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풍속화 중에 [이부탐춘 嫠婦耽春]이 있다.
이부(嫠婦)는 과부(寡婦)를 뜻하고, 탐춘(耽春)은 성적 욕망을 즐긴다는 뜻이다.
직설로 하면, 과부가 발정이 났다는 말이다.

발정난 여인은 과부만이 아니라 처녀도 있다.
댕기 머리에 옥색 치마를 입은 어린 처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일었다.
제목과 다르게 그림의 주인공이 소복을 입은 과부 한 명이 아니라 처녀까지 둘이다.

신윤복/이부탐춘/28.2*35.6/종이에 담채/조선후기/간송미술관. [사진 제공 – 심규섭]
신윤복/이부탐춘/28.2*35.6/종이에 담채/조선후기/간송미술관. [사진 제공 – 심규섭]

좌측 여자는 트레머리에 소복을 입었다.
소복(素服)은 장식을 하지 않은 옷이다.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출 때 입는 일종의 예복인 셈이다.

민가에서 입는 소복은 상제(喪祭)와 관련이 있다.
상(喪)을 치를 때는 상복을 입는다. 상이 끝나고 난 후 일정 기간 소복을 입고 이후 평복을 입는다.
상을 당한 후 1년이 지나고 제사를 지낼 때 소복을 입는다.

소복은 일본 문화에 의해 훼손되고 왜곡되었다.
특히 소복을 입은 긴 머리 처녀 귀신은 일본 우물귀신을 흉내낸 것이다.
우리 전통문화에서 소복의 상징은 예의, 청렴, 희생, 양심 따위이다.

그림 속의 여성이 소복을 입었다는 것은 남편이나 부모 상(喪)을 치른 이후이거나 1년쯤 지났다는 의미이다.
결국,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발정이 났다는 말이다.
당시, 상을 치른 지 3년도 되지 않았는데 성 충동을 느끼는 것은 부도덕하게 여겼다.

이런 부도덕한 여성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표현했다.
자칫 사회적 비판을 받아 곤경에 처할 수도 있는 위험한 그림이다.
과연 신윤복은 자신의 평판을 망가트릴 결심을 한 것일까?
그만큼 대단한 그림일까?

망할 놈의 그림 제목 때문이다.
그림 제목, 화제(畫題)는 그림 감상과 해석의 핵심 역할을 한다.
그림 감상자는 화제의 틀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그림 속에는 화제는 물론 그림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어떤 글귀도 없다.
이 그림의 제목은 1930년대 오세창이 지었다.
그러니까 오세창의 눈으로 본 감상의 틀인 셈이다.

의심을 가지고 삐딱한 눈으로 그림을 살펴보자.

분명 한 여인이 소복을 입고 있다.
오세창은 소복 입은 여인을 이부(嫠婦)라고 규정했다.
이부는 과부, 즉 남편을 잃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소복은 남편이 죽었을 때만 입는 옷이 아니라 부모상을 당했을 때도 입는다.
소복 입은 여인이 과부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탐춘(耽春)은 성적 욕망을 즐긴다는 뜻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교미하는 개를 보고 있다.
그러니까 여인의 마음 상태는 교미하는 개와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미하는 개를 보고 욕망이 일어나거나 교미하는 개에게 성적 욕망을 투영하는 경우가 있나?
교미하는 개를 보고 성적 충동을 느끼는 사람은 변태 중에 변태이다.

어릴 적 교미하는 개를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놀리거나 돌을 던졌다.
마치 사람이 백주대낮 길거리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부도덕하다고 여긴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개지만 길거리에서 흘레붙다니... 당장 떨어지지 못해!”

화창한 봄날, 상중이라 심신이 나른하다. 먼 친척 동생이 찾아와 마당을 걷다가 낮은 소나무 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담벼락 구멍을 통해 이웃집 개가 들어와 흘레붙었다.
이 모습을 본 소복 여인이 당황했다. 친척 여동생에게 마음이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친척 동생이 허벅지를 살짝 꼬집으며 말한다.
‘언니, 정신 차려. 나도 부끄럽지만 염치가 있어야 해. 사람이 짐승처럼 살 수는 없잖아?’

신윤복은 그림을 통해 사뭇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상중(喪中)에 성적 욕망을 즐기는 것은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흘레붙은 개를 그렸다. 도덕과 염치가 없으면 짐승이라는 뜻과 두 여인의 욕망과 관계를 개의 형상에 투영한 중의적 표현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흘레붙은 개를 그렸다. 도덕과 염치가 없으면 짐승이라는 뜻과 두 여인의 욕망과 관계를 개의 형상에 투영한 중의적 표현이다. [사진 제공 – 심규섭]

하지만...
신윤복은 훈장 같은 사람이 아니다.
당시, 사회적 상징체계는 변화하고 있었다. 군자의 인격과 양심을 담은 상징은 백성의 욕망과 결합했다.
이를테면, 군자의 인격적 완성체인 모란은 백성들에게 부귀라는 욕망의 상징이 되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내용의 출세(出世)는 신분상승의 꿈으로,
공공의 업적을 뜻하는 닭은 벽사와 진급의 상징으로,
청렴한 선비의 삶을 뜻하는 두루미(학)는 장수의 뜻으로 수용했다.
이런 현상의 바탕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철학과 호락논쟁이 있었다.

신윤복은 상류층에서 활동했던 화가이다.
당대 주류 철학을 무시하거나 사회전복을 꿈꾸던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양심과 욕망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였다.

이 그림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염치와 욕망이 교묘하게 얽혀있다.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달리 감상된다.

성적 쾌락이라는 탐춘(耽春)을 개의 교미를 통해 짐승 같은 행동으로 만들어 도덕과 염치를 강조했다.
동시에, 사람의 성적 욕망은 짐승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도 숨겨놓았다.
다시 말해, 사람의 성적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며, 사회적 도덕이나 엄격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신윤복의 그림이 철학적이라니 놀랐네. 하긴 야동에도 욕망의 구현과 확장이라는 서양사상이 들어가 있긴 하지.”

“신윤복은 글로나 말로 자신의 철학을 주장하지 않았네. 오로지 그림으로 표현했지. 정조 임금의 문체반정에 걸려 곤욕을 치른 이옥이라는 선비가 있네. 신윤복과 같은 시대 사람이지만 둘이 교류했는지는 알 수 없네. 하지만 이옥의 시와 신윤복의 그림은 유사한 내용이 많다네.”

“그나저나 그림 속 소복 여인은 과부인가 아닌가? 두 여자의 관계도 정말 궁금하네.”

“역시 이 그림은 도덕과 염치로 감상하면 재미가 없지. 아무리 엄숙하게 보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생기네.
바로 신윤복이 노린 지점일세. 우리는 신윤복이 쳐놓은 욕망의 그물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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