)은 그의 손자이다.
그의 사촌 김안수의 딸은 윤지임(尹之任, ?~1534)의 아들 윤원형(尹元衡, 1503~1565)3)에게 출가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남동생이다. 김안로와 친분이 있던 인물로는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김근사(金謹思, 1466~1539) 등이 있었다.
양송당 김시는 1537년(14세 시, 중종32) 혼인하던 해에 폭정을 한 아버지 좌의정 김안로가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몰려 사사되자 과거와 벼슬길이 막혀 독서와 서화(書畫)로 일생을 보냈다.
잠시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와 사포(司圃)를 지냈고, 본 논고의 아랫부분 “5. 김시의 선화(線畫)로 만든 목판화”에서도 언급하지만, 양송당 김시는 늦어도 1583년 이전에 선비 신분으로 도화서 화원(畫員)이 된 것으로 보인다.
양송당 김시가 1590년(67세 시, 선조23)에는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4)에 책록되었는데, 이 사실도 그가 화원이 되어 궁중이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회사(繪事)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5)
김시의 손자로서 조선중기의 형제 문인화가 김집은 1576년에 태어났고 퇴촌 김식은 1579년에 태어났는데, 양송당 김시는 1593년 임진왜란(1592년) 중에 사망(70세)할 때 김집이 18세이고 김식이 15세이므로,6) 당연히 그의 두 손자는 어려서부터 김시로부터 그림을 배웠을 것이다.
[표1]7)은 그의 집안 직계 4대조부터 손자 대까지의 계보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그의 집안은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사대부층(士大夫層) 권문세가(權門勢家)였다.
[표1] 연안김씨 내자시윤공파(內資寺尹公派) 계보
2. 양송당 김시의 교유와 평가
양송당 김시는 조선전기의 여류화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의 아들이자,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동생인 선비화가 옥산(玉山) 이우(李瑀, 1542~1609)8)와 교유하였고, 또한 금강산을 함께 유람한 일화가 전해 온다. 이 유람은 단순한 유람이 아니라 금강산의 빼어난 실경을 그리기 위한 목적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양송당보다 23세가 많았던 조선전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도 그의 『화우첩(畵牛帖)』에 찬문을 지었다.9)
김시의 그림은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의 시문과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와 더불어 당대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숙종 때 문인화가이자 선비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김시를 안견(安堅)에 버금가는 화가로 평가하였듯이, 양송당 김시는 산수, 인물, 우마, 화조, 초충 등 여러 분야의 그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였는데, 현전하는 양송당 김시의 작품이나 전칭 작품은 산수, 인물, 우(牛), 화조(花鳥) 등이 있다.
그의 큰 손자 김집은 우(牛)와 영모(翎毛)를, 둘째 손자 김식은 산수(山水)와 우마(牛馬)를 즐겨 그린 것을 보면 그의 두 손자는 김시로부터 그림을 배웠음이 확실하다.
3. 양송당 김시의 작품과 화풍
양송당 김시의 현전하는 산수를 보면, 그는 안견파화풍(安堅派畵風)과 남송(南宋) 원체화풍(元體畵風)을 따르면서도 당시로서는 새로운 화풍이었던 중국 절강(浙江)에서 대진(戴進)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절파화풍(浙派畫風)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삼성미술관 소장)는 절파 계통의 산수 인물화이고, 1584년 작인 「한림제설도(寒林霽雪圖)」(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10)에서는 안견 화풍의 잔영(殘影)이 보인다.
그리고 「목우도(牧牛圖)」(일본, 개인 소장), 「황우도(黃牛圖)」(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하산모우도(夏山暮雨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우배도하도(牛背渡河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은 조선의 정취를 짙게 풍긴다.
그밖에 유작으로 임진왜란 중에 그린 「매조문향도(梅鳥聞香圖)」(간송미술관 소장)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로 선종화 냄새를 풍기는 「선록완월도(仙鹿翫月圖)」(간송미술관 소장)가 현전한다.
김시의 화풍은 그의 손자 김집과 김식 등 후손들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특히 절파화풍의 경우 이흥효(李興孝, 1537~1593),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 1545~1611)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1600~?) 등 조선전기에서 조선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4. 양송당 김시의 대표작 「동자견려도」
양송당 김시의 대표작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는 견본담채(絹本淡彩)의 그림으로서 가로 46㎝, 세로 111㎝의 크기이다. 일찍이 1984년 8월 6일 보물로 지정하였고,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통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건너지 않으려고 버티는 당나귀의 고삐를 억지로 잡아끌고 있는 동자의 모습이 생생(生生)하게 살아있다. 화면 왼쪽에 날카롭고 각지게 표현된 가지와 뾰족한 잎을 지닌 소나무가 화면 아래에서 위 주봉까지 치솟아 그림의 여백을 메우고 있다. 뒤편으로는 비스듬히 치솟아있는 주봉을 흑백 대비가 심한 묵법과 부벽준법을 사용하여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그려진 소나무와 바위가 왼쪽으로 치우친 구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나무 및 바위의 묘사 등에서 절파화풍의 영향을 볼 수가 있다. 우리 회화사학계에서 이 그림은 그가 40세(1563년)를 전후로 한 시기(명종조 말)에 그린 것으로 추정했다.
5. 김시의 선화(線畫)로 만든 목판화 「정절선생상」과 「귀거래도」
『선조실록(宣祖實錄)』권17, 선조16년(1583) 10월 4일 조에 의하면, “승지(承旨)를 성균관(成均館)에 보내 유생을 시강(侍講)하게 하고 약(略) 이상(以上)에게는 『도정절집(陶靖節集)』 1권씩을 각각 내려 주었다(壬子, 遣承旨于成均館, 試講儒生等, 略以上, 陶靖節集各一件, 賜給)”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시문집 『도정절집』을 1583년(宣祖16, 김시 60세 시)에 간행하여 성균관 유생들에게 반사(頒賜)하였다.
2007년에 연구된 한 논문에 의하면, “선조는 도화서 김시(金禔)에게 그린 도연명의 반신 초상화인 「정절선생상(靖節先生像)」과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리게 하여 삽화(목판화)를 추가시켰다”라고 한다.11)
이 『도정절집』의 「귀거래도」는 비록 목판화이지만, 기존에 알려진 김시의 산수와 공통적인 화격(畫格)을 보여주는 상당한 수준의 그림으로 여겨진다. 이 삽화는 숙종과 영조 초에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되면서 1583년에 실린 김시의 삽화가 목판으로 복각(覆刻)되어 지속적으로 유포되었다.
그러나 1583년 본에서 보다는 다소 품격이 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에서 양송당 김시가 늦어도 ‘1583년 이전에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라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6. 맺음말
양송당 김시는 중종19년(1524)에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선조26년(1593)에 70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그가 그림을 그린 시기는 대체로 명종조(明宗朝, 재위 1545~1567)와 선조조(宣祖朝, 재위 1567~1608)로 보이는데, 주로 명종조 말과 선조조에 활동하였다.
김시와 그의 형 김기, 그의 손자 김집과 김식 형제는 사인화가 가문의 전형적인 형성 표본이 된다. 양송당 김시는 16세기 후반의 화단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절파화풍의 그림을 그리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조선초기와 중기를 잇는 교량적 역할을 한 화가로서의 위치에 있다.
공재 윤두서는 김시를 안견(安堅)에 버금가는 화가로 크게 평가하였지만, 아직도 우리 회화사학계에서는 그에 관한 연구는 미진하다. 우리가 조선전기 회화사를 논할 때 반드시 논하여야 할 화가 양송당 김시에 관한 과감하고도 종합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
추록
1929년 1월 1일 자로 발행된 『별건곤』 제18호의 기사 「신춘지상대회(新春誌上大會) 텁석부리와 대머리 대품평회(大品評會), 웃지안을 사람은 입장불허」에 ‘독두(禿頭, 대머리)와 기생(妓生)’이라는 양송당 김시의 우스개 일화가 실려 있다.
“李朝 中宗 때에 畵家로 유명한 金禔은 머리 버서지기로도 또한 유명하엿는데, 그가 한번은 洪州를 갓더니 그곳 郡守가 自己와 親한 까닭에 妓生 한 아를 薦枕하엿섯다. 그 妓生은 나히 어린 까닭에 自己의 머리버서진 것을 시려할가 념녀하고 감투를 잔뜩씨고 그대로 자고 나서는, 아츰에 妓生에게 생트집을 잡어서 하는 말이 ‘妓生은 그래도 處身이 좃즐하여야 하겟는데, 드른즉 너는 늙은 중(僧)놈과 조와 한다니 그러할 법이 어듸 잇느냐’ 하니, 그때만하야도 僧侶를 퍽 賤視하던 때이라 기생이 그말을 듯고는 하도 긔가 맥히고 憤하야 그양 작고 우닛가 그제야 金氏는 감투를 벗고 읏서 갈오되 ‘머리가 없는 사람이면 다 중이지. 중이 別사람이 잇느냐’ 하니 妓生도 또한 읏고는 머리버서진 것을 何暇에 생각도 못하고 그저 읏고 잘 놀기만 하엿섯다 한다.”
주(註)
주1) 『용천담적기』는 김안로가 1525년 남곤과 심정의 탄핵으로 경기도 풍덕(蘴德)으로 유배 갔을 때 쓴 기록이다. 그는 이것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자서(自序)」에서 “귀양살이로 정신이 피로하여 성인의 글을 읽을 수가 없어 예전에 친구들과 하던 이야기를 기억하여 붓 가는 대로 기록하여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농담하는 것에 대신할까 한다.”라고 밝혔다. 모두 35가지의 이야기를 소개하였으나 따로 제목을 달지 않고 연속하여 서술하였는데, 글의 전개 순서도 일정한 기준 없이 생각나는 대로 써 나갔다.
주2) 『동국문헌 필원편』에 김흔은 선서(善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3) 소윤(小尹)의 영수 윤원형은 윤원량 윤원로 문정왕후의 동생이므로 중종의 처남이자 사돈이었으며, 정적인 김안로는 처당숙이고, 대윤(大尹)의 영수 윤임(尹任)은 그의 9촌 아저씨였다. 외조카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노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친족인 윤임, 처당숙 김안로(金安老) 등과 갈등했다.
주4) 광국원종공신은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공을 세운 원종공신을 녹훈한 것이다.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이며, 고려말기에 4명의 왕을 시해했다고 잘못 기록하였는데, 조선 조정은 건국 초기부터 200여 년간 여러 차례 수정요구를 했으나 명나라에서는 이를 고치지 않았다. 선조는 1584에 주청사 황정욱 등을 보내어 이를 바로 잡고자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는데, 결국 뜻을 이루게 되어 1588년 유홍(兪泓)이 고쳐진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오자 유홍의 벼슬을 올리고 노비와 전토(田土)도 내렸다. 또한, 선조는 종묘에 가서 종계의 개정을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으며, 백관에게도 벼슬을 올려주었고, 마지막 종계변무 사절 관련자들만을 광국공신과 광국원종공신으로 책록하였다.
주5) 당시 광국원종공신으로 책록된 화원은 김시 이외에도 이흥효(李興孝, 1537~1593)와 이신흠(李信欽, 1570~1631) 등이 있다.
주6) 지금까지는 우리 회화사학계에서는 김식이 형이고 김집이 동생으로 주장됐으나, 필자가 방목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김집이 1576년생이고 김식이 1579년생이므로 김집이 형이고 김식이 동생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대인감보(歷代人鑑譜)』에 채록된 ‘연안김씨계보’에서도 확인된다. 형제의 순서가 뒤바뀐 오차는 위창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형재의 순서를 뒤바꿔 수록하며 김집을 김식의 제(弟)라고 기록한 데 원인이 있다.
주7) 이 표에서 관직은 생략하였고, 과거시험도 최종 입격한 것만을 적었다.
주8) 신사임당의 아들인 옥산 이우는 시(詩)·서(書)·화(畫)·금(琴)을 다 잘하여 4절(四絶)이라 불렸다. 그림은 초충(草蟲)·사군자·포도 등을 다 잘 그렸는데, 어머니의 화풍을 따랐다. 그의 아들 이경절(李景節, 1571~1640)도 가법(家法)을 이어 서·화·금에 능하여 3절이라는 말을 들었다. 옥산 이우가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화훼초충(花卉草蟲)을 잘 그렸다고 한다. 묵매화(墨梅畫)는 주로 횡관식구도(橫貫式構圖)로 힘차게 묘사하였다. 현전하는 유작으로는 「설중매죽도(雪中梅竹圖)」(개인 소장)·「노매도(老梅圖)」·「수과초충도(水瓜草蟲圖)」(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포도도(葡萄圖)」 등이 전하고 있다. 개인 문집으로 『옥산시고(玉山詩稿)』가 있으며, 초서 필적으로는 「옥산서병(玉山書屛)」이 전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우(李瑀) 항목 참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283
주9) 오세창, 『근역서화징』에 이황의 『퇴계집』을 인용하고 있다. 『국역 근역서화징』 상 p.332, 1998년, 시공사 발행.
주10) 이 『한림제설도』에는 “만력(萬曆) 갑신년(선조17, 1584) 가을에 양송거사(養松居士)가 안사확(安士確)을 위해 한림제설도를 그렸다.”라고 관지되어 있다.
주11) 선승혜, 「箋註靖節先生集에 실린 金禔(1524~1593)의 陶淵明의 초상화와 귀거래도」, 『민족문화연구』 60호(2013.08.3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pp.387~403. 선승혜의 이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구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이다. (NRF-2007-361-AL0014)
“정유길(鄭惟吉)의『임당유고(林塘遺稿)』下에 「도정절집발응제(陶靖節集跋應製)」의 봉교발(奉敎跋)의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도화서 김시에게 그 행적으로 긔게 하고, 정유길에게 그 권의 뒤에 제발을 쓰게 한다(命圖畫署別提金禔圖其迹, 又命臣惟吉題其卷後)”라고 부분은 箋註靖節先生集의 제작에 김시가 그림을 그리게 하고, 정유길이 제(題)을 쓰게 하였음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민족문화연구』 60호, p.390.)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