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전기에는 『소상팔경도』[주1]와 『사시팔경도』가 여러 점 그려졌다. 보한재 신숙주는 1445년에 지은 「비해당화기(匪懈堂畫記)」[주2]에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는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의 작품을 열거하면서 『팔경도(八景圖)』 두 점을 제일 먼저 언급하였다. 이를 보면 안견도 『소상팔경도』와 『사시팔경도』를 1445년 이전에 그렸다. 회화사학계에서는 안견이 1442년 이전에 『팔경도』 두 점을 그린 것으로 본다.

그런데 안견이 그린 『소상팔경도』에 붙었던 안평대군이 엮은 『소상팔경시첩』도 현전하고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안견의 작품으로 전하는 『소상팔경도』가 소장되어 있다. 이 『소상팔경시첩』과 『소상팔경도』의 연결성이 주목된다.

1. 안평대군이 엮은 『소상팔경시첩』을 해부한다

청명 임창순 선생이 소장하던 『소상팔경시첩』을 1990년대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매입하였다. 이 『소상팔경시첩』은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1442년에 엮은 시첩이므로, 그의 호를 붙여 『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이라고도 한다.

서첩은 45면으로 서첩의 크기는 세로 45cm, 가로 33.3cm의 서첩이고, 2004년 5월 7일 국가유산 보물(제1405호)로 지정되었다.

왼쪽, 『匪懈堂瀟湘八景詩帖』 포갑, 제첨을 일제때의 대표적인 서예가 惺堂 金敦熙(1871~1937)가 썼다. 그렇다면 이 시첩은 백여 년 전에 널리 알려졌다는 의미이다. 오른쪽, 『匪懈堂瀟湘八景詩帖』 포갑, 이 포갑이 성당의 제첨을 쓴 포갑보다 먼저 만든 것인지는 시첩의 원본을 검토 비교하여야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왼쪽, 『匪懈堂瀟湘八景詩帖』 포갑, 제첨을 일제때의 대표적인 서예가 惺堂 金敦熙(1871~1937)가 썼다. 그렇다면 이 시첩은 백여 년 전에 널리 알려졌다는 의미이다. 오른쪽, 『匪懈堂瀟湘八景詩帖』 포갑, 이 포갑이 성당의 제첨을 쓴 포갑보다 먼저 만든 것인지는 시첩의 원본을 검토 비교하여야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서첩은 안견이 그린 『소상팔경도』에 붙어 있던 것이다. 찬시를 쓴 서품(書品)의 크기는 각기 다르다. 세로가 가장 긴 것이 40㎝, 가장 짧은 것이 19.5㎝이고, 가로가 가장 긴 것은 32㎝, 가장 짧은 것은 17.4㎝이다. 지질은 모두 미립금점(微粒金點)이 별처럼 찍힌 유색(有色)의 중국산 금전지(金箋紙)인데, 이러한 것을 보면 안평대군이 찬시를 부탁하며 나누어 준 종이에 쓴 것 같다.

1442년(세종24),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은 고려의 ①이인로(李仁老, 1152~1220)와 ②진화(陳澕, ?~1200년 문과~?)가 지은 팔경도 화찬을 옮겨쓰게 하였고, 조선 세종조의 ③김종서(金宗瑞, 1382~1453) 등 19명에게 시를 짓고 쓰게 하였는데, 작품이 수록된 인물은 고려의 2인과 조선의 김종서를 비롯하여 ④이영서(李永瑞, ?~1450) ⑤하연(河演, 1376~1453) ⑥정인지(鄭麟趾, 1396~1478) ⑦조서강(趙瑞康, ?~1444) ⑧안숭선(安崇善, 1392~1452) ⑨성삼문(成三問, 1418~1456) ⑩박팽년(朴彭年, 1417~1456) ⑪신숙주(申叔舟, 1417~1475) ⑫안지(安止, 1377~1464) ⑬강석덕(姜碩德, 1395~1459) ⑭최항(崔恒, 1409~1474) ⑮남수문(南秀文, 1408~1442) ⑯신석조(辛碩祖, 1407~1459) ⑰이보흠(李甫欽, ?~1457) ⑱유의손(柳義孫, 1398~1450) ⑲김맹(金孟, 1410~1483) ⑳만우(萬雨, 1357~?) ㉑윤계동(尹季童) 등이다.

이영서의 서문은 만우의 시 다음에 위치해 있던 것을 최근(?)에 옹정춘(翁正春, 1553~1626, 明 尙書)의 찬제(讚題) 다음으로 옮겨 개장하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 정인지 안지 안숭선 이보흠 남수문 신석조 유의손 최항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등 11명이 집현전(集賢殿) 출신이다.

지어진 시는 오언고시, 오언배율, 오언절구, 칠언고시, 칠언율시, 칠언절구, 육언절구 등 다양하다. 권수(卷首)의 이인로와 진화의 시는 팔경을 산시청람(山市晴嵐), 연사모종(烟寺暮鍾), 어촌석조(漁村夕照), 원포귀범(遠浦歸帆), 소상야우(瀟湘夜雨), 평사낙안(平沙落雁), 동정추월(洞庭秋月), 강천모설(江天暮雪) 등의 순서대로 나누어서 지었는데, 이인로의 시는 칠언절구이고, 진화의 시는 팔구체의 칠언고시이다. 그런데 세종조 당대의 작가들은 대부분이 팔경의 내용을 따로 나누지 않았고, 다만 강석덕·성삼문·만우 등이 팔경(八景)을 나누어서 시를 지었다.

이렇게 세종대왕의 문치 하에 안평대군의 주도와 집현전 학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은 시·서·화 삼절(三絶)의 기념비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5년 뒤인 1447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제작할 때에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제작에는 19명의 문인이 참여하였고 『몽유도원도』의 제작에는 22명이 참여하였다. 두 작품의 제작에 모두 참여한 인물은 9명이다. 그리고 『몽유도원도』를 그린 인물도 현동자 안견이다.

세종 24년(1442) 8월에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1453)이 1416년 명(明)에서 간행된 《동서당집고첩(東書堂集古帖)》에서 남송 영종(南宋寧宗)의 〈소상팔경시(瀟湘八景詩)〉를 얻자 그 시를 베끼고 그림을 그리게 하여 ‘팔경시권(八景詩卷)’을 만들고, 고려 이인로(李仁老)ㆍ진화(陳澕)의 소상팔경시를 붙인 뒤 이영서(李永瑞, ?~1450)에게 서문을 짓고 시에 뛰어난 여러 문사에게 청하여 오언·육언·칠언시를 짓고 쓰게 하였다.

당시 작시(作詩)한 사람은 조서강(趙瑞康) 강석덕(姜碩德) 유의손(柳義孫) 윤계동(尹季童) 안지(安止) 남수문(南秀文) 천봉(千峯) 이보흠(李甫欽) 신석조(辛碩祖) 성삼문(成三問) 김맹(金孟)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정인지(鄭麟趾) 안숭선(安崇善) 신숙주(申叔舟) 하연(河演) 김종서(金宗瑞)인데, 그중 천봉 만우는 시학(詩學)에 뛰어난 승려였다.

안평대군이 제작한 ‘팔경시권(八景詩卷)’은 《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으로 전하는데, 이영서의 서문에 그 개략이 적혀있다. ‘비해당’은 안평대군의 호이다. 또 박팽년의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에 실린 「제비해당소상팔경시권(題匪懈堂瀟湘八景詩卷)」이란 시제(詩題)를 보면, 이 시권은 후에 판서 윤휘(尹暉, 1571~1644, 本海平) 가(家)에 소장되었고 맨 앞에 명(明) 옹정춘(翁正春)의 예서제자(隸書題字)가 있다고 시주(詩註)가 있다. 현재의 시첩에도 옹정춘의 제자가 있고 이어 아래의 순서로 문사들의 시문이 실려 있다.

이 시첩은 소상팔경도라는 산수도를 전제로 한 화제시첩(畵題詩帖)으로서 조선시대 팔경시(八景詩)와 팔경도(八景圖)의 유행을 이끈 점에서 시학사(詩學史)나 회화사(繪畵史) 그리고 조선초기 서예자료로서 귀중하다. 이 화제시첩에 관하여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검색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면 아래와 같은 전문가(專門家) 용(用) 해제가 나온다. ‘[ ]’은 인문(印文)이다.

“①〈題字〉 “海宇(〇〇)奇觀 翁正春” [翁正春印] [壬辰狀元]
②〈序〉 “宣敎郞集賢殿副修撰知制敎經筵司經 魯山李永瑞錫類謹序” [李永瑞印] [錫類] [平昌世家] [金坡雅詠]
③〈李仁老의 칠언절구 소상팔경시〉
④〈陳澕의 칠언율시 소상팔경시〉
⑤〈칠언시〉 “左贊成晉陽河演淵亮書” [河演] [淵亮] [晉陽世家]
⑥〈오언시〉 “節齋金宗瑞”
⑦〈칠언시〉 “知中樞院事 河東鄭麟趾”
⑧〈오언시〉 “承政院都承旨 銀川趙瑞康”
⑨〈칠언시〉 “承政院右承旨 姜碩德” [碩德] [姜氏子明]
⑩〈칠언시〉 “藝文提學 耽津安止”
⑪〈칠언시〉 “刑曹判書 竹溪安崇善”
⑫〈칠언시〉 “成均注簿 永陽李甫欽”
⑬〈육언시〉 “直集賢殿 鐵城南秀文景質“
⑭〈칠언시〉 “直集賢殿 鷲山辛碩祖”
⑮〈칠언시〉 “承政院左副承旨 柳義孫”
⑯〈칠언시〉 “集賢殿副敎理 㠉梁崔恒” [崔恒] [貞父] [㠉梁世家]
⑰〈칠언시〉 “集賢殿修撰 朴彭年” [朴彭年] [仁叟] [平陽世家]
⑱〈오언시〉 “承文院副敎理 昌城成三問” [成三問謹甫氏] [夏山樵夫]
⑲〈칠언시〉 “集賢修撰 高陽申叔舟” [泛翁] [與造物游]
⑳〈칠언시〉 “鈴平君 尹季童”
㉑〈칠언시〉 “校書校勘 盆城金孟”
㉒〈오언시〉 “千峯釋卍雨” [千峯] [釋卍雨]”

이 시첩에 수록된 인물들의 글씨의 사진을 아래에 공개한다.

①「海宇〇〇奇觀」, 翁正春, [翁正春印] [壬辰狀元], 1618년경, 오른쪽 아래 閔丙奭(1858~1940) 소장인. [사진 제공 – 이양재]
①「海宇〇〇奇觀」, 翁正春, [翁正春印] [壬辰狀元], 1618년경, 오른쪽 아래 閔丙奭(1858~1940) 소장인. [사진 제공 – 이양재]

서첩의 맨 앞에는 명나라 말기의 상서(尙書) 옹정춘(翁正春, 1553~1626)의 찬제가 있다. 성천(成川)의 동명관에는 시랑(侍郞) 옹정춘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고 한다. 옹정춘이 1610年에 예부좌시랑(禮部左侍郎)이 된 것을 보면 동명관에 걸린 편액은 1610년경에 쓴 것 같다. 그는 1621年에 예부상서(禮部尚書)가 되었고, 1626년에 사망한다.

그런데 안견의 『소상팔경도』 화축을 소장하였던 윤휘(尹暉, 1571~1644)는 이 화축에 옹정춘의 찬제를 받아 붙이는데, 그는 1618년과 1620년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아마도 그 시기에 『소상팔경도』를 명나라로 가져가서 옹정춘의 찬제를 받은 것 같다.

윤휘는 광해군이 명나라에 구원군을 보낼 때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을 지지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 직후 파면되었다. 이를 보면 17세기 중반까지도 안견의 『소상팔경도』는 축본의 완전한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필자가 추정하기에는 안견의 『소상팔경도』와 『소상팔경시첩』은 조선중기 이후 18세기 중반에 분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옹정춘의 필적 ‘해우(海宇)’와 ‘기관(奇觀)’은 연결된 완전한 문구(文句)가 아니다. 그 이유는 ‘해우’의 아랫 부분은 찢겨져 나갔으므로 보수(補修)되었고, 보수된 종이 위에 조선말기와 일제시기의 서예가 민병석(閔丙奭, 1858~1940)의 소장인을 찍고 있다. ‘해우’와 ‘기관’ 사이에 2자가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정하고 본다면 찢겨져 나간 공간에 그리고 ‘해우’의 왼쪽 면과 ‘기관’의 오른쪽 면의 훼손된 부분이 연결되지 않는다. 2자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宇)’와 ‘주(宙)’는 한 글자씩 푼다면, 단순한 집‘우(宇)’ 집‘주(宙)’이지만, 한 단어로 풀이한다면 우주(宇宙)는 천지사방(天地四方)과 고금왕래(古今往來)를 말한다. 천지사방은 공간(空間)이며, 고금왕래는 시간(時間)이다. 즉 우주는 공간과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때, 해우(海宇)는 “해내(海內)의 땅”을 의미하니, 바다와 같은 천지사방의 넓은 호수를 의미한다. 기관(奇觀)은 “매우 훌륭한 경치”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해우’와 ‘기관’ 사이에 2자가 결실되었다면 무슨 글자로 ‘〇〇’이 들어 갔을까? 혹시 시간을 뜻하도록 ‘금고(今古)’를 쓴 것은 아닐까? “해우금고기관(海宇今古奇觀)”에 관한 독자분들에게 의견을 구한다.

②〈序〉 “宣敎郞集賢殿副修撰知制敎經筵司經 魯山李永瑞錫類謹序” [李永瑞印] [錫類] [平昌世家] [金坡雅詠] [사진 제공 – 이양재]
②〈序〉 “宣敎郞集賢殿副修撰知制敎經筵司經 魯山李永瑞錫類謹序” [李永瑞印] [錫類] [平昌世家] [金坡雅詠]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영서(李永瑞, ?~1450)는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석류(錫類), 호는 노산(魯山)·희현당(希賢堂), 부친은 판관을 지낸 이종미(李宗美).

그는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4년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 교리를 지냈다. 1446년 수찬에 올라 세종의 명으로 왕비 소헌왕후를 위해 강희안과 함께 금니·은니로 불경을 베껴 쓰고, 표지에 금으로 용을 그렸다. 그 후 주부·병조정랑을 지내고 정인지의 추천으로 사가독서 했다. 1448년 이조정랑을 지내고, 1450년 예조정랑·교리 등을 역임하였으며, 광주목사를 거쳐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안평대군이 이 『소상팔경시첩』을 만들면서 이영서에게 그 전말을 적은 발문을 쓰게 하였다. 그는 소해를 잘 써서 강희안과 함께 나라에서 조성하는 금니사경을 많이 썼으나 지금 전해지는 해서로는 오직 이 발문 한 편만 알려져 있다.

발문은 행의를 띤 세필 해서인데 사경의 필의가 있으며, 필력이 주경(遒勁)하며 결체(結體)도 뛰어나서 송원대의 명품도 이보다 앞서는 작품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이 글씨는 당시 유행하였던 송설체의 서풍이 남아 있는 품격이 매우 높은 작품이다.

③〈李仁老의 칠언절구 소상팔경시〉 [사진 제공 – 이양재]
③〈李仁老의 칠언절구 소상팔경시〉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고려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경원(慶源).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와도헌(臥陶軒).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오(李䫨).

이인로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화엄승통(華嚴僧統)인 요일(寥一)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가 후에 환속하였다. 이인로는 25세 때에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하였고, 1180년(명종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을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여 금나라의 문화예술인과 교유하였다.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복고(腹藁)’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인로는 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에서 이인로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하였으나,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다.

이인로는 『파한집』을 남겼다. 이 시첩에 수록된 글씨는 그의 친필이 아니고, 그가 지은 시를 베껴 적은 사본이다.

④〈陳澕의 칠언율시 소상팔경시〉 [사진 제공 – 이양재]
④〈陳澕의 칠언율시 소상팔경시〉 [사진 제공 – 이양재]

진화(陳澕, 고려 명종조)는 고려시대의 문인이다. 본관은 여양(驪陽), 호(號)는 매호(梅湖). 시(詩)에 능하고 사(詞)에 쓰인 말이 맑고 고와 경지에 달(達)하였으며, 변태 백출(變態百出)한 표현으로 이규보(李奎報)와 더불어 이름을 떨쳤다. 문집 ≪매호유고(梅湖遺稿)≫에 시 몇 편이 현전한다.

〈칠언시〉 “左贊成晉陽河演淵亮書” [河演] [淵亮] [晉陽世家] [사진 제공 – 이양재]
〈칠언시〉 “左贊成晉陽河演淵亮書” [河演] [淵亮] [晉陽世家] [사진 제공 – 이양재]

하연(河演, 1376~1453)은 조선전기에 영의정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 신희(新稀). 하즙(河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하윤원(河允源)이고, 아버지는 부윤 하자종(河自宗)이며, 어머니는 정우(鄭寓)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96년(태조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녹사를 거쳐, 직예문춘추관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동부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태종은 그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하했다 한다. 세종이 즉위하자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조심스럽게 처사하여 신임을 받아 예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423년(세종5)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받았다. 1425년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 뒤 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1437년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판이조사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공세법(貢稅法: 연분9등, 전분6등)을 마련했으며, 1442년에는 각품의 행수법(行守法)을 제정하였다. 1445년에 좌찬성이 되어 70세로서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4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으로 있던 1451년(문종1)에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 간 문안에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진양연고(晉陽聯藁)』가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⑥〈오언시〉 “節齋金宗瑞” [사진 제공 – 이양재]
⑥〈오언시〉 “節齋金宗瑞” [사진 제공 – 이양재]

김종서(金宗瑞, 1382~1453)는 조선 전기에 좌의정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할아버지는 지평 김태영(金台泳)이고, 아버지는 도총제(都摠制) 김추(金錘)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배규(裵規)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해 1415년 상서원직장(尙書院直長)을 지냈다. 1418년(세종즉위년) 11월 감찰로서 강원도의 답험손실(踏驗損實)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1419년 3월 행대감찰(行臺監察)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 상황을 조사했고, 같은 해 10월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1420년 윤정월에 광주판관(廣州判官) 거쳐 봉상판관(奉常判官)으로 있으면서 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賑濟)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1426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 상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1427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해 황해도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1433년 좌대언(左代言)인 김종서에게 이부지선(吏部之選: 이조의 인사권)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함길도 도관찰사가 된 뒤 7~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 지방에서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말을 놓아 기를 수 있는 곳의 수효를 조사해 보고하였다.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했으며, 이듬해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柵堡)를 살펴 정했다. 1449년 8월 달달(達達, 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해 요동 지방이 소란해지자 그에 대처하기 위해 평안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소환되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左贊成兼知春秋館事)로서 『고려사(高麗史)』를 찬진했고, 같은 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년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해 올렸다. 1452년(단종즉위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이듬해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김종서는 육진을 개척한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이자 『고려사』 · 『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무관이고 육진 개척에서 이룩한 공로가 있어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엄정하고 밝은 문인·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다. 그는 고제(古制)와 의례에 조예가 깊어 육진 개척의 일을 마친 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1446년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한다.

또한,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위세가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그러한 위세는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해져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한다. 세종은 권제(權踶)·안지(安止) 등의 『고려사』 개수 작업이 미비한 것을 보고 1449년 김종서·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쳐 쓰기를 명하였다. 그 작업은 2년후에 완성되었는데, 이때 집필과 교열을 맡은 이들은 김종서 외에는 모두 집현전의 관료 출신들이었다. 집현전 출신이 아니면서도 당시 최고 수준의 학자·관료였던 집현전 학사와 그 출신들을 지휘해 『고려사』 편찬의 책임을 맡은 것은 김종서의 학자적 능력을 보여 준다. 1451년 새로 편찬된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편년체의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자, 왕이 즉시 편찬 착수를 명해 이듬해에 『고려사절요』가 이루어진다. 같은 해 『세종실록』의 편찬 때에는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실록에는 따로 지(志)를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한 정인지의 의견을 지지해 『세종실록』에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등의 전문적인 자료가 정리되어 실리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단종이 즉위한 뒤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아래서의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위세는 당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따라서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되었고, 결국 계유정난 때 제거되었다. 그 뒤 1678년(숙종 4)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이 친필은 그가 60세때 쓴 유묵이다.

⑦〈칠언시〉 “知中樞院事 河東鄭麟趾” [사진 제공 – 이양재]
⑦〈칠언시〉 “知中樞院事 河東鄭麟趾” [사진 제공 – 이양재]

정인지(鄭麟趾, 1396~1478)는 조선 전기에 영의정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정익(鄭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을귀(鄭乙貴)이고, 아버지는 석성현감(石城縣監) 증영의정부사(贈領議政府事) 정흥인(鄭興仁)이다. 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정도전(鄭道傳)·권우(權遇)의 문인이다.

1411년(태종11) 생원시에 합격했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제수되었다. 1415년 예문관부교리에 개수(改授)되고, 이어 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한다. 1418년(세종즉위년) 8월 병조좌랑을 거쳐 1421년(세종3)에는 상왕(태종)의 “대임을 맡길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는 요청과 함께 병조정랑에 승직된다. 이후 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한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뽑히면서 응교에 제수되고, 직전(直殿)에 승진되었다. 142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시 직제학에 승진, 곧 세자시강원좌필선을 겸대한 뒤, 다음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또다시 부제학에 승진된다. 1430년 10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면서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다음해에는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한다. 1432년 예문관제학 겸 동지춘추관사(藝文館提學兼同知春秋館事), 1433년 2월 인수부윤(仁壽府尹), 같은 해 6월 예문관제학이 된다. 1434년 4월 이조좌참판에 발탁되고, 같은 해 10월 다시 예문관제학을 거쳐 1435년 6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다음해 9월 부상으로 사직한다. 1437년 세종의 문운 육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기복(起復)되어 예문관제학에 서용된다. 1439년에는 집현전제학이 된 뒤 곧 형조참판으로 옮겼다가 1440년 5월 정연(鄭淵)의 천거를 받아 형조판서에 발탁되고, 같은 해 11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한다. 이듬해 지중추원사로 당시에 찬·반의 논의가 격렬하던 공법(貢法)을 극력 주장, 그 실시를 확정하는 데 공헌한다. 이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의 제조(提調) 및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파견되어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전품(田品)을 분정(分定)하는 등 내·외의 전제사를 주관한다.

1445년 1월 우참찬이 되고, 그 해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한다. 1446년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세종의 듯을 받들어 다른 집현전 학자들과 훈민정음 창제에 협찬하고 훈민정음 서문을 찬진한다. 같은 해 예조판서를 거쳐 1447년에는 이조판서 겸 지춘추관사가 되어 『태조실록』을 증수(增修)하는 데 참여한다. 한편으로는 전라도에 파견되어 전품을 다시 상정한다. 1449년 공조판서를 거쳐 1450년(문종즉위년) 좌참찬이 되고, 1451년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고려사』를 개찬(改撰)한다. 그리고 이듬해 김종서 등과 함께 다시 『고려사절요』를 편찬한다. 1452년(단종즉위년) 병조판서가 되어 병정(兵政)을 관장하면서 단종을 보필했으나, 그의 강직함을 꺼려한 황보인(皇甫仁)·김종서의 배척을 받아 품계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으나 관직은 한직인 판중추원사로 체직(遞職)되었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주도한 계유정변의 성공과 함께 정변에 협찬한 공로와 수양대군의 신임 및 그의 인망으로 특별히 좌의정에 발탁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되면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군된다. 1452년부터 1454년에 걸쳐 편찬된 『세종실록』을 총감수(總監修)한다. 1455년(세조1) 세조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부사에 승진된다. 그리고 세자사(世子師)를 예겸(例兼)한 뒤 세조 즉위에 끼친 공로로 다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된다. 1458년 공신연(功臣宴)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논죄되면서 고신(告身)이 몰수되었으나, 곧 고신을 환급받고 하동부원군에 제수되었다. 1459년 취중에 직간한 일이 국왕에게 무례를 범했다고 논죄되면서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종편(從便)되었으나 그 해에 다시 소환되어 고신을 환급받고, 그 이듬해 하동부원군에 복직된다. 1465년 나이 70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 받지 못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다음해 관제 개혁으로 인한 부원군호의 개칭과 함께 하동군(河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1468년(예종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로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1470년(성종1) 부원군호의 복구와 함께 하동부원군에 개봉되고 경연영사(經筵領事)를 겸대하였다. 같은 해 1467년(세조13)에 설치된 원상제에 따라 원상에 임명된 후 국왕의 측근에서 국정의 논의와 처결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471년 성종 즉위에 끼친 공로로 또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78년 성종의 호학 및 당시의 문운 융성과 함께 연덕(年德)을 구비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오갱(三老五更: 王師)으로 봉해 문풍을 더한층 진작시키자는 논의에 힘입어 삼로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진봉식 거행 직전에 대간의 “한미한 가문에서 기신했으나 식화(殖貨)에 전념하여 치부했으니 불가하다”라는 반대가 있었다. 비록 한명회(韓明澮) 등의 대신이 “정인지의 식화는 장리(長利)에 불과했으니 큰 흠이 될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 실시를 주장했지만, 결국은 진봉되지 못하였다. 같은 해에 하동부원군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인지는 유학과 전고(典故)에 밝아 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비록 큰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세종∼문종대에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문한(文翰)을 관장하고 역사·천문·역법·아악을 정리했다. 이와 아울러 한글창제에도 참여하고 문풍 육성과 제도 정비에 기여했다. 단종∼성종초에는 학덕을 구비한 원로대신으로서의 풍도를 지킴으로써 빈번한 정변과 어린 국왕의 즉위로 인한 경직되고 혼란된 정치 분위기와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저서로 『학역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⑧〈오언시〉 “承政院都承旨 銀川趙瑞康” [사진 제공 – 이양재]
⑧〈오언시〉 “承政院都承旨 銀川趙瑞康”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서강(趙瑞康, 1394~1444)은 조선초기에 이조참판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자경(子敬), 호는 경은(耕隱). 보리공신부흥군(輔理功臣復興君) 조득주(趙得珠)의 4대손으로, 조하(趙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세경(趙世卿)이고, 아버지는 개국공신 참찬문하부사 조반(趙胖)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이양오(李養吾)의 딸이다.

1414년(태종14)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식년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한 뒤 감찰에 등용되었으나, 1417년 감찰들간에 불화가 생겨 파직된다. 세종대에 장령을 역임하고, 1431년(세종13) 의정부사인으로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의를 거쳐 1433년 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우사간을 거쳐 1436년 좌사간에 임명되었다. 1437년 10월 첨지중추원사, 12월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438년 형조참의, 1439년 우승지, 1441년 도승지를 거쳐, 1443년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⑨〈칠언시〉 “承政院右承旨 姜碩德” [碩德] [姜氏子明] [사진 제공 – 이양재]
⑨〈칠언시〉 “承政院右承旨 姜碩德” [碩德] [姜氏子明] [사진 제공 – 이양재]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은 조선초기에 대사헌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아버지는 동북면도순문사 강회백(姜淮伯)이며, 심온(沈溫)의 사위이고, 아들이 강희안(姜希顏)과 강희맹(姜希孟)이다.

태종 초에 음사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었으며, 공조좌랑으로 재직하던 1416년(태종16)에 천추사(千秋使)가 가지고 간 무역품 중에 공조가 납품한 은이 가짜로 판명되어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한다. 세종초에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인수부소윤(仁壽府少尹)에 승진되어 집의를 역임하고, 1442년(세종22)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 동부승지 등을 거쳐 이듬해 우부승지가 된다. 그 뒤 좌부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44년에 호조참판으로 승진, 이듬해에 대사헌, 1446년에는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어 세종비 소헌왕후의 국상에 참여한다. 1447년 개성부유수로 출사했다가 1449년 중추원사로 입조하고, 1450년(문종즉위년) 동지중추원사, 이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1455년(세조1)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면서 가자(加資)된다. 일생 동안 학문에 힘쓰고 청렴강개하였으며,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대민(戴敏)이다. 저서로는 『완역재집(玩易齋集)』이 있다.

⑩ 〈칠언시〉 “藝文提學 耽津安止” [사진 제공 – 이양재]
⑩ 〈칠언시〉 “藝文提學 耽津安止” [사진 제공 – 이양재]

안지(安止, 1377~1464)는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자행(子行), 호는 고은(皐隱). 찬성 안사종(安士宗)의 아들이고, 형은 안기(安起)이고, 동생은 안일(安逸)이다.

안지는 조선시대인 1414년(태종14)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에 임명되었다가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집현전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냈고, 이조참판·공조판서가 된다. 1449년(세종31)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 과정에서 권제(權踶)와 함께 마음대로 내용을 줄이고 누락시킨 것이 문제가 되어 고신(告身)을 빼앗겼다가, 1452년(문종2)에 고신을 돌려받고 1455년(단종3)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된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봉조청(奉朝請)이 되었고, 김제시 용지면 안촌(安村)에 은거 중이던 형 안기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안지는 문장을 잘 짓고 해서(楷書)에 능하여서 세종이 태종을 위하여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베끼도록 명하였다. 1445년(세종27) 공조참판으로 권제(權踶)·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고, 1449년(세종31) 『고려사』 개찬과정에서 권제(權踶) 등과 함께 참여했다.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고은선생문집』이 있다.

⑪〈칠언시〉 “刑曹判書 竹溪安崇善” [사진 제공 – 이양재]
⑪〈칠언시〉 “刑曹判書 竹溪安崇善” [사진 제공 – 이양재]

안숭선(安崇善, 1392~1452)은 조선초기에 좌참찬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중지(仲止), 호는 옹재(雍齋). 고조부는 도첨의찬성사 안축(安軸)으로, 증조부는 판문하부사 안종원(安宗源)이고, 할아버지는 조선의 개국공신 안경공(安景恭)이다. 아버지는 판중추원사 안순(安純)이고, 어머니는 정추(鄭樞)의 딸이다. 부인은 송씨로 판전농시사 송천우(宋千祐)의 딸이다.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급제하고, 1415년 음보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임명되었으며, 1418년 사헌감찰에 이르렀다. 1420년(세종 2)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이조전랑, 1426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사헌부에서 예조참판 이명덕(李明德)을 몇 차례에 걸쳐 탄핵하는데 앞장섰다. 이 일로 세종의 뜻에 거슬려 좌천되었다가 곧 집의(執義)에 임명된다. 1429년 대호군으로 승진해 함녕군(諴寧君) 이인[李䄄, 景寧君)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다. 이 사행은 명나라에서 과다하게 요구하는 금은(金銀)의 양을 감면하기 위한 것인데,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귀국해 곧 동부대언(同副代言)에 발탁되고, 1433년에 지신사(知申事)가 된다. 그 뒤 1437년 3월 대사헌으로 승진할 때까지 승지로 있었다.

1433년 파저강(婆猪江)의 야인 정벌 때 세종의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세종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그 뒤 조정의 인사 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사관의 평에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 맹사성(孟思誠)은 착하기는 하지만 결단성이 없고 이조판서 신개(申槪)는 그저 남의 의견을 따르기만 해, 모든 인사 행정을 안숭선이 좌우하였다”라고 한 것은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인사 행정에 승지의 법제외적 권한이 크게 작용하자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비판은 자연히 안숭선 개인에게 집중되며, 나아가 승지의 인사 행정과 관계되는 업무를 규제하려는 방향으로까지 전개된다. 결국 1437년 3월 안숭선은 대사헌으로 전보되고, 5개월 후에는 승지들의 전주권(銓注權)을 크게 제약하는 조처가 취해진다. 1443년 형조판서, 1444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중추원사·집현전대제학, 1445년 병조판서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 수찬에 참여하였고, 1448년 병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이 때 정실 인사가 문제되어 진천현에 부처되었다가 풀려 나왔다. 1450년(문종즉위년) 참찬을 거쳐, 좌참찬이 되고 이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근재집(謹齋集)』 부록에 유고가 전한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⑫〈칠언시〉 “成均注簿 永陽李甫欽” [사진 제공 – 이양재]
⑫〈칠언시〉 “成均注簿 永陽李甫欽” [사진 제공 – 이양재]

이보흠(李甫欽, 1398~1457)은 조선초기에 순흥도호부사를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시호는 충장(忠壯). 아버지는 부사직을 지낸 이현실(李玄實), 어머니는 보승낭장 장표(張彪)의 딸 공인 인동장씨(仁同張氏), 할아버지는 판도판서 이석지(李釋之), 증조할아버지는 경덕재생 이흡(李洽)이다. 부인은 증 정부인 영천최씨(永川崔氏)이다.

1429년(세종11)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조정에 사창법 시행을 건의하기도 했다. 1452년(문종2)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고, 1454년(단종2)에는 기주관으로서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7년(세조3) 순흥도호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순흥도호부에는 금성대군이 유배와 있었다. 금성대군은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 대신 단종을 지지했다. 이에 1455년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직후 탄핵을 받아 가산을 몰수하고 순흥도호부로 유배했다. 그런 1456년(세조2)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死六臣)이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단종의 복위를 추진하다 발각되었고, 이 일로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군으로 유배된다. 금성대군은 유배지에서 새로 부임한 순흥도호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준비한다. 이에 고을의 여러 인사와 결탁하고, 이보흠을 불러 격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들은 순흥도호부의 군사와 남쪽 여러 고을에서 호응할 자들과 함께 단종을 모셔오고, 조령과 죽령의 두 길을 막고서 복위할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관노 급창(及唱)이 모의를 듣고 한양으로 올라가 고변함으로써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처음에는 장(杖) 백 대에 유(流) 삼천리의 형벌이 내려져 박천군으로 유배되었으며, 신하들의 지속적인 처형 요청에 따라 세조는 의금부도사 최계남(崔季男)을 보내 교살하였다. 1738년(영조 14) 복권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에는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증시하였으며,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장릉 배식단에 배향할 충신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행적을 엮은 5권 2책의 『대전실기(大田實記)』가 전한다.

⑬〈육언시〉 “直集賢殿 鐵城南秀文景質“ [사진 제공 – 이양재]
⑬〈육언시〉 “直集賢殿 鐵城南秀文景質“ [사진 제공 – 이양재]

남수문(南秀文, 1408~1442)은 조선초기에 집현전직제학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경질(景質)·경소(景素), 호는 경재(敬齋). 할아버지는 공안부윤(恭安府尹) 남기(南奇)이고, 아버지는 병조참판 남금(南琴), 어머니는 부령(副令) 이춘명(李春明)의 딸이다.

1426년(세종8)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의 정자(正字)가 되었다. 권채(權採)·신석조(辛碩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의 명을 받고 학문에 정진했으며. 1433년에는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서 김말(金末)과 함께 세종의 여러 대군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435년 간행한 갑인자 초인본(初印本)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에도 참여해, 윤회(尹淮)·권채·정인지(鄭麟趾) 등과 『통감』을 주해하기도 했다. 1436년 중시문과에 장원하고 집현전응교를 제수받았다. 1437년 집현전에서 편찬한 『장감박의(將鑑博義)』의 발문을 썼고, 이듬해 한유(韓愈)의 문장에 대한 주석서의 발문도 썼다. 그 후 예문관응교·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거쳐, 1442년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지제교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많은 글을 지었으나 대다수의 글은 흩어져 없어졌으나, 1442년흥천사(興天寺)를 짓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 때 지은 설선문(說禪文)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전하고, 몇 편의 전(箋)과 기·묘지 등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한다. 남수문은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문원(文苑)을 떠나지 않고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 윤회·권채·신석조 등과 시문을 겨루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남수문의 문장이 제일로 쳤다. 특히 서거정(徐居正)은 그를 극찬하여, “태산백두의 자질에 소강절의 학문으로, 그 조예와 실천은 옛날의 대 현인에 양보하지 않는다(山斗之材, 康節之學, 造詣實踐, 不讓古大賢)”라고 하였고, 이자(李耔)도 “남수문은 뛰어난 군자로서, 그 글을 말하면 성당의 수준에 이르러 만당을 넘어섰고, 그 도를 말한다면 여동래와 장남헌이 그보다 조금 낫지만 황간이나 채원정이 그에 미치지는 못한다. 그에게 몇 해가 더 허락되었다면 그 나감을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南敬齋, 賢君子也. 語文, 盛唐而非晩, 語道, 東萊南軒稍右, 而黃蔡不及也. 倘假數年, 其進不可量矣.)”라고 평가하였다. 고향인 옥천(沃川) 호계사(虎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재유고(敬齋遺稿)』가 있다.

⑭〈칠언시〉 “直集賢殿 鷲山辛碩祖” [사진 제공 – 이양재]
⑭〈칠언시〉 “直集賢殿 鷲山辛碩祖”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석조(辛碩祖, 1407~1459)는 조선초기에 우사간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영산(靈山). 초명 신석견(辛石堅). 자는 찬지(贊之), 호는 연빙당(淵氷堂).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마절제사 신유정(辛有定)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신인손(辛仁孫)이다.

1426년(세종8) 생원시에 일등 급제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저작랑에 제수되었으며, 곧바로 권채(權綵)·남수문(南秀文)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된다. 이후 직제학·우사간·부제학 등을 지낸다. 1452년(문종2)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시찬(始撰)하며, 이듬해 이조참의가 된다. 1456년(세조2) 공조참판 때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조참판·대사헌·중추원사·경기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459년 한성부윤을 거쳐 개성유수로 있을 때 사망했다.

성품이 온순, 근엄하며 학문에 뛰어나고 문장이 능하였으며, 『의방유취(醫方類聚)』·『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도 참여했다. 시호는 문희(文僖). 저서로는 『연빙당집(淵氷堂集)』이 있다.

⑮〈칠언시〉 “承政院左副承旨 柳義孫” [사진 제공 – 이양재]
⑮〈칠언시〉 “承政院左副承旨 柳義孫” [사진 제공 – 이양재]

유의손(柳義孫, 1398~1450)은 조선초기에 예조참판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효숙(孝叔), 호는 회헌(檜軒) 또는 농암(聾巖). 유습(柳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극서(柳克恕)이다. 아버지는 직제학 유빈(柳濱)이며, 어머니는 윤방익(尹邦益)의 딸이다.

1419년(세종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6년(세종8)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을 거쳐, 감찰·수찬을 역임하였다. 143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고 직제학에 올랐다. 동부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학문에만 능할 뿐, 과단성이 결여되어 사무처리는 좌부승지인 황수신(黃守身)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한다. 1447년 이조참판 역임 시 동반직(東班職)에 있던 우부승지 김유양(金有讓)의 아들을 잘못 서반직(西班職)에 옮겨놓은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예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그때 상을 당함으로써 몸이 쇠약해져 관직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세종이 고기를 하사하여 보신을 시켰으나 끝내 병으로 사직한다. 문장에 능하였고, 저서로는 『회헌일고』가 있다.

⑯〈칠언시〉 “集賢殿副敎理 㠉梁崔恒” [崔恒] [貞父] [㠉梁世家] [사진 제공 – 이양재]
⑯〈칠언시〉 “集賢殿副敎理 㠉梁崔恒” [崔恒] [貞父] [㠉梁世家] [사진 제공 – 이양재]

최항(崔恒, 1409~1474)은 조선초기에 영의정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정보(貞父), 호는 태허정(太虛亭)·동량(㠉梁). 최충(崔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윤문(崔潤文)이고, 아버지는 증영의정 최사유(崔士柔)이다. 어머니는 오섭충(吳燮忠)의 딸이다. 서거정(徐居正)의 자부(姉夫)이다.

1434년(세종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집현전부수찬이 된다. 이 해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하며, 이어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과 같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다. 1444년 집현전교리로서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하는 일에 참여하며, 같은 해 박팽년·신숙주·이개(李塏) 등과 함께 『운회(韻會)』를 한글로 번역한다. 1445년 집현전응교로서 『용비어천가』를 짓는 일에 참여하고, 이어 『동국정운』·『훈민정음해례』 등을 찬진한다. 1447년 문과 중시에 5등으로 급제, 집현전직제학 겸 세자우보덕에 임명된다. 당시 세종은 세자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하는데 이 때 서연관(書筵官)으로서 보좌한다. 1450년(문종즉위년)에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같은 해 언관(言官)으로서 활동한다. 이 해 7월 다시 집현전으로 돌아와 부제학이 되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주석하는 일을 맡으며, 『고려사』의 열전을 집필한다. 1452년 2월 『세종실록』 편찬 때는 수찬관으로 참여한다. 이어 동부승지가 되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협찬한 공이 있다 하여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1등에 녹훈되고, 도승지가 된다. 이 해 12월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진다. 1454년 10월에는 「공신연곡(功臣宴曲)」 4장(章)을 지어 올렸으며, 1455년 정난공신 1등의 교서가 내려진다. 그 해 2월 대사헌이 되고, 6월에 세조가 즉위하면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녹훈된다. 이어 7월에 서연의 우부빈객이 되고, 그 뒤 호조참판·이조참판·형조판서·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한다. 세조는 즉위한 직후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는데 이 때 그는 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 등과 함께 육전상정관(六典詳定官)으로 임명되고, 1458년(세조 4)에 『신육전(新六典)』의 초안을 작성하여 올린다. 그 해 부친상을 당했으나 왕명으로 기복(起復)되어 다음 해 중추원사세자빈객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460년 이조판서가 된다. 1461년 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한글로 번역, 간행한다. 1463년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1464년 9월 왕명으로 『병장설주(兵將說註)』를 산정(刪定)한다. 이듬해 좌참찬 겸 세자이사(左參贊兼世子貳師)가 되고, 사서오경의 구결(口訣)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한다. 1466년에 판병조사로 임명되자 그는 군사 관계는 적임이 아니라며 간절히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는다. 1467년 4월 좌찬성, 5월 우의정, 7월 좌의정, 9월 영의정이 된다. 1468년(예종즉위년) 9월 신숙주·한명회(韓明澮)·김국광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된다. 1469년 경국대전상정소 제조(提調)를 겸하여 『경국대전』을 찬진하고, 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수한다. 1470년(성종1) 부원군에 봉해지고, 『역대제왕후비명감(歷代帝王后妃明鑑)』을 찬진한다. 1471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녹훈되고 다시 좌의정이 되어 경연춘추관사를 겸하면서 『세종실록』·『예종실록』을 찬진한다. 그 뒤 1474년 4월에 사망한다.

그는 18년 동안 집현전 관원으로 있으면서 경연관·지제교(知製敎)로서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의례·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고제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서거정이 찬한 비명, 『필원잡기(筆苑雜記)』, 김육(金堉)이 지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의 것과 『성종실록』에 있는 그의 졸기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에서는 그의 성품이 겸공(謙恭)·간정(簡靜)·단개(端介)·무화(無華)·공정(公正)하고 정관(正冠)·위좌(危坐)하며, 침착 신중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청백하여 재산을 탐하지 않으며, 40년 간 벼슬했으나 한 번도 탄핵을 받지 않았다고 극구 칭송하고 있다. 반면에 후자에는 겸근과언(謙謹寡言)과 정관·위좌하였다고 한 것은 거의 비슷하나, 일을 처리하는 데 결단성이 없고, 정승자리에 있었으나 한번도 인사(人事)를 건의하는 일이 없이 우물쭈물 넘겼으며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했다고 못마땅하게 평하고 있다. 저서로 『태허정집』 ·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⑰〈칠언시〉 “集賢殿修撰 朴彭年” [朴彭年] [仁叟] [平陽世家] [사진 제공 – 이양재]
⑰〈칠언시〉 “集賢殿修撰 朴彭年” [朴彭年] [仁叟] [平陽世家] [사진 제공 – 이양재]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은 조선초기에 형조참판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회덕(懷德,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지역) 출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원상(朴元象), 할아버지는 박안생(朴安生)이다. 아버지는 박중림(朴仲林),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부인 낙안김씨(樂安金氏)는 김미(金彌)의 딸이다. 동생은 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 박대년(朴大年), 박영년(朴永年)이다. 아들로는 박헌(朴憲)·박순(朴珣)·박분(朴奮)이 있다.

1432년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4년 알성시(謁聖試)에 입격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를 비롯해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 등 주로 집현전에서 근무한다. 1438년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1447년 문과 중시(重試)에 응시해서 다시 급제한다. 문종 즉위후에는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고, 이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낸다. 단종이 즉위한 1452년 집현전 부제학에 제수되고, 이후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을 거쳐 우승지와 좌승지에 차례대로 임명된다. 『세종대왕실록(世宗大王實錄)』 편찬에도 참여하며, 1454년 형조참판에 임명된다. 세조 즉위후에는 충청도관찰사(忠淸道 觀察使)가 되었다가 예문제학(藝文提學), 형조참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제수된다. 1456년(세조2) 정창손(鄭昌孫)의 사위 김질(金礩)이 박팽년·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이 단종 복위를 시도하였다고 고발하자, 박팽년은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어 공초(供招)를 받다가 심한 고문 때문에 옥중에서 사망한다. 아버지 박중림은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고, 동생 박대년과 세 아들 박헌·박순·박분 모두 처형된다. 다만, 손자 박비(朴斐)는 유복자(遺腹子)였기 때문에 처형을 면하여. 단종 복위를 주도하였던 6명 중 박팽년만이 후손을 남겼다.

박팽년은 문재(文才)가 뛰어 났으나, 역모로 몰려 가문 전체가 몰락했기 때문에 개인 저술 등이 후대에 전해지지는 않으므로, 이 시첩에 들어있는 그의 자필 시문은 더욱 더 귀하다. 박팽년의 공초 기록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17명의 명단이 제시되어 있지만, 누가 거사를 주도하였는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후일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의 순서로 단종 복위를 주도한 6명의 신하가 수록되어 있어, 당시 거사에서 박팽년과 성삼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본다. 「육신전」과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등의 기록에는 박팽년이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세조에 보냈던 장계에 ‘신(臣)’이란 글자를 쓰지 않았다는 내용과 세조를 나리로 지칭하였다는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박팽년 등에 대한 평가는 세조 재위이후 줄곧 역모였다. 성종대에도 박팽년의 행위는 반역으로 설명된다. 남효온은 1478년(성종9)에 올렸던 상소문에서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을 건의한다. 이는 세조 즉위와 당시 공신들의 명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남효온의 상소는 조정에서 논란이 된다. 중종 재위기부터는 박팽년 등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제기된다. 1517년(중종12) 정순붕(鄭順朋)은 “박팽년과 성삼문 등이 단종을 복위하고자 시도한 일은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들의 절의는 처벌할 수 없다”라고 하고 이청(李淸)은 “이들이 대의(大義)를 따랐으니 난신(亂臣)으로 지칭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중종 재위기부터는 사육신의 단종에 대한 절의가 강조되면서 이들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과정이 기록되지만, 박팽년 등에 대한 평가나 배향 문제가 조정에서 논란이 된다. 선조대에도 「육신전」의 서술 내용이 문제가 된다. 이후 1691년(숙종17) 숙종은 관원을 파견해 단종과 여섯 신하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도록 조치하는데, 처음에는 대신들의 의견을 묻자는 견해가 있어 바로 시행하지는 못하지만, 12월 숙종은 박팽년 등의 관작을 회복하고 사당에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관작이 회복된 이후 1698년 증직(贈職) 및 증시(贈諡)가 되었다. 1709년에는 경상도 의성(義城) 금학산(金鶴山) 밑에 유생들이 성삼문의 사우(祠宇)를 짓고 박팽년 등 5명의 신하를 향사(享祀)하였다. 향사를 주도한 사람들이 사액(賜額)을 요청하자 숙종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1758년(영조34)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다시 증직되고, 1791년(정조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또 장릉의 정단(正壇)에 배식된 32명 중 한 사람이 된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⑱〈오언시〉 “承文院副敎理 昌城成三問” [成三問謹甫氏] [夏山樵夫] [사진 제공 – 이양재]
⑱〈오언시〉 “承文院副敎理 昌城成三問” [成三問謹甫氏] [夏山樵夫] [사진 제공 – 이양재]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조선초기에 예조참의 등을 지냈던 문신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개성유후(開城留后)를 지낸 성석용(成石瑢),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성달생(成達生),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한 성승(成勝)이다.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는 현감을 지낸 박첨(朴襜)의 딸이다. 부인 연안김씨(延安金氏)는 김잉(金仍)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식년 생원시에 합격한다. 143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1447년 문과 중시(重試)에 다시 급제한다. 성균관주부(成均館注簿)를 시작으로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과 직집현전(直集賢殿) 등의 관직에 임명된다. 성균관 주부 시절부터 이미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요동에 파견되어 운서(韻書)에 관한 내용을 조사해 오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후 신숙주와 함께 문자·음운 등에 관련된 업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관련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갖추게 된다. 세종때 성삼문과 신숙주 등을 요동에 파견한 것은 명나라의 황찬(黃瓚)을 만나 어음(語音)과 자훈(字訓) 등을 질정(質正)하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황찬은 명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며, 요동에 귀양 와 있었다. 이후 성삼문은 『동국정운(東國正韻)』, 『홍무정운(洪武正韻)』, 『사성통고(四聲通考)』 등을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해 성과를 낸다.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으로 있을 때는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수행한다. 직집현전(直集賢殿)을 거쳐 단종대에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병요(兵要)』를 수찬한다. 1453년(단종1) 사간원우사간(司諫院右司諫)에 임명되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공적을 인정받아 수충정난공신(輸忠靖難功臣)에 녹훈된다. 성삼문은 권준(權蹲)과 함께 공신 녹훈을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한다. 1454년 집현전부제학에 제수되고, 얼마 후 예조참의에 제수되며, 세조 즉위후에는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임명된다. 1455년(세조1)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세조2)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있을 때, 정창손의 사위였던 김질이 세조를 인견하고 성삼문과 박팽년을 비롯하여 이개·하위지·유성·유응부 등이 신숙주·권람·한명회 등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도모하였다고 고변(告變)한다. 당시 김질이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이 성삼문이다. 세조는 숙위하는 군사들과 승지들을 불러 모으고 성삼문을 제압한 뒤 직접 심문하였다. 취조를 통해 성삼문이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박쟁(朴崝) 등이 함께 공모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성삼문은 의금부에 하옥되어 고문을 받다가 능지처사(凌遲處死) 된다. 시호는 충문(忠文)이고,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

성삼문 등은 세조대 이후에는 역모를 도모한 인물로 평가된다. 1478년(성종 9) 남효온(南孝溫)은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에 대한 상소문을 올렸고, 남효온은 「육신전(六臣傳)」에서 성삼문과 박팽년이 단종 복위를 주도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단종 복위와 관련된 6명의 신하에 대한 재평가 작업도 본격화되었다. 위의 박팽년을 설명하면서 언급하였듯이 중종대와 선조대의 논란을 거쳐 1691년(숙종 17) 숙종은 특명을 내려 단종과 여섯 신하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결국 성삼문을 비롯한 여섯 신하의 관작은 회복되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세조가 성삼문에 대해 "오늘날 난신(亂臣)이나, 후세(後世)에는 충신(忠臣)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⑲〈칠언시〉 “集賢修撰 高陽申叔舟” [泛翁] [與造物游] [사진 제공 – 이양재]
⑲〈칠언시〉 “集賢修撰 高陽申叔舟” [泛翁] [與造物游]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조선처기에 좌의정을 역임한 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신덕린(申德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신포시(申包翅)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신장(申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1438년(세종20)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진사가 된다.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이 되고,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한다. 1442년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가하여 공적이 많았다.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열세 차례나 내왕하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신숙주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 1447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가 되고, 1451년(문종1)에는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 등이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해 장령(掌令)·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에 오른다. 1452년(문종2)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동행한다. 145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오른 뒤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쳤고, 같은 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나, 수충협책정난공신 2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1455년 수양대군이 즉위한 뒤에는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예문관대제학에 초배(超拜)되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해 진다. 이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고명(誥命)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온 공으로 토전(土田)·노비·안마(鞍馬)·의복을 함께 하사받는다. 1456년(세조2)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을 전장하고, 곧이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고, 우찬성이 되어서는 대사성까지 맡는다. 1457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무렵 동북의 야인(野人)의 잦은 침입이 있자 강경론을 폈다. 1460년에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에 출정하는데, 군사를 몇 개 부대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펼쳐 야인의 소굴을 크게 소탕한다. 1462년에 영의정부사가 되고, 1464년에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사직하였으나, 1467년에 다시 예조를 겸판한다. 이듬해 예종이 즉위하자 유명(遺命)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원상(院相)으로 서무를 참결(參決) 한다. 같은 해 이른바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는다. 이듬해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하여 성종의 즉위하도록하여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된다. 노병(老病)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지만 허락을 얻지 못하고, 1472년(성종3)에는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다. 이어 세조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그의 집에서 총관한다. 그리고 세조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의 개찬·산정(刪定)을 위임받아 완성한다. 신숙주는 여러 나라의 음운(音韻)에 밝아, 여러 역서(譯書)를 편찬하였으며, 또 일본·여진의 산천 요해(要害)를 표시한 지도를 만든다. 그리고 『해동제국기』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異同), 사선(私船) 내왕의 절차, 우리측 관궤(館餽)의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하여 일본과의 교빙(交聘)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세조는 일찍이 “당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할 정도로 그는 세조와의 관계가 깊었다. 당대에 신숙주의 정치적·학문적 영향력은 컸다. 신숙주는 ‘항상 대체(大體)를 생각하고 소절(小節)에는 구애되지 않았다’, ‘큰일에 처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강하(江河)를 자르듯 하였다’라는 평가가 있다. 과거시험의 시관을 열세 차례나 하여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고, 예조판서를 십 수 년, 병조판서를 여러 해 동안 각각 겸임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렇게 세조의 특별한 배려는 외교·국방면에서 그의 탁월한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저술 대부분이 이에 관계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대교린의 외교문서는 거의 신숙주의 윤색을 거쳤다. 신숙주가 없이 세조의 치세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송설체에 뛰어났다. 현전하는 필적으로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찬문(贊文)과 진당풍(晉唐風)의 고아한 느낌을 주는 해서체의 「화명사예겸시고(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있고, 이 『소상팔경시첩』의 시문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보한재집(保閑齋集)』이 전한다.

⑳〈칠언시〉 “鈴平君 尹季童” [사진 제공 – 이양재]
⑳〈칠언시〉 “鈴平君 尹季童” [사진 제공 – 이양재]

윤계동(尹季童, 여말~선초)은 조선초기의 영평군(鈴平君)이다. 본관은 파평. 윤향(尹向, 1374~1418)의 아들이다. 영평군은 태종(太宗, 재위 1401~1422)과 신빈신씨(信嬪辛氏, ?~1435) 사이에서 태어난 정신옹주(貞愼翁主, 1408~1452)의 부군(夫君)이다.

1425년 10월에 그의 무리가 나라의 새매(鷂)를 응방제조(鷹房提調)의 집에서 훔치는 물의를 빚어 직첩을 거두고 풍양(豐壤)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3월에 해배된다. 1455년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된다.

㉑〈칠언시〉 “校書校勘 盆城金孟” [사진 제공 – 이양재]
㉑〈칠언시〉 “校書校勘 盆城金孟” [사진 제공 – 이양재]

김맹(金孟, 1410~1483)은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진(子進). 김항(金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서(金湑)이고, 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윤 이간(李暕)의 딸이다.

생원시를 거쳐, 1441년(세종 2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감찰·김천도찰방·예조좌랑이 된다. 1451년(문종1) 평안도도사를 거쳐 고령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1) 좌랑으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고, 곧 의금부진무를 거쳐 오위도총부경력을 역임한다. 성종초에 집의에 올랐다가 퇴직한다. 성품이 단아, 청렴하고 명예와 이익에 초연하였으며, 부자가 모두 문명을 떨쳤다.

㉒〈오언시〉 “千峯釋卍雨” [千峯] [釋卍雨]” [사진 제공 – 이양재]
㉒〈오언시〉 “千峯釋卍雨” [千峯] [釋卍雨]” [사진 제공 – 이양재]

만우(萬雨, 1357~1447 이후)는 고려 말~조선초기에 활동한 승려이자 서예가이다. 호는 천봉(千峰)·만우(卍雨).

『동문선』에 이색(李穡)이 만우에게 천봉이라 호를 붙인 내력을 적은 「천봉설(千峰說)」이 실려 있다. 구곡(龜谷) 각운(覺雲)의 사자(嗣子)로, 환암(幻庵) 혼수(混脩)의 제자이며 전북 남원 용성 출신이다. 어려서 경전에 통달했으며 시를 잘하여 이색·이숭인(李崇仁) 등과 어울렸으며, 집현전 학사들과도 교유하였다. 구곡·환암·한산자(韓山子) 모두가 아끼는 제자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로 뛰어났다. 회암사에서 90여세에 입적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조선에 사절로 온 일본 승려 분케이(文溪)에게 지어준 시 한 수와 「산중음(山中吟)」이 전한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에 “불교·유교의 사표가 되어 많은 후학을 가르쳐 모두가 존경했다. 성임(成任)·성간(成侃) 등이 회암사에서 공부할 때 그를 만났는데 이미 90세가 넘었으나 용모가 맑고 기력이 강건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글씨를 잘 써서 이 『소상팔경시첩』에 오언절구 10수로 화제를 짓고 썼고, 이어서 1447년에 제작된 『몽유도원도첩』에도 찬시를 썼다. 이 시첩의 오언절구 10수를 보면, 만우는 해서에 능하여 자획이 단정하고 사경풍(寫經風)의 면모를 보여 준다. 당 시대에 유행하던 송설체와는 다른 독자적인 서풍를 구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안평대군이 엮은 『소상팔경시첩』은 국보로 승격하여야 할 국가유산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안 모 교수의 허상 논리에 의하여 국립중앙박묽한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견의 『소상팔경시첩』와 함께 묶여 연구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안견의 『소상팔경도』는 『몽유도원도』의 선행 작품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안견의 작품으로 전하는 『소상팔경도』와 『사시팔경도』가 현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소상팔경도』는 견본수묵으로 크기가 각 폭 31.1×35.4cm이다.

소상팔경은 중국에 실재하는 명소를 그린 그림으로, 전통적으로 ①산시청람(山市晴嵐) ②연사모종(煙寺暮鍾) ③소상야우(瀟湘夜雨) ④동정추월(洞庭秋月) ⑤어촌낙조(漁村落照) ⑥원포귀범(遠浦歸帆) ⑦평사낙안(平沙落雁) ⑧강천모설(江天暮雪)의 여덟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호남성 동정호(洞庭湖) 부근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장면을 그려 낸 것으로, 현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상경(理想景)을 여기로 본 것이다.

필자는 “『행화구욕도』와 이인로를 통해 본 고려와 금나라의 서화 교류”라는 논고에서 “이인로는 칠언시가 실려 있는 『동문선』 권지20, 장1 뒷면부터 장3 앞면까지 「송적팔경도(宋迪八景圖)」를 주제로 한 7언시가 실려 있다. 이 「송적팔경도」는 11세기 북송의 화가 송적(宋迪)이 그린 『소상팔경도』를 보고 지은 시이다. (중략) 이인로는 송적의 『소상팔경도』를 어디서 보았을까? 이인로는 “25세 때에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했는데, 1180년(명종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이 사림(士林)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고, 이듬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라고 한다. 즉 이인로는 1182년 당시 고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던 금나라(1115~1234)에 정사(正使)를 수행하여 다녀왔다. 당시 금나라의 황제는 제5대 황제 세종(世宗, 재위 1161~1189)이고, 금나라의 수도는 1153년부터 1214년까지는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였다. 중도대흥부는 지금의 북경이다. 즉 이인로는 송적의 『소상팔경도』를 북경에서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라고 언급하였다.[주3] 이렇게 이인로가 송적의 『소상팔경도』를 본 이후, 1185년(고려 명종15년) 왕이 문신들에게 명하여 소상팔경시를 짓게 하고 이광필(李光弼, 12~13세기)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사실이 있다. 이광필이 『소상팔경도』를 그렸다면, 그것은 송적의 그림을 베낀 사본(寫本)이 고려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려의 이광필로부터 시작한 『소상팔경도』는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화의 주요 소재였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의 『소상팔경도』를 그린 화가들은 거의 모두 실제의 동정호를 본 바 없이 그려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우리나라의 『소상팔경도』는 중국 화가들의 『소상팔경도』를 베껴내거나 재해석한 그림일 것인데, 조선에 이르러서는 거의 상상화 수준의 관념(觀念) 산수화로 되었다. 중국 동정호의 실경이면서도 살경이 아닌 상상화이다.

지난번 안견론 비판에서도 언급하였던, 안 모 교수의 가설 ‘이른바 “단선점준”은 안견이후의 안견파 작가들에게 나타난다’는 가설(假說)에 의거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소상팔경도』를 안견의 작품이 아닌 16세기의 작품으로 확정하는 우(愚)를 범(犯)하고 있다. 따라서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조선초기 최고의 회화로 현재까지 전해지지만,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소상팔경도』는 잃어버렸다”라며, 연구를 하기도 전에 미리 단정(斷定)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안견 작 『소상팔경도』는 안견작이 아니라고 부정을 한다. 그러면서 “그러나 이때의 소상팔경도가 조선 초기 소상팔경도의 유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라고 주장하며, 1452년 이전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을 16세기 중반에 그린 것으로 시대를 떨구어 놓는다. 아마도 안 모 교수는 16세기 중반에 그 『소상팔경도』 그리는 것을 본 모양이다.

안평대군이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을 제작한 것은 이상세계를 동경(憧憬)했기 때문이다. 5년 후에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이상향을 표현한 『몽유도원도』를 제작하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안평대군은 꿈에 본 도원을 잊지 못하여 북악산 서북쪽 산기슭(지금의 종로구 부암동 319-3 일대)에 ‘무계정사(武溪精舍)’이라는 별장을 지었다. ‘무계정사’란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는 ‘계곡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위에 복숭아나무 수백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안평대군이 이상세계를 꿈꾸고 현실에서 구현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안견의 『소상팔경도』는 이러한 면애서 보면, 『몽유도원도』를 그려내는 과정에서 그려진 선행(先行) 작품이다. 당연히 곽희의 화풍으로 그려줄 것으로 안평대군이 주문한 『몽유도원도』와는 필법이 다를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소상팔경도』는 선입감(先入感)을 버리고 전면 재검토하여야 한다.

3. 안평대군은 안견의 후견인이다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로 1418년 태어났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 등이 있다. 특히 비해당이라는 호는 부왕인 세종이 하사하였는데, 안평(安平)이라는 이름이 편안하고 무사하다란 뜻이기에 안이(安易)한 점을 경계하라는 의미로서 『시경(詩經)』에서 따온 사호(賜號)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當代人)의 명망(名望)이 높았다. 또한 도성의 북문 밖에 무계정사를 짓고,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 마포대로4길122)을 지어 만여 권의 책을 수장[주4]하였으며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

안평대군은 당대 제일의 서예가이다. 그의 서풍(書風)은 고려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송설체(松雪體)를 따랐다.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유려하고 활달한 서풍(書風)은 당대 최고로 평가되었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조선초기와 중기에 송설체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와 같이 안평대군이 서가(書家)로서 대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뛰어난 천분(天分)과 궁중에서 생장하는 과정에서 내부(內府)에 소장된 많은 진적(眞蹟)을 보고 수련하고, 그 스스로의 서화 수장도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보한재집(保閑齋集)』 「화기(畵記)」에 의하면, 그는 1445년 당시에 모두 222축의 서화를 수장하였는데, 그 중 안견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이 중국 서화가의 명적(名蹟)이었다. 따라서 그와 교유하였던 인사들이 명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당대의 서화 발전에도 큰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1453년, 36세 때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려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희생된다. 수양대군이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로 등극한 후 안평대군은 정적(政敵)으로 몰려 강화도로 귀양보내졌다가 사사(賜死)되었으며, 그와 함께 『비해당소상팔경시첩』과 『몽유도원도』에 시를 쓴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등도 결국 같은 운명을 맞는다. 이 가운데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호도 매죽헌(梅竹軒)인데, 안평대군의 호와 같다. 조선초기에 안평대군과 성삼문의 호가 같다는 것은 동갑(同甲)인 두 사람의 동지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삼문이 1455년 10월부터 1456년 6월 1일까지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한 것은 성삼문과 안평대군의 동지적 관계의 연결선상에서 이루어진 일로 보이기도 한다.

보한재 신숙주가 1445년에 저술한 「비해당화기」에 의하면, 조선초기 안평대군의 서화 수장품 222종 가운데 조선인의 작품은 안견의 작품만 31종[주5]이 있었고, 이후로도 『몽유도원도』를 주문한 것으로 보면, 안평대군은 안견의 뒤를 봐주는 최고(最高)의 후견인(後見人)이었던 셈이다. 요즘에도 생존해 있는 화가 한 사람의 작품을 32종 46점(『몽유도원도』 포함)이나 사들여 소장하는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이다.

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소상팔경도』를 논한다

소양주인(昭陽主人) [사진 제공 – 이양재]
소양주인(昭陽主人)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제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소상팔경도』를 제시한다. 이 그림의 7점에는 그림의 왼쪽 상단부에 1점에는 오른쪽의 상단보에 ‘소양주인(昭陽主人)’이라는 주인(朱印)을 찍혀 있다. ‘소양(昭陽)’이란 ‘밝은 볕’, ‘봄 햇살’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소양(昭陽)’은 고갑자(古甲子)에서 천간(天干)의 열 째인 계(癸)를 이은다. 이 주인 ‘소양주인’은 소장인(所藏印)인데, 현재 이 인흔이 있는 자리에는 원 소장자의 인흔이 있었을 것이다. 원 소장자의 인흔을 도려내고 후(後) 소장자 ‘소양주인’의 인흔을 찍어서 붙인 것이다. ‘소양주인’은 누구일까? 우리나라에서 ‘소양(昭陽)’이 들어간 지명은 강원도 춘천(春川)의 소양강(昭陽江)이 있다.

『세종실록』 153권 「지리지」 / 강원도 / 춘천도호부 조에는 소양강변의 ‘소양정’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春川 : (중략) 昭陽亭, 【在府北鳳山下, 俯臨江水.】 (중략)”[주6]. 즉 “소양정(昭陽亭) 【부의 북쪽 봉산(鳳山) 아래에 있는데, 강물에 굽어 임한다.】”.

이 소양정은 『선조실록』 189권 선조38년(1605년) 7월 23일 을미 3번째 기록으로 아래와 같은 강원도의 수재(水災) 기록이 있다. “春川則昭陽亭樓撥毁, 人物、廬舍, 盡數墊沒, 百穀埋損, 沙石覆沒. 登高望見, 哭聲相聞於四野, 鷄犬鳴吠於浮屋之上, 亦有著枷罪人, 浮來水上.”. 즉, “춘천은 소양정(昭陽亭) 누각이 부서지고 인물(人物)과 여사(廬舍)가 모두 매몰되었으며, 백곡이 손상되고 사석(沙石)이 뒤덮였다.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면 통곡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떠내려 가는 지붕 위에서는 닭이 울고 개가 짖어대며, 칼을 쓴 죄인이 물에 떠내려 오기도 하였다”라는 것이다.

고려 때부터 있던 소양정은 1605년 홍수애 부서졌다. 소양정은 삼국시대에 세운 정자로서, 처음에는 이요루라고 불렀다. 이 소양정과 소양주인의 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주7] 그러므로 소양정과 ‘소양주인’은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 소장인을 찍은 ‘소양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필자는 ‘소양주인’은 이 그림의 17세기 초반의 소장자 윤휘(尹暉, 1571~1644, 本海平)로 판단한다.

왼쪽부터 ①산시청람 ②연사모종 [사진 제공 – 이양재]
왼쪽부터 ①산시청람 ②연사모종 [사진 제공 – 이양재]
③소상야우 ④동정추월 [사진 제공 – 이양재]
③소상야우 ④동정추월 [사진 제공 – 이양재]
⑤어천낙조 ⑥원포규범 [사진 제공 – 이양재]
⑤어천낙조 ⑥원포규범 [사진 제공 – 이양재]
⑦평사낙안 ⑧강천모설 [사진 제공 – 이양재]
⑦평사낙안 ⑧강천모설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는 이 『소상팔경도』를 안견이 1442년 이전에 그린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안 모 교수는 이 그림을 1442년에서 100년 후인 16세기 중반의 작품으로 본다. 그 근거는 단선점준의 사용에 있다. 그러나 안견 이전에도 준법(皴法)도 미점(米點)도 아닌 신조어(新造語) 단선점준(短線點皴)이 사용된 바 있고, 안견은 다양한 화풍을 구사하였으므로, 안견이 이른바 단선점준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안 모 교수는 『한국 소상팔경도 연구』를 저술하여 2024년 7월 17일자로 출판하였다. 지난 9월말에 말도 못하는 건강 상태라는 누군가의 전언(傳言)으로 필자의 논조는 약하게 낮추어 니갔으나, 그 전언은 사실이 아니었음이 그 출판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30년만에 재연되는 안견논쟁을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소상팔경도』는 안 모 교수의 저서 『한국 소상팔경도 연구』에서 잘 다루고 있다. 그 책에서의 독소(毒素)는 안견의 전칭작품이라고 시대를 100년이나 낮추어 본 것과 단선점준이라는 허구적 신조어를 배제하고 볼 것을 독자들에게 권고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안견작 『소상팔경도』에 관한 필자의 세부적 설명은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다.

5. 맺음말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안 모 교수의 가설 ‘이른바 “단선점준”은 안견 이후의 안견파 작가들에게 나타난다’는 가설(假說)에 의거하여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소상팔경도』는 잃어버렸다”라며, 연구를 하기도 전에 미리 단정(斷定)하여‥‥‥1452년 이전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을 16세기 중반에 그린 것으로 시대를” 단정하고 연구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소상팔경도』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비판적으로 자신의 논문에 일부 수용하는 소장파 학자들이 논문을 작성하는 것은 학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는 하버드대학교에서 강사도 커리큘럼에도 없는 한국회화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는 허상과 같은 이상 야릇한 이력을 제시하여 그것으로서 홍익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강사를 하다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전임(轉任)한 안 모 교수의 ‘개인적 그룹(私團)’이 지난 40여 년 이상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를 장악해 온 결과이기도하다.

사실 안 모 교수의 저서 『한국회화사』는 대단한 명저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조선초기의 회화사 부분은 문제가 크다. 안 모 교수의 안견론은, 안견을 안견 이전과 이후의 회화세계와 단절시켜, 결국 안견 회화의 명성을 공중에 띄어 놓는 결과를 내 놓았다. 안 교수의 회화사에는 아무도 안견과 직접 연결되는 화가는 없다. 이를 일본식 사고로 바꾸어 놓으면 “화신(畵神) 안견은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라는 식이 된다. “안견은 뛰어난 화가이지만, 선대의 여러 화가들 작품의 영향을 받았고, 당대의 화가들과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후대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으로 논하여야”하는데, 그러한 상호 영향적 관점이 안 모 교수의 조선전기의 회화사에서는 배제되고 있다. 엉뚱한 안견 논리를 제시함으로서 그러한 회화사적 흐름을 토막을 낸다. 그것이 준법에도 없는 ‘단선점준’이라는 허상(虛像)의 가설(假設)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휘두른 결과이다.

그리고 그러한 허상(虛像)의 보도(寶刀)에 질려서 따르는 현상이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에서 조선전기 회화사를 연구하는 소장파 학자들은 조선중기나 조선후기 회화사를 연구하는 소장파 학자보다 그 수가 매우 적다. 조선전기 회화사를 연구하자면 안 모 교수의 논리로 나가거나 아니면 거슬러야 하는데, 안 교수의 논리를 거슬리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안 모 교수의 안견 논리는 우리 민족의 회화사와 미술사를 단절과 변형시키는 서구식 신식민지의 역사 문화 논리로 파악된다.

필자는 최근 제주에서 조직 출범한 ‘식민역사문화청산제주회의’의 공동대표로 선임되었다. 우리가 청산하여야 할 식민역사문화의 청산에는 일제의 식민지 역사문화 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모화사대주의 역사 문화’와 해방후 ‘서구와 미국이 이땅에 심어 놓은 신식민 역사 문화’도 포함하고 있다. 필자는 30년 전(1994년) 4월에는 단기 필마로 시작하였다. 곧바로 이건환(李健煥) 선생이 가세하였고, 안 모 교수와 한때 절친하였던 고미술상 이 모 사장이 필자측에 가세하여 진위 논란으로 변질시켰다. 당시의 세 이씨 가운데 두 이씨는 타계하고 필자 만이 남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는 우리 민족의 국가 유산를 우리의 눈으로 보자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해방후 이땅에 확산한 우리 민족의 역량을 토막내고 비하하여 온 신식민지 역사관의 만행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넓고 깊게 확산하는 추세이다. 한국의 회화사학계는 우리 민족의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미국의 1980년대초에 한국어 강사도 제대로 없던 하버드대학교에서 미국 태생도 아니고 한국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에서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이, 미국의 장학금을 받아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선사편수회의 이병도 박사가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것보다 더 심하게, 미국이 신식민지 사학을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한 것이 아닌가? 안 교수 자신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주(註)

[주1] ‘소상팔경’이란 중국 양자강의 지류 소강과 상강의 여덟 승경(勝景)으로 산시청람(山市晴嵐)·연사모종(煙寺暮鍾)·어촌낙조(漁村落照)·원포귀범(遠浦歸帆)·소상야우(瀟湘夜雨)·동정추월(洞庭秋月)·평사낙안(平沙落雁)·강천모설(江天暮雪)이다.

[주2] 신숙주, 「화기(畵記)」.

“비해당(匪懈堂)이 서화를 사랑하여, 남이 한 자의 편지 한 조각의 그림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구입하여 그 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여 표구를 만들어 수장하였다. 하루는 모두 내어서 신숙주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나는 천성이 이것을 좋아하니 이 역시 병이다. 끝까지 탐색하고 널리 구하여 10년이 지난 뒤에 이만큼 얻게 되었는데, 아, 물(物)이란 것은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이 때가 있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운수가 있으니,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역시 기필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한창려(韓昌黎)가 독고생(獨孤生)의 그림에 기(記)를 하여 스스로 구경하고자 하였기에 나도 짐짓 시를 지어 기록하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를 지으라.” 하였다. 내가 가만히 들으니 장돈간(張敦簡)의 집에 수장된 그림이 겨우 10여 축밖에 되지 않는데도 오히려 백낙천(白樂天)이 이를 위해 기를 지었다 하는데 하물며 고금을 정선하여 수백 축에 이르렀으니 기를 지어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수장품을 보니 동진(東晋)에서 한 사람을 얻었으니 이른바 고개지(顧愷之)다. 소자(小字)는 호두(虎頭)이며 널리 배워 재주가 있으며, 그림 역시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스스로 감추고 아끼어 세상에서 그 그림을 보기가 드물다. 지금 각본(刻本)의 수석도(水石圖) 하나가 있는데, 그 정화는 얻어 볼 수 없으나 법도는 아직도 역력히 남아 있어 마치 모장(毛嬙)이나 서시(西施)가 늙어도 맵시가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당(唐)에서 두 사람을 얻었으니, 오도자(吳道子)는 그림을 잘 그려서 이름이 천하에 떨쳐 한퇴지(韓退之)의 문(文)과 두자미(杜子美)의 시와 더불어 삼절(三絶)로 병칭되었다. 지금 불화(佛畵) 둘과 위에 소동파(蘇東坡)가 손수 찬을 쓴 화승(畵僧) 둘이 있으며, 왕유(王維)는 산수(山水)에 정하여 천기(天機)가 이르러 가는 곳마다 누구도 미칠 수 없으니, 더욱 시에서 얻은 것이다. 지금 산수도(山水圖) 하나가 있는데, 물과 산이 다 천연하여 인위적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송(宋)에서 여섯 사람을 얻었으니 곽충서(郭忠恕)가 누관(樓觀)과 대사(臺榭)를 잘 그려 다 고상하고 옛스러워 뛰어나다. 지금 설제강행도(雪霽江行圖) 하나가 있으니, 큰 배가 함께 가는데 인물과 기용(器用)이 정밀하여 비할 데 없으며, 위에 송휘종(宋徽宗)의 어필(御筆)이 붙은 고각임강도(高閣臨江圖) 하나가 있는데, 유사(儒士)가 도인(道人)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각(閣) 아래로 지나가고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 익히 바라보는데, 풍치가 쇄략하여 그림인가 실경인가를 깨닫지 못할 정도이며, 이공린(李公麟)은 자호(自號)는 용면거사(龍眠居士)인데 널리 듣고 정밀하게 알았으며, 그 그림은 뜻을 세우는 것으로 위주하는데 더욱 인물을 잘 그렸다. 지금 영척장가도(寗戚長歌圖) 하나가 있는데, 송휘종(宋徽宗)의 어필로 된 제(題)에 이르기를, “형기(形氣)가 소쇄하여 그림을 펼쳐놓고 구경할 때마다 남산 백석(白石)의 소리가 어렴풋이 사람의 귀에 들린다.” 하였으며, 소동파(蘇東坡)는 지금 진서(眞書)로 쓴 조주비(潮州碑) 인본(印本) 하나와 풍죽(風竹)ㆍ설죽(雪竹)ㆍ춘죽(春竹)도가 각각 하나씩 있는데, 전아하고 표일하여 진실로 화가의 격 밖에 있으며, 문여가(文與可)는 묵죽(墨竹)을 잘하며 소동파와 더불어 가장 서로 친하였다. 지금 풍죽도(風竹圖) 하나와 순죽도(筍竹圖) 넷이 있는데, 큰 줄기가 곧게 빼어나서 만 척(萬尺)의 기세가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운당(篔簹)이라는 것인가 보다. 곽희(郭熙)는 산수와 한림(寒林)으로 한 시대에 독보적이었다. 지금 산수도 둘이 있는데, 하나는 춘경(春景)으로 산장(山莊)에서 잔치를 파하고 말을 건널목에 세웠으며, 하나는 추경(秋景)으로 강촌에서 고기를 낚기 위하여 낚싯대를 쥐고 홀로 앉았으며, 삭풍표설도(朔風飄雪圖) 하나, 하경청람도(夏景靑嵐圖) 하나, 수석도(水石圖) 하나, 풍우도(風雨圖) 하나, 강설도(江雪圖) 하나, 재학도(載鶴圖) 하나, 고목평원도(古木平遠圖) 둘, 산수도 하나가 있는데, 다 웅장하고 기이하여 필세가 날아 움직이며,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 하나,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 하나가 있다. 그 서릿바람에 국화가 비치는데 거문고를 안고 멀리 바라보는 것이나, 눈이 갠 장강에 외로운 배를 타고 홀로 낚시질하는 것이 각각 한가하고 방랑한 취미가 깃들었다. 임정도(林亭圖) 하나, 급우도(急雨圖) 하나가 있는데 다 선면(扇面)이며, 투우도(鬪牛圖) 둘이 있는데, 힘차게 밀고 대드는 품이 몹시 기력이 있어 보이며, 최각(崔慤)은 화조(花鳥)를 잘하여 한때에 추앙을 받았다. 지금 추화야압도(秋花野鴨圖) 하나가 있는데, 바람과 이슬이 처량하고 터럭과 깃이 스산하다.

원(元)에서는 21명의 것을 얻었는데, 조맹부(趙孟頫)는 서화가 무리에 뛰어났다. 지금 행서(行書) 26점과 묵죽 둘이 있으며, 선우추(鮮于樞)는 조맹부와 더불어 함께 글씨를 배웠는데, 지금 초서(草書) 여섯이 있다. 왕공엄(王公儼)은 화초(花草) 금수(禽獸)를 잘하였는데, 의(義)만 취하여 이루었으나 저절로 생기가 있다. 목화도(木花圖) 열이 있는데, 송이가 모두 만개한 가운데 새들이 서로 우짖으며, 화초도 넷과 과목도(果木圖) 넷이 있는데, 꽃과 열매와 초충(草虫)이 선명하고 생동하며, 패하노자도(敗荷鷺鷀圖) 하나, 황응도(黃鷹圖) 하나, 해청도(海靑圖) 셋, 도화요자도(桃花鷂子圖) 하나, 아골도(鴉鶻圖) 하나가 있는데, 혹은 깃을 거두고 몸을 우뚝 세웠고, 혹은 날아가며 날쌔게 치닫는 형상이 각각 핍진하다. 사원(謝元)과 진의보(陳義甫)는 역시 화조(花鳥)를 잘 그렸다. 사원은 지금 해당절지도(海棠折枝圖) 하나가 있는데, 정결하고 간략하여 조화(造化)에 방불하며, 진의보는 지금 매화도(梅花圖) 하나, 행화도(杏花圖) 하나가 있는데, 구슬 같은 꽃망울이 햇볕에 어울리고 진기한 새들이 목청을 뽑아 우짖는다. 유백희(劉伯熙)ㆍ이필(李弼)ㆍ마원(馬遠)ㆍ교중의(喬仲義)ㆍ유도권(劉道權)ㆍ안휘(顔輝)ㆍ장언보(張彦甫)ㆍ고영경(顧迎卿)ㆍ장자화(張子華)ㆍ나치천(羅稚川)은 모두 산수로 유명하였다. 유백희는 필세가 호방하고 건장하며, 기암(奇巖)과 노목(老木)에 장기(長技)가 있는데, 지금 강정설제도(江亭雪霽圖) 하나, 장림설만도(長林雪滿圖) 하나, 춘효연람도(春曉烟嵐圖) 하나, 장강도(長江圖) 하나가 있다. 이필은 필세가 정미하여 누각(樓閣)과 인물에 장기가 있는데, 지금 등왕각도(滕王閣圖) 하나, 화청궁도(華淸宮圖) 하나, 소상팔경(瀟湘八景) 각각 하나,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 열 둘, 고목도(古木圖) 하나, 현애준각도(懸崖峻閣圖) 하나가 있다. 마원은 필세가 고상하고 우아하여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지금 장송모사도(長松茅舍圖) 하나, 계거관분도(溪居灌盆圖) 하나가 있다. 교중의는 한 자의 산과 한 치의 나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아니하였는데, 지금 염채산수(染綵山水) 여덟이 있다. 유도권은 더욱 농담(濃淡)을 잘 하였으며, 지금 수묵산수도 하나가 있다. 안휘는 암석(巖石)과 인물을 잘 그렸는데, 지금 산중간서도(山中看書圖) 하나, 유림채약도(幽林採藥圖) 하나, 화불(畵佛) 셋이 있다. 장언보(張彦甫)는 지금 계산우과도(溪山雨過圖) 하나, 절안도(絶岸圖) 하나, 장림권운도(長林捲雲圖) 하나, 수묵운산도(水墨雲山圖) 하나, 예중(倪中)의 시가 있는 송석도(松石圖) 하나, 게해사(揭奚斯)의 시가 있는 그림 일곱이 있는데, 산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암담(暗淡)하고 평원(平遠)하여 다 비범한 취미가 있다. 고영경(顧迎卿)은 지금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 하나가 있는데, 유심(幽深)하고 한가하여 매우 고상한 풍치가 있다. 장자화(張子華)는 지금 소림소산도(疏林蕭散圖) 하나, 산수도 하나가 있고, 나치천은 지금 설산도(雪山圖) 하나가 있는데, 각각 절묘한 경지에 이르러 기격(氣格)이 청신하다. 화마(畵馬)로 유명한 이는 주랑(周朗)과 임현능(任賢能)인데, 주랑은 지금 희마도(戱馬圖) 하나, 목마도(牧馬圖) 하나가 있고, 임현능은 지금 견마도(牽馬圖) 하나가 있다. 설창은 부도(浮屠)로서 난죽(蘭竹)을 잘 그렸는데, 지금 광풍전혜도(狂風轉蕙圖) 둘, 현애쌍청도(懸崖雙淸圖) 하나가 있다. 철관은 왜승(倭僧)으로 산수를 잘 그렸는데, 실제의 모습과 같게 하는데 뜻을 두었으나, 호방하고 표일한 기운이 적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승기(僧氣)가 있다고 비평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가볍게 여길 수 없으며, 지금 산수도 둘, 고목도(古木圖) 둘이 있다. 식재(息齋)ㆍ진재(震齋)는 그 이름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식재의 대그림과 진재의 용그림은 다 고수였다. 식재는 지금 채죽(彩竹) 둘, 금성도(金聲圖) 하나가 있고, 진재는 지금 운룡도(雲龍圖) 하나가 있다. 송민(宋敏)ㆍ왕면(王冕)ㆍ섭형(葉衡)ㆍ지유(知幼)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송민은 지금 묵죽도(墨竹圖) 하나가 있는데 풍격이 특절하여 천하에 짝이 없고, 왕면은 지금 묵매도(墨梅圖) 다섯이 있는데, 각각 시가 있어 운치가 청아하고 서법(書法)이 훌륭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할 만하며, 섭형(葉衡)은 지금 수죽도(脩竹圖) 하나가 있는데, 역시 시가 있어 매우 청절(淸絶)하고, 지유는 지금 묵죽도 둘이 있는데 역시 가작이다.

우리 조정에서 한 사람을 얻었으니, 안견(安堅)이다. 자는 가도(可度)요, 소자(小字)는 득수(得守)이니, 본래 지곡(池谷) 사람이다. 지금 호군(護軍)으로 있는데, 천성이 총민(聰敏)하고 정박(精博)하며 고화(古畵)를 많이 열람하여, 다 그 요령을 터득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아서 모두 절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산수가 더욱 그의 장처로써 옛날에 찾아도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을 얻기 드물다. 비해당(匪懈堂)을 따라 교유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 가장 많다. 지금 팔경도(八景圖) 각각 하나, 강천만색도(江天晩色圖) 하나, 절안쌍청도(絶岸雙淸圖) 하나, 분류종해도(奔流宗海圖) 하나, 천강일색도(天江一色圖) 하나, 설제천한도(雪霽天寒圖) 하나, 황학루도(黃鶴樓圖) 하나, 등왕각도(滕王閣圖) 하나, 우후신청도(雨後新晴圖) 하나, 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 하나, 경람필련도(輕嵐匹練圖) 하나, 제설포겸도(霽雪舖縑圖) 하나, 수국경람도(水國輕嵐圖) 하나, 강향원취도(江鄕遠翠圖) 하나, 기속생화도(起粟生花圖) 하나, 춘운출곡도(春雲出谷圖) 하나, 유운포학도(幽雲蒲壑圖) 하나, 광풍급우도(狂風急雨圖) 하나, 규룡반주도(虯龍反走圖) 하나, 장림세로도(長林細路圖) 하나, 은하도괘도(銀河倒掛圖) 하나, 절벽도(絶壁圖) 하나, 묵매죽도(墨梅竹圖) 하나, 수묵백운도(水墨白雲圖) 하나, 산수도 둘, 노안도(蘆雁圖) 하나, 목화도(木花圖) 둘, 장송도(長松圖) 하나가 있다. 또 고화(古畵)로 누구의 작품이라 이름하기 어려운 것이 열하나인데, 거북 하나, 배꽃 하나, 살구꽃 하나, 송학(松鶴) 하나, 화압(花鴨) 하나, 사우(四牛) 하나, 왕발(王勃)의 사적에 대한 인본(印本)이 하나, 후원산수(後園山水) 하나, 아골(鴉鶻) 하나, 누각(樓閣) 하나, 고목산수(古木山水) 하나이다. 모두 오대(五代)에 걸쳐 35명을 얻었는데, 산수를 그린 것이 84, 조수(鳥獸) 초목을 그린 것이 누각 인물을 그린 것이 29점이며, 글씨가 또 33점으로 합하면 2백 22축이 된다. 아, 독실한 애호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처럼 많이 수집할 수 있겠는가. 나는 비록 일찍이 이 방면을 해득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무릇 그림이란 것은 반드시 천지의 조화와 음양의 운행을 궁구하여, 온갖 물건의 정과 온갖 일의 변화가 가슴속에 서린 뒤에 붓을 들고 종이에 대면 정신이 모이고 생각이 합치되어, 산을 그리고자 하면 산이 보이고 물을 그리고자 하면 물이 보이며, 무릇 그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물건이 보일 때에 붓을 휘둘러 그에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슴에 서린 물(物)의 가형(假形)을 통하여 그 안에 있는 진상(眞狀)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화가의 법이다. 이를테면 마음에서 터득하고 손에 응하면, 마음과 손이 서로 잊어버리고 몸은 물(物)과 더불어 화(化)하여, 조용하고 단아하여 마치 조화가 본래 단분(丹粉)의 밖에 있는 것이라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을 구경하는 자가 능히 저의 충담(沖澹)하고 고아(高雅)한 것으로써 나의 성정을 즐기고, 그림속의 호건(豪健)하고 진려(振厲)한 것으로써 나의 기운을 기르면 어찌 보익됨이 작다 하겠는가. 더구나 물의 이치를 정밀히 연구하며 널리 듣고 많이 아는 것에 이르러서는 장차 시(詩)와 더불어 공을 같이 할 것이니, 모르겠구나. 세상 사람이 과연 여기에 미치는 자가 있을런지.”

[주3] 필자, “『행화구욕도』와 이인로를 통해 본 고려와 금나라의 서화 교류” /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62).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611

[주4] 필자, 담담정에 관해서는 「『몽유도원도』의 숨겨진 이야기」 참조, 통일뉴스, 오피니언 기고 2024년 2월 7일자 게재.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999

[주5] ①②팔경도(八景圖) 각각 하나, ③강천만색도(江天晩色圖) 하나, ④절안쌍청도(絶岸雙淸圖) 하나, ⑤분류종해도(奔流宗海圖) 하나, ⑥천강일색도(天江一色圖) 하나, ⑦설제천한도(雪霽天寒圖) 하나, ⑧황학루도(黃鶴樓圖) 하나, ⑨등왕각도(滕王閣圖) 하나, ⑩우후신청도(雨後新晴圖) 하나, ⑪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 하나, ⑫경람필련도(輕嵐匹練圖) 하나, ⑬제설포겸도(霽雪舖縑圖) 하나, ⑭수국경람도(水國輕嵐圖) 하나, ⑮강향원취도(江鄕遠翠圖) 하나, ⑯기속생화도(起粟生花圖) 하나, ⑰춘운출곡도(春雲出谷圖) 하나, ⑱유운포학도(幽雲蒲壑圖) 하나, ⑲광풍급우도(狂風急雨圖) 하나, ⑳규룡반주도(虯龍反走圖) 하나, ㉑장림세로도(長林細路圖) 하나, ㉒은하도괘도(銀河倒掛圖) 하나, ㉓절벽도(絶壁圖) 하나, ㉔묵매죽도(墨梅竹圖) 하나, ㉕수묵백운도(水墨白雲圖) 하나, ㉖㉗산수도 둘, ㉘노안도(蘆雁圖) 하나, ㉙㉚목화도(木花圖) 둘, ㉛장송도(長松圖) 하나가 있다. (신숙주의 「비해당화기」 참조)

위 명단의 31종의 작품 가운데 ①㉒팔경도 각각 하나는 『소쌍팔경도』와 『사시팔경도』를 의미한다. 각각의 팔경도는 8점이니 위의 31종을 현대의 박물관 소장품을 계수(計數)하는 식으로 개수하면 31종 45점이 된다. 보한재 신숙주는 같은 주제의 그림 8점이 든 화첩을 1점으로 계수하였다. 이것이 조선시대 방식(朝鮮式) 계수법(計數法)이다.

[주6] 春川: 都護府使一人, 儒學敎授官一人, 本貊地。 新羅 善德王六年, 爲牛首州, 【卽唐 太宗 貞觀十二年。 一云文武王十三年, 置首若州。】 景德王改朔州。 【一云首次若。 一云烏根乃。】 高麗 成宗十四年乙未, 改春州團練使, 屬於安邊。 州人以道途艱險, 難於往來, 至神宗六年癸亥, 賂權臣崔忠獻, 陞爲安陽都護府, 【南宋 寧宗 嘉泰三年。】 後降爲知春州事, 本朝因之。 太宗十三年癸巳, 改春川郡, 十五年乙未, 例改都護府。 別號壽春。 【淳化所定, 又號光海鳳山。】 屬縣一, 基麟, 本高句麗 基知郡, 高麗改基麟, 本朝因之。 鄕一, 史呑。 鎭山, 鳳山。 【在府北。】 母津、 【在府北。】 昭陽江。 【在府北, 皆有舟楫。】 四境, 東距洪川四十三里, 西距京畿 加平三十八里, 南距京畿 楊根六十里, 北距楊口五十五里。 戶一千一百十九, 口一千九百五十。 基麟戶一百單八, 口二百五十一。 軍丁, 侍衛軍二百九十八, 舡軍一百三十四。 土姓三, 崔、朴、辛; 亡姓一, 許; 續姓八, 金、 【咸昌來。】 林、尹、 【酒泉來。】 池、 【忠州來。】 石、 【堤川來。】 安、元、 【原州來。】 全; 【旌善來。】 亡來姓二, 咸、韓。 史呑姓一, 宋; 亡姓八, 韓、程、朴、楊、徐、吉、李、全。 基麟續姓一, 朴。 人物, 贊成朴恒。 【忠烈王時人。】 厥土多塉, 風氣寒, 墾田五千七百三十七結。 【水田十分之一强。】 土宜五穀, 桑、麻、莞、梨、栗、楮、漆。 土貢, 蜂蜜、黃蠟、松子、五味子、五倍子、鐵、眞茸、石茸、狐皮、狸皮、獐皮、猪皮、山獺皮、水獺皮、豹尾、猪毛、熊毛。 藥材, 人蔘、蓁艽、茯苓、當歸、前胡、芎藭、牽牛子、白芨、白膠香、木賊、拳白。 土産, 金産府西四十二里許所串里。 陶器所一, 在府南十三里倉老里。 【品下】 龍華山石城, 在府北六十里。 【周回四百五十二步四尺, 有三小泉, 旱則渴。】 昭陽亭、 【在府北鳳山下, 俯臨江水。】 驛五, 保安、原昌、安保、仁嵐、富昌。 所領縣三, 狼川、楊口、麟蹄。

[주7] 현재 소양정은 1984년 6월 2일자에 강원도 지방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소양강 남안에 있었으나, 광해군 2년(1610) 부사 윤희당이 현재의 소양당 자리에다가 다시 짓고, 인조 25년(1647)에는 부사 엄황이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지금 남아있는 춘천시 소양로1가 산1-1 소양정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6년 다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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