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내일(11월 12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은평역사한옥박물관’과 ‘고령신씨 종중회’에서 공동주최하여 은평구에 있는 ‘이호철 북콘서트홀’에서 “혜원이 고향, 은평 / 은평의 화원, 신윤복”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은평구 구산동’은 옛 ‘양주 연서 구산리’였다. 1970년대 이전까지 여기에는 혜원 신윤복의 선대 묘소가 있었다. 족보에 따르면 26기 이상이 있었던 것 같다. 쌍분이나 합장 26기라면 엄청난 규모이다. 그렇다면 구산리는 고령신씨 안협공 신공섭(申公涉) 직계 서손들의 세거지로 보아야 한다. 대체로 선산에서 멀지않은 곳에 후손들이 집단 거주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혜원 신윤복을 탐색하여 왔고, 그 결과 고령신씨 안협공파 종중의 주장대로 여기 구산동을 혜원 신윤복의 본향(本鄕)으로 판단하였다. 나는 이번 학술대회에서 『혜원 신윤복의 삶과 예술』을 주제로 발표하게 되었고, 아래에 발표문의 중요한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작품 소개를 위주로 할 것이다. 참석에 아무런 제한이 없으니, 독자분들은 내일 학술대회에 필히 참석하기를 바란다.

1. 나의 혜원 신윤복 연구
2. 혜원 신윤복에 관한 1920~40년대 평가
3. 혜원 신윤복에 관한 제1세대 회화사학자들의 관점
4. 혜원 신윤복 작품의 출현
5. 혜원 신윤복의 가계가 그의 그림에 미친 영향의 가능성|
6. 혜원 신윤복과 조선시대의 춘의도⁃춘화도에 관하여
7. 혜원 신윤복의 미술 창작 분야와 화풍
   1) 혜원 산수와 인물 산수
   2) 혜원 인물화의 백미, 『미인도(美人圖)』
   3) 신선(神仙) 및 고사인물(古事人物)
   4) 화조(花鳥)와 영모(翎毛)
   5) 풍속도

8. 맺음말

7. 혜원 신윤복의 미술 창작 분야와 화풍

혜원이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진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춘의도와 춘화도가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여 먼저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혜원 신윤복은 산수(山水)와 인물산수(人物山水), 인물(人物)과 신선(神仙) 및 고사(古事), 화조(花鳥)와 영모(翎毛), 풍속(風俗) 등 조선시대 회화의 거의 전 분야에서 창작하였다. 이를 아주 간략히 살펴보자.

1) 혜원 산수와 인물 산수

혜원 신윤복의 거의 모든 작품은 배경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많은 작품은 인물 산수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산수만을 그린 작품도 10여 점 넘게, 대략 20여 점 현전한다. 그 일부만 언급하더라도 간송미술관 소장의 『송정아회(松亭雅會)』 『계명곡암도(溪鳴谷暗圖)』 『송정관폭도(松亭觀爆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송하망폭도(松下望暴圖)』 등등이 있다.

혜원은 당시 겸재 정선(鄭歚, 1676~1759)의 진경산수나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15경)의 실경산수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고, 그 영향은 『혜원풍속도화첩』 배경으로 그림에 녹아 들어가 있다. 혜원은 당시 유행했던 남종화(南宗畵)를 그리기는 했으나, 사의(思意)를 중요시한 남종화에 선구적 위치에 선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사의를 중요시한 남종화는 11세기 고려 중기에 들어와 14세기 고려말에 한때 퍼져 나가기도 하였으나 조선이 건국하면서 쇠퇴하였고, 다시 조선중기에 이르러 차츰 나타나더니 조선후기에 크게 확산한다. 이러한 시기에 그려진 혜원의 남종화 산수에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과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15경)가 즐겨 구사한 화풍이 보인다.

『혜원화첩』(일명 취화첩, 건희 3650) 도(6)의 ‘추경산수’. [사진 제공 – 이양재]
『혜원화첩』(일명 취화첩, 건희 3650) 도(6)의 ‘추경산수’. [사진 제공 – 이양재]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삼성그룹의 고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혜원화첩』(일명 『취화첩』, 건희 3650)에 들어 있는 도(3) (5) (6)은 조선중기로부터 내려오는 화법, 특히 현재 심사정과 단원 김홍도의 영향이 보이는 혜원 인물산수의 수작이라 할 만하다. 이 『혜원화첩』은 작품을 그린 연도가 1808년 맹추(음력 7월)의 보름달이 뜨는 백중날(15일)로 규명되는 작품이다.[주1]

조선시대 백중날은 양반보다는 평민(平民)의 명절이었다. 혜원이 1758년생이라면 이 그림은 그의 51세 시 작품이 된다. 조선시대에 50세이면 노년에 속했다. 필자는 1808년이면 혜원이 동가숙서가식하던 시절로 판단한다. 맹추(孟秋, 음력 7월)에 그린 그림이면서도 잎이 떨어진 수목을 그린 것을 보면 매우 쓸쓸한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2) 혜원 인물화의 백미(白眉), 『미인도(美人圖)』

2018년 2월 22일 보물로 지정한 『신윤복 필 미인도』(견본채색,114.0×45.5㎝ 간송미술관 소장)는 혜원이 그린 여인의 전신상(傳神像)이자 전신상(全身像)이다.

『미인도』,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미인도』,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화면에 보이는 “여인은 머리에 가체(加髢)를 얹고 회장저고리에 풍성한 치마를 입고 있다.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로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묘사하였고 은은하고 격조 있는 색감으로 처리하였다. 자주색 회장 머리띠, 주홍색 허리끈, 분홍색 노리개 등 부분적으로 가해진 채색은 정적인 여인의 자세와 대비되어 화면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마치 초상화처럼 여인의 전신상을 그린 미인도는 신윤복 이전에는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19세기의 미인도 제작에 있어 전형(典型)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가 크다.”[주2]

간송미술관 소장의 혜원 『미인도』는 조선시대 미인도 가운데 가장 세련된 필치를 보여주는 『미인도』이다. 혜원은 회견(繪絹) 위에 명주실 같이 가는 선(線)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곱디고운 여성이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옷고름을 살며시 푸는 요염한 자태를, 맵시 있고 단아하게 표현하였다.

혜원은 자필 화제로 자작시(自作詩) “반박흉중만화춘 팔단능여물전신(盤礴胸中萬化春 筆端能與物傳神)”을 쓰고 있는데, 이는 “가슴 속(胸中)에 만 가지 봄기운 가득하니, 붓끝의 초상화(傳神)에 그대로 살아 있네.”라는 뜻이다. 여항(閭巷) 문인(文人)으로서의 혜원의 면모를 보인다. 여기서 ‘전신(傳神)’이라는 말은 초상화를 말하는 단어이다.

이 칠언 한시는 화가가 짓고 쓸 수 있는 한시(漢詩)이니, 혜원 자신의 흉중(胸中)과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칠언시(七言詩)이다. 즉 화제를 보면 그려진 여인은 혜원이 사랑하는 여성임을 말하여 준다. 혜원은 사랑하던 여인의 내밀한 속마음까지 세세히 읽어 그것을 그림으로 표출해 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혜원의 『미인도』는 혜원 미술이 무엇인가를‥‥‥, 혜원 미술 전체를 대변(代辯)해 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전하는 혜원 그림 거의 대부분은 여성이 주인공으로 또는 조연(助演)으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혜원을 ‘여성미의 탐색자’로 본다. 혜원은 그 시대의 여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린, 조선 화단(畫壇) 유일의 화가였다.

3) 신선(神仙) 및 고사인물(古事人物)

2015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최한 ‘그림으로 본 조선통신사’ 전에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공명이 맹획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은 고사(古事, 옛날 일)를 주제로 그린 『고사인물도』가 공개 전시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 그림에는 ‘조선동강제신미○○(朝鮮東岡題辛未○○)’와 ‘조선국혜원사경사화원(朝鮮國蕙園寫京師畵員)’이라는 관지가 있다. 1811년에 피종정과 신윤복이 각각 쓰고 그렸음을 밝힌 그림이다.

이 그림은 혜원이 그린 고사인물도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그림이다. 그러나 현재 분실되어 행방을 알 수가 없다는 보도(2024년 6월 16~17일 자)가 여러 신문 매체에 나온 바 있다.[주3] 그런데 혜원이 그린 신선 그림, 즉 선인도(仙人圖) 가운데 한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혜원화첩』(일명 취화첩)에 네 번째 그림으로 들어가 있다. 이른바 「해상선인도(海上仙人圖)」이다. 게를 탄 선인이 해상에서 생황(笙簧)을 불고 있다. 단편적인 소품이지만은 현재 심사정이나 단원 김홍도의 해상 선인도에 못지않은, 아주 동적(動的)인 작품이다.

『혜원화첩』 도(4) 『해상선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건희 기증품. [사진 제공 – 이양재]
『혜원화첩』 도(4) 『해상선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건희 기증품. [사진 제공 – 이양재]
왼쪽부터 『사녀도』, 신윤복(款).  『사녀도』, 김홍도.  『선인도』, 김득신. [사진 제공 – 이양재]
왼쪽부터 『사녀도』, 신윤복(款).  『사녀도』, 김홍도.  『선인도』, 김득신.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913년에 이성혁으로부터 매입한 『전 신윤복 필 미인도』 1점(덕수 4174, 101.5×38.5cm)이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실존인물의 전신(傳神, 초상)이 아니라 사녀(仕女)를 그린 『사녀도(仕女圖)』이다. 현실 속의 미인도라기 보다는 신선(神仙)을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은 긍재 김득신의 『신선도』나 단원 김홍도의 『사녀도(仕女圖)』(1781년 4월, 지본채색, 덕수 5538, 121.8×55.7cm)와 비교하여야 할 그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전 신윤복 필 미인도』라는 명칭에서 ‘전(傳) 신윤복’을 붙인 것은 신윤복의 관지(款識)가 되어 있으나, 신윤복의 그림이라 단정하지 않고 ‘신윤복의 그림으로 전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 작품을 선인도라는 관점을 버리고 미인도라고 한다면 당연히 간송미술관 소장의 혜원 『미인도』와 대비하게 되는데 간송 소장의 혜원 『미인도』와는 전혀 다른 필치와 분위기의 그림이므로 혜원 작품임이 부정되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전 신윤복 필 미인도』는 미인도가 아니므로, 『사녀도』로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혜원의 작품임을 고정(考正)하여야 할 것이다.

4) 화조(花鳥)와 영모(翎毛)[주4]

혜원의 꽃 그림은 그의 풍속화에 소품으로 자주 등장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단원풍속화첩』과 간송미술관 소장의 『혜원풍속화도첩』의 다른 점은 배경이나 소품이 없고 있음에 있다. 우리는 흔히 꽃과 새나 나비를 함께 그리는 그림을 화조(花鳥), 또는 화조도(畵鳥圖)라고 부른다. 꽃과 새나 나비를 함께 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만 그리거나 새나 나비만 그린 그림도 대체로 화조라 한다.

그리고 고양이나 개, 말, 새 등을 묘사하거나, 특히 세필(細筆)로 상세히 묘사한 그림을 영모(翎毛)라 부른다. 혜원의 그림 가운데 주목할 만한 새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투계(鬪鷄, 싸움 닭)』(23.9×23.6cm, 덕수 2291–14)가 있고, 북에는 조선미술박물관에 『소나무와 매』(108×52cm) 등이 있다.

『투계(鬪鷄)』, 1813년 11월(仲冬, 음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투계(鬪鷄)』, 1813년 11월(仲冬, 음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투계』는 혜원이 1813년에 그린 작품으로 1910년 이왕가미술관이 일본인 ‘곤도 사고로’로부터 사들인 그림이다. 혜원 그림의 특징은 대체로 채색을 짙게 써서, 피사체를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투계』는 현전하는 혜원의 작품(1813년)으로 기년(記年)이 가장 늦은 작품이다. 따라서 회화사학계에서는 혜원의 졸년(卒年)을 추정할 때 1814년 이후로 추정한다.

혜원이 고양이와 개를 함께 그린 그림으로는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의 『묘견도(猫犬圖)』(견본채색, 31.8×16.3cm)가 있고, 개와 말은 혜원의 풍속화 여러 점에 등장한다.

5) 풍속도

혜원의 풍속화는 위에서 춘의도와 춘화도를 논하면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런데 혜원의 풍속화는 당시 사회의 풍류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처럼 노동 현장을 그린 그림도 있다. 이는 혜원도 한때 그 시대에 유행하였던 풍속화를 그리는 것에도 충실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혜원의 풍속화는 사진기가 없었던 조선시대 후기의 의상(衣裳)이라든가 풍류(風流) 및 풍속(風俗)를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 혜원 신윤복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에로티시즘의 천재적 화가이다. 섬세한 선으로 동작과 표정의 사실성을 그려낸다. 혜원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상황에 맞는 심리적 표정과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한-중-일의 춘화도를 비교하여 보면, 중국의 춘궁이나 일본의 춘화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실적인 표정이 혜원의 춘화도에서는 나타난다. 혜원의 작품으로 관지가 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춘화도 가운데 진안(眞贋)을 구분하는 척도가 바로 그 사실적인 표정에 있다. 혜원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회화사는 쓸쓸하고 삭막(索漠)했을 것이다. 혜원의 에로티시즘은 단순히 성적(性的) 기호(嗜好)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상춘야흥』,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상춘야흥』,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후기 악기 연주(演奏)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악기를 다루고 노래를 하는 음률(音律)은 선비들이 즐겨 배우기도 하였다. 혜원의 이 풍속화는 상당히 젊잖은 편에 속한다.

『무녀신무』,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무녀신무』,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악기 연주는 민중 무속의 굿 마당에서도 반드시 있어야 했다. 조선시대에 굿 마당을 그린 그림은 혜원의 이 그림이 거의 유일한 그림으로 보인다. 물론 대한제국 시기의 기산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풍속화에 굿 모습이 단편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연소답청』,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연소답청』,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림의 윗부분에 그려진 말을 탄 두 기녀와 의관을 흐트러트린 두 양반, 그림의 왼쪽 아랫부분에 그려진 일반 여인의 모습을 긴장 있게 대비시킨 놀랄만한 그림이다.

『청금상련』,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청금상련』,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한바탕 풍류가 펼쳐지는 이곳은 기와를 올린 높은 담장과 연못, 정원 조경을 보아, 그리고 한껏 차려입은 남자들의 복식으로 보아 정삼품 이상의 당상관으로 보이며, 이 무대는 양반가의 후원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엄숙하여야 할 특별한 장소이다. 그러한 곳에서 이들은 감히 풍류를 즐기고 있다.

그림에 보이는 장죽의 담뱃대를 물고 있는 여성은 머리에 의녀(医女)의 ‘가리마(加里亇)’를 쓰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부에 후한(後漢)의 재상(宰相) 공융(孔融)[주5]이 지은 “좌상(座上)에는 손님들이 항상 가득하고, 술독에는 술이 비지 않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座上客常滿, 樽中酒不空, 吾無憂矣.)”를 원용하여 “좌상에는 손님들이 항상 가득하고, 술 중의 술이 비지 않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座上客常滿, 酒中酒不空, 吾無憂矣.)”라고 화제시(畵題詩)를 적고 있다.

여기서 ‘주중주(酒中酒)’란 미주(美酒)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그림에 주안상(酒案床)은 그려져 있지 않다. 술상까지는 그리지 않고, 화제(畫題) 시(詩)로 처리한 것이다. 혜원으로서도 그리는데 눈치를 보았음 직한 그림이다.


주(註)

[주1] 필자, 『혜원 신윤복의 혜원화첩』, 2024년 1월 29일, 인터넷 통일뉴스에 연재한 글.

[주2]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포탈 『신윤복 필 미인도』 설명문, 2024년 10월 현재.

[주3] 분실된 이 작품이 빨리 제 자리로 돌아왔으면 싶고, 향후 ‘은평역사박물관’으로 기탁되었으면 한다. 이 작품은 분실 신고가 되어 있으므로 선의의 취득이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분실이나 유실된 문화재에 관해서는 장물 취득의 소멸시효가 없다.

[주4] 혜원의 영모에 관한 연구는 이원복의 『蕙園 申潤福의 翎毛畵 試考』가 있다.

[주5] 공융(孔融, 153~208) : 노(魯)나라 사람이다. 자는 문거(文举), 공자(孔子)의 20세손(世孫)으로 태산도위(太山都尉) 공우(孔宙)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기이한 재주가 있었고 성실하며 학문을 좋아했다. 한헌제(漢獻帝) 즉위 후 북군중후(北軍中侯),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북해상(北海相)을 지냈다. 그래서 당시에 ‘공북해(孔北海)’라 일컬어졌다. 성품이 빈객(賓客)을 좋아하고 남들과 정치를 논할 때 격렬했다. 뒤에 조조(曹操)의 노여움을 사사 죽임을 당했다. 시문(詩文)에 능해서 건안칠자(建安七子)중 일인이 되었다. 명(明)의 장부(張溥)가 『공북해집(孔北海集)』을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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