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에 1994년 7월 8일 김일성 북한 주석이 급서하지 않았다면 예정된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것이고, 그해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까지 더해져 한반도의 운명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외교부는 28일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1994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총 2,506권, 약 38만여 쪽을 공개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후계자 김정일 권력승계,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북측의 연기 통보, 북미 핵협상과 제네바 기본합의 체결 등 중요한 내용들이 포함됐다.

외교부 관계자는 △공개시 외교적 마찰 발생이 우려되는 경우 △협상전략 노출 등 국익 저해가 우려되는 경우 △개인정보가 포함된 경우 ‘블랙 마킹’되거나 ‘공란’ 처리됐다고 밝혔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관련해 외교부는 주로 해외 대사관들을 통해 북한 내부 정보수집에 주력하는 한편, 해외 북한공관들의 조기 게양이나 조문객 접수 동향 등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김주석 사망이 공표된 7월 9일 외교부는 장관 명의 긴급 ‘발신전보’를 평양주재 대사관이 있는 러시아와 동유럽 등의 국가 대사들에게 보내 “주재국 외무성을 긴급 접촉, 북한 주재 귀 주재국 대사를 통하여 김일성 사망 원인 및 경위, 북한내부 동향, 향후 북한정세 전망 등을 긴급 파악해 줄 것을 요청하고 결과 수시 보고바람”이라고 지시했다.

이후 각국 우리 대사관으로부터 속속 보고가 접수됐고, 주불가리아 대사는 9일 주재국 외무부 부국장을 만난 결과 “평양시내는 조용하고 특이동향은 감지되지 않고 있다함”이라고 보고했고, 주독대사관 역시 당일 NBC 주독 특파원의 이야기라며, 북한 이익대표부에 전화할 때에는 “김일성 사망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음. 오히려 “남반부” 기자가 사실 무근의 낭설을 이야기한다고 화를 냈음“이라고 보고했다.

주베트남 대사는 7월 11일 주북한 베트남 대사가 평양주재 외교관 주석궁 초치로 조의를 표하고 김정일을 만났으며 “김정일은 외교단에게 감사하다는 말 이외에 다른말은 일체하지 않았음”이라고 보고했고, 주우즈베키스탄 대사는 7월 12일자 보고에서 김일성 주석이 7월 7일 집무중 고혈압 증세로 반신불수가 돼 8명의 의사가 치료했지만 8일 새벽 2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주루마니아 대사는 7월 12일자로 “한 조문객이 김유순 당지주재 북한대사에게 사망 원인을 문의한바 동 대사는 심장병으로 그간 고생해 왔었는데 최근의 남북정상회담 준비와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방북시 김일성이 매우 긴장을 받은 관계라고 설명하였고 함”이라고 보고했다.

유종하 주유엔 대사는 7월 12일자 보고에 ‘김일성 후계체제 전망’을 담아 “김 체제가 약 6 개월정도 지나게 되면 군부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길어야 김정일은 96 년말 정도까지만 집권하게 될 것임”이라고 전망하고 “김정일 집권후기에는 반사적으로 김성애의 영향력이 커지게 될 것이며, 김영주, 김평일간의 권력 암투 가능성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음”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은 향후 북한 정부내의 강경파가 득세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해서는 안 되며,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나치게 북한을 몰아부쳐서는 안될 것임”, “또한 현 시점에서 대북 주요정책은 북한내의 사태를 확실히 파악한 후 수립 발표하는 것이 좋겠음”이라고 제언했다.

이같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정세보고와 판단은 김영삼 정부가 조문을 막고 대북 강경책으로 선회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어 주목된다. 유종하 대사는 외교부 차관을 거쳐 장관으로 승승장구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7월 9일 긴급안보회의와 긴급국무회의를 소집, 전군에 비상경계태세를 긴급 지시했고,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된데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도 “가능한한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대비를 하도록 군경계령을 내림”이라고 이해하는 등 초기 대응은 비교적 신중한 기류였음이 확인된다.

북한은 김용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이홍구 부총리에게 11일자로 서한을 보내 “이미 중대보도를 통하여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측의 유고로 예정된 북남고위급회담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위임에 의하여 통지하는 바입니다”라고 7월 25일로 예정됐던 남북정상회담의 ‘연기’를 통보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그러나 이영덕 국무총리는 18일 국무회의에서 “김일성은 민족분단의 고착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비롯한 불행한 사건들의 책임자라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져 있다”며 “최근 일부재야 및 운동권 학생과 사회일각에서 김일성의 장례식과 관련하여 조전발송, 조문단 파견 논의 등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무분별한 행동으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불법행위’로 규정했고, 외교부는 다음날 “김일성에 대한 정부의 공식 평가” 제목으로 이를 재외 공관들에 전파했다. 남북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

이같은 정부의 강경입장 선회는 주로 조문 문제를 둘러싼 이념갈등으로 나타나는 모양새지만 내면의 기류 변화과정은 이번 공개문서에서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 대목에서 ‘공란’으로 남겨진 쪽이 유독 많은 것도 아쉬운 점이다. 

북한은 남측 대학가와 일부 야당의 조문단 파견 움직임에 대한 14일 조평통 담화를 시작으로, 남측 국무총리의 발언에 대한 20일 민민전 공개질의서, 범민련 해외본부 성명 등을 통해 대남 비난 수위를 높여나갔다.

20일은 김일성 주석 추도대회가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날이므로, 결과적으로 이영덕 총리의 18일 “김일성에 대한 정부의 공식 평가” 발언은 이를 염두에 둔 선긋기로 읽힐 소지가 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는 서울 서초동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열람실’을 직접 방문해 열람할 수 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외교문서 공개는 현재까지 총 40,000여 권, 약 57만여 쪽에 달하며, 온라인으로도 ‘공개외교문서 열람‧청구시스템’을 통해 신청하여 확인할 수 있지만 올해 공개된 문서들은 6월 이후에 이용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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