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반독재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 맞서 도덕적 우위에 있었다. 광포한 탄압 속에서도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반제, 반미, 민족해방은 드러내놓고 주장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이었다. 해방 직후와 전쟁 전후의 남로당에 대한 끔찍한 탄압의 기억과 ‘빨갱이’ 논란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치며 오직 ‘반공’만이 유일한 기준, 유일한 가치가 됐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 남민전은 산하에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를 결성했다. 민투는 유신독재 타도라는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남민전은 민투를 내세워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진행했다.

남민전은 ‘야간사령부’란 별칭을 갖고 철저히 지하에서 비공개로 움직였다. 대신 ‘주간사령부’란 별칭을 가진 민투가 반유신투쟁의 선봉을 맡았다. 남민전의 조직원은 ‘전사’로 호칭했고, 민투의 조직원은 ‘투사’로 불렀다. ‘투사’ 중에서 검증된 이들을 ‘전사’로 받아들였다.

민투의 조직원들은 남민전이란 상부 조직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들 남민전이 침탈당한 뒤에야 그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 남민전의 존재에 대해서는 철저한 보안이 유지됐다. 남민전은 이처럼 이원화된 조직을 유지하며 44개월 동안 반유신 투쟁을 공세적으로 진행했다.

“남민전과 민투로 이원화해 조직을 운영한 건 이재문 동지의 치밀한 판단이었어. 반유신 투쟁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민족해방이라는 우리 운동의 전략과 목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거든. 뿌리 깊은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고, 체계적인 학습이 부족하기도 했어. 그래서 내가 맡은 교양선전선동부의 중요한 역할이 민투 조직원들을 제대로 학습시킬 교양자료를 만드는 일이었지.”

군사독재 시절에는 불심검문이 일상이었다. 전투경찰이나 사복경찰이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세우고, 가방이나 소지품을 뒤지는 모습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군사독재 시절에는 불심검문이 일상이었다. 전투경찰이나 사복경찰이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세우고, 가방이나 소지품을 뒤지는 모습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남민전이 활동하던 시기는 유신독재가 가장 악랄했던 때였다. 야간 통행금지와 정보경찰의 촘촘한 감시망이 온 사회에 그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유신정권은 일제강점기 전시체제에서 전 조선인의 생활을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든 ‘애국반’과 같은 ‘반상회’를 통해 전 국민을 관리했다. 조금이라도 동향이 이상한 사람은 즉시 신고하도록 했다.

거리에는 불심검문이 일상이었다. 전투경찰이나 사복경찰이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세우고, 가방이나 소지품을 뒤지는 모습은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었다.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세력은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남민전은 여러 차례나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유인물 살포 투쟁을 전개해 정권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재문 동지는 ‘투쟁을 쉽게 하려다 조직원이 희생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라고 강조했어. ‘일은 크게 터뜨리되 적이 알았을 때는 이미 우리 사람이 그곳에 없어야 한다’라는 걸 철칙으로 여겼지.”

이를 위해 남민전은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파라슈트(Parachute, 낙하산) 작전’이다. 이 작전은 애드벌룬을 이용해 유인물을 공중에서 대량으로 살포하는 방식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건물 옥상에서 애드벌룬 줄에 유인물 뭉치를 노끈으로 매단다. 그리고 쑥으로 만든 담배에 불을 붙여 노끈에 끼운 다음, 애드벌룬을 공중으로 띄워 보낸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쑥담배가 다 타고 노끈이 끊어지면, 공중으로 올라간 애드벌룬에서 유인물이 광범하게 살포되는 것이다.

여러 차례의 실험을 거쳐 일반 담배보다는 쑥으로 만든 담배가 공중으로 올라갔을 때 쉽게 꺼지지 않고 잘 탄다는 걸 알아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한 번에 1, 2만 장씩 대량으로 뿌릴 수도 있었다. 그사이 투쟁에 참여한 조직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파라슈트 작전’은 유인물 대량 살포에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 자주 활용됐다.

창의적인 방법은 또 있다. 시내버스에 탄 뒤 목적지로 정한 정류장에 서면, 버스 지붕의 환기구 밖으로 유인물 뭉치를 올려놓고 내렸다. 뒤이어 버스가 출발하면 유인물이 바람에 날리며 거리에 한가득 뿌려졌다. 이때도 조직원은 안전하게 피신한 뒤였다.

남민전의 유인물 살포는 서울 시내 중심가에서 인파가 몰리는 점심때나 퇴근 시간을 활용해 진행됐다. 요즘 같으면 유인물 한 장이 뭐 그리 대수냐 싶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투쟁이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속담처럼 주위에는 온통 정보원들이 득실거렸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사람들끼리 말 한마디 편하게 할 수 없었다. 술자리에서 박정희를 욕하다가 잡혀가던, ‘막걸리 보안법’ 세상이었다. 택시에서 정부를 비판하면 기사가 바로 택시를 파출소로 몰고 가 신고했다.

그래서 유인물 한 장의 힘이 컸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체념하던 시절에 박정희를 규탄하고 애국적 양심을 일깨우는 글은 민중의 가슴을 후련하게 했다.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다. 독재정권은 유언비어 날조와 유포를 들이대며 겁박했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 가듯 진실의 내용은 금세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남민전의 유인물 대량 살포가 수시로 벌어지자 정권은 당황했다. 공안당국은 시내 건물 옥상마다 사복경찰을 배치하고 감시에 나섰다. 버스정류장에도 사복경찰이 배치됐다. 하지만 남민전의 조직원들은 감시망을 피해 가며 투쟁을 이어나갔다.

투쟁을 통해 남민전은 빠르게 성장했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사와 노동자, 농민들 속에서 많은 핵심이 발굴됐다. 이들을 중심으로 민투 산하에 교사, 노동자, 농민, 학생 조직을 결성했다. 대구와 광주 등 지역에도 조직을 확대했다. <민중의 소리>라는 지하신문도 발행했다.

조직이 확대되면서 조직원의 교육도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아버지는 교양선전선동부 책임을 맡아 교양자료 노트를 정리했다. 1960년대에 이재문 선생과 동지적 관계를 맺은 뒤로 노트 정리는 늘 아버지의 역할이었다. 통일전선론, 항일무장투쟁사, 정치경제학, 조직론 등을 기본으로 하고, 김일성방송대학의 철학, 역사 강좌 내용도 활용했다. 아버지는 조직원들의 사상 수준을 높이고 통일단결을 이루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치밀한 조직 관리와 운영, 치열한 토론과 학습, 그리고 거침없는 투쟁……. 남민전은 유신독재 타도와 민족해방의 신념과 낙관으로 똘똘 뭉쳤다. 이때가 남민전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그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남민전에도 위기가 닥쳤다. 위기는 주체의 결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객관적 조건에서 비롯됐다. 조직이 처한 근본적 한계였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나름의 노력도 있었지만, 그 노력이 도리어 조직을 더 위기에 빠뜨렸다.

남민전에 찾아온 위기의 본질은 ‘재정’이었다. 조직이 확대되면서 재정 문제가 점점 어려워졌다. 남민전은 조직원들이 각자 수입의 10%를 납부하며 재정 문제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곧 한계에 부닥쳤다. 투쟁을 거듭하면서 하나둘씩 수배자가 생겼다. 이들이 머무를 안가(安家)도 필요했다. 조직원들의 헌신으로 풀어나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른 수건을 짜는 방식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활동을 중단하고 숨어지낼 수는 없었다.

이재문 선생은 고심 끝에 형님에게 연락했다. 당시 이재문 선생의 형님은 서울 중구 쌍림동에 살고 있었다. 형님의 집 앞에는 늘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건너편 건물 옥상에도 무장병력이 배치돼 24시간 감시했다. 그런 상황임에도 이재문 선생은 형님에게 연락해 집 한 채를 구할 만한 거금을 지원받았다. 형님에게도 무리한 액수였지만, 인혁당 관련자들의 가혹한 마지막을 보았기에 쫓기는 동생에 대한 걱정과 비통함이 컸을 것이다. 아버지 역시 주위의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 목돈을 만들어 보탰다.

남민전의 중앙위원인 이재문, 신향식 선생과 아버지는 자금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세 사람은 자력갱생의 방안을 생각했다. 재벌이나 고위공직자 집을 털어 자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민중을 착취하고 부정부패로 재물을 축적해 온 것에 대한 경고와 응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전’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치밀하게 준비했다고는 하나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당연히 어설플 수밖에 없었다. 즉시 신고가 들어갔고,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기 시작했다. 작전에 나선 조직원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이재문 선생의 안가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1979년 봄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쫓기던 조직원들이 이재문 동지의 잠실 안가에 하나둘씩 들어와 살게 됐지. 이재문 동지와 조직의 안전을 위해서는 제2, 제3의 안가가 필요했어. 어떻게 해서든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어.”

1979년 4월에 남민전 핵심 조직원인 임동규 선생이 구속되면서 남민전도 큰 위기가 닥쳤다. 당시 통혁당 재건 사건으로 발표된 사건에는 안재구 교수의 동생인 안용웅도 관련돼 있었고, 치안본부는 그가 일본을 통해 월북했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 기사. [사진 제공 – 안영민]
1979년 4월에 남민전 핵심 조직원인 임동규 선생이 구속되면서 남민전도 큰 위기가 닥쳤다. 당시 통혁당 재건 사건으로 발표된 사건에는 안재구 교수의 동생인 안용웅도 관련돼 있었고, 치안본부는 그가 일본을 통해 월북했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 기사. [사진 제공 – 안영민]

1979년 4월에는 핵심 조직원인 임동규 선생이 붙잡혔다. 임동규 선생은 수사기관이 의심하는 대로 통일혁명당 재건을 위해 활동했다고 진술했다. 그 덕분에 남민전 조직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 사건 역시 시발점은 자금 문제였다.

남민전은 자금 마련을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때 접촉한 사람이 일본에 있는 임동규 선생의 숙부였다. 당시 임 선생의 숙부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상공위원회 부회장으로, 사업을 크게 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임 선생 숙부와의 접촉을 반대했다. 총련의 간부라면 이미 외부로 드러난 인물이었다. 당연히 주위에서 보는 눈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재정난을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이재문 선생은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임동규 선생의 숙부를 만나보게 했다. 그때 일본으로 간 사람이 아버지의 동생이자, 내게는 둘째 작은아버지인 안용웅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나는 이재문 동지를 크게 비판했어.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나면 꼭 탈이 나는 법이거든. 용아(둘째 작은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용아’라고 불렀다)는 이해경 동지가 추천해 남민전에 가입했고, 임동규 동지는 용아가 추천해 남민전에 가입했어. 세 사람 모두 4.19세대로 친분이 두터웠지. 용아는 무역회사 일로 월남에도 여러 차례 다녀와 해외를 드나드는 데 어려움이 없었어. 그래서 이재문 동지가 일본에 보냈던 거야.”

1974년 안재구 교수의 어머니 회갑 때 모인 형제와 가족들. 아래 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안재구 교수가 앉아 있고, 그 옆이 부친인 안의환 선생이다. 맨오른쪽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동생인 안용웅씨다. 오른쪽 맨아래에 앉아 있는 꼬마가 필자인 안영민. [사진 제공 – 안영민]
1974년 안재구 교수의 어머니 회갑 때 모인 형제와 가족들. 아래 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안재구 교수가 앉아 있고, 그 옆이 부친인 안의환 선생이다. 맨오른쪽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동생인 안용웅씨다. 오른쪽 맨아래에 앉아 있는 꼬마가 필자인 안영민. [사진 제공 – 안영민]

이때가 1977년 11월이었다. 하지만 1978년 2월에 두 번째로 일본에 간 작은아버지는 “한국으로 못 돌아간다”라는 연락을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그 뒤 작은아버지의 행방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임동규 선생이 숙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통혁당 재건을 기도했다고 발표했다. 또 일본에서 임 선생의 숙부를 만난 작은아버지가 월북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임동규 선생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선고 직후 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임동규 선생은 남민전 사건으로도 무기징역형을 추가로 받아 ‘쌍무기수’가 됐다.

1994년 구국전위 사건 당시 나를 조사한 수사관은 “북에 가서 삼촌을 만나 지령을 받고 온 걸 다 알고 있다”라며 허무맹랑하게 나를 몰아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의 월북은 확인된 게 하나도 없다. 2000년대 들어 남북관계가 풀리고 교류협력이 활발하던 시절에도 작은아버지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어떠한 단서나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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