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1988년 12월에 출소한 뒤로 참 바쁘게 지냈다. 감옥에서 쓴 편지들을 모아 옥중서간집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를 이듬해 3월에 펴냈다. 출소한 지 겨우 석 달이 지난 때였다. 감옥에서 구상한 수학사 책의 초고도 정리하고, 철학과 과학에 대한 글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서강대 총학생회에서 개설한 ‘과학과 사람’이라는 강좌를 강의했고, 1991년부터는 경희대에서 교양학부 강사로 재직하면서 ‘현대사회와 과학’이라는 과목을 강의했다. 당시 대학에서는 학원자주화 투쟁의 성과로 진보적인 과목이 교양과목으로 개설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수학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10여 년 만에 대학 강단에 서는 기쁨을 얻었다.
사학비리 척결 투쟁을 벌여 비리 재단을 몰아낸 대학에서 아버지에게 교수직을 제의해 온 곳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내심 기대했으나, 아버지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석방 상태라 대학에 폐를 끼칠 수 있어서도 그랬지만, 자신이 할 일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전국 어디서라도 부르면 달려갔다. 아버지는 특히 청년들을 만나 우리 운동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했다. 또 그들로부터 1987년 6월항쟁으로 촉발된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의 경험을 듣고 싶어 했다. 그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감옥살이로 10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나갔다. 어머니는 오랜 수감 끝에 석방되었으니 조용히 건강을 돌보고 휴식하길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 없었다. 이른 나이에 목숨을 빼앗긴 여정남을 생각하면 편히 쉴 수 없었다. 동지 이재문의 마지막 당부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런 아버지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동생의 행방이었다. 1978년 2월에 일본으로 간 작은아버지는 한국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안기부는 작은아버지가 월북했다고 발표했지만,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과연 살아 있는지, 아니면 저들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했다. 동생의 생사를 확인할 방도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공안당국은 가석방으로 출소한 아버지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출국이 금지된 상태라 일본에 가볼 수도 없었다. 궁리 끝에 아버지는 일본의 지인을 수소문했다. 밀양 출신으로 해방 후에 가해진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각별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고, 동생의 행방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시간이 지나 일본에서 온 사람이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왔다. 1991년 초였다. 그 사람은 아버지를 만나 “동생이 일본에 들어와 몇 사람을 만난 건 확인했으나, 마지막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전해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란 믿음을 간직했다.
그 사람은 몇 달 뒤 다시 찾아왔다. 여전히 작은아버지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아버지에게 편지 한 통을 전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안 교수님, 감옥살이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출소하신 뒤에도 통일을 위해 애쓰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교수님의 겨레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열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통일운동을 하시는 데 제가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백명민’이었다. 해방 직후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지금까지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시리게 남아 있다고 했다. 통일된 조국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동포로서 고국에서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의 제안을 감사히 받기로 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1970년대 유신독재에 맞섰던 남민전 활동 이후, 1980년대 운동은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아픈 역사를 딛고 운동의 저변은 크게 확대됐다. 1987년 6월항쟁은 새로운 광장을 열었다. 이전까지의 선각자 운동, 비공개 운동에서 대중조직 중심의 새로운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의 고민에 대해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완전히 꺾였다고 생각한 남쪽의 운동이 4.19를 거치며 새롭게 부활했어. 그것이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으로 이어지는 비공개 조직운동의 토대가 됐지. 우리는 그 힘으로 새로운 공간을 열어나갔지만, 여전히 한계가 많았어.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운 정도라고나 할까.”
감옥에서 나온 뒤 아버지가 마주한 현실은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10년 만에 우리 운동은 내용에서도 규모에서도 괄목상대했다. 그 중심에는 대중투쟁 속에서 단련된 청년 활동가들이 있었다. 이른바 ‘386세대’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학생운동을 거쳐 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 교육운동 등 각계각층 대중운동으로 진출해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었다. 이재문 선생과 함께 남민전이 추구한 목표였고, 여정남과 함께 만들고자 했던 미래였다.
“청년들을 만나면 참 든든했어. 시대를 보는 안목도 훌륭했고, 학습 능력도 뛰어났지. 앞으로 이들이 지도해나갈 우리 운동의 미래가 무척 희망적이었어. 그들에게 운동의 선배로서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됐지.”
그 무렵 오랜 세월 동안 적대와 대립으로 이어져 왔던 남북관계에도 새로운 변화가 시작됐다. 1990년 9월에 남북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됐고, 1991년 12월에 열린 제5차 회담에서는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남북기본합의서의 핵심은 남북의 상호 체제 인정과 존중이었다. 적대적 관계를 평화적 관계로 바꾸고 다방면의 교류 협력을 진행하자는 남북의 역사적인 합의는 아버지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1989년 3월에 북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던 문익환 목사님이 그러셨지. 분단 50년이 되는 1995년을 통일 원년으로 만들자고. 나도 목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했어. 남북 간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민족해방운동도 새로운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러자면 이를 본격적으로 준비할 조직, 대중적인 통일운동을 지도해나갈 조직이 필요했어.”
아버지는 새로운 청년 활동가들이 그 조직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구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구국전위’는 바로 이러한 고민과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구국전위 활동에는 일본에 있는 백명민 선생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 백 선생은 재정적인 지원과 함께 아버지에게 필요한 자료를 보내주었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왕래할 수 없었던 두 사람 사이에는 연락을 담당하던 사람이 따로 있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일본에서 온 연락원을 만난 사람이 큰누나의 친구인 정화려였다. 그는 구국전위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연락을 주고받는 과정에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에서 보낸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그는 한국 국적으로 여행업을 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당시는 한국 국적자가 아닌 재일동포들은 한국을 방문할 수 없었다. 어렵게 물색해 보낸 그 사람은 신념을 가진 활동가는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전달해야 할 돈을 가로채고, 문서가 보관된 물건은 그대로 안기부에 넘겨주었다. 뜻밖에 터진 일이었지만 이쪽에서는 알 수 없었다.
안기부는 물건을 건네받기로 한 사람이 누구인지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정화려의 신분이 드러나고 말았다. 안기부는 정화려를 밀착 감시해 그가 아버지와 만나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아버지에 대한 전면적인 감시에 들어갔다. 안기부는 아버지의 집필실이 있던 서강대 후문 근처 한과청(한국과학기술청년회) 사무실의 건너편 건물에 몇 달 동안 세를 얻었다. 창문에 망원카메라를 설치하고 사무실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1994년 6월 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체포됐다. 모두 23명이 붙잡히고 10여 명이 수배됐다. 하지만 실제로 아버지와 함께 조금이라도 활동을 한 사람은 8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나처럼 구국전위와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잡혀 온 사람들이었다.
안기부는 아버지가 일본의 대남공작원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구국전위를 조직하고 간첩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안기부는 백명민 선생을 공작원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안기부는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사건의 핵심 인물을 특정하지 못한 것이다. 백 선생이 안기부의 주장대로 공작원인지는 밝혀진 게 하나도 없었다. 안기부는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39통의 수사보고서를 유죄의 증거라고 내놓았을 뿐이다.
구국전위 사건의 또 다른 문제점은 압수한 아버지의 디스켓에서 나온 문서의 변조였다. 1994년만 해도 디지털 증거의 효력 여부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니 압수한 디스켓에서 나왔다는 문서가 과연 아버지가 만든 것인지, 안기부에서 조작한 건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안기부는 증거를 교묘히 조작했다. 구국전위가 마치 북에서 지령을 받아 조직한 것처럼 강령과 규약을 조작했다. 지령문과 보고문이라고 주장한 문서 역시 자기들 입맛대로 왜곡하고 덧칠했다. 아버지가 디스켓에 저장해둔 문서와 안기부가 증거로 제출한 문서는 서체와 글자 크기가 서로 달랐다. 누군가 변조한 것이 분명했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들은 제출된 증거의 조작 여부를 문제 삼았다. 직접 쓴 문서라면 필체 감정을 할 수 있지만, 안기부가 제멋대로 출력한 문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재판부도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구국전위 사건을 계기로 디지털 증거의 신뢰성이 논란이 됐다. 피의자의 디지털 기기를 포렌식으로 복제하고, 이를 피의자로부터 최종 확인받아 밀봉한 뒤, 다시 개봉할 때도 조작이나 훼손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없다면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는 규정이 새로 만들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검찰은 아버지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아버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남민전에 이은 두 번째 무기징역이었다.
나의 재판 결과는 더 황당했다. 재판부는 “부자가 동시에 구속된 것이 마음 아프기는 하지만, 집행유예 기간인 관계로 징역 2개월을 선고하고, 남은 미결 구속 일수는 삽입하지 않는다”라고 판결했다. 듣도 보도 못한 징역 2월형이었다. 무죄를 선고하자니 눈치가 보였던 판사가 찾아낸 꼼수였다. 결국 나는 구국전위 사건으로 잡혀 오기 직전에 불구속 상태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1년 6개월의 ‘외상값’을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내고 1996년 10월에 석방됐다.
구국전위 사건은 해외에서 더 주목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구속한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1995년 5월 유엔인권위 산하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위원회’는 구국전위 관련자들의 구금이 세계인권선언과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을 위반한 자의적 구금이라고 결정하고, 한국 정부의 시정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엠네스티에서도 아버지와 나를 비롯한 구국전위 관련자들을 ‘양심수’로 지정했다.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 응원의 편지가 많이 왔다. 그들은 한국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이나 테러 등의 행위가 없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행위가 아닌 생각을 처벌하는 법이 이 나라의 국가보안법인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가 무기수로 감옥에 갇히고, 아들도 같이 감옥에 있다는 현실에 그들도 함께 분노했다.
구국전위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조직의 기본 골격도 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남북관계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때, 새로운 통일시대를 준비할 청년 활동가를 규합하려고 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1999년 8.15에 석방된 아버지에게 나는 비로소 구국전위를 물어볼 수 있었다. 그때 내게 해준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남민전으로 10년 징역을 살고 나온 뒤에 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지켜왔던 우리들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역할이라 생각했어. 그런 생각으로 청년들을 규합하려고 했지. 하지만 제대로 일도 못 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네.”
아버지의 이야기는 우리 세대에 대한 기대와 당부로 이어졌다.
“앞으로 통일 정세가 급변할 거야.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고 남북이 협력하는 길이 조만간 열릴 수밖에 없어. 이제는 너희 세대가 우리 운동을 새롭게 이끌어야 해. 언제 어디서나 가장 중요한 건 대중의 지지야. 꼭 명심했으면 한다.”
2000년 6월에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났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새로운 통일시대의 이정표라 할 6.15공동선언을 함께 발표했다. 아버지의 예견대로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나는 1998년부터 일하던 《말》지를 그만두고, ‘남북이 함께 하는 통일언론’을 내걸고 새로 창간을 준비하던 《민족21》에 합류했다. 2001년부터 민족21 기자로 일하면서 다양한 남북 교류협력의 현장을 취재했다. 이를 위해 평양에도 여러 번 다녀왔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학술본부의 고문을 맡은 아버지도 2005년에 역사유적참관단으로 평양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그때의 감격을 글로 정리해 ‘이재문 동지, 나 평양에 다녀왔어요’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하지만 그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이룩한 성과는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을 쌓아 올리기는 힘들어도 허물기는 순식간이었다. 정권이 바뀐 뒤 나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민족21의 활동이란 게 시절이 좋을 때는 남북협력사업이고 방북취재이지만, 시절이 바뀌면 한순간에 국가보안법의 족쇄에 걸려들기 마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기부에서 국정원으로 이름만 바꾼 공안당국은 2011년 7월에 나를 국가보안법으로 걸고넘어졌다. 그런데 아버지까지 걸고넘어졌다. 민족21 기자로 평양과 일본을 수시로 드나든 나는 시빗거리가 될 만하겠지만, 아버지는 뜻밖이었다. 아버지는 민족21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당시 아버지의 연세가 일흔여덟이었다. 활동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6.15위원회나 범민련 사무실에서 연로한 선생님들을 만나 정세를 논하거나 집회가 있으면 함께 나가는 정도였다. 그 외에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북녘 드라마나 영화를 찾아보는 게 낙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런데도 저들은 왜 아버지와 나를 함께 엮었을까.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