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한글을 제대로 알자. 필자는 본 연재의 제32회[주2]에서 한글에 관하여 크게 왜곡된 분야를 언급한 바 있다. 이번에는 1년 만에 이를 다시금 정리하여 기고한다.

우리 글 창제의 공을 이른바 가림토 문자라는 허상에 띄워 놓거나 한글 띄어쓰기를 헐버트가 창안하였다는 말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 우리 글 『훈민정음』은 생년월일이 분명한 세계 최고의 문자이다. 그 자체가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월인석보』 권1 첫장, 1459년, 목판본, 보물, 22.8㎝ ×33.8㎝. 서강대 소장본(왼쪽), 『훈민정음(해례본)』 용자례, 1446년, 목판본(오른쪽), 국보, 20×32.3㎝, 간송미술관 소장본,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월인석보』 권1 첫장, 1459년, 목판본, 보물, 22.8㎝ ×33.8㎝. 서강대 소장본(왼쪽), 『훈민정음(해례본)』 용자례, 1446년, 목판본(오른쪽), 국보, 20×32.3㎝, 간송미술관 소장본,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 한글 창제는 세종대왕이 직접 했다

한글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명칭으로 1443년에 세종대왕이 창제한 후 1446년에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곧 우리 글의 창제에 관한 제1차 사료는 모두 세종대왕을 창제자로 지목하고 있다. 한글 창제의 주역(主役)은 세종대왕이고, 보조역(補助役)이 집현전 학사 신숙주(申叔舟)와 정인지(鄭麟趾), 신미(信眉) 등이다.

『월인석보』 권1에 실린 한글본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적고 있다. ‘세종 어제’라 부친 것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친히 지었다”라는 의미이다.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경술 2번째 기사에도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라고 하였다.

또한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갑오 4번째 기사에는 세종이 지은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 원문이 실려 있다.

『세종실록』 원문 : “是月, 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 便於日用耳。 ㄱ牙音, 如君字初發聲, 竝書如蚪字初發聲。 ㅋ牙音, 如快字初發聲。 ㆁ牙音, 如業字初發聲。 ㄷ舌音, 如斗字初發聲, 竝書如覃字初發聲。 ㅌ舌音, 呑字初發聲。 ㄴ舌音, 如那字初發聲。 ㅂ唇音, 如彆字初發聲, 竝書如步字初發聲。 ㅍ唇音, 如漂字初發聲。 ㅁ唇音, 如彌字初發聲。 ㅈ齒音, 如卽字初發聲, 竝書如慈字初發聲。 ㅊ齒音, 如侵字初發聲。 ㅅ齒音, 如戍字初發聲, 竝書如邪字初發聲。 ㆆ喉音, 如挹字初發聲。 ㅎ喉音, 如虛字初發聲, 竝書如洪字初發聲。 ㅇ喉音, 如欲字初發聲。 ㄹ半舌音, 如閭字初發聲。 ㅿ半齒音, 如穰字初發聲。 ㆍ如呑字中聲, ㅡ如卽字中聲, ㅣ如侵字中聲, ㅗ如洪字中聲, ㅏ如覃字中聲, ㅜ如君字中聲, ㅓ如業字中聲, ㅛ如欲字中聲, ㅑ如穰字中聲, ㅠ如戌字中聲, ㅕ如彆字中聲。 終聲復用初聲。 ㅇ連書唇音之下, 則爲唇輕音, 初聲合用則竝書。 終聲同。 ㆍㅡㅗㅜㅛㅠ附書初聲之下, ㅣㅓㅏㅑㅕ附書於右。 凡字必合而成音, 左加一點則去聲, 二則上聲, 無則平聲。 入聲加點同而促急。”

『세종실록』 번역 :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ㄱ은 아음(牙音)이니 군(君)자의 첫 발성(發聲)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규(虯)자의 첫 발성(發聲)과 같고, ㅋ은 아음(牙音)이니 쾌(快)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ㆁ은 아음(牙音)이니 업(業)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ㄷ은 설음(舌音)이니 두(斗)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담(覃)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ㅌ은 설음(舌音)이니 탄(呑)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ㄴ은 설음(舌音)이니 나(那)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ㅂ은 순음(脣音)이니 별(彆)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보(步)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ㅍ은 순음(脣音)이니 표(漂)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ㅁ은 순음(脣音)이니 미(彌)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ㅈ은 치음(齒音)이니 즉(卽)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자(慈)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ㅊ은 치음(齒音)이니 침(侵)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ㅅ은 치음(齒音)이니 슐(戌)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사(邪)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ㆆ은 후음(喉音)이니 읍(挹)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ㅎ은 후음(喉音)이니 허(虛)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홍(洪)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ㅇ은 후음(喉音)이니 욕(欲)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ㄹ은 반설음(半舌音)이니 려(閭)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ㅿ는 반치음(半齒音)이니 양(穰)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ㆍ은 탄(呑)자의 중성(中聲)과 같고, ㅡ는 즉(卽)자의 중성과 같고, ㅣ는 침(侵)자의 중성과 같고, ㅗ는 홍(洪)자의 중성과 같고, ㅏ는 담(覃)자의 중성과 같고, ㅜ는 군(君)자의 중성과 같고, ㅓ는 업(業)자의 중성과 같고, ㅛ는 욕(欲)자의 중성과 같고, ㅑ는 양(穰)자의 중성과 같고, ㅠ는 슐(戌)자의 중성과 같고, ㅕ는 별(彆)자의 중성과 같으며, 종성(終聲)은 다시 초성(初聲)으로 사용하며, ㅇ을 순음(脣音) 밑에 연달아 쓰면 순경음(脣輕音)이 되고, 초성(初聲)을 합해 사용하려면 가로 나란히 붙여 쓰고, 종성(終聲)도 같다. ㆍ, ㅡ, ㅗ, ㅜ, ㅛ, ㅠ는 초성의 밑에 붙여 쓰고, ㅣ, ㅓ, ㅏ, ㅑ, ㅕ는 오른쪽에 붙여 쓴다. 무릇 글자는 반드시 합하여 음을 이루게 되니, 왼쪽에 1점을 가하면 거성(去聲)이 되고, 2점을 가하면 상성(上聲)이 되고, 점이 없으면 평성(平聲)이 되고, 입성(入聲)은 점을 가하는 것은 같되 촉급(促急)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훈민정음』이 세종 어제라는 역사 기록을 무시하고 『훈민정음』 창제에 부수적 역할을 했던 신미(信眉)라든가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 창제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주장이다.

오케스트라(orchestra) 연주에서는 각각의 연주가는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연주하여야 한다. 지휘자가 일부 연주가를 교체할 수는 있지만, 각각의 연주가가 지휘자를 교체할 수는 없다. 유명 가수의 독창회에서도 연주가나 지휘자도 중요하지만, 연주가나 지휘자가 성악가를 빼낼 수는 없는 것이다. 독창회에서는 독창하는 성악가가 핵심이다.

마찬가지로 『훈민정음』의 창제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결정적 인물은 세종이다. 다른 인물들은 부수적인 삯꾼이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세종어제라 한다. 세종대왕이 삯꾼들의 성과를 가로채 간 것이 아니다. 당시에 예조판서 정인지(鄭麟趾, 1396~1478)나 학승(學僧) 신미(信眉)가 아무리 큰 역할을 했다고 해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조선어학자들과 당시의 민족사학자들은 『훈민정음』이 ‘세종어제’라는 명제를 흔들지 않았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세종실록』에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 9월 상한에 반포한 것으로 나온다.”[주1]

2. 가림토 문자나 고려 한글 주장은 완전 허구이다

그런데도 친일 전력을 가진 한 몽상가에 의하여 이른바 ‘가림토 문자’라는 허구가 조장되었다(1979년). ‘가림토 문자’ 유래설에 혹(或)한다면 세종의 위대한 업적은 바닥에 떨어진다. 우리 글의 독창적 창제 원리를 폄훼하고 창제한 분을 변경하거나 끌어 올리려는 시도는 민족의 정체성을 흐트러뜨리는 시도이다.

실제로 고대에 이른바 가림토 문자가 있었고, 그 글자가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과 유사한 글자라고 해도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와 있는 창제 원리에 미루어 보면, 허상의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 글자에 영향을 준 것이 전혀 없다.

『훈민정음』의 글자가 허상의 가림토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황당한 주장은 ‘ㄱ’과 ‘ㅜ’가 알파벳 ‘T’의, ‘ㄴ’이 ‘L’의, ‘ㄷ’이 ‘C’의, ‘ㄹ’이 역‘S’의, ‘ㅅ’이 ‘A’의, ‘ㅇ’이 ‘O’의, ‘ㅈ’이 ‘Z’의, ‘l’가 ‘I’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또한 우리 문자의 ‘ㄷ’이나 ‘ㅌ’는 한자의 ‘亡(망)’, ‘ㄹ’은 한자의 ‘己(기)’, ‘ㅁ’은 ‘口(구)’가 아니다. 히브리어 “ד”(달레트 Dalet)이나 “ם”(멤 미형 Final Mem)은 ‘ㄱ’이나 ‘ㅁ’이 아니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글 창제 원리와 기원에 대하여 고대 문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窓)살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여러 학설이 난무하여 그 독창성이 부정당했다.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조음(調音) 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분명히 밝혀졌다. 또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의 우수성, 독창성을 올바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근거자료가 되고 있다.

읽는 음(音)조차 불분명한, 이른바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한글의 원조라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환단고기』가 유일하다. 『훈민정음』의 타 문자 기원설은 다양한데, 그러한 기원설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공개된 이후 이미 정리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과거의 주장일 뿐이다.[주1]

최근에는 어느 정신 나간 유튜버가 한글의 고려 때 사용되었다는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 것까지 있다. 그가 동영상에서 제시한 자료는 고서도 고문서도 아니고, 중국에서 누군가가 21세기에 들어와 한글을 폄훼하기 위하여 날조한 황당한 가짜 고서이다. 한글에 관한 이러한 부류의 가짜 고서와 가짜 고옥편(古玉片)에 새긴 책이 중국의 가짜 공장에서 만들어진 바 있다.

3. 한글 띄어쓰기는 주시경이 확산을 시도하였다

어느 나라의 말이든 말할 때, 호흡을 멈추고 말하지 않고, 말하면서도 호흡을 조절하며 말한다. 곧 듣는 상대가 쉬 이해하도록 숨을 쉬며 억양을 조절하며 말하는데, 그것이 찰나적으로 띄어 말하는 것이 된다.

글을 쓸 때는 띄어서 말하는 절차에 따라 띄어서 쓰기를 한다. 영어나 유럽어에서는 띄어쓰기가 있다. 그들의 문자는 상형문자가 아닌 알파벳이므로 띄어쓰기를 안 하면 문자 소통이 안 된다. 반면에 중국어나 일본어에는 띄어쓰기가 없다. 그것은 중국말에는 뜻글자와 어조사가 있기 때문이고, 일본어에는 한자와 일본 글자(가나)를 혼용하여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은 한글을 창제할 때부터 한글 전용을 생각한 것 같다. 『훈민정음』을 반포(1446년)하기 1년 전인 세종27년(1445)에 편찬되어 세종29년(1447)에 간행된 악장-서사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우리 글을 앞세운 우리 글로 지어진 최초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이후에는 우리 글은 대체로 한문(漢文)과 혼용하여 사용했다. 한자보다는 1/2 크기의 우리 글로 토를 달고 있는 예도 있다. 우리 글에 띄어쓰기의 필요성이 나온 것은 한글을 창제한 직후부터이지만, 본격적인 우리 글 띄어쓰기는 18세기부터 차츰 등장한다.

허균의 『홍길동전』이나 조선시대의 한글 가사 및 시조를 보면 우리 문학은 4.4체나 4.5체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구태여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도, 가독(可讀)하는 방법에 따라 어렵지 않게 읽혔다. 그러나 다양한 학문이나 문장을 빠르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띄어쓰기가 소용되었고, 또한 이름이나 직책과 같은 명사는 정확한 단어 표기가 필요하게 되어 초보적인 띄어쓰기가 이미 조선중기 이후, 특히 18세기 말에 간헐적으로 시도되었다.

따라서 우리 글 띄어쓰기는 서양 선교사의 창안이 아니다. 호머 비 헐버트는 더군다나 아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 중에 현대 형식의 띄어쓰기를 한 문헌은 1877년에 영국인 존 로스(John Ross, 1841~1915) 목사가 쓴 조선어 교재인 『Corean Primer(조선어 첫걸음)』로 확인된다. 1882년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 『Corean Primer』를 통하여 조선어를 배웠고, 그들은 당연히 존 로스 목사의 띄어쓰기를 보았다.

그런데 존 로스 목사는 1876년에 이응찬(李應贊)에게서 우리 말을 배웠다. 즉 이 말은 존 로스 목사의 띄어쓰기가 존 로스 목사가 착안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에게 우리 말을 가르친 이응찬에게서 우리 말을 배울 때 그렇게 배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우리 말을 가르칠 때 한 마디, 한 단어씩 띄어서 가르친다. 그것이 언어 교습의 원리이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존 로스 목사에게 전달된 것이다.

존 로스 목사가 1877년에 저술한 조선어 교재 『Corean Primer』 이후에, 1887년 스코트가 쓴 책과 1890년 언더우드가 쓴 『한영 문법』에서도 띄어쓰기가 되어 있으며, 1895년 간행된 순한글의 『구셰교문답』은 띄어쓰기를 철저하게 사용하고 있다.

1896년 4월 7일 창간한 『독립신문』은 띄어쓰기를 도입한 최초의 신문이다. 이 신문의 영문판 한 면의 편집 영역을 헐버트가 담당하였다고 주장하며, 『독립신문』의 띄어쓰기는 헐버트의 공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최근에 확인한 바로는 발행인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이 『독립신문』 영문판을 전담했고, 『독립신문』이 창간될 때 필진으로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주시경 등이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우리 문법을 30여 년간 연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문법서 『조선문전』(1902년 이전 저술)과 『대한문전』(1909년경)을 저술하였고,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독립신문』 창간 이전부터 우리 문법을 연구하던 당시 유일무이한 국문 전용론자였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자 총무 겸 교보원으로 주시경을 임명하였으며, 그는 국문(國文) 담당 조필(助筆)을 맡아 서재필의 국민 계몽운동을 지원하면서 한글 전용, 한글 띄어쓰기, 쉬운 한글 쓰기를 실천하였다. 즉 『독립신문』의 띄어쓰기는 분명 주시경의 작품이다.[주2] 주시경은 1910년경에 ‘한글’이라는 호칭을 만든 한글학자이다.

따라서 헐버트가 『독립신문』에 얼마나 간여했는지가 이제는 의문이 든다. 헐버트가 1889년에 저술한 『사민필지』 한글본은 1889년 초판본이든 1906년 재판본이든, 1909년 삼판본이든 띄어쓰기가 전혀 없다.

『사민필지』 초판본에 엥길리국(영국), 합중국(미국)이라고 했던 국호를 재판본에서는 영국과 미국으로 수정했다. 이는 재판본의 조판을 새로 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도 재판본에서 띄어쓰기는 전혀 수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1896년 『독립신문』의 띄어쓰기가 헐버트와는 관련이 없다는 물증이다.

이를 보면 헐버트는 『독립신문』에 별 역할을 못 했음이 확실하다. 헐버트 박사를 기념한다는 사람들이 타인의 문화 공적을 가로채 가는 날조된 현상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흐트러트리려는 매우 심각한 행위이다.

4. 조선시대의 한글 띄어쓰기

우리 글 띄어쓰기는 『독립신문』 창간 이전에도 있었고, 그 필요성은 한글 창제할 때부터 인식됐으며, 조선시대의 여러 언해본 저서에서 띄어쓰기 효과가 나도록 시도한 바 있으며, 그 초보적 연원은 조선 중기, 늦어도 18세기 말로 올라간다. 우리 글 띄어쓰기의 공식화는 1933년 한글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여 띄어쓰기와 각종 문장부호를 정착시킨 것이다.

존 로스 목사의 『Corean Primer』에서 보이는 띄어쓰기는 우리 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체득하여 기록화한 것이다. 우리 글에서의 띄어쓰기는 서구와는 달리 명사에 조사를 붙여 쓰고 있다. 어순에서 한글 띄어쓰기는 알파벳 문자의 서구와는 전혀 다르듯 그 출현 및 발전 과정은 선교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

왕실의 고문헌에는 한문이든 한글이든 대두법이 보인다. 한글 고문서에서의 대두법은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平昌上院寺重創勸善文)』(1464년, 국보)의 한글 부분에서도 보이지만, 여기에서는 초보적인 띄어쓰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 고문헌은 오대산 월정사에 소장되어 있는데,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되어 있다. 한글 고문서 및 고서에서 가운데 1778년경에 홍낙춘(洪樂春)이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풍산홍시셰계』 궁체본(宮體本)과 1802년 중하(仲夏, 음력 5월)에 궁체(宮體)로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국됴고ᄉᆞ(국조고사)』에서는 띄어쓰기의 초보적 형식으로 발전한다.

이를 보면 띄어쓰기는 19세기 초에 궁중의 여성들 사이에서 대두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주3] 1882년에 존 로스 목사에 의하여 번역된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최소한의 조선식 띄어쓰기도 『풍산홍시셰계』 궁체본과 『국됴고ᄉᆞ(국조고사)』 궁체본 수준의 초보적인 띄어쓰기이다.

『국됴고ᄉᆞ(국조고사)』 한글 궁체, 필사본. 19C초. 조선의 왕실역사를 한글 궁체로 쓰고 있다.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국됴고ᄉᆞ(국조고사)』 한글 궁체, 필사본. 19C초. 조선의 왕실역사를 한글 궁체로 쓰고 있다.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1895년 중동(仲冬, 음력 11월)에 학부에서 발행한 『소학독본(小學讀本)』에는 방점(傍點)을 찍어 띄어쓰기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전 기간 여러 종의 한글 고서에서 한글 띄어쓰기 이상의 고심한 흔적들이 보인다. 필자는 이상의 관점에서 띄어쓰기가 외래의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 사이에서 편의에 따라 적어도 정조조(正祖朝)부터는 간헐적으로 시도됐다고 정리한다.

이후 로스 목사의 『Corean Primer』로 한글을 배운 대한제국 시기의 선교사들이 1893년 5월에 조선어 성서를 번역하기 위한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그 휘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설치하며 그 위원들이 조선에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띄어쓰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거의 비슷한 시기인 1896년에 『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일반 대중들을 위하여 띄어쓰기를 사용하였고 이후 띄어쓰기는 우리의 한글학자들에 의하여 널리 확산하였다. 물론 헐버트 박사는 조선어 성서 번역 위원으로 선정되지도 않았다.

5. 맺음말 ; 한글학계와 문화계는 더 이상 거짓을 확산하지 말아야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하였고, 가림토 문자는 친일 경력이 있는 자가 만든 허구이고, 한글 띄어쓰기는 외래의 영향이 아니었다.

특히 한글 띄어쓰기의 필요성은 이미 18세기에 조선의 궁중과 궁중 관련 인물들 사이에서 부각되었다. 후일 이를 존 로스 목사가 받아들였고, 1893년에 조직된 ‘상임성서실행위원회’의 ‘성경번역자회’ 소속의 번역자들이 그 확산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알파벳 문장에서는 토씨(조사 助詞)가 단어와 떨어지지만, 한글의 띄어쓰기는 명사나 동사 및 형용사에 조사(助詞)가 붙는다. 즉 우리 한글의 띄어쓰기는 알파벳 문장에서의 띄어쓰기와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알파벳 문장은 한글 띄어쓰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헐버트가 2014년 한글날에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은 것은 이러한 왜곡한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14년에 우리나라의 한글학자들은 한글의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지 않고 무엇을 했는가? 비판받아 마땅하다.

왜곡에 따라 헐버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追敍)하였으면 당연히 삭훈(削勳)하여야 할 것이고, 남의 공적을 가로채 기념물을 세웠다면 당연히 고치거나 철거하여야 할 것이다.

깊이 생각하여 보면 우리 한글 띄어쓰기를 서양인이 창안하였다는 모 단체의 주장은 우리 민족의 독창성과 정체성을 훼손하려는 숭미주의자(崇美主義者)들의 숭미사대(崇美事大)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헐버트의 띄어쓰기 창안 주장은 미국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신(新) 식민지사관(植民地史觀)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한글학계와 문화계는 더 이상 이러한 거짓 주장, 즉 한글의 ‘가림토 문자 유래설’과 ‘한글 띄어쓰기 헐버트 창안설’을 확산(擴散)하거나 동조(同調)하지 말아야 한다. (2024.10.5.)

[주1] 이양재,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8) - 우리 글 『세종어제훈민정음』과 『신지비사』”, 통일뉴스, 2022,03,29.

[주2] 이양재,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32) - 세종대왕의 『훈민정음』과 주시경의 ‘한글 띄어쓰기’”, 입력 2023.10.09. ‘통일뉴스’에 연재.

[주3] 이양재,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22) - 광주이씨(廣州李氏) 가문 등의 한글 가승”, 2023.07.31. ‘통일뉴스’에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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