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안고 살았다. 둘째 작은아버지는 기질과 풍모, 성격과 생각까지 큰형인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용아가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남달랐고, 배짱이 있었지. 4.19에 참여하고, 학생 민통련 활동을 할 때 보면 지도력도 있었어. 또래 중에서 항상 리더 역할을 했지. 그런 점은 정남이하고 참 비슷했어.”

기질과 풍모, 성격과 생각까지 큰형인 아버지를 쏙 빼닮았던 둘째 작은아버지는 1977년 6월, 남민전에 가입해 대외연락부책을 맡았다. 사진은 밀양을 떠나 달성군 구지에서 지내던 당시의 가족사진. 뒷둘의 큰 소년이 아버지이고, 앞줄의 어린아이가 아버지보다 여덟 살이 어린 둘째 작은아버지 안용웅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기질과 풍모, 성격과 생각까지 큰형인 아버지를 쏙 빼닮았던 둘째 작은아버지는 1977년 6월, 남민전에 가입해 대외연락부책을 맡았다. 사진은 밀양을 떠나 달성군 구지에서 지내던 당시의 가족사진. 뒷둘의 큰 소년이 아버지이고, 앞줄의 어린아이가 아버지보다 여덟 살이 어린 둘째 작은아버지 안용웅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남민전 조직에 대해 동생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작은아버지는 형도 모르게 조직에 참여했다. 어느 날 중앙위원회에 동생의 조직 가입이 안건으로 올라오자, 아버지는 기분이 묘했다고 한다. 든든하고 뿌듯하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이 엇갈렸다.

그런 동생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작은아버지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저 어디서든 살아있겠거니 여겼다. 그런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경이 드러난 일이 있었다. 그 일은 내게도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2018년 어느 날 오전이었다. 아침 식사를 챙겨드리고 잠시 우리 집에 다녀왔는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침에 내게 광화문에서 열리는 집회에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은 내가 모셔다드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오늘은 안 된다고 했더니 아버지 혼자서 나가신 모양이었다.

그때만 해도 병세가 심하지 않을 때였다. 나는 집회를 준비하는 후배에게 연락해 아버지를 잘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아버지가 귀가하지 않았다. 후배에게 연락하니 집회는 벌써 끝났고, 모두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고 한다.

아버지의 행방을 알 수 없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그러다 카드 사용 내역이 나의 휴대전화에 떴다. 카드가 사용된 곳은 코레일이었다.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끊은 것이다. 요금을 확인하니 서울역에서 동대구역으로 가는 KTX였다. 두어 시간쯤 뒤에는 택시비 결제와 음식점 결제가 이어졌다. 아버지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갑자기 대구에 가실 일이 생겼는지, 그렇다면 왜 말씀을 안 하셨는지 혼란스러웠다.

밤늦게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아버지였다. 급히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의 휴대전화로 내게 전화를 건 사람은 경찰이었다. 대구 대명동에 있는 파출소라 했다. 그는 “주택가에서 배회하는 할아버지를 파출소로 모셔 왔는데, 휴대전화가 꺼져 있어서 새로 충전한 뒤 저장된 아들 번호로 연락했다”라고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비로소 안도했다. 대구의 후배에게 급히 연락해 파출소로 좀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배가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와 일단 하룻밤을 묵게 한 뒤, 다음날 동대구역에서 서울행 KTX 기차에 태워 드렸다.

나는 도착 시간에 맞춰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기차가 천천히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좌석의 객차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아버지가 기차에서 내렸다. 한눈에 봐도 지친 모습이었다. 아버지를 부축해 대합실로 올라가며 물었다.

“갑자기 대구는 왜 가셨어요?”

“용아를 만나러 갔지. 근데 예전에 용아랑 같이 살던 대명동 집을 도저히 못 찾겠더라. 용아가 나를 많이 기다릴 텐데……. 용아한테 통 연락이 안 돼서 걱정이다.”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병세가 한층 깊어진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 착잡했다. 그보다 더 마음 아팠던 건 오랫동안 아버지의 가슴 속에 담아둔 그리움을 확인해서였다. 작은아버지로부터 소식이 끊어진 지 40년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도 동생에 대한 걱정이 회한처럼 남아 있었다.

임동규 선생 사건이 터지고, 작은아버지가 월북했다는 발표가 나면서 아버지에게도 위기감이 몰려왔다. 다행히 통혁당 재건 사건으로 종결되면서 남민전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재문 선생과 상의해 중앙위원을 사임했다. 언제든 수사가 아버지에게 들이닥쳐 조직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향식 선생도 비슷한 시기에 중앙위원을 사임했다. 1979년 4월에 ‘땅벌작전’ 중 조직원 한 사람이 현장에서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땅벌작전’은 당시 ‘칠공자’라고 불릴 만큼 개차반인 행동거지로 민중들로부터 욕을 먹고 있던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집을 터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경찰이 보기에 단순 강도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게 많았다. 경비원은 경찰에, 강도들이 ‘혁명자금’ 운운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대공 혐의를 두고 본격적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작전에 가담한 조직원들은 이재문 선생의 안가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전을 총괄했던 신향식 선생이 결과에 책임을 지고 중앙위원을 사임한 것이다.

이처럼 조직에 서서히 위기가 닥쳐왔다. 하지만 투쟁은 한시도 멈출 수 없었다. 8월에는 ‘꽃불작전’을 실행했다.

가발업체인 YH무역의 부당한 폐업 조치에 맞서 8월 9일부터 야당인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벌이는 여성 노동자들(오른쪽). 경찰은 8월 11일 새벽에 1,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강제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진압하는 경찰에 떠밀려 추락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에 끌려가는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왼쪽) [사진 제공 - 안영민]
가발업체인 YH무역의 부당한 폐업 조치에 맞서 8월 9일부터 야당인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벌이는 여성 노동자들(오른쪽). 경찰은 8월 11일 새벽에 1,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강제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진압하는 경찰에 떠밀려 추락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에 끌려가는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왼쪽) [사진 제공 - 안영민]

당시 가발업체인 YH무역의 부당한 폐업 조치에 맞서 8월 9일부터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이 야당인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경찰은 8월 11일 새벽에 1,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강제 진압에 나섰다. 농성 중인 노동자들은 물론 야당 의원과 취재 기자까지 마구잡이로 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진압하는 경찰에 떠밀려 추락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박정희 유신독재는 강력한 언론 통제로 이 사건을 일절 보도하지 못하게 막았다.

‘꽃불작전’은 김경숙의 억울한 죽음과 박정희 유신독재의 폭력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작전은 민투의 산하 조직인 민학련(민주학생구국연맹)에서 수행했다. 민학련의 조직원들은 유인물을 제작해 청량리역 부근과 무교동, 서울역 일대에 ‘파라슈트’ 방식으로 대량 살포했다.

유신정권에서 난리가 난 건 당연했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는 이번의 ‘불온전단’ 살포 사건만큼은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며 작정하고 덤볐다. 철필로 써서 등사기로 찍어낸 유인물의 필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한 조직원이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단서를 잡은 경찰의 추적은 집요했다. 가족과 주변인, 친구들까지 모조리 미행했다.

결국 운명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1979년 10월 4일 새벽 2시, 권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서울 잠실 시영아파트 11동을 에워쌌다. 이들은 아파트 경비원을 가장하고 408호의 문을 두드렸다. 이곳은 이재문 선생의 안가였다. 문이 열리는 순간 무장경찰이 일제히 아파트 안으로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안가에 있던 네 명의 조직원들과 경찰이 격투를 벌였다. 그새 이재문 선생은 서류 보따리를 창밖으로 던지고, 칼로 자신의 양쪽 가슴을 찔러 절명을 시도했다. 조직원들은 모두 체포됐다. 이재문 선생은 깊은 자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불온전단’ 살포의 주동자 검거 작전에 나섰던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들은 이재문 선생이 창밖으로 던진 서류 보따리를 찾아내고 깜짝 놀랐다. 당시 이재문 선생은 조직의 중요한 내용을 안가에 종이 문서로 보관하고 있었다. 디스켓도 USB도 없던 시절이었다. 뜻하지 않게 남민전이라는 대규모 조직을 적발한 경찰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10월 9일, 내무부 장관인 구자춘은 흥분된 표정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10월 4일 새벽, 남민전 이재문 서기의 잠실 안가가 경찰에 급습당하면서 남민전 조직은 결성 44개월 만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10월 9일 내무부장관 구자춘이 발표한 내용을 1면 톱기사로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기사. [사진 제공 - 안영민]
10월 4일 새벽, 남민전 이재문 서기의 잠실 안가가 경찰에 급습당하면서 남민전 조직은 결성 44개월 만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10월 9일 내무부장관 구자춘이 발표한 내용을 1면 톱기사로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기사. [사진 제공 - 안영민]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남민전을 적발하고, 치안본부를 책임지는 내무부 장관이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면서 중앙정보부가 발칵 뒤집혔다. 중앙정보부는 남민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실은 대공분실도 마찬가지였다. ‘불온전단’ 살포 사건을 추적하다 우연히도 이재문 선생의 안가를 찾아낸 것이다.

이 때문에 박정희 앞에서 경호실장 차지철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도대체 중정은 뭘 하고 있었기에 경찰이 적발할 때까지 간첩 조직의 실체도 파악하지 못했냐’라고 힐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남민전 사건 발표 후 보름여 만에 터진 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에는, 자신을 힐난한 차지철에 대한 악감정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결국 차지철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재문 선생의 안가가 급습받았다는 소식은 아버지에게도 전해졌다. 아버지는 다음날인 10월 5일, 추석 차례를 지내자마자 급히 집을 나왔다. 아버지가 몸을 피하고 난 뒤 경찰들이 우리 집을 덮쳤다. 이재문 선생의 체포와 함께 조직의 실체가 모두 드러나고 말았다. 아직 검거되지 않은 조직원들도 하나둘씩 체포됐다. 아버지 역시 10월 27일, 경찰에 체포됐다.

“조직을 지켜낸다는 건 지도부를 지켜내는 일이야. 새로운 아지트를 확보해서 이재문 동지와 다른 조직원들을 완전히 분리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어. 그 부분이 너무도 안타깝고 속상해. 어떤 상황에서라도 지하조직의 보위 원칙을 지켜내야 했는데……. 그게 우리의 한계였어.”

그것은 남민전의 한계이면서 이재문 선생의 한계이기도 했다. 이재문 선생은 자신보다 남을 먼저 챙기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어렵게 형님한테서 받아온 목돈도 안가를 구하는 데 쓰지 않았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동지들의 생활비와 활동비를 챙기는 데 먼저 썼다. 아버지는 그런 이재문 선생을, “인정이 너무 많았던 게 운동가로서 장점이자 단점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이재문 선생의 체포와 함께 남민전은 무너졌다. 44개월간 목숨을 건 남민전의 투쟁도 이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남민전이 침탈당하고 얼마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도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18년의 독재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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