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이 터졌을 때, 아버지는 고립무원에 빠진 느낌이었다. 대구의 운동진영에는 폭탄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혁신계 선배들과 경북대 후배들이 한꺼번에 잡혀갔다. 남은 이들도 다급히 몸을 피했다. 이재문 선생도 일급 수배자 신세가 됐다.

인혁당 동지들의 죽음 이후 대구에 홀로 남은 안재구 교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산에 올라 슬픔을 감내하는 게 당시로는 유일한 일이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인혁당 동지들의 죽음 이후 대구에 홀로 남은 안재구 교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산에 올라 슬픔을 감내하는 게 당시로는 유일한 일이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이제 아버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정남이 지켜준 덕분에 체포의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버지에게는 산악반 제자들과 산에 오르는 게 유일한 위로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재문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무사히 잘 있다고 했다. 지금은 칼바람을 피하는 게 우선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 이겨내자고 했다. 아버지도 고민을 전했다. 마침 영국에서 교환교수 제안이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봤다. 이재문 선생은 정말 잘 됐다고 했다. 지금 같은 때에는 차라리 몇 년 외국에 나갔다 오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 말대로 준비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1975년 4월 9일 새벽, 인혁당 관련으로 여덟 명의 동지가 형장에서 생을 마친 것이다. 박정희가 저지른 잔혹한 살인을 보고 아버지는 마음을 바꾸었다. 학교와 가족들에게도 어렵게 이유를 둘러댔다. 이재문 선생에게도 연통을 넣었다. 이곳에 있어야겠다고.

1975년 5월 13일 박정희가 공포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비방하거나 개폐를 선전하는 모든 활동을 금지시킨,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자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박정희는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 긴급조치 9호를 앞세워 전면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75년 5월 13일 박정희가 공포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비방하거나 개폐를 선전하는 모든 활동을 금지시킨,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자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박정희는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 긴급조치 9호를 앞세워 전면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인혁당에 대한 사법 살인 후 박정희는 미친 운전수처럼 폭주했다. 1975년 4월 30일에 월남이 패망하자 박정희는 연일 북의 남침 위협을 말하며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다. 5월 13일에는 긴급조치의 완결판이라 할 9호를 공포하면서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모든 시위를 금지했다. 8월 17일에는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이끌어온 재야의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경기도 포천의 국사봉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로 볼 수밖에 없는 의혹투성이 죽음이었다.

1976년 2월, 아버지는 18년간 청춘을 바쳤던 경북대 수학과에서 쫓겨났다. 국가관 미확립,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이다. 그 소식에 분노가 치밀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했다. 이제 박정희와 싸울 일만 남았구나, 미친 운전수를 끌어내려야만 하겠구나, 그런 마음이 먼저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재임용 탈락 소식을 듣고, 이재문 선생이 직접 사람을 보냈다. 1976년 3월 중순이었다.

“이문희라고, 이재문 동지와는 일가인 젊은 여성이 집으로 찾아왔어. 당시 문희는 이재문 동지의 연락원 역할을 하고 있었지. 누가 봐도 집에 제자가 찾아왔구나, 했을 거야. 문희가 전해준 편지에는 ‘상의할 일이 있으니 한번 만났으면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지.”

4월 15일, 아버지는 대구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오후 2시에 서울역 앞 동양고속 터미널에서 이문희를 만났다. 이문희는 아버지를 영등포구 당산동의 다방으로 안내했다. 아버지는 혼자 들어가 구석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저쪽에서 백발의 노신사가 조용히 다가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출입구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앞에 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교수, 접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노신사를 쳐다보았다.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이재문 선생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던지 머리가 하얗게 다 셌더라고. 이재문 동지를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어. 이렇게 살아서 다시 만나는구나…….”

햇수로는 4년 만이었다. 중간에 잘 있다는 소식은 주고받았지만, 이렇게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백발이 되어버린 모습을 보니 그간의 고통스러운 세월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해 전에 박정희에게 죽임을 당한 여정남과 인혁당 동지들이 떠올랐다. 혁명가의 일생은 한순간에 생사가 오가는 일상의 연속이라지만, 동지들의 죽음이 남긴 상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날 이재문 선생은 아버지에게 ‘조직’을 말했다. 박정희와 맞서 목숨 걸고 싸울 수 있는 조직을 말했다. 유신독재를 타도하고 참다운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을 이룰 수 있는 조직을 말했다. 그런 조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아버지가 물었다.

“사람이 있겠습니까?”

인혁당 동지들의 사형 집행 후 박정희가 그랬다던가. 이제 빨갱이들을 싹쓸이했으니 더는 걱정할 게 없다고. 박정희의 말도 틀린 게 아니었다. 인혁당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그전에는 통혁당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이제 남쪽에는 변혁운동에 나설 핵심이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이재문 선생이 답했다.

“우리가 찾아야죠.”

아버지는 이재문 선생이 제안한 ‘조직’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더 이상 좌고우면할 때가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을 거꾸러뜨리지 못한다면 되려 모두가 당할 판이었다. 이대로 가면 또 누가 끌려가 죽을지 몰랐다.

“안 교수, 실은 그런 조직을 얼마 전에 결성했습니다.”

이날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했다. 조직이 필요하다, 이미 조직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가입 문제는 신중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전에도 그랬다. 이재문 선생은 항상 대학교수인 아버지를 배려했다. 공안기관에 노출되지 않게 최대한 신경을 썼다.

이재문 선생을 만나고 대구에 내려온 아버지는 며칠 뒤 밀양으로 갔다. 혼자 천황산에 올랐다.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무릉동을 찾았다. 사자평에 올라 박철환 지도원 동지에게 산악 훈련을 받던 때를 생각했다. 재약산 정상 아래에 있는 고사리분교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가지산, 운문산 일대를 종주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목숨을 거는 건 두렵지 않았다. 이미 생사의 경계를 넘어온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잘할 수 있을까. 이게 고민이었다. 조직을 책임지는 사람은 자신에게 그런 권한을 준 동지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일이 틀어지면 자기만 죽는 게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자면 최대한 신중해야 했다. 밖으로는 은밀하고, 안으로는 엄격해야 했다.

“과연 우리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천황산에 올라 나 자신과 이재문 동지부터 냉정히 평가해봤지.”

결론을 내렸다. 조직에 가입하기로 했다. 대신 이재문 동지를 다시 만났을 때, 예전에 함께 세웠던 원칙을 상기했다. 위에서 내려 먹이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올라가야 한다. 새로운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조직을 확장해야 한다. 전위정당 결성 이전에 각계각층 통일전선 조직부터 광범위하게 구축해야 한다…….

1976년 2월 29일 남민전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앙위원에 선임된 (사진 왼쪽부터) 이재문, 김병권, 신향식 선생은 가장 치열하게 박정희 유신독재와의 전면 투쟁을 벌였다.남민전 중앙위원회 서기를 맡아 사형선고를 받은 이재문 선생은 1981년 11월 22일에 고문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울구치소에서 옥사했고, 신향식 선생은 1982년 10월 8일에 사형 집행당하고 말았다. 징역 15년을 받고 복역하다 1988년 12월 출소한 김병권 선생은 범민련 활동으로 다시 구속됐고,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2005년 9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76년 2월 29일 남민전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앙위원에 선임된 (사진 왼쪽부터) 이재문, 김병권, 신향식 선생은 가장 치열하게 박정희 유신독재와의 전면 투쟁을 벌였다.남민전 중앙위원회 서기를 맡아 사형선고를 받은 이재문 선생은 1981년 11월 22일에 고문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울구치소에서 옥사했고, 신향식 선생은 1982년 10월 8일에 사형 집행당하고 말았다. 징역 15년을 받고 복역하다 1988년 12월 출소한 김병권 선생은 범민련 활동으로 다시 구속됐고,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2005년 9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이보다 앞서 1976년 2월 29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천3가에 있는 중국집 태화장의 2층 방에 세 사람이 모였다. 긴장되면서도 결연한 표정의 이재문, 김병권, 신향식 선생이었다. 세 사람은 식탁에 놓인 단도 위에 함께 손을 포갰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의 결성을 선포했다.

1921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병권 선생은 해방 직후 대중신문의 기자로 일했다. 4.19이후 사회당 경북도당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5.16쿠데타로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1968년에는 해방전략당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73년 만기 출소한 뒤 서울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재문 선생은 1973년 연말에 와룡산 염소농장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김병권 선생의 도움을 받아 수배 생활을 이어나갔다. 경찰은 두 사람이 대구에서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걸 알고, 김병권 선생을 앞장세워 이재문 선생을 뒤쫓았다. 김병권 선생은 낮에는 경찰과 함께 이재문 선생이 갈 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척하고, 밤에는 이재문 선생을 따로 만나 경찰의 움직임을 알려주곤 했다. 그 덕분에 이재문 선생은 무사히 도피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신향식 선생은 1934년 전남 고흥에서 한학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방 후의 혼란과 전쟁통으로 1955년에서야 고흥중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로 올라와 고학을 하면서 경복고를 졸업했다. 1958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노동청 산재보험과 서기로 근무했다. 동아출판사 제작부에 취업해 노조 결성에 나서기도 했다.

신향식 선생은 대학 선배인 통혁당의 이문규 선생과 각별한 사이였다. 1968년 이문규 선생의 권유로 학사주점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다가 통혁당 사건 때 함께 구속돼 3년 6개월을 복역했다. 출소 후에는 얼음 장사, 연탄 장사, 월부책 장사, 복덕방 등을 하며 유신독재에 맞선 투쟁을 암중모색해 왔다. 김병권 선생은 서울구치소에서 같은 대구 출신인 이문규 선생한테 신향식 선생을 소개받았고, 두 사람은 출소 이후에도 동지적 관계로 지내왔다.

김병권 선생과 신향식 선생은 긴급조치 9호 선포에 이어 1975년 7월 16일에 사회안전법이 제정되면서 졸지에 도피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박정희 정권은 사상범들의 재범을 막는다는 이유로 이미 출소한 사람들에게도 전향서 날인을 강요했다. 이를 거부하면 보호감호 처분을 내렸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는 사람도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았다. 교도소에서 바로 청주의 보안감호소로 보내버렸다. 재판도 없이 법무부의 심사만으로 다시 가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미리 잡아 가두던 ‘예비 검속’보다 더 악랄한 조치였다.

유신독재의 철저한 감시와 악랄한 탄압 속에 공개적으로 투쟁을 벌이는 건 불가능했다. 남민전을 결성한 세 사람 역시 경찰에 쫓기는 처지였다. 비밀리에 비공개로 조직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비합법조직, 지하운동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었다. 정권에 의해 강요된 길이었다. 그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것이 유신독재의 광포한 현실이었다.

남민전 동지 김병권 선생의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하는 안재구 교수. [사진 제공 – 안영민]
남민전 동지 김병권 선생의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하는 안재구 교수.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1976년 9월에 남민전에 가입했다. 경북대 재임용 탈락 이후 대구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의 대학에 강사 자리를 얻어 올라온 직후였다. 아버지는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된 김병권 선생의 후임으로 중앙위원에 선임됐다. 조직원의 사상교육과 조직의 선전선동사업을 책임지는 역할도 맡았다.

남민전은 조직 결성에서 침탈까지 약 44개월간 존속했다. 짧지 않은 기간이다. 남민전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우리 사회와 변혁운동에 무엇을 남겼을까.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남민전은 제 모습을 전부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84명이나 구속된, 남로당 이후 최대 지하조직이라는 남민전. 과연 그들은 유신독재에 맞서 어떻게 투쟁했을까. 이제부터 남민전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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