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제1기 집단지성과 제2기 집단지성
1925년 11월 1일 상해에서 순국한 백암 박은식(朴殷植, 1859~1925)과 1936년 려순에서 순국한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21세의 연령차가 있다. 이 정도의 연령차라면 부자간(父子間)의 연령차이다. 백암과 단재가 만나서 함께 활동한 중첩되는 시기를 보면, 백암 박은식은 단재 신채호를 동지이자 아들처럼 아꼈던 것 같다.
이제 이들 열혈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사학자들의 생존연대를 비교해 보자.
[표1] 제1기 민족사학자와 중요 독립운동가의 생졸년
안중근은 32세, 한글학자 주시경은 39세를 살았고, 신규식은 44세를 이준과 문일평은 49세를 살았다. 김구는 73세, 안재홍은 75세, 장도빈은 76세, 이시영은 85세를 살았으니 장수하였다.
박은식은 67세를, 최남선은 68세를 살았는데, 당시로는 비교적 장수한 편이다. 그러나 박은식의 67세는 아쉽게도 짧게 산 것 같고, 1927년 10월에 친일파로 변절한 최남선의 향년 68세는 오래 천수를 누린 것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철 김교헌 신채호가 모두 50대 중반에 타계한 것은 간고(艱苦)한 독립운동 탓으로 보인다. 권덕규가 61세에 실종된 것은 1950년 한국전쟁 직전의 좌우 대립 때문이고, 정인보가 60세에 납북된 것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때문이다.
[표1]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지난 2월 10일자 연재 ‘백암 박은식과 20세기 전반기의 민족사학’1)에서 일부 언급한 집단지성을 결집한 인물들을 파악할 수 있다.
20세기 초의 제1기 집단지성은 1905년을 기점으로 한 ‘대한국민교육회’ 주변의 동지적 인물들, 즉 이준과 박은식 나철 김교헌 이시영 주시경 김구 인중근 신규식 신채호인데, 대체로 해외 망명한 열혈 독립운동가들로서 간고한 투쟁을 하며 민족사관을 형성한 분들이다.
이들이 집단지성을 형성한 시기는 1905년경부터 1910년경까지로서 각기 종횡(縱橫)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 연구 활동은 대체로 1925년 박은식의 타계와 1930년대 신채호의 옥중 생활로 마감된다.
제2기의 집단지성은 대체로 국내 잔류했던 독립운동가들로서 제1기 집단지성의 영향을 받은 문일평 장도빈 권덕규 안재홍 정인보 등이다. 이들은 제1기 집단지성으로 이루어진 민족사학자들의 주체적 시각에 자극을 받아 권덕규 안재홍 정인보는 통사적 관점에서 민족사학을 발전시켰고, 문일평은 본격적인 통사 저술을 내지 못하고 49세에 타계하였다. (아쉬운 것은 육당 최남선은 일제의 회유에 변절한 것이다.)
이들 제1기 집단지성과 제2기 집단지성은 모두 을사늑약에서부터 정부수립 이전에 저서를 내 놓은 제1기의 민족사학자들로서 이들, 즉 제1기 집단지성과 제2기 집단지성의 역사적 논점과 흐름은 같은 맥락이다. 대체로 대종교의 역사관, 즉 박은식과 신채호를 이어받은 역사관이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민족사관(民族史觀)’이라 부른다.
2. 대한제국시기의 집단지성
필자는 2월 10일자에 기고한 「백암 박은식과 20세기 전반기의 민족사학」에서 “대한제국시 애국운동에 관한 집단지성이 모이는 과정에는, 1903년부터 1908년 사이에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편찬)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250권50책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집대성됨으로써, 대한제국시기의 자주적이고 자각적인 지성인들은 곧바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보는 관점을 민족주체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집단지성을 끌어낸다. 이준(李儁, 1859~1907)은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에 『국혼의 부활론』을 탈고하여 후처 이일정(李一貞)에게 준다. 이 원고는 이준이 쓴 것이지만, 1904년 8월 이준 이원긍 전덕기 유성준 박정동 최병헌 등이 중심이 되어 국민교육 실시를 목적으로 설립한 교육 계몽 운동 단체 ‘대한국민교육회’의 목적과 당위성을 논한 글로 평가할 수 있다. (중략) 이준이 국혼의 부활을 부르짖는 것은 당대(當代)의 집단지성(集團知性)이 모인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대한국민교육회 회장 이준은 나철과 박은식 신채호와도 가까웠다. 이준은 한때 대한제국 말의 거유(巨儒)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문하에 있었고, 나철은 김윤식의 대표적인 제자로 자처한 바 있다. 이렇게 형성된 집단지성이 곧바로 나철의 단군교(대종교) 중광,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에 의하여 민족사관으로 꽃 피운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준의 『국혼의 부활론』은 이준 한 사람의 사상이 아니라 당대 계몽주의자들의 집단지성을 결집한 글이다.”라고 언급하였다. 또한 이러한 집단지성이 “국혼 부활을 꿈꾸는 민족사관에 관한 의지는 1905년에 대한국민교육회에서 형성 및 결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언급은 제1기 집단지성의 형성을 지적한 것이다.
이들 제1기 집단지성에서 말하는 ‘한국혼’이라는 단어는 이준의 『국혼의 부활론』(『한국혼의 부활론』, 1907)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백암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1915)와 예관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의 『한국혼(韓國魂)』(1923)으로 이어진다. 물론 단재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던 『독사신론(讀史新論)』(1908)은 한국혼을 제대로 읽고자 하는 역사적 첫 시도였다.
3. 단재 신채호의 국내에서의 삶과 활동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보한재 신숙주의 18대손이다. 1880년 음력 11월 7일(양력 12월 8일), 충청도 공주목 정생면 익동 도라산리(현재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에서 신광식(申光植, 1849~1886)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단재의 증조부 신명휴(申命休, 1798~1873)는 1868년 7월 14일 작은 아들 신성우(申星雨, 1829~?)의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동년 8월 24일 오위장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조부 신성우(申星雨, 1829~?)는 1867년에 문과 급제하여 예조좌랑, 사헌부 지평(持平), 1871년 사헌부 장령(掌令), 1884년 성균관 전적(典籍), 1885년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지냈으며, 1886~7년경에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낙향하였다. 조부 신성우(申星雨)의 형 신약우(申若雨, 1823~1892)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부친 신광식(申光植)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38세에 사망한다.
단재는 한때 충청도 공주목 회덕현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나,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족향(族鄕)인 충청북도 청주목 산내면(현재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쳤으며, 『삼국지통속연의』와 『수호전』을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져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할아버지 신성우는 손자 신채호의 영특함을 보고 근처 읍내의 서당으로 보내다가 자신의 친구이자 먼 친척이며 구한말 관료였던 신기선(申箕善, 1851~1909)에게 신채호를 소개해 주었고 신채호는 신기선의 서재에서 많은 서적을 읽으며 개화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다.
1898년(19세)에는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며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한다. 1904년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성토하는 성토문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작성되자 이에 연명하기도 한다. 1905년, 신채호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사직하고 단발을 결행한 뒤 낙향하여 계몽운동을 시작한다. 이때 장지연이 신채호를 발견,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다시 상경한다.
1905년 11월 20일,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채호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7년에 박은식2)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하던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개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한다. 특히 신채호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평가받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1908년, 그의 나이 불과 29세에 발표한다. 또한 『기호흥학회보』,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한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4. 단재 신채호의 국외 망명 후 독립운동
일제에 의한 국권의 피탈이 확실시되자 신채호는 애국지사들과 협의하여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한다.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 들렀다가 중국 단동을 거쳐 청도에 도착했다. 청도에서 안창호, 이갑 등 신민회의 간부들과 독립군 기지 창건 문제를 논의하여 만주 밀산현에 신한민촌을 만들어 ‘독립군 기지로 활용하자’라는 계획을 세웠다.
9월,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新韓村)이 형성되는 데 참여하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에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에는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한다.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어려워지자,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의 초청으로 상해로 떠난다.
단재는 상해에서 1년간 머무르며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국사를 가르치며, 신규식에게 영어를 배우고,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1914년에는 대종교 신도 윤세복(尹世復, 1881~1960)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는데, 이때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서간도 일대의 고구려 고적을 답사한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으로 옮겨 1919년까지 4년간 체류하면서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여 생계를 꾸렸다. 그러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한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이렇게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에 의한 역사 연구서 저술도, 백암 박은식의 경우와 같이 간고한 항일투쟁을 하는 가운데 이룩된 것이다. 이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여가며 진척된 것이다.
1922년 12월 의열단(義烈團)의 김원봉(金元鳳)이 신채호를 초청하자, 그는 상해에 가서 1개월여간 그곳에 머물며 의열단의 폭탄제조소를 시찰하고, 이들을 위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한다. 5장 6,400여 자로 이루어진 「조선혁명선언」은 집필에 들어간 지 한 달여 만인 1923년 1월 발표되었다.
여기서 신채호는 조선 민족의 적은 ‘강도 일본(强盜 日本)’임을 분명히 하고, 이 적을 무찌르는 것은 조선 민족의 정당한 선택이라면서, 일본에 타협하는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등 역시 우리 민족의 적이며, 외교론과 준비론을 주장하던 임시정부를 비판하였다. 또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길은 오로지 민중의 직접 혁명밖에 없으며, 민중 직접 혁명을 통해 이족통치(異族統治), 특권계급, 경제적 약탈제도, 사회적 불균등, 노예적 문화사상의 다섯 가지를 파괴하고 고유한 조선, 자유로운 조선민중, 민중경제, 민중사회, 민중문화라는 이 다섯 가지를 건설해야 함을 천명하였다.
이 문건은 혁명의 수단으로서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측면에서 무정부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무장투쟁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가장 잘 정리한 것으로 의열단과 같은 의열투쟁 단체들뿐만이 아니라 독립을 바랐던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5.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단재의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는 1924년 10월 13일부터 1925년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것을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조선사연구초』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 그의 생전에 나온 연구서로 총 6편의 논문을 수록하고 있으며, 이 책은 우리 역사 연구를 위한 방법론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연구서이다. 위당 정인보와 벽초 홍명희의 서가 있다.
가.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古史上吏讀文名詞解釋法)」; 이두문 내의 명사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논문이다.
나. 「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三國史記中東西兩字相換考證)」; 삼국사기 내 東西 두 글자가 바뀐 원인을 다룬 논문이다.
다. 「삼국지동이열전교정(三國志東夷列傳校正)」; 삼국지의 위지 동이열전의 오류를 바로잡은 논문이다.
라.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 평양 패수라는 표현이 만주 해성현의 점우락임을 고증하고 있다.
마.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고조선이 분할되어 성립된 전삼한과 후삼한을 역사적 실체로 정립하려 시도한 논문이다.
바.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여기서 단재는 묘청(妙淸, ?~1135)의 난을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김부식의 사대적이고 중국 의존적 사관으로 인하여 조선역사 서술(敍述)에서 만주벌판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았으며, 묘청을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가진 정치가이자 승려로 생각했다. 또한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사대주의로 점철된 역사서로 강렬하게 비판하였다.
6. 맺음말 ; 영원한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학을 주목한다
신채호는 논설, 시, 소설 등에서 역사가 애국심의 원천이라고 주장했고 애국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역사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3대 영웅전을 썼고, 무력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영웅이 나와서 이 나라를 구하는 데에 적극적인 도움을 준다고 주장했다.
단재 신채호는 각 독립, 계몽운동에 대한 평을 남겼다. “갑신정변은 특수 세력이 특수 세력과 싸운 궁궐 내의 일시적 활극이며, 의병운동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과 운동이며, 민중적 각성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단재는 “안중근 열사의 폭력적 행동은 열렬했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다”라며 비판하고, “3.1운동은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보였지만 폭력적 중심을 갖지 못했다”라고 비판한다.
단재 신채호는 무정부정의자(아나키스트)로 ‘동방 아나키스트 연맹’에 참가한다. 또한 독립을 위해서는 ‘철저한 비타협적 투쟁과 민중 중심으로 민중을 혁명의 본영’으로 규정하고 테러와 폭력을 인정한다.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는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로, 국사 연구와 교육을 중시하였다. 기존의 왕과 영웅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사학을 내세웠다.
박은식과 신채호를 통하여 정립된 민족사관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주체적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다. 단재는 자신의 저서 『조선상고사』3)에서 자신의 역사관을 ‘낭가사상’4)과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하였다. 이렇듯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에 의하여 우리의 민족사관이 형성하고 발전하였다.
위에서 필자는 “대체로 대종교의 역사관, 즉 박은식과 신채호를 이어받은 역사관이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민족사관(民族史觀)’이라 부른다.”라고 언급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그 테두리를 벗어나 지향점(指向點)을 휘게 한 황당사관은 민족사관이라 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일제(日帝)는 1925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하려, 식민사관을 집대성한 『조선사』 35책을 1938년 3월에 완간하여 널리 퍼트렸다. 그러나 단재는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여 일제의 역사 왜곡에 더는 항거하지 못한다.
이제 백암 박은식 순국 백주기와 광복 80주년을 맞아, 제1기 민족사학자이자 제1기 집단지성으로서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는 동시에 기억하고, 그들의 간고한 독립투쟁과 역사 연구를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삶과 투쟁을 비웃듯이 활개 치고 있는 일본의 식민사관과 서구의 신식민사관(新植民史觀), 친일파의 황당사관(荒唐史觀)을 이제는 몰아내어야 한다.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에 입각한 역사광복이 광복 80주년의 해에 기틀이 놓아지길 간절히 기원한다.
추신 : ‘제주학연구센타’, ‘식민역사문화청산제주회의’, ‘제주연구탐라’가 공동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와 ‘(재)리준만국평화재단’이 공동 주관하는 ‘광복80주년기념’-‘백암 박은식 백주기 추모’(가칭) 전시를 제주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두 150점 이상 전시되며, 3월 18일부터 31일까지 관람할수 있습니다. 장소는 제주시 도남동 ‘KBS제주방송총국’ 1층 전시실입니다.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주(註)
주1) 필자, 통일뉴스,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 「백암 박은식과 20세기 전반기의 민족사학」. 2025년 02월 10일자 연재.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742
주2) 단재는 백암 박은식(朴殷植, 1859~1925) 보다 21세 연하(年下)이다. 단재는 제1기 집단지성에서 가장 막내였고, 백암은 가장 연장자였다. 따라서 백암은 단재를 아들처럼 아꼈다.
주3)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이후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초판 발행되었다.
주4) 신채호는, “낭가사상은 한민족의 원시종교인 수두제[蘇塗祭]신앙에서 유래하였다고 보았다. 단군은 단군조선의 개창과 더불어 민족적 구심점인 수두 제전(祭典)을 거행하였고, 이것은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소도(蘇塗)라는 이름의 제전으로 계승되었다가, 고구려 태조왕(太祖王)과 차대왕(次大王) 대에 와서 ‘선배’ 제도로서 국가적 차원의 정치적 제도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선배는 선인(仙人 또는 先人)의 우리말이다. 이때에 이르러 낭가사상은 한국의 주체적인 전통사상으로서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화랑제도(花郞制度)는 바로 고구려 선배제도를 모체로 하여 성장 발전한 것이다. 낭가사상은 고려 중기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다가 묘청의 난 때 국풍파(國風派)가 유학파에게 패하여 몰락함으로써 소멸하였다”라는 것이다. 화랑제도와 묘청에 대한 신채호의 태도에서 보듯이 유·불·선(仙)교 가운데 바로 선교가 한국의 전통사상이라고 파악하고, 그는 그것을 낭가사상의 핵심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 사상은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과 서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나아가 일제시대 국권 회복의 실천적 이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