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광풍이 지나갔다. 아버지와 나를 간첩으로 몰아가려던 공안당국의 음모는 사실상 실패했다. 그들은 언론을 앞세워 마녀사냥까지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해가 바뀌어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아버지와 나를 기소했다. 2013년부터 몇 년에 걸쳐 1, 2, 3심 재판이 차례로 진행됐다. 최종 판결이 2018년 7월에 내려졌고, 3년의 집행유예 기간은 2021년 7월에야 끝났다. 2011년 7월의 압수수색부터 시작해 꼬박 10년을 옭아매 둔 셈이다.

공안당국이 수사하고 법정에 세우는 와중에도 아랑곳없이 아버지는 회고록 집필에 몰두했다. 나도 6년 터울의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다. 아버지는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혼자 세월호 진상 규명이나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광화문 집회장에 자주 나갔다. 2016년 겨울에는 박근혜 퇴진 광화문 촛불집회에도 빠짐없이 나갔다. 여전히 건강하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의 건강은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압수수색과 수사, 기소, 재판의 과정을 몇 년간 겪으면서 서서히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의롭게 투쟁하는 이들의 집회에 참석해 힘을 보태는 것이 당신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하신 듯 집회가 열리면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하셨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압수수색과 수사, 기소, 재판의 과정을 몇 년간 겪으면서 서서히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의롭게 투쟁하는 이들의 집회에 참석해 힘을 보태는 것이 당신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하신 듯 집회가 열리면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하셨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압수수색과 수사, 기소, 재판의 과정을 몇 년간 겪으면서 서서히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의롭게 투쟁하는 이들의 집회에 참석해 힘을 보태는 것이 당신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하신 듯 집회가 열리면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하셨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압수수색과 수사, 기소, 재판의 과정을 몇 년간 겪으면서 서서히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의롭게 투쟁하는 이들의 집회에 참석해 힘을 보태는 것이 당신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하신 듯 집회가 열리면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하셨다. [사진 제공 – 안영민]

2017년 봄이었다. 통일운동 단체에서 일하는 후배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그냥 안부 전화인가 했더니 만나서 해줄 말이 좀 있다고 했다. 며칠 뒤 그 후배와 만났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한잔하는데 후배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형을 보자고 한 건 혹시 가족들도 알고 있나 해서요.”

“무슨?”

“선생님이 요새 좀……. 저희가 그동안 연로하신 선생님들을 많이 챙겨드리다 보니 느낌이 있는데…….”

후배는 최근에 본 아버지의 모습을 전해주었다. 집회를 마치고 식사하러 갈 때 자주 가는 식당인데도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도 많고,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어떨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예전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라고 했다.

“치매일지도 몰라서요.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한번 받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 말을 들으니 최근 들어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 제사상 앞에서 “오늘 누구 제사냐?”라고 물어보던 장면이 떠올랐다. 부엌에 있는 며느리를 보고 “저 여성은 누구지?”라고 물어보던 것도 생각났다. 가족 모임 때는 사위를 몰라보고, 외손자도 몰라봤다. 그 순간 아버지는 “내가 요즘 건망증이 심해서 그렇다”라며 웃어넘겼지만 그게 아니었다.

서둘러 아버지를 모시고 큰 병원에 갔다. 신경정신과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상담도 했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인지능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치매가 이미 중기로 접어든 상태였다. 병원을 나서면서 무척 속상했다. 천재 수학자에게도 이런 병이 생기는구나. 아버지도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는구나. 그런데도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잘 모르고 있었구나…….

일단 아버지를 우리 집 근처로 모셔 오기로 했다. 이때 아버지 집은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작은 아파트였다. 그리 멀지 않았지만 나도 두 아들을 키우느라 아버지한테 별로 신경 쓰지 못했다. 아버지를 챙겨드리자면 최대한 가까이 모시는 게 필요했다.

새로 이사 온 곳은 신축 주거용 오피스텔이었다. 위치도 그렇고 아파트형 실내 공간이라 편리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층마다 좌우로 현관문이 늘어서 있는 이곳을 아버지는 자꾸 교도소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또 구금됐다고 여긴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우리 집 바로 맞은편 주택가의 빌라로 몇 달 만에 다시 이사했다.

나는 걸어서 3분 거리인 아버지 집을 수시로 찾았다. 아침 일찍부터 식사를 챙겨드렸고, 낮에 요양보호사가 오면 우리 집으로 와서 밀린 일을 했다. 저녁에는 다시 아버지 집으로 가서 식사와 잠자리를 챙겨드리고 밤에 주무시는 걸 보고 나왔다. 그렇게 3년 가까이 보냈다.

2006년에 어머니와 함께 금강산을 찾았을 때. 맨왼쪽에는 범민련 이종린 의장님(2014년 타계), 그 옆에는 범민련 고문이신 류금수 선생님(2011년 타계). 두 분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사진 제공 – 안영민]
2006년에 어머니와 함께 금강산을 찾았을 때. 맨왼쪽에는 범민련 이종린 의장님(2014년 타계), 그 옆에는 범민련 고문이신 류금수 선생님(2011년 타계). 두 분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는 자꾸 광화문 집회에 나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제는 조직 사업도 강연도 힘들기에 정의롭게 투쟁하는 이들의 집회에 참석해 힘을 보태는 것이 당신의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버지 혼자 나가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위험했다. 나도 집안일을 하며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처지라 매번 모시고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면 나 몰래 혼자 나가기도 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아버지를 경찰이 발견하고 내게 연락해 파출소로 아버지를 모시러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생애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정용일 형과 함께 구술 작업을 진행했다. 아버지를 누구보다 존경하며 따랐던 정용일은 이전부터 내게 아버지의 평전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나 또한, 아버지를 잘 알고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는 누군가가 그 일을 맡아주었으면 싶었다. 정용일이 딱 적임자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 둘은 함께 그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구술을 위해 묻고 답하는 것을 아버지는 자꾸만 ‘취조’라고 여겼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거듭 묻는 일이 많다 보니 더 그런 것 같았다. 순조롭게 잘 이어지다가도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며 ‘진술’을 거부할 때가 많았다. 결국 구술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건강하실 때의 아버지 모습. 2013년 팔순을 기념해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을 출간한 무렵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건강하실 때의 아버지 모습. 2013년 팔순을 기념해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을 출간한 무렵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그 뒤로 나는 아버지를 챙겨드리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잠깐씩 듣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기억이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때그때 조금씩 메모를 했다. 2003년에 아버지와 내가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라는 책을 함께 쓸 때, 아버지의 생애를 대략이나마 정리해 놓은 게 큰 도움이 됐다.

단편적인 기억만 남게 되는 치매 환자에게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어떤 대목일까.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일 것이다. 아버지를 놓고 보자면 우선은 경북대 수학과 대학원 시절이었다.

한날은 은사인 박정기 교수님이 집에 오시기로 했는데 식사 대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나, 박정기 교수님은 벌써 돌아가셨고 문상도 다녀오셨다 해도 믿지 않았다. 돌아가셨으면 당연히 연락이 왔을 텐데 부고를 받은 일이 없다며 오히려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럴 때는 옛날 대학원 시절로 화제를 돌리는 게 제일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수학교실 세미나 이야기를 하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스승과 벗들과의 추억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다음은 감옥살이 기억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생활 자체를 감옥살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저녁으로 내가 식사를 챙기면 취사장에서 갖고 온다고 여겼다. 형이나 누나가 집에 오면 면회를 오는 거라 여겼다. 하루는 손톱깎이를 쓴 뒤 방 안에서 왔다 갔다 했다. 저놈들이 검방 와서 이걸 발견하면 난리를 칠 거라며 감출 곳을 찾는 것이다. 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내게 “당장 보안과장 불러와!”라며 호통쳤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새로운 곳으로 이감 왔다고 여겼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더니 “그래, 여기서 또 한 번 살아보자”하며 껄껄 웃기도 했다.

이처럼 일상의 모든 것을 감옥살이와 연결했다. 삶의 숱한 기억 속에서 기왕이면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이 많이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았다. 늘 긴장하고 쫓기던 조직 활동이, 또 감옥살이가 그나마 남은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의 삶은 이미 당신이 직접 쓴 책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구국전위 사건으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한창 재판을 받던 시기에,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기록해 작은누나에게 편지로 보냈다. 그 편지글을 정리해서 1997년에 펴낸 책이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이다. 아버지는 이 책을 통해 일제강점기 시대에 고향인 밀양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민족21> 사건이 터진 뒤에는 그다음의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써나갔다. 역시 수사와 기소, 재판의 와중이었다. 아버지는 1945년 8·15해방부터 시작해 1952년 대학 입학 때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통일뉴스>에 2년 동안 연재했다. 이를 정리해 2013년에 『끝나지 않은 길』이란 제목으로 두 권의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아버지의 인생에서 전사(前史)에 해당한다. 해방 정국에서 목숨을 걸고 분단을 반대하는 투쟁의 길로 뛰어들었던 소년 전사(戰士)의 이야기는 이후 아버지의 삶을 지탱하는 본질이 되었다.

하지만 수학자이자 통일운동가로 살아온 그다음의 이야기를 아버지는 미처 정리하지 못했다. 어느덧 팔순을 훌쩍 넘기고 나니 건강 문제가 앞을 막아선 것이다. 2011년의 압수수색과 수사, 그로부터 몇 년간 이어진 재판도 아버지의 건강을 악화시킨 원인이 됐다.

나는 앞날이 창창한 수학자의 길을 가던 아버지가 왜 남민전이라는 지하조직에 가입해 변혁운동의 길에 들어섰는지 그 연유가 늘 궁금했다. 이는 <말>지와 <민족21> 기자 출신으로서 취재하고 싶은 주제이기도 했다. 혈육으로서 아버지의 생애를 더 알고 싶은 것만이 아니라, 후배 세대로서 선배 운동가들이 살아온 치열했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버지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났다.

하지만 인터뷰는 아무 때나 진행할 수 없었다. 시간 약속도 할 수 없었다. 우리들의 인터뷰에는 늘 예측할 수 없는 기다림과 침묵이 동행했다. 아버지의 기억이 잠깐씩 돌아올 때야 비로소 진행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를 기다렸다가, 언제 또 사라져갈지 모르는 아버지의 기억을 조심스레 끄집어내 씨줄과 날줄로 엮어나갔다. 어떨 때는 빛나는 눈으로 몇 시간씩 인터뷰할 수 있었지만, 어떨 때는 마냥 며칠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 기다림이 차츰 길어져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면서 우리들의 인터뷰도 끝이 났다.

그래서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매 순간이 마지막 유훈과도 같았다. 지금 아니면 들을 수 없는 귀중한 증언이었다. 그 순간들이 내게는 큰 위안이 됐다. 당시 나는 육아와 집안일, 아버지 간병까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 몸도 마음도 점점 가라앉았다. 예전과 같은 활동은 언감생심이었다. 그 순간에 나를 일으켜준 게 아버지였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 수학자의 변혁적 삶과 그 생애를 관통한 민족해방투쟁의 역사, 생생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2019년 10월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 생신 축하모임’ 때 4남매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다. 결국 이 사진이 마지막 가족사진이 됐다. 이날 생신모임은 아버지의 86번째 생신을 맞아 아버지의 동지들과 후배들, 그리고 통일사회단체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2019년 10월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 생신 축하모임’ 때 4남매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다. 결국 이 사진이 마지막 가족사진이 됐다. 이날 생신모임은 아버지의 86번째 생신을 맞아 아버지의 동지들과 후배들, 그리고 통일사회단체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의 삶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무엇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굴곡지고 험난했던 80여 년의 생을 기꺼이 감당했을까. 아버지에게 하고 싶었던 마지막 질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인터뷰는 끝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아버지의 답변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아버지의 평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증조할아버지였다. 밀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에게 증조할아버지는 ‘민족’이란 지고지순한 가치를 일깨워주신 분이다. 아버지는 민족의 가치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함께 고난을 겪는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들에 대한 뜨거운 연대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민족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에 의해 분단되고 전쟁의 상처와 고통으로 신음하자 아버지는 저항했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가는 길에 자신의 모든 걸 바쳐 투쟁했다.

아버지는 평생을 ‘민족주의자’로 살았다. 물론 민족주의에 대한 정의와 해석은 시대마다 나라마다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민족주의의 한계와 폭력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민족주의는 외세의 침략에 맞선 민중의 집단적 저항을 상징했다. 갑오년 농민들의 반외세투쟁부터 일제에 맞선 항일운동가들의 무장투쟁, 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처절히 싸운 해방 정국의 투쟁까지, 우리 민족이 억압과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해방 정신이었다. 그 정신이 아버지의 시대에는 4.19혁명과 유신독재 타도 투쟁으로 발현됐고, 1980년대 이후 변혁운동의 뿌리가 됐다.

아들로서 곁에서 지켜본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까. 아버지가 내게 항상 강조한 것은 ‘인간 중심’의 사상이었다. 돈 중심의 자본주의를 극복할 민중의 사상은 인간이 기본이어야 함을 늘 강조했고, 삶으로 실천했다.

아버지는 식민, 분단, 전쟁, 독재로 점철된 당대에 맞서 쉼 없이 싸웠다. 그 가운데서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부당한 대우, 불평등한 삶을 어느 한순간도 외면하지 않았다. 대학 강단에 있을 때는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이 끝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감옥에 있을 때도 가난하고 힘없는 재소자들의 권리를 지켜주고 사회의 모순을 일깨워주었다. 불우한 소년수들을 연민으로 대하며 따스한 정을 나눠주었다. 이처럼 아버지는 강자에게는 불같이 맞섰지만, 약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다.

아버지는 나이가 한참 어린 청년들한테도 꼬박꼬박 존대했다. 소년 투사 시절에 아버지를 지도한 박철환 선생은 동지 관계의 기본은 ‘평등’임을 강조했다. 존대어를 ‘동지어’라고 가르쳐주었다. 아버지는 선배 전사들로부터 평등이 인간 중심 사상의 핵심이라 배우고 깊이 새겼다. 인간이 가장 귀하고, 세상의 근본이며, 누구나 평등하다는 그 정신을 아버지는 평생 간직하고 실천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와중에도 한번씩 옛 기억이 살아날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아버지도 무척 기분이 좋았다. 여정남 열사의 조카인 여상화 선배가 아버지를 찾아와 찍어드린 사진으로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와중에도 한번씩 옛 기억이 살아날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아버지도 무척 기분이 좋았다. 여정남 열사의 조카인 여상화 선배가 아버지를 찾아와 찍어드린 사진으로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아버지의 삶이 내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서야, 그리고 아버지의 평전을 정리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아버지’라는 큰 산에 의지해 세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음을…….

아버지는 혼돈의 시대에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알려준 이정표였다. 외떨어진 곳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게 해준 나침반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아버지가 걸어간 길을 따라 여기까지 헤쳐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오늘도 내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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