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호빙(玉壺氷)』이라는 고서가 있다. ‘옥호빙’은 ‘옥으로 만든 병 속의 얼음’이란 뜻으로 은자의 고결함을 비유한다.[주1][주2] 즉 이 단어는 속세의 진구(塵垢)에 물들지 않은 채 고결한 절개와 지조를 지키면서 고상한 정취를 즐기는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1. 『옥호빙』 저자 도목

『옥호빙』은 명(明)나라 도목(都穆, 1458∼1525)이 『세설신어(世說新語)』‧『용재수필(容齋隨筆)』 등 33종의 서적에서 청언소품(淸言小品)의 성격을 띤 이야기 72조를 발췌하여 엮은 청언소품집(淸言小品集)이다. 편자 도목은 이 편찬 작업을 통해 은거하고 싶은 자신의 지향을 담았다.

도목은 명나라 문학가로, 자는 현경(玄敬)이며 오현(吳縣,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 사람으로, 그의 부친은 도앙(都昂, 자는 유명維明)이다. 도목의 『옥호빙』 발문에 따르면 봉양(鳳陽)에서 글을 가르치던 시기에 『옥호빙(玉壺氷)』을 편찬했는데 나중에 은퇴한 후에 그때의 초고를 고쳐서 간행했다고 한다.

『옥호빙』을 편찬한 이후 도목은 홍치(弘治) 12년(1499) 41세에 진사(進士)가 되어 공부주사(工部主事)에 임명되었고, 정덕 연간(正德年間, 1506∼1521)에 예부낭중(禮部郞中)에 올랐으며, 1515년 태복시소경(太僕寺少卿)으로 벼슬을 마쳤다.

도목은 일곱 살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으며, 성년이 된 뒤에는 장구지학(章句之學)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책을 널리 섭렵했다. 일찍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봉양(鳳陽)에서 20년 가까이 글을 가르치다가, 나중에 오관(吳寬)을 통해 추천을 받아 비로소 수재(秀才)가 되었으며, 3년 뒤 마침내 진사에 급제했다.

벼슬을 그만둔 후 약 14년 동안 집에서 칩거했는데, 집안 형편은 날로 곤궁해졌지만 늘 옛 전적을 교감하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인(唐寅)·심주(沈周) 등 당대의 저명한 문인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주3]

2. 도목의 저술

도목은 저술에 전념하여 생전에 20여 종의 책이 간행되었다고 한다. 『천경당서목』과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등에 『남호문략(南濠文略)』·『남호시략(南濠詩略)』·『서사기(西使記)』·『금해임랑(金薤琳琅)』·『철망산호(鐵網珊瑚)』·『주역고이(周易考異)』·『사외류초(史外類抄)』·『임오공신작상록(壬午功臣爵賞錄)』·『우의편(寓意編)』 등이 저록되어 있다.

이 밖에 필기집으로는 『옥호빙』을 비롯해 『도공담찬(都公談纂)』·『청우기담(聽雨紀談)』·『사서일기(使西日記)』·『남호빈어(南濠賓語)』·『해낭속요(奚囊續要)』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사서일기』ㆍ『남호빈어』·『해낭속요』는 이미 망실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주4]

3. 『옥호빙』

도목은 『옥호빙』을 편록한 배경과 시기에 대해 그의 「발문(跋文)>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予少厭塵濁, 志樂閑曠. 三十年前, 嘗爲此書. 中間以親老家貧, 竊祿於朝. 玆得請致仕, 夙願始遂. 再披閱之, 怳如隔世, 而予亦老矣. 乃重錄而藏之, 非知我者, 不以示也. 正德乙亥夏六月, 吳郡都穆玄敬父.” - “나는 젊어서부터 혼탁한 속진을 싫어하고 한가한 정취를 즐기는 데 뜻을 두어 30년 전에 일찍이 이 책을 엮었다. 중간에 부모님께서 연로하시고 집안이 가난해 잠시 조정의 봉록을 축내다가 이제야 사직을 청해 오랜 소원을 비로소 이루게 되었다. 다시 그것을 펼쳐서 읽어 보니 아득히 격세지감이 느껴졌으며 나 역시 늙은 몸이 되었다. 이에 다시 기록해 간직하노니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보여 주지 않겠다. 정덕 을해년(1515) 여름 유월에 오군 사람 도목 현경 씀.”[주4]

<표1> 옥호빙 목차와 발췌처

제1조: 「낙지론(樂志論)」 [한(漢) 중장통(仲長統)]--총 1조.
제2∼17조: 『세설(世說)』 [남조(南朝) 송(宋) 유의경(劉義慶)]--총 16조.3)
제18∼19조: 「절교서(絶交書)」 [진(晉) 혜강(嵇康)]--총 2조.
제20조: 「난정기(蘭亭記)」 [진(晉) 왕희지(王羲之)]--총 1조.
제21조: 「한유찬(閑遊贊)」 [진(晉) 대규(戴逵)]--총 1조.
제22∼23조: 『도연명집(陶淵明集)』 [진(晉) 도잠(陶潛)]--총 2조.
제24조: 『도은거집(陶隱居集)』 [양(梁) 도홍경(陶弘景)]--총 1조.
제25조: 「여배적서(與裴迪書)」 [당(唐) 왕유(王維)]--총 1조.
제26∼27조: 한문(韓文) [당(唐) 한유(韓愈)]--총 2조.
제28∼29조: 유문(柳文) [당(唐) 유종원(柳宗元)]--총 2조.
제30∼31조: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당(唐) 백거이(白居易)]--총 2조.
제32∼36조: 『징회록(澄懷錄)』 [송(宋) 주밀(周密)]--총 5조.
제37∼41조: 『경서당잡지(經鋤堂雜志)』 [송(宋) 예사(倪思)]--총 5조.
제42∼43조: 『몽계필담(夢溪筆談)』 [송(宋) 심괄(沈括)]--총 2조.
제44조: 『남풍집(南豐集)』 [송(宋) 증공(曾鞏)]--총 1조.
제45조: 『소창랑집(蘇滄浪集)』 [송(宋) 소순흠(蘇舜欽)]--총 1조.
제46∼47조: 『동파집(東坡集)』 [송(宋) 소식(蘇軾)]--총 2조.
제48조: 『용재수필(容齋隨筆)』 [송(宋) 홍매(洪邁)]--총 1조.4)
제49∼50조: 『성재문회(誠齋文膾)』 [송(宋) 양만리(楊萬里)]--총 2조.
제51∼52조: 『학림옥로(鶴林玉露)』 [송(宋) 나대경(羅大經)]--총 2조.
제53∼54조: 『수심문(水心文)』 [송(宋) 섭적(葉適)]--총 2조.
제55조: 『당자서집(唐子西集)』 [송(宋) 당경(唐庚)]--총 1조.
제56조: 채록 출처 없음--총 1조.5)
제57∼60조: 『피서록화(避暑錄話)』 [송(宋) 섭몽득(葉夢得)]--총 4조.6)
제61조: 『손상서척독(孫尙書尺牘)』 [송(宋) 손적(孫覿)]--총 1조.
제62조: 『육방옹집(陸放翁集)』 [송(宋) 육유(陸游)]--총 1조.7)
제63∼64조: 『산가청사(山家淸事)』 [송(宋) 임홍(林洪)]--총 2조.
제65조: 『동천청록집(洞天淸錄集)』 [송(宋) 조희곡(趙希鵠)]--총 1조.
제66조: 『사고우집(謝皐羽集)』 [송(宋) 사고(謝翶)]--총 1조.
제67∼68조: 『계신잡지(癸辛雜識)』 [송(宋) 주밀(周密)]--총 2조.8)
제69∼70조: 『철경록(輟耕錄)』 [원(元) 도종의(陶宗儀)]--총 2조.
제71조: 『한거록(閒居錄)』 [원(元) 오구연(吳丘衍)]--총 1조.
제72조: 『잠계집(潛溪集)』 [명(明) 송렴(宋濂)]--총 1조.

『옥호빙』은 한나라부터 명나라 초까지의 여러 전적 중에서 속진에 물들지 않은 고상한 운치를 지녔다고 여겨지는 문장이나 고사 72조를 가려 뽑아 시대순으로 편록해 놓은 것인데, 채록 대상 시기로는 송대가 37조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채록 작품으로는 『세설신어』가 16조로 가장 많다. 그 채록 출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표1과 같다.[주4]

4. 중국 명·청 판본 『옥호빙』

『옥호빙』은 1515년에 명에서 편자 도목에 의하여 처음으로 간행되었지만, 현존하는 『옥호빙』이 명·청대 판본은 다음과 같다.

①명천계간손여란교본(明天啓間孫如蘭校本) : 전본(全本), 1권1책, 9행18자. 명 천계 연간(1621∼1627), 손여란 교감본, 대만 국가도서관 소장. 권수(卷首)에 도목의 「옥호빙 인(引)」이 있고, 본문 권단(卷端)에 “오군 도목 현경 찬, 양송 손여란 자형 교(吳郡都穆玄敬纂, 梁宋孫如蘭子馨校)”라 적혀 있다. 각 조의 끝에 두 줄의 작은 글자로 채록 출처를 기록하고 있다.

②명간구행본(明刊九行本) : 영본(零本), 1권. 각 조가 시작되는 행만 18자고 다음 행부터는 17자. 간행년과 간행자는 미상, 송나라 여조겸(呂祖謙)의 『와유록(臥遊錄)』 명간본을 부록으로 첨부. 현재 대만 국가도서관 소장. 본래 「발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남아 있지 않고, 본문 권단에 “명 오군 도목 편(明吳郡都穆編)”이라 적혀 있으며, 각 조마다 채록 출처가 기록되어 있다.

총 49조가 수록되어 있는데, 전본(全本) 제58조의 “王荊公晩居鍾山謝公墩, 自山距州城適相半, 謂之半山. 畜一驢, 每食罷, 必旦至鍾山, 縱步”까지만 남아 있고, 그 이후에는 다른 책의 일부가 엉뚱하게 편입되어 있다. 또한 남아 있는 곳까지를 전본과 비교해 볼 때 총 9조가 빠져 있으며 증보된 조는 없다. 따라서 원서의 일부를 삭제하고 증보한 속작 판본으로 추정된다.

③『속설부(續說郛)』본[주5]: 절본(節本), 1권, 9행 20자. 『속설부』 권27에 수록되어 있다. 권단에 “오군 도목(吳郡都穆)”이라 적혀 있고, 「서문」이나 「발문」이 없으며, 각 조에 채록 출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총 37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전본과 중복되는 것은 14조고, 나머지 23조는 전본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판본 역시 원서의 일부를 삭제하고 증보한 속작 판본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명-청 시기의 중국 판본으로 『옥호빙』의 1515년 초판본은 현전하지 않고, 완전본은 ①명천계간손여란교본 만이 남아 있다. 따라서 중국학자 원행패(袁行霈), 후충의(侯忠義)와 영가우(寧稼雨)는, 『옥호빙』의 판본으로 『속설부』본 만남아 있다고 기술했는데,[주6] ①명천계간손여란교본(明天啓間孫如蘭校本)과 아래에서 언급한 조선본이 남아 있으므로 이는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5. 조선 판본 『옥호빙』

『옥호빙』은 근래까지 국내외 학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옥호빙』은 1515년에 명에서 편찬되었고, 이후 언제 조선에 전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조선 선조 13년(1580)년 이전에 전래되어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독자들의 광범위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여러 판본이 간행되었다. 현전하는 『옥호빙』 고판본은 아래와 같이 4종이 있다.[주7]

①백만 본 『옥호빙』 ; 간행지 미상, 목판본, 10행20자, 1책(19장), 四周單邊, 有界, 上下內向黑魚尾, 上下黑口. 목판본. 백민본은 서체로 보아 중국 명판 복각본으로 판단되는데 성혼(成渾, 1535-1598)이 1580년 5월에 쓴 자필 발문이 들어 있는 성혼의 수택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혼이 경진(庚辰, 1580)년에 쓴 자필 발문에 의하여 1580년 이전 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백민본은 현전하는 최고본(最古本) 『옥호빙』으로는 유일하게 판심에 흑구가 들어가 있다. 또한 판각이 다른 3종의 『옥호빙』 보다 우수하며 목니가 없는 것을 보아 판각 초기의 인쇄본이다. 현재 동일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이건희 기증품으로 소장(건희6348)되어 있다.

『옥호빙』, 1580년경, 목판본, 10행20자. 上下內向黑魚尾, 上下黑口. 성혼 수택본. 백민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옥호빙』, 1580년경, 목판본, 10행20자. 上下內向黑魚尾, 上下黑口. 성혼 수택본. 백민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옥호빙』, 1580년경, 목판본, 10행20자. 上下內向黑魚尾, 上下黑口. 성혼 수택본. 백민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옥호빙』, 1580년경, 목판본, 10행20자. 上下內向黑魚尾, 上下黑口. 성혼 수택본. 백민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②경상도 고성(固城) 간본 『옥호빙』 ; 목판본, 1책, 1581년 11월에 간행했다는 간기(刊記)가 실려 있고, 여기에 성혼의 발문이[주8] 판각되어 있어, 백민문고 소장의 성혼 수택본에 들어았는 성혼의 발문을 옮겨 번각한 것으로 보인다.(참조 : 규장각 도서해제)

③전라도 완산(完山) 간본 『옥호빙』 ; 목판본, 1책(24장), 죽창옹(竹窓翁)이 1617년에 지은 발문이 실려 있고, 발문에서 1609년에 완산(完山)에서 인출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 뒤의 마지막 장에는 도목이 1515년에 지은 발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뒷면에는 죽창옹(竹窓翁)이 1617년에 흑묵으로 “萬曆四十五年丁巳夏四月, 竹窓爲書”라고 적혀 있다. 도목의 발문은 처음 간행할 때 인쇄한 것이고 죽창옹의 발문은 문헌이 완성된 후에 따로 적어 넣은 것이다. 죽창옹이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죽창(竹窓)을 이덕형(李德泂, 1566-1645)으로 보는 경우에는 1617년(광해군 9) 이덕형이 이 책을 읽고 적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참조 : 규장각 도서해제)

④경진년무안현간본(庚辰年務安縣刊本) 『옥호빙』 ; 목판본, 9행18자본. 1책(23장), 조선시대에 전라도 무안현에서 간행한 방각본(坊刻本)이다. 서울대 규장각(奎章閣) 상백문고(想白古895.135-D65o)과 고려대 만송문고(晩松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무안현 간행본은 조선시대의 『옥호빙』 간행본 가운데 유일하게 “경진시월일무안현간(庚辰十月日務安縣刊)”이라는 간기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경진은 한때 1580년으로 추정하여 왔으나, “강완(姜俒, 1739-1775)의 「옥호빙발(玉壺氷跋)」에 ‘이웅징(李熊徵, 1658-1713)이 무안현감이 되어 『옥호빙』을 간행했다’는 기술이 있어 1580년보다 120년이 늦은 1700년 판본이다. 四周單邊, 有界, 9行18字, 上下內向花紋魚尾, 半葉匡郭 : 19.5×13.3cm, 책 크기 : 25.6×17.2cm.

6. 맺음말 ; 『옥호빙』이 다시금 필요한 시대에 읽기를 권한다

위에서 살펴 본 조선 간본 4종은 중국의 간본과는 달리 모두 전본(全本)이자 선본(善本)이다. 문헌의 자료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런데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의 『탐라지』 책판고를 보면 『옥호빙』이 포함되어 있다. 즉 『옥호빙』은 1653년 이전에 제주에서도 간행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옥호빙』의 수요는 많았으므로, 우리는 경진년(1700년)에 무안현에서 방각본 『옥호빙』이 나온 것처럼, 제주판 『옥호빙』도 방각본으로 나온 책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동안은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하여 책판을 만들 나무가 부족하였다. 1653년 이전에 책판을 만들 나무를 가장 구하기 쉬운 곳은 임진홰란의 피해를 받지 않은 제주도였다. 따라서 1653년 이전에 제주판 『옥호빙』이 나왔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일 것이다. 필자는 제주판 『옥호빙』의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옥호빙(玉壺氷)이란 “깨끗한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서첵 『옥호빙』은 조선시대 선비와 문인들의 필독서이다시피 인기가 많았다. 따라서 방각본으로도 출판한 것이다. 어느 시기보다도 혼탁한 현 행정부 관리들, 특히 대통령 주변 사람들에게 읽혀야 할 필요가 있다. 은퇴하기 전에 자금 읽으시라.

주(註)

[주1] ‘옥호빙(玉壺氷)’, 김장환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 『고전해설ZIP』, 2009. 5. 10. 지식을 만드는 지식. - “‘옥호빙’이란 명칭은 역대 시문에서 즐겨 사용했는데, “直如朱絲繩, 淸如玉壺氷”[포조(鮑照), 「대백두음(代白頭吟)」], “洛陽親友如相問, 一片氷心在玉壺”[왕창령(王昌齡), 「부용루송신점시(芙蓉樓送新漸詩)」], “硏寒金井水, 簷動玉壺氷”[두보(杜甫), 「증여양왕시(贈汝陽王詩)」], “今夜酒醺羅綺暖, 被君融盡玉壺氷”[백거이(白居易), 「취후희제시(醉後戱題詩)」], “素魄將臨, 合浦之珠乍吐, 淸漣同映, 玉壺之氷始藏”[이초(李濋), 「화월조방지부(華月照方池賦)」]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필기집 중에서는 송(宋)대 문영(文瑩)의 『옥호청화(玉壺淸話)』 「서」에서 “玉壺, 隱居之潭也”라고 했다.”

[주2] ‘진법자 묘지명 (陳法子 墓誌銘) (註 038)’, - 이 묘지명은 中國 陝西省 西安 大唐西市博物館에 소장’, 정동준 역, 『한국고대금석문』 「백제」. “『文選』 鮑照 「白頭吟」의 “直如朱絲繩, 淸如玉壺冰.”에서 유래한 것이다. 해당 부분의 李周翰注에는 “玉壺冰, 取其絜淨也.”라고 되어 있다. 唐 姚崇 「冰壺誡序」 “冰壺者, 淸潔之至也. 君子對之, 示不忘淸也 … 內懷冰淸, 外涵玉潤, 此君子冰壺之德也.”라는 용례가 있다.“

[주3] ‘옥호빙(玉壺氷)’ 주2), 김장환, 앞의 책. - “도목의 행적은 정사(正史)에는 보이지 않으며, 만사동(萬斯同)의 『명사(明史)』 권387, 『명사고(明史稿)』 권267, 『국조헌징록(國朝獻徵錄)』 권72, 『황명사림인물고(皇明詞林人物考)』 권9, 『명인소전(明人小傳)』 권2, 『본조분성인물고(本朝分省人物攷)』 권22, 『속오선현찬(續吳先賢讚)』 권4, 『명시종(明詩綜)』 권27 하, 『명시기사(明詩紀事)』 권8 「정(丁)」, 『열조시집소전(列朝詩集小傳)』 「병(丙)」,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권9 등에 기록되어 있다.”

[주4] ‘옥호빙(玉壺氷)’, 김장환, 앞의 책.

[주5] ‘옥호빙(玉壺氷)’ 주12), 김장환, 앞의 책. - “『속설부』 46권은 명나라 도정(陶珽)이 편집한 필기 총집으로, 원나라 도종의(陶宗儀)의 『설부』의 뒤를 이어 명대의 필기 527종을 초록해 수록했다. 현재 청 순치(順治) 3년(1646년)에 간행한 이제기(李際期)의 완위산당(宛委山堂) 간본과 청 순치 4년(1647년)에 간행한 도정의 원간본(原刊本)이 있다. 1988년에 상해고적출판사에서 완위산당본을 영인 출판했다.”

[주6] ‘옥호빙(玉壺氷)’ 주13), 김장환, 앞의 책. - “원행패ㆍ후충의의 『중국문언소설서목』[베이징(北京): 베이징대학출판사(北京大學出版社), 1981년]에서는 “玉壺氷一卷, 存”이라 표제하고 “『속설부』본”만 언급했으며, 영가우의 『중국문언소설총목제요』[지난(濟南): 제로서사(齊魯書社), 1996년]에서는 “今惟見『續說郛』本”이라고 기술했다.“

[주7] 정지현, ‘옥호빙’, 『규장각 도서해제』. https://kyudb.snu.ac.kr/book/view.do)

[주8] ‘옥호빙(玉壺氷)’ 주14), 김장환, 앞의 책. - 성혼, 『우계선생집(牛溪先生集)』 권6 「잡저(雜著)ㆍ옥호빙발(玉壺氷跋)」: “此書編取愛閑之言, 欲以玩樂而忘世. 所謂玉壺氷者, 取氷壺瑩徹之義也. 雖然, 淵明之閑不在於山水魚鳥, 而在於高情遠識. 不有高情遠識, 而要以外物爲閑, 非眞閑者也. 必也有其識足以達觀物理, 有其守可以安土順天, 然後雖簞瓢陋巷, 皆可以不求人知, 不改其樂也. 不獨山陰道上秀水靑山爲可娛也. 輯是書者, 似乎好奇務外, 而不探其本. 故書此于左方, 欲使觀者有以專其內, 而毋求於閑云” - “이 책은 한가로움을 좋아하는 말을 모아 엮어, 보고 즐기면서 세상을 잊고자 한 것이다. 이른바 ‘옥호빙’이란 얼음 병처럼 깨끗하고 투명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도연명의 한가로움은 산과 물이나 물고기와 새에 있지 않고, 고상한 마음과 원대한 식견에 있었다. 고상한 마음과 원대한 식견이 없으면서 외물로 한가로움을 삼고자 한다면, 진정으로 한가로운 자가 아니다. 반드시 사물의 이치에 달관하기에 충분한 식견이 있어야 하고, 처지를 편안히 여기고 천명에 순응할 만한 지킴이 있어야 하니, 이런 뒤에야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골목에 살면서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산음 길가의 빼어난 물과 푸른 산만이 즐길 만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엮은 자는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외물에 힘쓰면서 그 근본은 탐구하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이것을 아래에 써서 보는 자들로 하여금 오로지 그 내면에 힘쓰고 한가로움만을 구하지 않게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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