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의 안견론(安堅論)에서, 그리고 조선전기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이상좌(李上佐)는 매우 중요하다. 필자는 격월간 『한국고미술』 1996년 8월호(p.p.102~111)에 「이상좌의 화원가계사대고정(畵員家系四代考整)」을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20여 년 후 그 발표를 전면 개정(改訂)하여 2017년 3월에 필자의 저서 『고려불화와 돈황사경을 찾아서』에서 「2부-조선전기 이상좌 가문과 불화」-‘4. 이상좌의 화원가계오대고정(畵員家系五代考整)’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필자의 논문은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이전의 논고이므로 접근이 어려워 널리 유포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자실(李自實) 항목에는 “16세기에 활동했던 도화서 화원으로, 조선 전기 화원(畫員)인 이상좌(李上佐)와 동일 인물이다.”라고 말도 안 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제 필자의 논문 일부를 다시 개정하고 여기에 공개하여 인터넷 항해(航海)에 띄운다.
1. 종의 신분에서 속량 된 후 어진화사가 된 이상좌
학포(學圃) 이상좌(李上佐), 그는 조선전기의 전설적인 화가이다. 그가 전설적인 화가라는 말은 그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그가 하나의 전설을 창조해 낸 위대한 화가라는 의미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이상좌는 지금까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어찌 된 이유인지 사인(士人) 이의석(李宜碩)[주1]의 남종(奴)이었다고 한다.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1507년) 5월 22일 갑자’조에 “李宜碩奴北間子上佐”[주2]라 하였으므로. 이상좌와 그의 부친 ‘북간(北間)’은 이의석의 남종인 것이 확실하다.
『중종실록』에 의하면 이의석의 남종이었던 북간은 연산군의 총희 장녹수(張綠水 ?~1506)에게 주어진 것 같다. 그런데 ‘북간’은 중종이 사가(私家)에 있을 시절(晉城大君)에 데리고 있던 여종의 남편(婢夫)이었고,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1507년) 5월 28일 경오’조 세 번째 기사에 북간이 주인(장녹수)을 배신한 것과 원종공신이 된 것을 보면, 북간은 중종에게 선을 대고 장녹수의 종으로 주인을 감시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실록에 의하면 그는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추록되었다.[주3] 그리고 북간은 원종공신에 추록됨으로 해서 1507년경에 종의 신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종전의 이상좌 연구에서는 “이상좌의 가까운 선대(先代)에서 죄를 지었거나 몰락하여 그의 일족이 노비가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그는 발군의 그림 솜씨를 지니고 있어, 중종(中宗, 재위 1506~1544년)은 특명을 내려 그를 종의 신분에서 특별히 속량해 주고 화원(畵員)의 직(職)을 내렸다.”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북간이라는 이상좌의 부친이 확인되고, 장녹수와 북간의 주종(主從) 관계, 전성대군(후에 중종)의 여종과 북간의 부부 관계, 진성대군과 북간의 추종(追從) 관계가 밝혀짐으로써, 이상좌가 그림을 잘 그려 종의 신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 부친의 반정에 원종(原從)한 공으로 하여 종의 신분(賤民)에서 벗어나 평민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성(姓)이 없던 그들 부자가 완전한 양민(良民)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북간과 화원 상좌 부자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성(姓)을 붙여 완전한 이름을 기록한 부분이 없는 것을 보아, 그는 인종1년에 중종의 어진을 그린 이후 전주이씨로 성을 사성(賜姓)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인종실록』 1권, ‘인종1년(1545년) 1월 18일 임자’조 세 번째 기사[주4]는 상좌에게 대행대왕, 즉 중종의 어진을 그리게 하자는 기록인데 여기에서도 “私奴上佐”라 한 것을 보면 관료들 사이에서는 종의 신분에서 벗어난 그를 양민으로 여기지 않고 천대한 것이다.[주5]
상좌가 어진을 그린 것은 『명종실록』 9권, ‘명종 4년(1549년) 9월 14일 경진’조 첫 번째 기사[주6]에서도 상좌와 석경이 중종의 어진을 그리게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즉, 종의 신분이었으나, 속량된 후에 화원으로 출사한 상좌(上佐)는 초상화에도 특히 뛰어나 중종의 어진(御眞; 1545년)과 명종의 어진(1549년), 그리고 여러 공신의 초상(1546년) 등등을 그린 바 있고, 산수(山水)에도 뛰어나 여러 점의 산수화도 남긴 바 있다.
2. 이상좌의 회화사적 위치
조선시대 초기의 회화사(繪畵史)에서 이상좌가 차지하는 입지는 매우 크다. 우선 이상좌에 대한 『한국회화사』에서의 언급을 살펴보자.
“안견과 강희안이 화풍에 이어 주목되는 것은 이상좌(李上佐)의 화풍이다. 이상좌는‥‥‥ 산수와 인물에 모두 뛰어났는데, 그에게서 이숭효(李崇孝)와 이흥효(李興孝) 아들 형제와 손자 이정이 나와 우리나라 회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남송원체화풍의 그림을 그렸으리라고 믿어지는 것은 그의 작품으로 전칭(傳稱)되고 있는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 때문이다. 『송하보월도』는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의 작품들 중에서 남송(南宋) 마원(馬遠)의 화풍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보여 준다. ---(중략)---. 이 작품이 진실로 이상좌의 것인지 또 이상좌가 정말 마하파(馬夏派) 계통의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실상 그의 아들인 이숭효와 이흥효, 그리고 손자 이정(李楨)의 화풍은 『송하보월도』의 화풍과는 거리가 먼 안견파(安堅派) 화풍이나 절파계(浙派系) 화풍과 보다 밀접한 관계가 있다.”[주7]
한편 『한국미술사』에서는 “이상좌의 아들인‥‥‥ 이숭효와 이흥효 형제는 그의 아버지인 이상좌가 주로 구사했다고 흔히 믿어지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가법을 이었을 법한 아들들의 화풍에 의거하여 보면 이상좌가 과연 남송대의 원체화풍을 위주로 추구하였을지 의문시될 소지도 없지 않은 것이다. 이상좌의 손자이며 이숭효의 아들인 이정도 남송대 원체화풍과는 별다른 연관이 없다.”[주8]라고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북의 『조선미술사』에 나타난 이상좌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 이상좌의 작품은 유물이 많지 못하다. 현재 보존되여 있는 『달밤에 소나무를 거닐며(송하보월도)』, 『범(맹호도)』, 『산수도』, 『꽃과 새』는 창작가로서의 그의 기량을 보여 주는 것들이다. ……(중략)……. 이상좌의 강렬한 창작적 개성은 그의 작품에서 주되는 형상을 정면에 배치하고 모든 세부들을 대담하게 집중시키는 구도 조직과 격동적인 형태모사와 긴장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독특한 필법을 낳게 하였다.”[주9]고 언급되어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남과 북의 미술사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학포 이상좌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면 이상좌는 남북 양측의 미술사학계에서 모두 중요한 화가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과 북의 미술사학계가 이상좌의 작품에 대해 보는 시각 면에서는 대단히 큰 편차를 지니고 있다. 즉, 남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이상좌의 모든 작품을 전칭작(傳稱作)으로 보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북의 미술사학계에서는 그의 모든 작품을 그의 진작(眞作)으로 인정하는 데 있다. 그러한 시각의 편차가 생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상좌의 『송하보월도』라든가 『박주삭어도(泊舟數魚圖)』 등등을 남측의 미술사학계에서 회의적으로 보아 온 관점은……, 이러한 전존(傳存) 하는 이상좌의 작품들에는 마하파(馬夏派) 화풍의 영향이 역력한데, 지금까지 이상좌의 아들로 알려져 온 이숭효와 이흥효, 그리고 그의 손자라 알려져 온 이정의 전존 작품에는 마하파 화풍의 영향이 거의 없으므로 이상좌가 과연 마하파 화풍의 그림을 그렸는가가 의심스럽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성립된 것이다. 이 논리는 화가가 일생에 걸쳐 시도하는 자유로운 화풍의 구사라든가 발전적인 창작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단순한 단편적 시각에 의한 논리이기 때문에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이숭효와 이흥효가 이상좌의 아들이 아니고 손자라면, 그리고 그 가운데를 연결해 주는 또 한 세대의 화가와 그의 작품이 있다면, 우리는 그간 부정되어 온 이상좌의 작품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게 된다.
3. 이상좌의 화원 가계 4대 고정(考正)
지금까지 이상좌의 화원 가계에 대하여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이상좌, 이숭효, 이흥효, 이정' 조에서 인용된 옛 문헌은 아래와 같다.[주10]
(1) 李楨哀辭曰, 楨父崇孝, 祖陪連, 曾祖小佛, 俱以畵擅名, 父早亡, 養于其孝叔興孝. (許均, 揀竹)
(2) 李上佐子興孝亦善畵, 以寫明宗御用, 付軍職, 筆法慕金禔云. (魚叔權, 稗官雜記)
(3) 李禎上佐之子也. (南泰應, 聽竹畵史)
(4) 稗官云上佐子興孝. 畵史曰上佐子李楨互異. (李肯翊, 燃藜室 別集)
위의 기록 (1) 허균의 ‘간죽(揀竹)’[주11]에서는 틀림없이 이상좌의 화원 가계 4대를 “小佛 - 陪連 - 崇孝 / 興孝 - 楨”으로 설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이숭효와 이흥효가 이상좌의 아들로 되어 있는 다른 기록만을 참고하여 “李上佐- 李崇孝 / 李興孝- 李楨”으로 이상좌의 화원가계 3대를 설정하였다.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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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의 ‘揀竹’ |
4대 고정 |
5대 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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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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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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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小佛 |
李上佐 |
李上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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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陪連 |
李自實 |
李自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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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李崇孝 |
李崇孝 |
李崇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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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李楨 |
李楨 |
李楨 |
이들 4대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절대적인 기록은 허균(許均)의 『이정애사(李楨哀辭)』이다. 『패관잡기』나 『청죽화사』, 『연려실 별집』은 고증에 소홀한 후대의 객관적인 기록이다. 분명 허균은 이정과 교유가 있던 당대의 인물이므로 허균의 기록은 신뢰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인정하여야 하며, 고증이 결여되어 있는 막연한 후대의 기록이 당대에 이정과 절친하였던 허균의 기록보다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허균의 기록은 당사자의 1차 사료(史料)이기 때문이다.
허균은 당대에 승려들과 매우 가까이 지냈기에 유림(孺林)들의 지탄을 받았다. 즉 그는 금강산을 자주 찾았고, 그때 장안사에서 이정을 만나 교유하였음이 분명하다. 허균이 제시한 4대는 이상좌의 가계를 연구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기록이다. 이에 따라 이상좌란 이름을 분석하여 보면, 공교롭게도 상좌(上佐)란 곧 승려(僧侶)의 한 직위의 호칭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4대의 가계에서 이상좌라는 이름과 뜻이 통하는 이름은 오직 소불(小佛)이 유일하다. 즉, 소불(小佛)은 이상좌를 의미한 이름이다.
그렇다면 배련(陪連)은 누구인가? 그 역시 화원 화가였는가? 배련(陪連)은 이자실(李自實)이다. 배련이 이자실이라는 사실은 선조38년(1605) 의과(醫科)에 급제하여 의과방목(醫科榜目)에 수록된 견후증(堅後曾)의 기록을 통하여 입증된다. 견후증의 기록 부분에 그의 처부(妻父)가 이흥효로, 처조부(妻祖父)가 이자실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주12] 소불과 배련을 검토하여 보면 소불(小佛)은 상좌(上佐)란 이름과 의미가 상통(相通)하듯이, 배련(陪連)은 자실(自實)이란 이름과 의미가 아주 잘 어울린다.
4. 이자실의 작품에 나타난 이상좌의 영향
배련이 이자실이라는 사실이 이제 입증됨으로써 우리는 이자실의 작품을 통하여 이상좌의 미술세계를 재검토해 볼 수가 있는 당위성을 갖게 되었다. 과연 이자실의 미술세계에는 마하파(馬夏派) 화풍의 영향이 전혀 없을까?
이자실의 가장 확실한 전존작품으로는 『관음32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가 있다. 필자는 이 그림의 실물을 호암미술관이 1994년도에 개최한 “고려불화전”에서 볼 수가 있었다.
원래 이 그림은 1550년 4월에 인종(仁宗)의 비(妃)인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양공(良工)을 모집하여 이자실이 그림을 그리게 한 후 전남 영광 도갑사(道岬寺) 금당에 봉안케 했던 탱화(幀畵)로서, 그림의 크기는 235☓135cm[주13]이며, 현재 일본의 지은원(知恩院)에 소장되어 있다.[주14]
그런데 이 『관음32응신도』는 이른바 안견파(安堅派)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마하파 화풍이 혼합 사용된 형태로 그려져 있다. 특히 이 그림에 나타난 수목의 필치와 이상좌작 『박주삭어도』에 나타난 수목의 필치를 비교해 보면 빼어다 박은 듯하여 시사하여 주는 점이 매우 크다.
즉, 이자실의 『관음32응신도』에 마하파 화풍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그의 부친 이상좌의 영향이다. 이상좌의 작품 『송하보월도』는 조선화 되어 가는 마하파 화풍의 대표적인 그림이기에,[주15] 그의 아들 이자실의 『관음32응신도』에 이상좌의 조선화된 마하파 화풍의 영향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숭효와 이흥효, 이정의 전존 작품에 전혀 나타지 않는 마하파 화풍이 나타난다고 하여 이상좌의 작품인가를 회의적으로 보아 왔던 『송하보월도』라든가 『박주삭어도』 등등은 이제는 이상좌의 작품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과거의 잘못된 시각을 버리고 이 작품들이 이상좌의 작품인가를 처음에서부터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한다.
또한, 그동안 이상좌가 안견(安堅: 1418경~1470년대 중반?)의 제자라는 조선시대의 관점을 부정했는데, 이 역시 분명히 재검토되어야 한다. 안견은 분명 마하파 화풍의 그림을 그렸으며,[주16] 안견이 구사한 마하파 화풍은 안견의 어느 제자를 통하여 이상좌에게 계승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5. 이상좌 화원 가계에 대한 재조명
이제 이상좌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부친 북간(北間)을 포함한 5대 가계와 화원 4대의 생존기간을 검토하여 보자.
1. (李)北間(대략1460경~1507~?) : 정국원종공신.
2. 李上佐(대략1480경~1549~?) : 화원.
3. 李自實(대략1510 이전~1560~?) : 화원.
4. 李崇孝(대략1535경~1578~?) : 화가, 적어도 43세 이후에 이정을 득남.
4. 李興孝(1537~1593) : 화원, 이숭효의 동생. 광국원종공신.
5. 李楨(1578~1607)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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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北間, 1460경~1507~?, 정국원종공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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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李上佐, 화원, 小佛, 1480경~1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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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李自實, 화원, 陪連, 1510이전~1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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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李崇孝, 화가, 1535경~1573~? |
4. 李興孝, 화원, 1537~1593, 광국원종공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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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李楨, 화가, 1578~1607 |
5. 女 禹啓賢 |
5. 李穡 |
5. 女 堅後曾, 鍼內醫, 1605~? |
이상좌는 1480년경을 전후로 한 어느 시점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좌는 중종 때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화가로서 생년은 미상(未詳)이지만 그의 졸년(卒年)은 그가 명종(明宗)의 어진을 그린 시기(1549년) 이후임이 틀림없다. 이때는 그가 60대 후반이나 70세경이 되는 때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이상좌는 안견의 화풍을 따르기는 했지만, 안견으로부터 직접 배운 화가는 아니다.
원래 이상좌는 신분이 사인(士人) 이의석과 장녹수의 종이었다고는 하지만, 필자는 이상좌가 조선시대에 출가한 대처승(帶妻僧)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대처승과 비구승(比丘僧)이 한 절간에 함께 하였다. 즉 이상좌는 불화를 그리던 화승이자 화원이었다고 본다.
이상좌의 가계가 화승(畵僧)이었을 가능성은 그의 화원 가계 4대는 모두 탱화 제작과 연관이 깊다는 데서도 엿볼 수가 있다. 즉, 이상좌의 불교화는 『불화첩(佛畵帖: 보물 593호)』의 『나한상(羅漢像)』 초본이 전존하고 있고, 그의 아들 이자실의 탱화(幀畵)로는 『관음32응신도』 등등이 전존하고 있으며, 또한 이정은 11세(1588년)에 금강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는데 그는 금강산 장안사 개수시(己丑: 1589년)에 그 벽에다 산수(山水)와 천왕제체(天王諸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즉 이정이 천왕제체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5세시부터 그의 숙부 이흥효에게서 가법(家法)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침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흥효와 이숭효 역시 불교화를 그리는 가법을 터득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정은 이상좌의 화원 가계 4대 가운데 탱화에 있어 가장 높은 화격(畵格)을 이룩한 화가였다. 이는 허균의 다음과 같은 찬문을 통하여서도 엿 볼 수가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처를 잘 그린 이 몇몇이나 되었는가?
오도자는 이미 신선이 되었고 이공린은 죽어 버렸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장군(李將軍)[주17]을 가장 높이 일컬었으나,
그의 손자 이정은 더욱 기이하고 절묘하게 잘 그리는구나.”
이러한 여러 상황에서 보았을 때 이상좌는 탱화법을 화승(畵僧)에게서, 산수화법은 안견의 그 어느 제자에게서 배웠던 것으로 유추된다. 따라서 이들 4대는 당시 화단을 풍미했던 산수화풍의 작품도 남길 수 있었고, 또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자실은 당대의 산수화풍을 엿볼 수가 있는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탱화 『관음32응신도』를 남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자실의 이 작품은 조선전기회화사에서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한편 이자실의 『관음32응신도』에서 나타나는 수목 묘사법 등등은 그의 아들 이숭효와 이흥효의 작품에도 일부 변화되었기는 하나 대체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의하면 “이흥효는 명종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그려 군직을 제수받았다”라고 한다. 이흥효가 받은 군직은 수문장(守門將)이었던 것 같다.
한편 1591년에 책록된 ‘광국원종공신’ 3등에 ‘부호군 이흥효’라는 인물이 들어 있는데, 이 부호군 이흥효는 화원 이흥효와 동일인으로 판단된다. 광국공신을 따라 공을 세웠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흥효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공으로 ‘광국원종공신’ 3등이 되었는지는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6.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이상좌의 화원 가계 4대를 논술하면서 이상좌를 위시한 화원 및 화가 4대의 생존 연대를 유추해 보았다. 그 결과 이상좌는 안견의 화풍을 따르기는 했지만, 안견으로부터 직접 배운 화가는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하였고, 이상좌 화원 가계에 관한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특히 이자실이 이상좌의 아들임이 밝혀진 바탕 위에서 이상좌의 작품론에 대한 시각을 재정립하였다. 또한 이들 이상좌 이자실 이흥효에 이르는 3대가 모두 어진을 그린바 있는 어진화사라는 점은, 다른 화원 가문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매우 흥미로운 기록적인 일이다.
한편 격월간 『한국고미술』 창간호(1996년 6월)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원복 전 미술부장은 “이상좌의 『어가한면도』는 『박주삭어도(泊舟數魚圖)』라야 옳다”는 글을 기고하였다.[주18] 그 글에서 이원복 전 미술부장은 이동주 선생의 의견(意見)을 빌려 이 『박주삭어도』가 “비록 소품이나 이상좌의 기준작으로 제시될 그림이다”라고 제시하였다.
필자는 이원복 전 미술부장의 견해는 매우 옳다고 본다. 『박주삭어도』, 즉 별칭 『어가한면도』가 이상좌의 기준작이 될 때 『송하보월도』도 역시 이상좌의 작품이라는 구전을 받아들일 수가 있기에 더욱 옳다.
이상좌의 여러 작품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수년 전 이자실이 금니로 그린 『금니 관음도』가 미국과 일본 경매에 출품되어 팔린 바 있다. 기회가 되면 이자실 작품론을 기고하고자 한다.
이제 그동안 한 미술사학자가 제기한 이상좌의 전존 작품들에 대한 회의적 견해가 미술사학계의 보편적 논리로 자리 잡아 온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움을 느끼며, 이상좌 화원 가계 4대를 고정(考整)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을 여기에 추기(追記)하고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추기(追記)
1. 이상좌의 손자 이숭효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 딸의 남편이 우계현(禹啓賢)이다. 그리고 우계현의 손녀사위가 내침의(內鍼醫)를 지낸 오정화(吳鼎和)인데, 오정화는 『근역서화징』을 저술한 서예가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년)의 8대조가 된다. 즉 오세창은 이상좌의 13대 외외손(外外孫)이 되는 셈이니, 이상좌–이자실–이숭효를 잇는 외손은 현존하는 셈이다.
2. 『승정원일기』 130책(탈초본 2783책) 고종 9년(1872년) 12월 4일 갑인조 19/34 기사에 의하면, “⋯⋯⋯穆祖大王第一男, 忠莊公珍, 追封安原大君, ⋯⋯⋯郞署李施贈平海君, 安原大君嫡長子, 學生李輔夏贈東海君, 安原大君嫡衆子, 同敦李文贈崑山君, 安原大君嫡長孫, 萬戶李希武贈崙山君, 學生李哲贈陽平君, 已上安原大君嫡衆孫, 贈參議李秀贈潼陽君, 安原大君嫡長曾孫, 進士李春興贈東南君, 團鍊使李富琦贈遼城君, 學生李德南贈遼陽君, 李承贈遼平君, 中郞將李上佐贈遼海君, 學生李應佐贈遼川君, 李敬佐贈遼陵君, 李仁甫贈遼興君, 已上安原大君嫡衆曾孫⋯⋯⋯”라 되어 있다.
즉, 1872년에 전주이씨의 상계대(上系代)를 군으로 봉하면서 안원대군 자손의 이상좌를 료해군(遼海君)으로 봉한 기록이다. 이에 따라 안원대군파 『선원속보』를 찾아보았다.
穆祖 → 翼祖 → 度祖 → 桓祖 → 太祖
↘ 李珍 → 李輔夏 → 李哲 → 李上佐
↘ 李應佐
↘ 李敬佐
료해군 이상좌와 화원 이상좌는 상하(上下) 계대(系代)가 다르므로 동명이다.
주(註)
[주1] 이의석(李宜碩)은 덕수(德水) 이씨로서 율곡 이이(李珥)의 증조부이니, 곧 신사임당(申師任堂 ; 1504~1551)의 시조부(시할아버지)이다. 이의석은 홍산현감(鴻山縣監)과 판관(判官)을 지냈다.
[주2]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1507년) 5월 22일 갑자조의 첫 번째 기사.
“御朝講。 臺諫啓河漢文、尹衡老、李發等事, 又啓曰: "正言朴兼仁前爲海州訓道時, 校生等枚擧過失, (訢) 于監司, 不合言官, 請改李宜碩奴北間子上佐等, 在廢朝, 投托內人綠水, 又托內需司, 廢主別賜綠水。 反正後, 凡公私賤, 竝還本主, 右奴等至今屬內需司, 而其主上言, 以年歲相當換給。”
번역문 : 조강을 하였다. 대간이 하한문·윤형로·이발 등의 일을 논계하고 또 아뢰기를, "정언(正言) 박겸인(朴兼仁)은 해주 훈도(海州訓導)로 있을 때에, 교생(校生) 등이 그의 과실을 낱낱이 들어 감사에게 호소하였으므로, 언관(言官)에 합당하지 않으니 개정하소서. 이의석(李宜碩)의 종 북간(北間)의 자식 상좌(上佐) 등은 폐조 때에 나인(內人) 녹수(綠水)에게 의탁하고 또 내수사(內需司)에 의탁하여, 폐주가 특별히 녹수에게 준 것입니다. 반정한 뒤에는 모든 공사(公私)의 노비(奴婢)들이 다 본주인에게 돌려졌는데도 지금까지 이 노비들이 내수사에 속해 있으므로, 그 주인이 상언(上言)하여 나이가 같은 사람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주3]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1507년) 5월 28일 경오’조 세 번째 기사 참조.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 데 공을 세워 『정국원종공신』이 된 것이다.
[주4] 『인종실록』 1권, ‘인종 1년(1545년) 1월 18일 임자’조 세 번째 기사.
政院啓曰: "前者大行大王御容畫成事, 宗簿寺例掌爲之, 今則異於常例, 追想而畫之, 最難近眞, 不可泛委於外。 請於明政殿兩廊設畫局, 以平時親侍宗親利城君 【慣】 及平時入侍內官四五人, 監掌其事。 左贊成成世昌知畫格, 請使監校。 杜城令 巖善畫, 私奴上佐亦善畫, 竝令參畫何如?" 傳曰: "可。"
번역문 : “정원이 아뢰기를, "전에는 대행 대왕의 어용을 그리는 일을 종부시(宗簿寺)가 으레 맡았으나, 이번에는 상례(常例)와 달라서 추상(追想)하여 그리므로 진용(眞容)에 가깝기가 매우 어려우니 범연히 밖에다 맡길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명정전(明政殿) 양쪽 행랑에 화국(畫局)을 설치하고 평소에 가까이 모시던 종친인 이성군(利城君) 【이름은 관(慣).】 과 평소에 입시하던 내관 너덧 사람에게 그 일을 감장(監掌)시키게 하소서. 좌찬성 성세창이 그림 격식을 아니 감교(監校) 시키소서. 두성령(杜城令) 암(巖)이 그림을 잘 그리고 사노(私奴) 상좌(上佐)도 잘 그리니, 아울러 참여하여 그리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주5] 신분 사회인 조선시대의 사회에는 양반과 평민, 그리고 천민으로 구분하였다.
[주6] 『명종실록』 9권, ‘명종 4년(1549년) 9월 14일 경진’조 첫 번째 기사.
利城君 慣啓曰: "中宗影幀, 臣監造, 旣不知畫, 又因國喪多事之中, 未能詳察。 頃者奉審, 敎之以翼善冠影幀, 專不髣髴, 心實未安, 待罪。 其時畫師, 請推考治罪。" 【畫師, 上佐石璟。 大抵繪畫之事, 畫師相對, 猶且不類, 況大行之後, 追記御容畫成, 其幀安有近眞之理乎? 尤有未安者, 藏之璿源, 傳之萬世, 毫髮之差, 尙且不可, 矧曰專不髣髴者乎? 利城職掌監造之事, 旣不能致察於當時, 欲推畫師於今日, 嗚呼末矣!】 傳曰: "雖致誠意, 暫見外貌, 畫無所據, 豈能髣髴乎? 其勿待罪。 畫師亦不須推之。"
번역문 :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이 아뢰기를, "중종의 영정은 신이 감조(監造)하였는데 그림을 모르는데다 국상(國喪)으로 인하여 일이 많아서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봉심하시고는 익선관을 쓴 영정이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고 하교하셨는데, 마음이 미안하여 대죄합니다. 그때의 화사(畫師)도 추고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화사는 상좌(上佐) 석경(石璟)이다. 그림은 화사가 실물을 마주하고 그려도 똑같을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구나 대행(大行) 후에 어용(御容)의 기억을 더듬어 그린 영정이 어떻게 진상에 가까울 수 있겠는가? 더욱 미안한 것은, 이 영정은 선원전에다 모셔두고 만세에 전하는 것이므로 털끝만큼만 틀려도 안 될 일인데, 하물며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것이겠는가? 이성군은 감조하는 일을 맡았던 사람으로 그 당시에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서 오늘에 와서 화사를 추고하라고 하였으니 아, 안될 일이다.】하니, 전교하기를, "비록 성의를 다하더라도 잠시 본 외모이고 근거할 만한 그림도 없었을 것인데 어떻게 닮게 그릴 수 있겠는가.? 대죄하지 말라. 화사 역시 추고할 것 없다."하였다.”
[주7] 安輝濬, 『韓國繪畵史』, p.137에서 인용. 서울, 일지사, 1984년 5쇄.
[주8] 金元龍, 安輝濬(共著), 『韓國美術史』, p.277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3년 초판제2쇄.
[주9] 조선미술가동맹편, 『조선미술사』, p.p.223-4에서 인용. 서울, 한마당, 1989년.
[주10] 吳世昌, 『槿域書畵徵』, 계명구락부 발행, 1928년, p.p.67(이상좌), 95(이숭효, 이흥효), 121~124(이정) 참조.
[주11] 허균의 『이정애사』는 『국조인물고』 권41 ‘사자(士子)’에 수록되어 있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이를 아래와 같이 번역하였다.
“이정(李楨)의 자(字)는 공간(公幹)이며, 스스로 부른 호는 나옹(懶翁)이다. 아버지는 이숭효(李崇孝)이고, 할아버지는 이배련(李陪連)이고, 증조는 이소불(李小佛)인데,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태어날 때 금신 나한(金身羅漢)이 그의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오면서 말하기를, “너의 집 3대에 걸쳐 네 사람이 모두 부처를 잘 그려서, 그린 부처가 수천 구(軀)나 된다. 그래서 내가 부처의 뜻을 받들어 너를 위하여 아들을 주어 보답한다.”라고 하였다. 그 꿈을 깨고 나서 아기를 낳으니, 서광(瑞光)이 해를 꿰뚫었는데, 아기의 생김새가 그 나한과 똑 닮았었다.
그의 부모가 일찍 죽어, 작은아버지인 이흥효(李興孝)에게서 자랐다. 5세에 저절로 그림 그릴 줄을 알아 붓을 들고 중을 그렸는데, 그 모습이 아주 그럴듯하였다. 이흥효가 기특히 여겨 가법(家法)대로 가르치니, 10세에 벌써 대성하였다. 특히 산수화(山水畫)에도 정통(精通)하였지만 인물화(人物畫)와 불화(佛畫)가 가장 옛사람에게 근접했다. 그림을 아는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에게 견주기도 하였는데, 그 정채(精彩)는 더 낫다고 한다. 11세에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장안사(長安寺)를 고쳐 지을 때 그가 그린 벽화(壁畫)와 산수화 및 천왕상(天王像) 여러 구(軀)가 다 날아 움직일 듯하고 삼엄하였다. 난우(蘭嵎) 주 태사(朱太史, 명(明)나라 주지번(朱之蕃))가 그 그림을 보고 천고에 최고라고 크게 칭찬하면서 “천하에 짝할 리가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산수화를 그에게서 많이 그려서 갔다. 그러나 이정은 사람됨이 게을러서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 전하는 그의 필적이 드물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 2월에 술병이 나 서경(西京)에서 죽으니, 매우 애석하다.
이정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 모습을 그려서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면서 울곤 했었다. 그의 숙부와 숙모를 부모처럼 섬기어 감히 게을리하지 않았고, 숙부 내외 역시 다 친자식과 같이 여겼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고 마음이 활달하였다. 글씨도 잘 쓰고 시도 할 줄 알았는데, 모두 속기(俗氣)를 벗어나 비범하였다. 겉보기에는 과단성이 없어 무슨 일을 단단히 하지 못할 듯하였으나 그 속은 탁 트이고 조예도 깊었다. 그리고 불교(佛敎)에 대해서 경지가 매우 깊어 그의 이해력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었다.
비록 가난하여 남에게 기식(寄食)하고 지냈으나 의리가 아닌 것은 하나도 취하지 않았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권력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일지라도 탐탁지 않게 여겨 마치 자신을 더럽히기라도 할까 봐 떠나버렸다. 친구인 심우영(沈友英)·이경준(李耕俊)과 아주 교분이 두터워 마치 형제 같았다. 그 두 사람은 여러 해를 그와 사귀었지만, 한 번도 털끝만 한 불의(不義)를 볼 수가 없었다.
좋은 시절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대뜸 술에 취하여 소리 높이 노래를 불렀고, 다니다가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만나면 흥얼거리며 바라보느라 집에 돌아갈 줄도 몰랐다.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여 추워서 떠는 사람을 만나면 옷을 벗어 입혀 주곤 하였는데, 속된 사람들은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헐뜯었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일찍이 세도 있는 정승이 그를 불러서 그림을 그리려고 흰 비단을 마련해 놓고 술을 잘 대접하였다. 이정이 일부러 취한 척하고 누웠다가 한참 만에 일어나, 화물(貨物)을 가득 실은 소 두 마리를 두 사람이 몰고 솟을대문으로 들어오는 모습 한 폭을 그린 다음에 붓을 내동댕이치고 가버렸다. 그 재상이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가 쫓기어 평양에 이르렀다가 그곳의 아름다움을 못내 사랑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고 결국 그곳에서 죽었는데, 임시로 선연동(嬋姸洞)에 매장(埋葬)하였다.
나는 소탈하고 영특하되 행검(行檢)이 적은 것이 서로 맞았기 때문에 나이나 벼슬을 따지지 않고 가장 깊이 서로 사랑해 왔는데,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유명(幽明)을 달리하였으니, 아! 매우 슬프다. 그가 선(禪)을 이야기할 때 현묘한 도리를 파헤쳐 내 마음을 맑게 일깨워줘 신선과 부처의 진리를 터득하게 한 것이 생각날 때마다 그를 위해 식음(食飮)도 폐지하였다. 아, 금신(金身)의 현몽(現夢)이 아니었던들 어찌 이런 사람이 태어났을 것인가? 그 또한 기이한 일이다. 이내 글을 지어 다음과 같이 애도한다.
‘아, 나옹이여! 그 명이 어이 그리 짧은가? 그러나 불후(不朽)한 것이 남아 있으니, 내 어찌 서글퍼하겠는가? 사종(嗣宗)의 호방함이고 자경(子敬)의 허탄(虛誕)함이도다. 정단(井丹)의 청고(淸高)함이고 장강(長康)의 어리석음이도다. 이 모든 아름다운 장점을 아울러 지녔다가 모두 다 버리고 어디로 갔는가? 나는 속세에 어울리지 못하여 세상의 쭉정이가 되었도다. 그대만이 나와 뜻이 맞아 일찍이 교유를 맺어 단짝이 되었네. 사람마다 시끄럽게 모두들 헐뜯고 나무라니, 슬프도다. 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오직 그대만 이끌고 돌아와서 산중에나 숨어 살까 생각했네. 티끌이 날아서 흰 옷을 더럽히니, 난초 지초는 가을바람에 여위었네. 나이도 장차 늙어가니, 빨리 멍에 지워 동으로 가려고 기약했네. 옥루(玉樓)에서 그대를 빨리 데려갈 줄을 누가 알았겠나? 일찍이 인간 세상에 연연치 않았네. 아득히 회오리바람 타고 떠나 붙잡기 어려우니, 봉래산(蓬萊山)에 오색구름만 아득하네. 아련히 옥퉁소 소리 들리니, 나의 눈물 줄줄 흐르누나. 슬프도다. 이 몸이 그 누구를 의지하나, 애통하게 지기(知己)가 이미 선계(仙界)로 떠나갔네. 차가운 바위에 계수나무이고 그윽한 골짜기의 가을꽃이도다. 누구랑 같이 갈거나 서성이노라. 외로운 내 그림자 위로하자니 슬프기도 하구나. 요담(瑤潭)은 맑아서 깨끗하기 그지없고 달빛은 밝아서 온 누리를 비추네. 아련히 그대 모습 보이니, 오장(五章)을 소리 높여 읊조림 듣는 듯하구나. 아! 천추만세토록 어찌 다하랴? 그대 그리는 마음 잊을 수 없으리.’”
[네이버 지식백과] 이정 [李楨]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12] 李成茂, 崔珍玉, 金喜福 [共]編, 『朝鮮時代雜科合格者總覽』,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년. 『醫科榜目』 역시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큰 국가의 기록이다.
[주13] 이자실의 『관음32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는 235☓135cm인데, 32응신이 아닌 22신이 그려져 있다. 즉 수문신(壽聞身)·임왕신(林王身)·제석신(帝釋身)·자재천신(自在天身)·천대장군신(天大將軍身)·대자재천신(大自在天身)·거사신(居士身)·바라문신(婆羅門身)·용남신(龍男身)·용녀신(龍女身)·용신(龍身)·약차신(藥叉身)·건달바신(乾闥婆身)·아수라신(阿修羅身)·긴나라신(緊那羅身)·마호나가신(摩呼那伽身)·불신(佛身)·장자신(長者身)·집금강신(執金剛身)·소왕신(小王身)·부녀신(婦女身)·벽지불신(辟支佛身) 등 만이 남아 있는데, 10신 부분은 잘려 나간 것 같다.
[주14] 『高麗, 영원한 美』, 高麗佛畵特別展 도록, p.p. 68-71, 222.
[주15] 미술사학자 허영환 교수는 『송하보월도』를 중국 송대의 마원(馬遠)이 그린 그림일 가능성을 제기(提起)한 바 있다. 이는 이 그림이 만원의 작품 수준과 맞먹는 그림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만원의 그림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세상의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 그림이 이상좌의 작품이라는 구전(口傳)을 일단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존중(尊重)되어야 한다고 본다.
[주16] 金安老, 『龍泉談寂記』, 本朝安堅 字可度 小字得守 池谷人也, 博閱古畵 皆得其用意深處 式郭熙則爲郭熙 式李弼則爲李弼 爲劉融爲馬遠 無不應向 而山水最其長也.
[주17] 여기에서 李將軍은 李自實이 李楨의 조부로 확인된 이상 李自實을 의미한다. 이자실을 장군이라 한 것을 보면 그는 장군(將軍) 품계(品階)를 받은 것 같다.
[주18] 李源福, 『李上佐의 『魚暇閑眠圖』는 『泊舟數魚圖』라야 옳다』, 격월간 『韓國古美術』 창간호, p.p.80-82. 1996년 6월.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