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한 책을 받아보니 파란 하늘에 펼쳐진 대전현충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표지를 넘겨 앞날개에 필자들을 소개하는 작은 한 장의 사진이 더 눈길을 붙든다. 김선재, 임재근, 정성일 3명의 저자가 현충문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해설사 포즈를 취한 것. 심지어 스피커까지 어깨에 메고서…….

신간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도서출판 문화의힘)는 대전지역에서 진보적 사회운동을 펼쳐온 김선재, 임재근, 정성일이 발로 쓴 대전현충원 안내서이자 훌륭한 우리 근현대사 교과서다.

김선재·임재근·정성일,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도서출판 문화의힘. [자료 사진 - 통일뉴스]
김선재·임재근·정성일,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도서출판 문화의힘. [자료 사진 - 통일뉴스]

“굴곡진 세월을 다 겪고 나서 정정화 지사는 1991년 11월 2일 향년 91세로 눈을 감으시는데요... 남편 김의한 지사 유해는 평양 재북 독립운동가 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시아버지 김가진 선생은 지금까지도 중국 상해에 묘비도 없이 잠들어 있습니다.”(171쪽)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까지 받은 시아버지 김가진 대동단 총재가 남편 김의한을 대동하고 상해로 망명하자 정정화 지사는 뒤따라 망명해 임시정부를 뒷바라지하고 목숨을 걸고 국내에 잠입해 독립자금을 구해오기도 여러 차례, 26년의 망명생활 끝에 해방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전쟁시기 남편은 납북되고 종로경찰서에 ‘부역죄’로 끌려가 형사로부터 ‘손찌검’을 당하는 치욕까지 당해야 했다. “종로서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내 심정은 갈가리 찢겨갔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1묘역 313호 ‘한국의 잔 다르크’ 정정화 지사의 묘역은 씁쓸한 우리 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일깨우고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제1장 독립운동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2장 군사반란, 3장 국가폭력과 사회적 참사, 4장 사회공헌 유공자들의 사연을 많은 사진과 자료를 동원해 보여주고 있다. 하루아침에 써낸 책이 아니라 오랜 기간 필자들이 <오마이뉴스> 등에 기고하며 축적된 내용들을 압축한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추천글에서 짚었듯이 “서울에서 언론매체를 통해 대전현충원을 접하게 되는 경우의 대부분은 김창룡 등 친일과 독재의 흑역사를 갖고 있는 자들의 묘를 대전현충원에서 이장해야 한다는 기사 같은 것들”이었지만 이 책은 군의문사 희생자나 세월호 순직교사 5명, 소방관들의 이야기까지 우리 사회가 잊지 말아야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다.

물론 필자들도 전두환 신군부의 1979년 12.12쿠데타 수뇌부들 중 13명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10명)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영화 <서울의 봄>과 일일이 대조해 가며 고발하고 있고, 제주 4.3 총살 명령자와 진압 책임자들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12.12쿠데타 세력을 진압하려 한 용기있는 군인들과 제주 4.3 총살을 거부한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 등도 선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는 미덕도 갖추고 있다.

더구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민복기 대법원장은 일제시기 춘천 상록회 사건 재판에서 본인이 유죄를 선고한 이초생(이재상) 애국지사와 불과 60m 떨어진 곳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음을 지도까지 제시하며 생생하게 드러내는가 하면, 세월호 관련 순직교사와 선원들, 순직 소방관들이 안장된 대전현충원에 ‘세월호 유족 사찰’ 기무사령관 이재수 중장이 장군2묘역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 과학기술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들’이나 ‘영화 <1947 보스톤> 주인공 손기정’ 등 예상치 못한 영웅들을 이 책에서 만나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책 표지 앞날개에 실린 사진. 저자 3명이 나란히 KAIST 출신이고 지역에서 진보적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다. 왼쪽부터 임재근, 김선재, 정성일. [사진 제공 - 문화의힘]
책 표지 앞날개에 실린 사진. 저자 3명이 나란히 KAIST 출신이고 지역에서 진보적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다. 왼쪽부터 임재근, 김선재, 정성일. [사진 제공 - 문화의힘]

대전에는 대덕연구단지와 KAIST가 있고, 저자 3명이 나란히 KAIST 출신이라는 점에서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전설적 과학자들은 어쩌면 저자들이 꿈꾸던 영웅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이 그 시대의 부름에 뛰어들었듯 모두 진보적 사회운동가로서 대전지역을 누비고 있다.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임재근의 경우 (사)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과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번 책 역시 그같은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대전지역 근현대사의 가장 첨예한 주제를 이론과 실천으로 파헤치고 있는 셈이다.

나고자란 고향에서 진보적 사회운동의 일각을 감당하며, 자신이 발딛고 선 곳의 역사를 몸과 마음으로 깨우치며 안내하는 저자들의 노력은 아직은 우리사회가 희망이 남아있다는 산 증거가 아닐까.

최근 수운 최제우 출세 200년을 맞아 각 지역마다 동학혁명의 흔적을 찾아 그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들이 줄을 잇는 것도 이같은 맥락일 것이며, 이 흐름이 더 나아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과 대종교의 국학운동으로까지 이어지길 바란다면 아직은 너무 과한 기대일까.

꼼꼼한 사실관계 서술과 빠짐없는 사진, 일목요연한 도표화 등 충실히 발로 뛴 흔적에다 탄탄한 역사의식을 토대로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가 더해져 이 책은 두꺼운 무게감만큼이나 풍부한 내용들을 품고 있다.

1919년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발생한 제암리 사건은 그나마 알려졌지만 옆마을 고주리에서 김주일 결혼식을 위해 모였던 일가족 6명이 칼로 살해당하고 불태워져 누구의 유해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어 3기로 분묘가 조성됐다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7묘역에 3기로 모셔진 사연은 이 책이 아니면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113~115쪽)

그러나 한 권의 책에 대충현충원에 묻힌 10만의 ‘묻힌 이야기’를 모두 담기는 벅찰 수밖에 없고, 복잡다단한 역사적 사건들의 전모를 모두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도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정확장판 후속작이 기대되는 이유지만 갓 책을 선보인 저자들에게는 너무 이른 압박일 수도 있겠다.

식민과 전쟁, 분단과 독재의 굴곡진 세월을 거치면서도 친일세력, 독재세력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애국과 반역이 뒤섞여 흐르는 우리 사회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는 서울현충원을 다룬 김학규의 『현충원 역사산책』(섬앤섬, 2022)과 더불어 우리 근현대사 길라잡이로 요긴하고 귀한 책임에 틀림없다.

자본에 지배받고 강대국에 휘둘리는 현실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죽음, 반민족 배신자들의 삶과 죽음이 주는 울림은 크다. 이 책의 독자들이 저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들을 현장에서 듣는 그림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먼저 저자들을 만나고 싶으면 12월 1일 오후 3시 대전 소소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를 찾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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