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따르던 당시의 신진사류(新進士類) 세 사람 가운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과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미술은 이미 다루었다. 이제 영천자 신잠의 미술에 관하여 탐색한다. 이 3인은 모두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중종조의 선비화가이다.
1. 영천자 신잠
아차산(峨嵯山) 밑에 살던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1)의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를 썼고 만년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라는 호를 썼다.
영천자 신담의 직계 선대는 누대(累代)에 걸쳐 시서화에 능하였다. 려말선초의 서화가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은 그의 7대조이며, 명필 신장(申檣, 1382~1433)은 그의 5대조이다. 또한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신잠의 증조부(4대조)이고, 신주(申澍, 1435~1457)는 조부이다.
그의 부친 삼괴당(三槐堂) 신종호(申從濩, 1456~1497)도 명필로 이름이 났다. 부친 신종호의 자는 차소(次韶)이고, 세 차례 장원하였다고 하여 삼괴당(三魁堂)이라 호를 정하였는데,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으로 예조 참판을 지냈다. 부친 삼괴당은 신잠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삼괴당 신종호의 어머니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니 신잠은 한명회의 외증손이다. 아울러 부친 삼괴당은 세종의 서출 제3 왕자 의창군(義昌君) 이강(李玒, 1420~1460)의 사위이니, 신잠은 세종의 외증손이다. 즉 영천자 신잠은 세종대왕과 한명회의 외증손이자 보한재 신숙주의 증손이니, 그는 신종호의 넷째 아들이었지만 당대 상류층의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신종호의 큰아들 신항(申沆, 1477~1507)은 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의 딸 혜숙옹주(惠淑翁主, 1478~?)의 남편이니, 영천자의 큰 형수가 혜숙옹주이다.
영천자 신잠은 1519년(중종14)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의 벼슬에 올랐는데, 같은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파방(罷榜)되었다. 당시 그는 어머니(세종의 손녀, ?~1539)를 모시고 청주의 농장으로 돌아갔으나, 농촌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어머니가 농촌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므로, 얼마 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521년(중종16) 10월 11일 신사무옥 때2) 안처겸(安處謙, 1486~1521)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장흥현(長興縣)으로 귀양 갔다가 1534년에 양주목(楊州牧) 아차산(峨嵯山) 아래로 이배 되었으며, 1537년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영천자는 이때부터 아차산인이라는 자호를 쓴다.
영천자 신잠은 청백리이기도 했지만 효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539년 4월(49세시)에 모친 전주이씨가 사망하는데, 예법에 따라 아차산 아래에 있던 부친 삼괴당 신종호(1497년에 사망)의 묘에 합장하여 장사를 지내고 그로부터 3년간 묘막(墓幕)살이를 한다.
1543년(중종38년) 3월에 다시 등용되고, 11월 29일 사옹원주부(司雍院主簿)가 되고, 곧이어 겨울에 태인현감(1543~1549)3)으로 제수된다. 다시 1549년에 간성군수(1549~1552)로 제수된다. 1552년(명종7년) 4월 25일에 상주목사가 되어4) 선정을 베풀어 18개 서당5)을 세웠고, 백성들이 부모처럼 받들었는데, 상주목사 재임중이던 1554년(명종9년) 12월 2일 병석에 드러눕고 이틀후(4일), 64세를 일기로 사망한다.6)
1555년 3월 아차산 임좌(壬坐) 병향(丙向)에 묻혔다가, 2016년 4월 19일 현재의 ‘경기 구리시 아천동 산15’로 이장하였다.
영천자의 초취(初娶) 부인은 종실(宗室)인 당해부수(唐海副守) 이붕구(李朋龜)7)의 딸인데 슬하에 2녀를 두었고, 장녀는 감찰(監察) 한수(韓洙)에게, 차녀는 생원(生員) 강완(姜浣)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재취(再娶) 부인은 풍천노씨(豊川盧氏) 현릉참봉(顯陵參奉) 노우명(盧友明)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다만 첩에게서 낳은 아들 수용(申秀溶, 1548~?)이 있는데, 영천자 사망 당시에 불과 여섯 살이었다.
2. 영천자 신잠 행장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46 「기묘당적인(己卯黨籍人)」에는 제자 노진이 지은 「신잠행장(申潛行狀)」이 있다. 이 행장을 왕조실록이나 여러 자료와 대비하여 보면 장흥에 유배되어 있던 년수(年數) 17년에 관한 부분에서는 3년의 오차가 있다. 신잠은 1534년에 양주로 이배 되고, 1537년에 귀양이 해제된 것으로 고증된다. 행장의 이 부분은 잘못된 기록이다.
그러나 이 행장은 영천자 신잠에 관한 연구에 전반적으로는 참고가 되는 중요한 기록이다. 아래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번역한 그 번역문을 전재한다.
“신잠(申潛). 공(公)의 휘(諱)는 잠(潛)이고 자(字)는 원량(元亮)이다. 신씨(申氏)의 본관(本貫)은 고령(高靈)인데, 원조(遠祖) 신성용(申成用) 이하가 모두 문장(文章)으로 드러나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었다. 공의 증조(曾祖) 문충공(文忠公) 휘 숙주(叔舟)에 이르러서는 다섯 조정에서 임금을 도왔고, 지위는 총재(冢宰)였으며, 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한 시대의 종신(宗臣)이 되었다. 문충공의 장자(長子) 휘 주(澍)는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에 보임(補任)되고, 그 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문망(文望)은 있었으나 요절(夭折)하였다. 신주가 삼괴 선생(三魁先生) 신종호(申從濩)를 낳았는데, 신종호가 진사시(進士試)ㆍ문과(文科)ㆍ중시(重試)에 모두 제1등으로 합격하였으므로 삼괴라고 일컬은 것이다. 신종호는 박학(博學)과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울리면서 관직이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으나,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참판(參判, 신종호)은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제 11자(子)인 의창군(義昌君) 이강(李玒)의 딸에게 장가들어 홍치(弘治) 신해년(辛亥年, 1491년 성종 22년) 3월 모일(某日)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특한 자질이 발군(拔群)하였으나, 겨우 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맏형인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은 귀한 집 자제(子弟)의 티를 능히 벗어버리고 문재(文才)가 당대에 무거웠던 이로써, 공이 그를 좇아 배움에 지도(指導)를 거치자마자 곧 스스로 깨우쳤으므로 가르치는 노고(勞苦)를 번거롭게 들이지 않았고, 사조(詞藻, 시문(詩文)의 문채(文彩))가 날로 진보하여 약관(弱冠)도 되기 전에 명성이 크게 떨쳐졌으므로 공경(公卿)과 진신(縉紳)들이 모두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513년 중종 8년)에 공의 나이 23세였는데, 진사시(進士試)에 연이어 수석으로 합격하고, 남궁(南宮, 예조(禮曹)의 별칭)에서 보인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사람들이 능히 가업(家業)을 계승할 사람으로 여겼다. 이때 중종이 재위한 지 이미 오래되어 치교(治敎)가 경장(更張)되고 선비들의 학문이 날로 새로워졌는데, 공이 곧 부화(浮華)함을 통렬하게 깎아내고 스스로 수양(修養)하는데 힘쓰면서 성현(聖賢)의 글을 취해다 읽는 한편, 당세의 인사들과 두루 사귀면서 왕래하고 논변하며 탁월하게 자득(自得)하고, 학업(學業)이 날로 진보되었으므로 명성이 더욱 무거워졌다.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고의(古義)에 따라 신과(新科, 현량과(賢良科)를 말함)를 신설하자, 공이 그 선취(選就)하는 시험에 참여하여 모과(某科) 제 기명(幾名)에 합격하면서 곧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보임되었다. 선례(先例)에 사대(賜對, 임금이 신하를 불러서 묻는 말에 대답하게 함)할 때는 사관(士官)이 항상 나중에 들어가고 먼저 나왔는데, 공이 입시(入侍)한지 겨우 며칠이 지나서 곧 진언(進言)하기를, “사관은 인주(人主)의 말과 행동의 작은 부분에 대해서도 모두 관찰하여 써야 하는데, 나중에 들어가서 먼저 나온다면, 사실을 기록하는 데 실수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듣건대, 성종조에 간사하고 아첨하는 어떤 이가 여기에 편승하여 그 설(說)을 팔고 다녀 끝내 뒷날의 화(禍)가 이를 매개로 일어났다고 하니, 지금부터는 먼저 들어가서 나중에 나오는 것으로 상식(常式)을 삼으소서.” 하자, 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즉시 규례(規例)를 삼도록 명하였는데, 당시의 논의가 이를 옳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관직(館職,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ㆍ성균관 대제학(成均館大提學) 이하 관원의 총칭)에 뽑혔으나 임명되기 전에 당시의 일(己卯士禍)이 크게 변하여 신과(新科)를 비방하는 말들이 있었으므로 제도가 폐지되었고, 공은 관직에서 쫓겨나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지내게 되었으며, 사관이 먼저 들어갔다가 나중에 나오는 제도 역시 폐지되었다. 공이 이때부터 다시는 당시에 할 일이 없음을 알고서,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청주(淸州)의 전서(田墅)에 갔는데, 우거(寓居)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인이 이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므로 얼마 후에 다시 도성으로 들어왔다. 이때 당파(黨派)에 연좌되어 관직을 그만두게 된 이들은 당시의 재주와 명망을 갖춘 인사들이었으므로, 권력을 농단하던 자들이 매우 불안해하였다.
신사년(辛巳年, 1521년 중종 16년) 겨울에 공이 안정(安珽)공과 함께 뜻밖에 죄적(罪籍, 죄를 기록한 명부)을 입어 정신(庭訊, 대궐의 뜰에서 죄를 신문함)에까지 이르러 화(禍)가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끝내 얻은 바가 없게 되자, 마침내 장흥부(長興府)에 유배하였다. 적소(謫所)에 있었던 17년 동안에 대부인이 서울에 있었으므로 사모(思慕)함이 간절했다. 그러나 지기(志氣)는 넓고 평탄하여 원망하고 근심하며 한탄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술을 일절 끊은 채 때때로 혹 시(詩)를 읊조리며 스스로 근심을 풀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인(士人)이 와서 글을 배우는 자가 있을 때는 또한 거절하지 않고, 그들의 재질(材質)에 따라 돈독히 가르쳤으므로 성취한 자가 많았다.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8) 겨울에 죄가 참작(參酌)되어 양주(楊州)로 이배(移配) 되었고,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년) 가을에 마침내 편의(便宜)에 따라 거주(居住)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 대부인은 나이가 많았지만, 오히려 무양(無恙)하였는데, 돌아가서 대부인을 모심에 있어 온화하였다. 이듬해에 상(喪)을 당하여 애도(哀悼)함이 지극하였고, 장례와 제사에 있어 한결같이 고례(古禮)에 따랐으며, 또 참판공의 조역(兆域)의 풍토(風土)가 천박하다 하여 널리 고의(古義)를 궁구하여 옮겨와 대부인과 합폄(合窆)하였다. 아차산(峨嵯山) 아래에서 묘막(墓幕)살이하던 3년 동안에 한번도 집에 이른 적이 없었고, 인하여 그 곁에 집을 지어 여생(餘生)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곳은 강산(江山)과 금어(禽魚)의 즐거움이 있어 봄과 가을이 올 때마다 그곳에 나가 살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으니, 영달(榮達)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계묘년(癸卯年, 1543년 중종38년)에 천거(薦擧)에 의하여 군직(軍職)에 보임(補任)되었으나 받지 않았고, 그해 겨울에 대신(大臣)들이 ‘공이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데다 재주가 나라를 빛낼 일을 감당할 만하므로 그가 오기를 기다려 상례(常例)에 따라 조용(調用)하는 그것은 불가하다.’라고 아뢰자, 마침내 육품(六品)으로 초수(超授)하면서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로 임명하였다. 주부라는 관직이 비록 공에게 마땅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은명(恩命)이 범상하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대궐에 나아가 사례(謝禮)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신잠은 주부가 됨은 무익(無益)하니, 고쳐 수재(守宰, 수령(守令))에 임명하여 치적(治績)을 살펴보려 한다.” 하고, 이에 태인현감(泰仁縣監)에 보임하였다. 어떤 이는 공이 하찮은 벼슬로 굽혀 임명됨은 마땅치 않다고 여겨서 가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내가 비록 오래도록 다스려 본 경험은 없지만, 본디 산야(山野)의 처사(處士)와는 동류(同類)가 아니고, 은명(恩命)이 이러함에 이르러 의리상 피할 수 없다. 하물며 옛날의 대현(大賢)은 모두 주현(州縣)을 맡는데 편안해하면서 충분히 그 뜻을 실행할 수 있다고 여겼을 뿐이니, 내가 어찌 꺼리겠는가?” 하고, 마침내 나아갔다.
공이 현(縣)을 맡음에 있어 본래부터 일이 많아 다스리기 어렵다고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수양한 바가 이미 많은 데다가 또 세상일을 두루 겪은 것이 많았으므로, 이를 한 고을에 베풂에 있어서는 성대하여 남음이 있을 정도였다. 백성들을 어루만짐에는 있어서는 그 자서(慈恕)를 다 하고, 정사(政事)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신명(神明)을 다 바쳤으므로, 다스린 지 일 년 사이에 온 경내가 한결같이 교화되고 복종하였다. 또 이 고을은 인순(因循)해 오던 폐단을 계승함이 지극하여, 명목(名目)이 없는 부(賦)와 바르지 않은 세(稅)가 고슴도치의 털처럼 많이 섞여 나왔으므로 백성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공이 이에 대해 조목조목 계획을 세워 구분하여 처리하여 거의 모두 다를 개혁(改革)함으로써 그것이 구원(久遠)하게 행해지기를 구하였지, 한때의 이해(利害)에 따라 급히 변칙적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백성 중에 일을 가지고 현(縣)의 뜰에 이르는 자가 있으면, 말을 온화하게 하고 자신의 뜻을 낮추어 위엄과 꾸짖음을 가하지 않았고, 부결(剖決)은 합당하여 남의 의표(意表)의 밖에서 나왔다. 골육(骨肉)끼리의 소송(訴訟)이 있게 되면, 역시 반드시 은의(恩義)의 중함을 깨우쳐주고, 거듭 그것을 간절하고 상세하게 하므로 백성이 모두 부끄럽게 여기고 탄복하며, 뉘우치고 깨달아서 그 다툴 바를 잃어버리고 물러갔다. 그 정사를 함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예(禮)를 흥기시키고 풍속을 선량하게 하며, 재목이 될 만한 이를 육성(育成)하고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방촌리사(坊村里社)에 널리 국당(局堂)을 설립하여 스승과 학생을 위한 장소로 삼았는데, 전포(錢布)를 많이 출자(出資)하여 그 비용을 넉넉하게 하는 한편, 종종 직접 방문하여 종용히 소속된 이들을 가르쳤다. 그 가르친 바는 사조(辭藻)를 기송(記誦)하여 익힘에 있지 않고, 나이 많은 사람을 존양(尊養)하고 효절(孝節)을 기리고 선양함에 있었으므로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반드시 경이(敬異)를 더하고, 그 성명(姓名)을 기록하였다. 절기(節期)가 이르면 혹 늠미(廩米)와 술 및 음식을 보내어 장려(獎勵)하였고, 미미한 전곡(錢穀)의 출납(出納)에 이르러서도 역시 반드시 직접 점검하였다. 그리고 아전들이 살피지 못한 것을 살펴 밝혔으므로, 아전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때마침 연이어 흉년을 당하여 유리(流移)하는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먹을 것을 바라자, 이에 부정공(富鄭公, 송나라 때 사람 부필(富弼)로 청주의 난민을 구제하는 데 대한 구체적 내용을 진달한 적이 있음)의 고사(故事)를 끌어와 방실(房室) 백 칸쯤을 벌여 설치하여 거처하게 하면서 매양 음식을 먹게 하였고, 대악(大惡)을 저지른 자가 아니면 반드시 몸소 임하여 살폈으며, 무릇 의약(醫藥)으로 조호(調護)할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 조치(措置)가 섬세하고 구비되는 등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원근(遠近)에서 소문을 듣고서 다투어 태인(泰仁)을 귀의처(歸依處)로 삼아 이에 의지해서 목숨을 온전히 한 자가 무려 수천 인이었다. 이에 관찰사(觀察使) 김광철(金光轍) 공이 조정에다 그 일을 올렸는데, 임금이 이를 가납(嘉納)하고서 일급(一級)을 가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공이 비록 은명(恩命)의 무거움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맞는 직책을 얻지 못한 채 오래도록 현(縣)을 맡은 것이 자기의 뜻은 아니었으나, 연이어 국상(國喪, 중종(中宗)과 인종(仁宗)의 죽음을 말함)을 만나고, 또 흉년이 거듭 드는 바람에 관직에서 떠나갈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현(縣)을 힘써 다스린 지 6년 만에 마침내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내직에 돌아갔는데, 고을 사람들이 공을 애모(愛慕)하여 머물러 주기를 바랐으나 그럴 수 없자, 전(前) 대제학(大提學) 소세양(蘇世讓) 공에게 선정기(善政記)를 청하고, 비석을 세워 덕을 드러내어 밝혔다.
공은 벼슬살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서 항상 산수(山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 겨울에 집정(執政) 중에 공의 뜻을 아는 이가 있어, 마침내 강원도(江原道) 간성군수(杆城郡守)에 임명되었는데, 당시에 공의 장자(長姊, 손아래 누이 중에서 장녀)가 아들을 따라 인제현(麟蹄縣)에 와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흔쾌히 그곳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간성군은 동해(東海)가 펼쳐져 있어 비록 맑은 승지(勝地)로 일컬어졌으나, 그 지역이 가장 오지(奧地)였으므로 백성들의 풍속이 어리석고 포악하여 흔극(釁隙, 불화(不和))이 쉽게 발생하여 교화하고 가르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풍기(風氣, 민정(民情))가 강고(剛固)하여 효의(孝義)로써 행실을 확립한 사람들이 많았다. 공이 이에 먼저 예(禮)를 그 사람들에게 파급하여 풍속(風俗)을 맡기고, 한결같이 태인(泰仁)을 다스리던 대로 다스리자, 얼마 안 되어 모두 선(善)에 교화되면서 다투어 서로 권려(勸勵)하였으므로 백성의 풍속이 크게 변화하였고, 선비 중에 그를 존경하는 자가 모여들었으므로 문풍(文風) 또한 크게 떨쳤다. 여가가 나면 때때로 배우는 이들을 데리고 산해(山海)의 명승지를 유람(遊覽)하고서 바람을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고, 또 풍악산(楓岳山)에 올라 그 흉금(胸襟)을 굳세게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저술한 바가 많았다.
신해년(辛亥年, 1551년 명종 6년) 겨울에 임금이 중외(中外)의 신료 중에서 청렴하고 근면하게 임무를 수행한 자를 가려서 아뢰도록 명하자, 관찰사 유지선(柳智善) 공이 또 조정에 공의 청렴하고 근면한 자취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에는 공이 이미 풍질(風疾)을 앓아서 재직할 수가 없었다. 구례(舊例)에 수령(守令)이 병으로 해임될 것을 구하면, 관찰사가 예(例)에 따라 파관(罷官) 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 그러므로 유공이 비록 공의 질병을 알고 있었으나 오히려 예(例)를 좇아 청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잠은 맑은 덕이 이미 드러나 이르는 곳마다 마음을 다하여 다스린다. 그러므로 병이 있다고 하여 해직(解職)시킴은 불가하다.” 하면서 체직(遞職)을 명하고, 인하여 벼슬을 올려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년) 여름에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초배(超拜)되었는데, 이때 공의 병이 치유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임금의 은혜로 중임(重任)에 조용(調用)됨에 감읍하여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안 되어 이전에 청렴하고 근면하다고 알려진 자에게 모두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는데, 공 역시 그 명을 받았다. 상주는 경상도(慶尙道) 전체를 통틀어 요충지(要衝地)에 해당하여 수레가 폭주(輻輳)하고 기무(機務)가 호번(浩繁)한데, 연이어 흉년이 드는 바람에 유민(流民)이 전부(顚仆)하여 죽어 나가는 자가 서로 베고 누울 정도로 많았다. 공이 이에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근면하게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여 살려 주었는데, 규모(規模)와 절목(節目)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태인에 있을 때에 의거하였다. 이 때문에 굶어 죽는 백성이 없었고, 또 농사짓는 것을 감독하여 그들로 하여금 때에 맞게 힘을 쓰게 하였으므로 가을에 이르러 여러 고을이 모두 재앙을 입었으나 오직 상주만은 곡식이 잘 여물 수 있었다. 관찰사 정응두(丁應斗) 공이 조정에 황정(荒政)의 전최(殿最, 관리 성적의 우열을 말함)를 올리자, 임금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한 단계 품계(品階)를 올려 주었다.
상주는 속현(屬縣)이 넷이었는데, 모두 궁벽한 오지였으므로 선비들이 강학(講學)할 장소가 없는 것을 매우 병통으로 여겼다. 이에 당원(堂院)을 크게 열매 땅을 골라 건물을 지었는데, 비록 극심한 기근(饑饉)을 당하더라도 능히 늠용(廩用)을 절약하여 그 비용을 제공하였고, 또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州)의 인사들이 다투어 서로 흠모하여 본받아 궁벽한 촌(村)과 사(社)에 이르러서도 모두 사적(私的)으로 영건(營建)하고, 또 이를 위해 힘든 일을 도와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 학업(學業)에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그중 서원(書院)으로 이름난 곳이 무려 열 곳쯤이었다. 또 주 문공(朱文公, 남송(南宋) 때 주희(朱熹))의 남원(南原)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고을의 수양 된 인사들을 골라 원장(院長)으로 삼아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준행할 교육의 조목(條目)을 가지고 학식(學式)을 간행하매, ≪소학(小學)≫과 성리학(性理學) 등의 서적을 많이 구입해 여러 서원에 나누어주어 수장케 함으로써 배우는 이들에게 영구한 이익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를 설치하고 베푸는 데에 있어서는 모두 그 방법을 실천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 12월 초2일에 급환(急患)을 얻었는데 이틀을 넘기고서는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춘추 64세였다. 관찰사가 조정에 부음(訃音)을 알려 오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잠은 청렴하고 근면하여 다른 사람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참으로 이 때문에 슬프도다.” 하고, 마침내 부의(賻儀)를 더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날, 마치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것처럼, 선비들은 가정에서 곡을 하고, 백성들은 들에서 울부짖었다. 그 상여가 나아감에 미쳐서는 고을의 부로(父老)와 유사(儒士)들이 상여를 만류(挽留)하면서 슬프게 전송하였는데, 인파(人波)가 도로를 가득 메울 정도였다. 향촉(香燭)을 치전(致奠)할 때엔 끊이지 않고 다른 지역에까지 미쳐, 군민(軍民) 중에 뒤늦게 함창읍(咸昌邑)의 치소(治所)에까지 이르러 치전을 닦는 이가 있었으니, 이 어찌 권세와 이익을 가지고 권유(勸諭)하여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이겠는가? 이듬해 3월 모일(某日)에 선영(先塋)이 있는 아차산의 임좌 병향(壬坐丙向)의 묘원(墓原)에 예법(禮法)에 따라 장사 지냈다.
공은 사람됨이 풍자(風姿)가 고상하여 다른 사람의 의표(意表)에서 벗어났고, 도량(度量)이 넓으며 학식이 고아(高雅)하였으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여 두려워할 만했고, 가까이 나아가면 소탈하여 친할 만하였다.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함에 있어서는 따를 무리가 없었고, 학문은 성현(聖賢)을 종주(宗主)로 삼았는데, 매양 경전(經傳)을 열람하면서는 반드시 그 용의처(用意處)를 궁구하였고, 읽다가 그 좋은 말과 뛰어난 행실에 이르러서는 그 옛일을 발돋움하며 흠모하여 그와 더불어 같이 될 것을 생각하였다.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옛사람을 스승으로 삼았고, 세속의 모든 비루한 논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일을 만나서는 여유가 있어 성색(聲色)을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창졸간에 일을 당하여도 일찍이 질언(疾言)과 거색(遽色)이 있은 적이 없었다. 공의 충효(忠孝)와 우애(友愛)는 천성(天性)에서 나왔고, 시속(時俗)을 근심함은 지성(至誠)에서 발출하였으므로 친구(親舊)를 거두어주고 도와주며, 궁핍한 이들을 진휼하여 구제해 주면서는 재산을 출자(出資)하면서도 돌아보아 아까워 한 적이 없었다. 후생(後生)에 학문을 장려함을 더욱 임무로 여겨 재주에 따라 선도하면서 힘써 옛사람의 사업(事業)으로써 권면하였다. 혹 더불어 고금(古今)에 대해 논할 때는 아무리 중첩되더라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조그마한 선행이 있으면 비록 미천한 일일 지라도 반드시 경애(敬愛)를 가하였고, 만일 그가 비루하고 외설하며 보잘것없는 부류이면 매우 천하게 여겨 더불어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과 접하여 대우할 때는 화기(和氣)가 퍼져 모두에게 그 환심(歡心)을 얻었다. 그러므로 비록 거슬러 배척을 받은 자일지라도 그다지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본디 벌열(閥閱) 가문의 누적된 가전(家傳)을 소유하여 재업(財業)이 예로부터 넉넉하였다. 공이 오래도록 먼 적소(謫所)에 있게 되면서는 장자(長姊, 손아래 누이 중 첫째)에게 오로지 맡기고서 개의치 않았고, 재산을 분배함에 미쳐서는 누이가 취하는 데로 맡기면서 부인으로 하여금 분배에 참여케 하고, 공은 간여하지 않았다.
일찍이 아버지의 문집 원고가 간행되지 못한 것을 염두에 두어 태인에 있을 때 비로소 상재(上梓)하였는데, 능히 기무의 여가에 손수 해서(楷書)로 베껴 씀에 시종일관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정성에 감복하였다. 일찍이 경세(經世)에 마음을 두어 매양 원한을 씻어주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임무로 여겼으므로, 나아가 주현(州縣)을 다스림에 있어 조금이나마 그 뜻을 실행해 보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송나라 제현(諸賢)들을 모범으로 삼아서 시속(時俗)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았다. 그 정치가 비록 인애(仁愛)와 자혜(慈惠)를 위주로 하였지만 선(善)을 드러내고 악(惡)을 끊어, 그들로 하여금 권징(勸懲)하는 바를 알게 하였고, 강한 족속을 묶어 매는 데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애초에 혹 기뻐하지 않던 자도 오랫동안 공의 교화를 입게 되면 모두 면모가 바뀌고 교화되어 복종하였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임금의 외척(外戚)으로서 젊을 때부터 집에 거처할 때 복식(服食)과 거마(車馬)가 평범한 사람들과 동등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주현을 다스림에 미쳐서는 맑은 지조가 탁월하여 음식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관(官)에 폐를 끼침이 없어서, 집안사람들과 복어(僕御)들이 모두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할 정도였으나 공은 편안하게 거처하였다. 매양 관직에서 돌아갈 때면 모든 기구(器具)와 집물(什物)에 대해서 혹 일용(日用)에 관계된 것이 비록 지극히 하찮은 물건이라도 역시 모두 일일이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관(官)에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공이 세상을 떠나 돌아갈 때 부인 역시 한결같이 이와 같이 하였고, 주관(州官)에서 관례에 따라 부의를 보내왔으나 일절 받는 바가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공의 가법(家法)이 있는 바를 보고서 평소에 행한 바가 한 때에 나쁜 점을 고치려고 부지런히 힘쓴 바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찍이 공을 거스른 자가 있었는데, 그 사위가 중죄를 범하여 옥사에 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이 매우 모호하여 분별할 수 없었는데, 공이 그가 억울함이 있음을 살펴서 끝내 잘못된 조사로부터 사실을 얻어 마침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그 옛 원한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음이 이처럼 한결같이 지극히 공변된 마음에서 나왔다.
공이 문장(文章)과 예술(藝術)에 있어 능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시(詩)는 ≪문선(文選)≫을 조종으로 삼고, 사(詞)는 초나라 ≪이소(離騷)≫를 주장(主張)하여, 격률(格律)은 고고(高古)하고 지취(旨趣)는 심원(深遠)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공의 척구(隻句)와 편사(片詞)를 얻기만 하여도 마치 큰 옥을 얻은 듯이 여겨서 전해가며 완미함을 그치지 않았다. 만년엔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솜씨가 공교로웠고, 또 난초와 대를 그림에 있어 지극히 그 실물(實物)에 핍진하여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으므로, 다투어 비단을 걸고서 이를 구하였으나 공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간혹 친구와 더불어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즐거운 나머지, 시가(詩歌)를 발하게 되면 화락하고 화창하여 그 풍류와 기개가 남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여 모두 흠모하고 우러렀다. 남은 글 약간 권이 있다.
아! 공의 아름다운 덕과 뛰어난 행실은 한 시대의 모범이 될 만하여 유림(儒林)에 기강(紀綱)이 되었고, 문장과 학술은 임금의 정치를 빛내고 태평한 시대를 꾸밀 만하였으나 일찍 당고(黨錮)를 입어 유배를 가는 바람에 때에 큰일을 해낼 수 없었다. 만년에 비록 잠깐 주현(州縣)을 맡아 다스려 보긴 하였으나 풍속이 침륜(沈淪)하고 비용(卑冗)하여 그 뜻을 펼 수 없었으니,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은 이에 그칠 뿐이다. 아! 슬프도다. 그러나 만일 조금 시험해 본 것을 가지고 그 마음 씀을 구해 본다면, 공의 지업(志業)이 옛 사람에게서 모범을 삼지 않은 것이 한 가지도 없었으므로 이를 통해 그 대강을 터득할 수 있다 하겠다. 모르겠지만 오늘날 세상에서 이런 점을 가지고 공을 궁구하는 자가 있는가?
공의 초취(初娶)는 종실(宗室)인 당해 부수(唐海副守) 이모(李某)의 딸로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감찰(監察) 한수(韓洙)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생원(生員) 강완(姜浣)에게 시집갔다. 후취(後娶)는 현릉 참봉(顯陵參奉) 노우명(盧友明)의 딸로 후사(後嗣)가 없었다. 시비(侍婢)에게서 1남을 두었는데, 이제 겨우 6세이다. 아! 이 아이가 공을 계승하겠는가? 감찰 한수는 1녀를 낳았는데, 이정빈(李廷賓)에게 시집갔다.
나 노진(盧禛)은 20여 년 동안 공의 문하에 왕래하며, 공의 덕업(德業)과 행치(行治)를 들음이 익숙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겠다. 다만 식견이 천박하고 글솜씨가 없으므로, 이미 공의 경지를 살피기에 부족하고, 게다가 서술(敍述)이 또 그 은미함을 천양(闡揚)할 수 없다. 모시고 좇은 것은 역시 공의 만년의 일이라 공의 젊은 날 행사(行事)의 자취에 대해서는 상세함을 얻지 못한 점이 있다. 그러나 평소에 비루한 데라고는 조금도 없고 자신을 반성함이 매우 두터웠는지라, 내가 이를 통해서 공을 살폈다. 그러므로 감히 미루어 우의(寓意)할 수 없었으므로 그 경개(梗槩)를 이와 같이 기술하여 내가 채택한 바로써 채울 뿐이다.” / 신잠 [申潛]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3. 영천자 신잠의 화단 교유와 창작시기 및 연보
영천자 신잠은 10대 때부터 가풍으로 서화를 배우고 즐겼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가 서화에 흥미를 느끼고 창작에 들어간 시기는 20대 중반부터로 보인다. 전라도 장흥에 유배 중이던 때와 이후 경기도 양주목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던 때는 물론이고, 경상도 상주에서 사망하기 전까지도 계속 그림을 그렸으니, 대략 1516경부터 1554년까지의 약 38년간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이전부터 조광조(趙光祖)의 신진사류에 속하였던 선비화가 충암(冲庵) 김정(金淨, 1486~1521), 그리고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특히 영천자가 전라도 장흥현에 유배되어 있던 1522년(중종17)에 능주군으로 낙향해 있던 양팽손(梁彭孫)이 영천자의 적소(謫所, 유배지)를 방문한다.
그리고 『학포집(學圃集)』에 의하면 영천자는 능주군에 낙향해 있던 학포 양팽손을 1534년(갑오)에 방문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유배시에는 거소의 제한이 있어 영천자가 유배되어 있던 장흥현에서 적소(謫所, 귀양지)를 벗어나 능주군을 오고 가기란 불가능하다. 즉, 영천자는 1534년에 양주목으로 이배 되어 북행하면서 능주군(현재 화순군 능주면)를 잠시 들렀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영천자가 장흥현에 유배되어 있던 시기는 1521년부터 1534년까지 13년간이다.
이후 영천자는 경기도 양주목 아차산 아래에서 4년간 더 유배 생활을 한다. 그곳에는 1497년에 사망한 부친 신종호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영천자가 이렇게 한양 근교로 이배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종의 외증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서 당시에는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양주목으로 이배됨으로써 영천자는 모친 전주이씨(세종의 10남 의창군의 차녀, 혜숙옹주의 시어머니)를 지척에서 모실 수 있었을 것이다.
노진의 「신잠행장」에 의하면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32년) 겨울에 죄가 참작(參酌)되어 양주(楊州)로 이배(移配)되었고,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33년) 가을에 마침내 편의(便宜)에 따라 거주(居住)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 대부인은 나이가 많았지만, 오히려 무양(無恙, 병이나 탈이 없음)하였는데, 돌아가서 대부인을 모심에 있어 온화하였다. 이듬해에 상(喪)을 당하여 애도(哀悼)함이 지극하였고,”라고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고증한 바로는 “정유년(丁酉年, 1534년 중종29년) 겨울에 죄가 참작(參酌)되어 양주(楊州)로 이배(移配)” 됨으로써 한양의 가족들과 원활히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년) 가을에 마침내 편의(便宜)에 따라 거주(居住)하라”하는 해배의 명을 받아 가족에게 돌아갔다. 영천자의 모친 전주이씨는 1497년에 홀로되어 1539년에 사망하며, 영천자는 아차산 아래에 있는 부친 신종호의 묘에 모친을 합장한 후 여기서 1541년까지 햇수로 3년여간 묘막살이를 한다.
영천자 신잠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기 위하여 필자 나름의 연보를 만들어 아래에 소개한다.
[표1] 영천자 신잠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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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도 |
연령 |
사 항 |
기타 중요 사항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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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0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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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從濩의 장인 의창군 이강(1428~)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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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년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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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호가 의창군 이강의 둘째 딸과 결혼 |
申從濩(1456~14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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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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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군의 처 김씨 사망하여 둘째 딸 전주이씨(신종호 처)가 대부분의 재산상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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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03 |
1 |
신종호의 4남으로 출생 |
모친은 전주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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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7.03.14 |
7 |
부친 신종호(1456~) 개성에서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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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 |
12 |
할머니 청주한씨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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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02.19 |
17 |
큰형 고원위 申沆(1477~1507) 사망(31세) |
혜숙옹주의 남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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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08.20 |
23 |
진사시 장원 급제 (1등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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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04.13 |
29 |
賢良科 병과 급제 (3등 7위) |
조광조의 신진사류에 속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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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 |
30 |
모친과 함께 청주로 낙향, 곧이어 상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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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10.11 |
31 |
辛巳誣獄에 연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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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 |
32 |
능주에 낙향해 있던 양팽손이 장흥의 영천자 적소 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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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 |
44 |
양주목 아차산 아래로 移配 / 능주로 양팽손 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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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포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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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7 |
47 |
解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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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9.04 |
49 |
모친 전주이씨(의창군 2녀) 사망 |
이후 3년 묘막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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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04 |
51 |
묘막살이를 마치고 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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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03 |
53 |
재등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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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 |
58 |
아들 申秀溶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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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01 |
59 |
‘고령세고’ 편찬 |
음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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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1.11 |
61 |
청백리로 녹선 |
강원도관찰사 柳智善의 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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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04.25 |
62 |
상주목사에 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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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08.04 |
63 |
통정대부로 승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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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4.12.02 |
64 |
상주목사 재직중 쓰러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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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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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임좌 병향에 장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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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천자 신잠의 작품에 관하여
영천자 신잠은 시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당대에 삼절(三絶)로 불렸다. 저서로는 『고령세고속편(高靈世稿續編)』에 「영천집(靈川集)」이 들어있는데, 「영천집」에는 그가 즐겨 그린 화제(畫題)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가 여러 수 수록되어 있다.
영천자 신잠은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난초와 대나무를 가장 잘 그렸다고 한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영천자는 묵죽(墨竹)에 뛰어났다”라 하였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墨竹)과 더불어 포도도(葡萄圖)도 잘 그렸다”라고 하였다. 다른 여러 문헌에도 유사한 언급이 있다.
영천자가 그렸다고 하는 현전하는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설중기려도(雪中騎驪圖, 探梅圖)」 1점과 「화조도」 4폭이, 국립진주박물관에는 「용도(龍圖)」가 소장되어 있다. 이에 필자는 2025년 2월 12일, 고령신씨연구소 신경식 소장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여 「설중기려도」 1점과 「화조도」 4폭을 상세히 살펴보았다.
① 「설중기려도(雪中騎驪圖)」 및 「탐매도(探梅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소장품 번호; 덕수1314)의 「설중기려도(雪中騎驪圖)」는 「탐매도(探梅圖)」라고도 부른다. 견본채색이며, 횡축의 그림이다. 그런데 현전하는 이 그림에는 관지(款識)라든가 화찬(畫讚)이 없다. 그리고 횡축의 중앙 부위를 보면 두 그림을 연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중앙 부위 필선이 연결되지 않으며 부자연스럽다. 상세히 살펴보면 한 점의 그림이 아니라 두 점의 그림을 하나로 붙이고 있다.9)
현재 붙어있는 그림의 크기는 세로 43.9cm, 가로 210.5cm인데, 그림의 중간부에서 왼쪽과 오른쪽의 그림 길이가 똑같다. 비단은 얼마든지 길게 짤 수가 있고, 폭도 그 넓이를 조절하여 짤 수가 있다. 이 그림의 세로가 43.9cm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비단보다는 넓다. 이 회견(繪絹)은 그림을 그릴 용도로 명나라에서 생산한 회견으로 보인다. 비단은 그림을 그릴 때 두루마리 상태에서 잘라서 쓰는데, 만약 이 그림이 연결된 한 점이었다면, 그림을 그리면서 연속하여 그렸을 것이다.
왼쪽의 그림은 당나귀를 타고 산속을 가는 모습을 그린 「설중기려도」이고, 오른쪽 그림은 매화를 찾아 나선 소년의 모습을 그린 「탐매도」이다. 만약 두 그림이 한 점으로 연결된 그림이었다면 왼쪽 그림과 오른쪽 그림은 위치가 바뀐 것인데, 필자는 한 횡축에 들어 있으나 떨어져 있었던 두 점의 그림을 새로 장황을 하면서 이어 붙인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작가와 감상자의 화제가 쓰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가 이 그림은 둘을 합친 것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왼쪽의 「설중기려도」에 그려진 당나귀를 탄 인물은 방한복을 철저히 껴입고 방한모를 쓴 모습으로 그리고 있으나, 오른쪽 「탐매도」에 그려진 소년은 방한복을 전혀 입지 않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만약에 두 그림이 현재의 표구 상태로 이어져 있던 그림이라면 이 그림은 왼쪽의 양반이 오른쪽의 하인을 혹사시키는 현실 비판적인 그림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만약 이 두 그림이 연결된 한 점의 그림이라면 그림이 왼쪽 그림과 오른쪽 그림은 위치가 바뀌어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왼쪽 그림과 오른쪽 그림은 화풍과 필치, 물감 등이 동일하지만, 작가가 나타내고자 한 화의(畫意)는 다르다. 왼쪽의 그림은 당나귀를 타고 산속을 가는 「설중기려도」이고, 오른쪽 그림은 매화를 찾아 나선 「탐매도」이다.
이 작품은 그림이 오래되어 일부 퇴색이 보이고 있지만, 그동안 사진이나 책에서 보아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색감의 그림이다. 사진이나 도판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은 실물보다 상당히 누런색이다. 실물의 보존 상태는 상당히 양호하다.
바위, 나무, 대나무, 인물을 모두 세필(細筆)로 그렸고, 바위 사이사이와 대나무 등에 칠해진 청록색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원나라로부터 명나라로 이어져 내려온 여기(吕紀, 1465~1505)가 즐겨 구사한 완체화(阮體畵)로서, 청록산수의 초보적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할 수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 인물산수는 「설중기려도(雪中騎驪圖)」 부분과 「탐매도(探梅圖)」 부분, 그 두 부분이 좌우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즉 “좌 「설중기려도」, 우 「탐매도」”라고 제호할 수도 있다. 이 그림은 1909년 2월 27일 이왕가박물관에서 일본인 골동상인 ‘스즈모토 혼지로오(鈴本銈次朗)’에게서 당시 돈 20원에 매입한 그림이다.
② 「전 신잠필 화조도(傳申潛筆花鳥圖)」 4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화조도」 4폭(소장품번호 ; 덕수 1154)은 지본채색의 작품으로 공필화(工筆畵)이다. 그런데 이 4점의 그림은 중국 명나라의 선지(宣紙)에 그렸다.
이 작품은 앞에서 언급한 횡축의 그림을 이왕가미술관에 매입하기 40여 일 이전인 1909년 1월 18일에 역시 같은 사람에게서 당시 돈 10원에 입수한 것이다. 이 화조도가 그려진 바탕 종이는 조선의 것이 아니다. 바탕 종이가 명나라의 종이라서 그런지 많이 방락되는 손상을 입었다.
그림에 낙관은 없지만, 폭④의 좌변(左邊) 중간 모서리 부분에 사각형 인흔(印痕)을 삭관(削款)하고 유사한 종이를 덧붙인 부분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림에 있던 인흔을 도려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삭관하여 훼손하는 데는 세 원인이 있다. 첫째, 후손이 선대의 유품을 팔 때 선대의 흔적을 없애 버린 경우가 있다. 1908~9년경은 우리나라에서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조상의 유묵(遺墨)을 매도한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헤도 이런 경우가 많았다. 둘째, 엉뚱한 작가의 이름으로 후낙한 것일 경우 그 후낙(後落)을 도려내 버린다. 셋째, 최근에는 장물일 경우 소장인을 도려내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대체로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 「전 신잠필 화조도」의 경우에는 이왕가미술관에서 구입한 시기가 1909년이므로 첫 번째 예로 보인다. 도려낸 인흔의 인문(印文)은 무엇이라 새긴 것일까? 매우 아쉽고도 궁금하다.
이 「화조도」 4점에서 보여주는 화풍은 앞에서 언급한 「탐매도」 및 「설중기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초의 화가 여기(吕紀)가 즐겨 구사한 완체화풍(阮體畵風)이다. 이러한 화조도는 조선에서 많이 그려졌다.
조선중기와 후기의 다른 화가들 그림이 자연스러움을 표현한 화조도라면, 신잠의 이 전칭작품 4점 가운데 폭②와 ③에서 굴절이 심한 매화나무의 인위적인 양화(養畵, 園藝)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런 양화를 화분에 있는 모습으로 옮겨 그리면 분재(盆栽) 그림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양화에 관한 첫 저서는 세조조(世祖朝, 1455~1468)의 선비화가였던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1418~1465)의 『양화소록(養花小錄)』(1474년, 목판본)이고, 인재의 전칭 작품에는 분재와 괴석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미 그 시대에는 대체로 양화에 관한 이해가 높았다.
그러므로 이 화조도는 조선전기에 충분히 그려질 수 있다. 특히 그림 폭③의 하단부에 나타나는 메추라기는 중국 원나라 시기의 메추라기 묘사와 매우 유사하며, 괴석의 묘사는 조선중기나 후기의 그림에서와는 전혀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 신잠의 전칭 작품과 사임당 신씨(申師任堂, 1504~1551)의 전칭 작품은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 화조도 4폭은 이왕가미술관이 사들이던 1909년 당시에는 4폭의 병풍으로 된 상태였는데, 현재는 각 폭이 세로 110.6, 가로 45.7의 족자로 꾸며져 있다. 원래의 병풍이 조선식 병풍인지 중국식 병풍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현재의 족자는 조선식 족자로 장황 되어 있다. 그려진 바탕이 명나라 때의 선지10)이고, 그림에 사용한 물감도 당시 명나라로부터 수입한 최고급의 물감이다. 영천자 신잠이 화원(畫員)이 아니면서도 이러한 회구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부유하였음을 의미한다.11)
③ 국립진주박물관 소장의 「용도(龍圖)」와 「호도(虎圖)」
재일동포 문화재수집가 김용두 씨는 일본에서 모은 자신의 수집품 대부분을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가 기증한 그림 가운데는 신잠의 인장이 찍혀 있는 「용도(龍圖)」와 「호도(虎圖)」가 각기 1점씩 포함되어 있다. 국립진주박물관의 이 두 작품은 크기와 재질이 동일하다. 단 「용도」는 수묵으로 「호도」는 채색으로 그렸다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두 그림의 왼쪽 상단부에 ‘원량(元亮)’이라는 인흔이 있다. ‘원량’은 영천자 신잠의 자(字)이므로, 이 그림은 영천자 신잠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이 인흔은 일본의 아사오카 오키사다(朝岡興禎, 1800~1856)가 편저한 『고화비고(古畫備考)』를 1903년에 오오타 츠츠시(太田謹, 1842~1925)가 증정한 『증정 고화비고(增訂古畫備考)』(1903~4) 조선편에도 채집되어 있다.
③-1. 「용도(龍圖)」, 소장품번호 ; 진주 1112., 견본수묵으로 크기는 세로 130.5cm, 가로86.5cm이다. 이 「용도」는 평양의 조선미술관에 있는 ‘안견(安堅)’작 「룡(龍)」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석경(石敬)’작 「운룡도(雲龍圖)」와 궤를 같이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원량의 인흔이 있는 이 「용도」는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증보판(1999) 68면 ‘신잠’조에 흑백도판으로 수록하고 있다.
③-2. 「호도(虎圖)」, 소장품번호 ; 진주 1113., 견본채색으로 크기는 세로 130.2cm, 가로 86.5cm이다. 이 「호도」는 조선후기의 민화 「호작도(虎鵲圖)」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호랑이 그림이다.
국립진주박물관 소장의 「용도」와 「호도」는 실물을 보면서 견본의 실체라든가 물감이나 먹의 농도를 검토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두 점의 그림에 관한 평가는 뒤로 미룬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용도」와 「호도」는 영천자 신잠의 자 ‘원량’을 새긴 인흔이 있는 한, 영천자 신잠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점을 밝힌다.
④ 일본 유현재 구장의 「묵죽도」 2점
이 묵죽도는 지본수묵으로 크기는 세로 137.8cm, 가로 65.5cm이다. 현재 이 작품의 행처를 알 수 없다. 각 화면의 왼쪽 부분에 찍혀 있는 ‘원량(元亮)’이란 백문방인과 ‘영천자장(靈川子章)’이라는 주문방인에 의해 영천자 신잠의 작품으로 확인된다.
필자는 일본 유현재 구장의 「묵죽도」 두 점 역시 실물을 확인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묵죽에 관한 평가는 뒤로 미룬다. 여기에서는 영천자 신잠의 자 ‘원량’과 호 ‘영천자장’이라는 인흔이 있는 한, 영천자 신잠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점을 밝힌다.
영천자 신잠은 묵죽을 즐겨 그렸다. 왼쪽 그림에서는 죽순에서 막 새로이 돋아나는 대나무와 성장한 대나무를 대비하여 신죽을 그렸으며, 오른쪽 그림에서는 비를 맞고 있는 우죽(羽竹)을 그렸다. 그가 묵죽을 즐겨 그린 것은 유배지 장흥에서 자신의 위치가 하찮게 땔감으로 사용되는 현지 대나무와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영천자 신잠은 서(書)에도 능하였다. 일반적인 작은 글씨가 몇 점 현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대자(大字)를 보여주는 글씨는 1552년경에 쓴 당호(堂號) 「긍구당(肯構堂)」을 목각하여 편액으로 만든 것이 현재로는 유일하다. 그 편액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긍구당에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
5. 맺음말 ; 잊지 말하야 할 조선전기의 선비화가이자 목민관 영천자 신잠
조선초기의 선비이자 문인화가를 규명하는 것은 우리 회화사의 한 본류를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려말선초에 활동한 ①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1330~1402)과 조선전기의 ②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1418~1465), ③충암(冲庵) 김정(金淨, 1486~1521), ④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 ⑤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이 그들이다.
이번에 영천자를 다룬 것으로 하여, 이들 모두를 여기서 다루었다.12) 어쩌면 이들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영천자 신잠일 것이다.
충암과 학포, 그리고 영천자, 이 세 선비화가는 모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신진사류에 속한 개혁파 인물이다. 조광조를 따랐던 많은 신진사류 인물이 기묘사화(1519)로 몰락하였으나, 영천자 신잠은 1543년에 재 등용되어 지방관으로 나가서 12년간 나름대로 품어온 개혁 지방 관치(官治)를 펼친다. 결과적으로 청백리로 녹선되고 선정비가 세워진다. 조광조가 목표로 하였던 개혁정치가 부분적으로나마 영천자에 의하여 실행한 것이다.
영천자가 유배지에서도 많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 것은 17년간의 억울한 유배를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희망이 없던 암울한 시기를 예술로 이겨낸 것이다.
우리 민족은 한(恨) 맺힌 인물을 모시는 신당(神堂)을 세운 예가 있다. 고려말의 무신(武臣) 최영(崔瑩, 1316~1388)이 그렇고, 고려말의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이 그렇다. 의외로 조선전기의 영천자 신잠이 태인현감을 마치고 이임한 후에 태인에 신당이 세워졌다. 그만큼 태인현 백성들은 그의 선치를 이해하고 따랐다. 태인의 백성에게는 전무후무한 인물인 셈이다.
그는 그저 단순이 여기(餘技)로서 문인화를 그린 선비화가가 아니라, 조선전기 최상급의 화가이다. 그러니만치 영천자 신잠의 예술세계는 재평가되어야 한다. 이제 그의 그림에 붙여 놓은 전칭작품이라는 덜 돼먹은 딱지를 떼어 버리자.
주(註)
주1) 필자, 「영천자 신잠의 인생과 예술」, 월간 『미술세계』 1993년 6월호(통권 제103호) pp.116~120.
사단법인 송헌문화재단(이사장 신화수)에서는 『영천자 신잠 선생의 생애와 업적』이라는 좋은 자료집 증보판을 2022년 3월에 내었다. 필자가 신잠에 관한 첫 글을 쓰던 1993년에는 그러한 자료집이나 신잠에 관한 논문이 한 편도 없었다. 또한 일반인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유물을 개별적인 열람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여 사진 검토만으로 논고를 썼다. 지금 살펴보면 부족함이 너무 많아, 이 논고를 쓰게 되었다.
주2) 1520년경 서울에 돌아온 신잠은 안처겸의 아들 안정(安挺)과 친하게 지냈는데, 신잠과 안정은 모두 그림에 취미를 가진 서화가이다. 좌의정 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이 모친상을 당하여 조문하려고 온 사람들과 담론하다가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고, 중종의 측근에 있는 간신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송사련(宋祀連)이 이를 듣고 무고(誣告)하여, 안처겸 안처근 형제는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안정은 유배되었다. 이를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고 한다.
주3) 태인현감 재직할 때 동서남북 네 곳에 학당(四部學堂)을 세웠고, 선정을 베풀어 태인의 주민들이 그의 선정과 치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1549년에 선정비를 세웠다. 이 선정비는 1984년 4월 1일 자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주4) 『명종실록』 13권, 명종 7년(1552년) 4월 25일 정축 2번째 기사. “以李名珪爲刑曹判書, 李浚慶爲知中樞府事, 【浚慶爲人, 度量雄偉, 才兼文武, 朝廷倚以爲將相之器, 而一忤權奸, 遂竄干外。 人心難誣, 邪正久而自辨, 至是命還于朝。 浚慶旣被謫, 李無彊意猶未已, 必欲殺之, 言於宋世珩, 珩曰: "此大事, 不可不議於尹元衡。" 卽往問之, 元衡大言折之, 無疆氣沮而退。 蓋大、小尹之說始行, 時論欲罪小尹, 李潤慶、浚慶兄弟, 以爲不可偏治小尹。 尹元衡嘗德之, 故浚慶得不死。】 申潜爲尙州牧使, 【潜, 故參判從濩之子也。 自少資稟絶特, 而又籍文獻之世, 與名公先輩遊, 務自砥礪, 充之以學識, 發之爲文章, 蔚然爲世偉人。 在中廟朝, 嘗膺賢良之選, 爲藝文館檢閱。 己卯禍起, 卽被謫流, 落海隅幾二十年。 丁酉歲, 金安老伏誅, 己卯諸賢, 幸而生存者, 皆被召命, 潜亦蒙恩放還。 朝廷以旣革其科, 不能使復躡文班, 而不忍棄其才, 陞其秩爲泰仁縣監, 其聲績爲諸道最。 秩滿還朝, 卽以山水之娛, 乞杆城郡而去, 未幾銓曹採廷議, 薦授是州。 上亦嘗聞其名, 故於其行引見焉。 潜早歲見逐, 羈窮者半生, 晩途仕宦, 亦復落莫不揚, 而其好賢樂善之誠, 愛君憂世之心, 老而益篤, 其可謂君子人也。】”
주5) 하곡(霞谷)ㆍ도곡(道谷)ㆍ석문(石門)ㆍ수양(首陽)ㆍ노동(魯東)ㆍ수선(修善)ㆍ용문(龍門)ㆍ영빈(潁濱)ㆍ매악(梅嶽)ㆍ오산(梧山)ㆍ고봉(孤峰)ㆍ봉성(鳳城)ㆍ백화(白華)ㆍ봉암(鳳巖)ㆍ송암(松巖)ㆍ지천(智川)ㆍ죽림(竹林)ㆍ근암(近嵒).
주6) 『명종실록』 17권, 명종 9년(1554년) 12월 13일 기묘 1번째기사. “己卯 / 尙州牧使申潜卒。 潜, 資性英邁, 又工於書畫, 善綴文。 初以賢良科進, 己卯之禍, 坐廢者二十年。 卜築于峩嵯山下, 以書畫自娛, 若將終身, 仁廟朝, 特授以六品職。 居官勤愼, 不曾有誤事, 及爲尙州, 有惠政, 民愛之如父母。 以廉謹, 陞通政, 未幾而卒。 惜乎! 其未大施, 而天奪之速也。 傳于政院曰: "今見慶尙道觀察使 【權轍】 書狀, 則尙州牧使申潜身死。 此人廉謹, 自上甚爲惻然。 米豆幷八石致賻可也。”
번역 / ”상주 목사(尙州牧使) 신잠(申潛)이 졸하였다. 신잠은 자질이 영민하고 서화(書畫)에도 솜씨가 있었으며 글을 잘 지었다. 처음에 현량과(賢良科)211) 로 진출(進出)하였다. 기묘년의 화로 폐치된 지 20년 동안에 아차산(峨嵯山) 밑에다 거처를 정하고 혼자서 서화를 즐기며 장차 일생을 마칠 듯이 했었는데 인묘조(仁廟朝)에 특별히 6품직을 제수하였다. 벼슬살이를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하여 일찍이 일 그르치는 때가 없었고 상주 목사가 되어서는 은혜로운 정치를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부모처럼 친애하였다. 염근(廉謹)으로서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다. 애석하다. 재능을 크게 펴보지도 못했는데 하늘이 너무 빨리 빼앗아갔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경상도 관찰사 【권철(權轍)이다.】 의 서장을 보니 상주 목사 신잠이 죽었다고 했다. 이 사람은 염근했기에 위에서도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미두(米豆)를 8석씩 치부(致賻)하도록 하라.”
주7) 노진의 「신잠행장」에는 당해부수(唐海副守) 이모(李某)의 딸이라 쓰고 있고, 전주이씨족보애는 영천자가 당해부수 이붕구(李朋龜)의 사위로 들어가 있다.
주8) 신담은 1534년에 양주로 이배되고, 1537년에 귀양이 해제된 것으로 고증된다. 행장의 이 부분은 잘못된 기록이다.
주9) 1993년에 필자가 쓴 기존의 논고에서는 “이 그림은 견본채색이며 2쪽의 그림이 1점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연결된 부위가 부자연스러워 적어도 10cm 이상이 잘려 나간 것으로 보인다”라고 언급하였으나 이제는 당시의 관점을 본 논고의 본문에서와 같이 수정한다.
주10) 후기신라와 고려 조선에서 우리의 저지(楮紙, 닥종이)는 중국 당나라로부터 청나라로 수출되었지만, 반면에 중국 북송과 원·명·청의 선지도 고려와 조선으로 수입되었다. 당시 수입지는 중국은 중국대로 저지가, 조선은 조선대로 선지가 수입품이니만큼 고가에 거래되었다. 조선후기의 서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대련(對聯)이나 병풍 작품은 대부분 청나라에서 수입한 화려한 종이에 썼듯이, 영천자의 「화조도」 역시 명으로부터 수입한 선지에 그려졌다.
주11) 노진이 지은 「신잠행장」에 의하면 “본디 벌열(閥閱) 가문의 누적된 가전(家傳)을 소유하여 재업(財業)이 예로부터 넉넉하였다. 공이 오래도록 먼 적소(謫所)에 있게 되면서는 장자(長姊, 손아래 누이 중 첫째)에게 오로지 맡기고서 개의치 않았고, 재산을 분배함에 미쳐서는 누이가 취하는 데로 맡기면서 부인으로 하여금 분배에 참여케 하고, 공은 간여하지 않았다.”라고 한 바 있다. 그리고 고령신씨문중의 구전에 의하면 영천자는 “외가 전주이씨와 후사가 없이 요절한 큰 형 신항으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라고 한다.
세종의 서자 의창군 이강(1428~1460)에게는 1남2녀가 있었고, 둘째 사위가 신종호이다. 의창군의 아내 김씨는 1482년에 53세로 사망하면서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둘째 딸에게 물려 주었으며, 그 재산의 상당량이 신잠에게 상속된다. 또한 신잠의 큰형 신항은 성종의 부마(혜숙옹주의 남편)인데, 후사가 없이 31세(1507)에 사망하여 큰 형의 유산도 상당량을 상속받는다. 영천자가 지방 방백으로 사재를 써 가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부(富)가 뒷받침해 주었다. ‘世宗’→庶三男 ‘義昌君 李玒’→둘째 사위 ‘申從濩’→四男 ‘申潛’.
주12) ①순은 신덕린 / 려말선초의 서화가 순은 신덕린과 그의 작품에 관한 고찰 / 2024.08.05. /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1294
②인재 강희안 / 선비화가 인재 강희안 / 2025.01.06. /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506
③충암 김정 / 요절한 중종조 선비화가 충암 김정 / 2025.02.03. /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696
④학포 양팽손 / 조선전기의 선비화가 학포 양팽손 / 2025.01.27. /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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