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994년에 있었던 ‘안견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당시의 안견논쟁은 학술적 논리논쟁으로 시작했지만, 그 논쟁을 피하려 한 논쟁의 당사자 안 모 교수와, 논쟁의 틈을 타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한 이 모 사장은 학술논쟁을 진위논쟁으로 변질시켰다.
금년 안견론쟁의 재개를 시도하는 중에, 9월 22일 회화사학자 한 분과 통화하는 가운데 1994년 논쟁의 당사자인 안 모 교수의 건강에 관한 우려할 만한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금년은 논쟁의 수위를 낮추어 필자의 안견에 관한 논리를 언급하는 선에서 글을 쓰려고 한다.
1.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1447년 4월 20일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꿈속에 도원(桃源)을 방문하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한 그림이다. 안평대군이 쓴 발문(跋文)에 의하면, 안견이 이 걸작을 단 3일 만에 완성하였다.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다. 크기는 세로 38.7㎝, 가로 106.5㎝이고,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안견의 그림뿐 아니라 안평대군의 제서(題書)와 발문, 그리고 1450년(세종 32) 정월에 쓴 시 한 수를 비롯해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하연(河演), 송처관(宋處寬), 김담(金淡), 고득종(高得宗), 강석덕(姜碩德), 정인지(鄭麟趾), 박연(朴堧), 김종서(金宗瑞), 이적(李迹),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윤자운(尹子雲), 이예(李芮), 이현로(李賢老), 서거정(徐居正), 성삼문(成三問), 김수온(金守溫), 만우(卍雨), 최수(崔脩) 등으로 모두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쓴 제찬을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찬문(讚文)이 첨부되어 있다.
안견의 그림과 이들의 시문(詩文)은 현재 두 개의 두루마리로 나누어져 표구되어 있다. 첫 번째 두루마리에 박연의 시문까지, 두 번째 두루마리에 김종서의 찬시부터 최수의 찬시까지 실려 있다.
2. 안견 논쟁의 본질
1994년에 당시 필자가 처음 제기한 학술적 논리논쟁의 중요한 세 가지 본질은, “①첫째, 안견은 산수에서 다양한 화풍을 구사하였다. 따라서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대표작이기는 하지만, 안견의 기준 작품이 될 수는 없다. ②둘째, 안견을 산수화가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안견은 산수(山水) 외에도 초상(肖像) 화훼(花卉) 매죽(梅竹) 노안(蘆雁) 누각(樓閣) 말〔馬〕 의장도(儀仗圖) 등 다양한 분야의 그림을 그렸다. ③셋째, 안견의 생존연대는 1418년경부터 1470년경으로 일본 무로마치시대의 회화에 영향을 준 것은 안견이 아니라 이수문과 문청이다.”라는 것이다.
최근 필자는 ③셋째, 본 연재의 제77회에서 이수문을, 제79회에서 문청을 다룸으로써 일본 무로마찌시대의 회화에 영향을 준 것은 안견이 아니라 이수문과 문청이라는 사실을 다시 논하였다. 이 논쟁의 셋째 본질에서 남아있는 부분, 즉, ‘안견의 생존연대’에 관해서는 조만간에 다룰 것이다.
그리고 ②둘째, 안견이 초상화에도 능한 어진화사였다는 사실을 제81회 연재에서 재차 논하였다. 즉, 둘째 본질에서 안견이 인물과 초상에도 능한 화가였다는 점을 논하였다. 이 논쟁의 둘째 본질에서 남아있는 풍속 등의 다른 분야야 대한 것도 조만간에 논할 것이다.
이번 회 연재에서는 ①첫째 본질, 즉,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대표작이기는 하지만 기준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논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 점은 안견논쟁에서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기도 하다.
3. 「몽유도원도」의 본질 – 안평대군과의 합작품이다
「몽유도원도」의 본질은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을 그렸다”는데 있다. 안평대군에 관해서는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언급하고 있는 아래의 기록을 주목하여야 한다. “학문을 좋아하는 왕자 비해당은 시문에 뛰어나고 서법이 뛰어나 천하의 제일이 되었고, 또한 그림을 잘 그렸으며, 거문고에도 뛰어 났다(‥‥‥匪懈堂以王子好學 尤長於詩文 書法奇絶 爲天下第一 又善畫圖 琴瑟之技‥‥‥).”
이러한 그림을 잘 그린 안평대군을 만족시키려면 안견은 「몽유도원도」를 그릴 때 심혈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꿈을 꾼 자는 안평대군인데, 안견이 안평대군이 꾼 꿈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려면, 당연히 상세한 설명을 들어야 했을 것인데, 그림에 뛰어난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단순한 설명보다는 대략적인 스케치를 하며 꿈꾼 세상을 말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화가 안견이 꿈을 꾼 안평대군 보다 꿈의 풍경을 더 잘 알 수 없다.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막연하게 꿈을 그리라고 주문했다면 그것은 아주 황당한 못된 주문이 된다.
중요한 것은 옛 조선의 그림이든 현대의 한국화이든, 동북아에서의 전통화(동양화)는 사의(思意)를 중요시한다. 다시 말하자면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사의에 따라 안견이 그렸다”라는 의미가 된다. 안평대군의 입장에서 보면 안견의 손을 빌려 「몽유도원도」를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그림의 관점(畵觀)에서 보면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과 안견의 합작(合作)이 된다. 우리나라의 회화사학계에서는 “「몽유도원도」에 나타난 곽희화풍은 안평대군이 곽희(郭熙)의 화풍을 선호(選好)하였기 때문에, 안평대군의 취향애 맞추어 안견이 곽희화풍(郭熙畫風)으로 그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확정적으로 말하지만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과 안견의 합작(合作)이다. 그것이 「몽유도원도」의 본질이다.” 「몽유도원도」에는 그림에 이어서 안평대군의 자필(自筆) 제서(題書)와 발문(跋文)이 들어가 있다. 「몽유도원도」의 본체는 안견의 그림만이 아니다. 크게 말하자면 안견의 그림과 안평대군의 기문 그리고 신숙주를 위시한 21인에 이르는 제시까지를 포함한 것이 「몽유도원도」이다. 서(書)는 화(畵)를 말하고 있다.
4. 안견의 산수화풍 -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기준작이 아니다
「몽유도원도」는 곽희의 화풍을 원용(源用)하여 그려졌다. 「몽유도원도」의 본질은 안평대군의 사의에 의한 주문화(注文畵)이므로,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좋아하였던 곽희의 화풍으로 그려줄 것을 안견에게 요청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몽유도원도」에서 보이는 화풍은 안견이 보편적으로 구사한 화풍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본조의 안견은 자가 가도이고 소자가 득수이며 지곡인이다. 고화를 많이 보고 그 깊은 곳에 있는 뜻 쓴 곳을 얻어 곽희식으로 그리면 곽희가 되고 이필식으로 그리면 이필이 되었으며 유용이나 마원도 마찬가지였다. 뜻대로 못 그리는 것이 없었다. 가장 잘 그리는 것은 산수였다.”[주1]라는 사실을 적고 있다. 이 기록은 중국 송원대의 유명한 산수화가 곽희(郭熙, 1023~1085경)나 이필(李弼) 유융(劉融) 마원(馬遠, 1140~1225) 등 당시 조선에 전래하여 있던 여러 화풍을 깊이 연구하여 그렸다는 의미이다.
안 모 교수의 안견론은 다음 세 전제에서 출발한다. 첫 번째 전제는 「몽유도원도」만이 안견의 진작(眞作)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 전제는 안견의 화풍은 곽희 화풍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전제는 안견은 조선초기의 대화가이므로 그가 일본 무로마치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전제 때문에 안 모 교수는 안견의 전칭 작품 모두를 부정한다. 또한 안견 제자들의 그림에서 곽희 화풍이 아니라 마하파 화풍이 나오는 것들도 의문시한다. 그리고 두 번째 전제 때문에 곽희 화풍의 영향이 안 보이는 안견의 인장이 보이는 작품 모두를 부정한다. 또한 세 번째 전제 때문에 안견의 작품보다 연대가 앞서 그려진 일본 무로마치 미술가보다 안견의 생존연대를 무리하게 올려 잡는다.
이러한 안 모 교수의 논리는 안견만이 15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로 한정(限定)하게 되며 결국이 이는 조선전기 회화사 전체를 참담하게 위축시킨다.
그러나 안견이 곽희 화풍뿐만 아니라 이필 유융 마원의 화법에서도 뛰어났다는 『용천담적기』의 기록에 의하여 안견의 화풍은 곽희 화풍이라는 논리와 「몽유도원도」만이 안견의 진작(眞作)이라는 논리는 성립이 안 된다.
안견이 구사한 산수 화풍이 다양했다는 사실은, 안견의 다양한 화풍이 조선전기 회화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확장 논리를 끌어낼 수 있게 한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대표작 가운데 한 점이지만, 안견의 기준작은 아니다.
5. 안평대군의 꿈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안 모 교수는 「몽유도원도」[주2]가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주3]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라고 주장하여 「몽유도원도」의 본질을 왜곡한 바 있다. 그러나 「몽유도원도」 그림에 이어 있는 안평대군의 가문(記文)을 보면 「몽유도원도」에서 나타나는 도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와 전혀 다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표(1)과 같다.[주4]
[표1] 「몽유도원도」의 기문과 「도화원기」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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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몽유도원도 기문」 |
「도화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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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자 |
안평대군 (꿈) |
어부 (현실) |
|
동행자 |
박팽년, 최항, 신숙주 |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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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자 |
산관야복을 입은 자가 알려 줌 |
없음 |
|
길목 |
복숭아 나무 수십 그루 |
냇물의 좌우양안 수백 보에 복숭아 나무 (즉, 수백 그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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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
말을 타고 골짜기에 들어가니 |
배를 타고 내를 가다가 동굴 입구에 다다라, 배를 버리고 몸만 들어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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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이 |
2~3리 |
(마을을 이룰 정도의 넓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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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
대나무 숲, 초가집, 싸리문 바위에다 서까래를 / 골짜기를 뚫어 |
(수많은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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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
사방의 산이 바람벽처럼 |
(산에 둘러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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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
구름과 안개가 자욱 붉은 놀이 떠 오르고 |
(언급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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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보이지 않음 |
(읍을 이룰 정도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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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
가축은 없음 |
닭 울고 개 짖는 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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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 안 |
시내에 조각배 있음 |
(동굴 안에 배에 대한 언급이 없음) |
이러한 면을 보면 「몽유도원도」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달라도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도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정치적 야망(野望)을 담고 있다.
이제 잡동산이 제85회(10월 13일 기고 예정)에서는 1997년에 필자가 논하였던 「몽유도원도」의 신해석을 요약하여 다시금 논하고자 한다. (2024.09.29)
주
[주1] 金安老, 『龍泉談寂記』, “本朝安堅 字可度 小字得守 池谷人也 博閱古畫 皆得其用意深處 式郭熙則爲郭熙 式李弼則爲李弼 爲劉融爲馬遠 無不應向 而山水最基長也.”
[주2] 安平大君,
歲丁卯四月二十日夜, 余方就枕, 精神蘧栩, 睡之熟也, 夢亦至焉. 忽與仁叟, 至一山下, 層巒深壑, 崷崒窈窅. 有桃花數十株, 微徑抵林表而分岐. 徊徨竚立, 莫適所之, 遇一人山冠野服. 長揖而謂余曰: “從此徑以北, 入谷則桃源也” 余與仁叟, 策馬尋之, 崖磴卓犖, 林莽薈鬱, 溪回路轉, 蓋百折而欲迷. 入其谷則洞中曠豁, 可二三里. 四山壁立, 雲霧掩靄, 遠近桃林, 照暎蒸霞. 又有竹林茅宇, 柴扃半開, 土砌已沈, 無鷄犬牛馬. 前川唯有扁舟, 隨浪游移, 情境蕭條, 若仙府然. 於是踟躕瞻眺者久之, 謂仁叟曰: “架巖鑿谷, 開家室, 豈不是與! 實桃源洞也” 傍有數人在後, 乃貞父⋅泛翁等, 同撰韻者也. 相與整履陟降, 顧盻自適, 忽覺焉. 嗚呼通都大邑, 固繁華, 名宦之所遊, 窮谷斷崖, 乃幽潛隱者之所處. 是故紆身靑紫者, 迹不到山林, 陶情泉石者, 夢不想巖廊. 蓋靜KC04012 殊途, 理之必然也. 古人有言曰: “晝之所爲, 夜之所夢” 余托身禁掖, 夙夜從事, 何其夢之到於山林也? 又何到而至於桃源耶? 余之相好者多矣, 何必遊桃源而從是數子乎? 意其性好幽僻, 素有泉石之懷, 而與數子者交道尤厚, 故致此也. 於是令可度作圖. 但未知古之所謂桃源者, 亦若是乎? 後之觀者, 求古圖, 較我夢必有言也. 夢後三日, 圖旣成, 書于匪懈堂之梅竹軒.
정묘년(1447) 4월 20일 밤, 내가 막 잠이 들려고 할 즈음, 정신이 갑자기 아련해지면서 깊은 잠에 빠지고 이내 꿈을 꾸게 되었다. 홀연히 인수(仁叟)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봉우리가 우뚝 솟았고 골짜기가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그윽하였다.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있고, 그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는데 숲 가장자리에 이르러 갈림길이 되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터에 마침 산관야복(山冠野服) 차림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나에게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에 이르게 됩니다”라 하였다. 내가 인수와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갔는데, 절벽은 깎아지른 듯 우뚝하고, 수풀은 빽빽하고 울창하였으며, 시냇물은 굽이쳐 흐르고, 길은 구불구불 백 번이나 꺾이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골짜기에 들어서니 동천이 탁 트여 넓이가 2, 3리 정도 되어 보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고, 멀고 가까운 곳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연기 같은 노을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대나무 숲 속에는 띠풀집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흙으로 만든 섬돌은 거의 다 부스러졌으며, 닭이나 개·소·말 등은 없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내에는 오직 조각배 한 척이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이어서 그 쓸쓸한 정경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싶었다. 이에 한참을 머뭇거리면서 바라보다 인수에게 말하기를 “암벽에 기둥을 엮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짓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겠는가? 정녕 이곳이 도원동이로다”라 하였다. 마침 옆에 몇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정보(貞父)·범옹(泛翁) 등이 운을 맞춰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윽고 신발을 가다듬고 함께 걸어 내려오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즐기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오호라, 큰 도회지는 실로 번화하여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노니는 곳이요, 절벽이 깎아지른 깊숙한 골짜기는 조용히 숨어 사는 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런 까닭에 오색찬란한 의복을 몸에 걸친 자는 발걸음이 산속 숲에 이르지 못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을 보며 마음을 닦는 자는 또 꿈에도 솟을대문과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길을 달리하는 까닭이니 필연의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옛사람이 “낮에 행한 바를 밤에 꿈을 꾼다”고 하였다.
나는 궁궐에 몸을 기탁하여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터에 어찌하여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던 말인가? 그리고 또 어떻게 도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도원에 노닒에 있어서 나를 따른 사람이 하필 이 몇 사람이었는가? 생각건대 본디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며 마음에 전부터 산수·자연을 즐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이들 몇 사람과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던 까닭에 함께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가도(可度)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옛날부터 일컬어지는 도원이 진정 이와 같았을까? 뒷날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옛날 그림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하게 되면 무슨 말이 있을 것이다. 꿈을 꾼 지 사흘째에 그림이 다 되었는지라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쓰노라.
[주3] 杜甫, 『桃花源記』,
晉太元中 武陵人捕魚爲業 緣溪行 忘路之遠近 忽達桃花林。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芳草鮮美 落英繽紛。 漁人甚異之 復前行 欲窮其林。 林盡水源便得一山。 山有小口 髣髴若有光。 便舍船從口入。 初極狹 纔通人 復行數十步 豁然開良。 土地平曠 屋舍儼然 有良田美池桑竹之屬。 阡陌交通 鷄犬相聞。 其中往來種作男女衣著 悉如外人 黃髮垂髫 竝怡然自樂。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鷄作食。 自云: 先世避秦大亂 率妻子邑人來此絶境不復出焉 遂與外人間隔。 問今世何世乃不知有漢 無論魏晉。 此人一爲具言 所聞皆歎惋。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停數日 辭去。 此中人語云: 不足爲外人道也。 旣出 得其船 便扶向路 處處誌之。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太守卽遣人隨其往 尋向所誌 遂迷不復得路。 南陽劉子驥 高尙士也。 聞之 欣然規往。 未果 尋病終。 後遂無問津者。
진나라 태원년간에 무릉 사람으로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물길을 따라 갔다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도 모를 무렵 홀연히 복숭아꽃 숲이 눈앞에 나타났다. 양쪽 강을 끼고 수백 보의 거리에 온통 복숭아나무뿐이며 다른 잡목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향기로운 풀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랐고 복숭아 꽃잎이 펄펄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어부는 이상하게 여기고 계속 앞으로 나가 복숭아 숲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했다. 숲은 강 상류에서 끝났고 그곳에 산이 있었으며,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그 속으로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어부는 즉시 배에서 내려 동굴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동굴은 처음에는 몹시 좁아 간신히 사람이 통과할 수 있었으나 수십 보를 더 나가자 갑자기 탁 트이고 넓어졌다. 토지가 평평하니 넓고 집들이 정연하게 섰으며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사방으로 길이 트였고 닭과 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마을에서 왔다갔다하며 농사를 짓는 남녀의 옷차림은 다른 고장 사람들과 꼭 같았으며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다들 즐거운 듯 안락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어부를 보자 크게 놀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어부가 자세히 대답하자 그들은 어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내고 닭을 잡아 대접을 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어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와서 저마다 물었다. 집 주인이 “우리 선조가 진나라 때의 난을 피해 처자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絶境)으로 와 다시 나가지 않았으므로 결국 바깥 세상 사람들과 단절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묻는 것을 보니, 그는 한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 뒤로 위나라와 진나라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고 하였다. 어부가 지난 역사를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해 주자 모두들 놀라며 감탄했다.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어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술과 밥을 대접했다. 어부는 며칠을 묵은 후 작별하고 떠났다. 마을 사람들이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어부는 마을을 벗어나와 배를 얻어타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군데 표식을 했다. 읍에 이르자 태수를 찾아 그대로 보고를 했다. 태수는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어부가 표식한 곳을 찾아가게 했으나 결국 길을 잃고 도화원으로 통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남양의 유자기는 고결한 은사였다. 그 소리를 듣고 기꺼이 찾아가보려고 계획했으나 목적을 달성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그 후로는 뱃길을 찾는 사람이 다시 없었다.
[주4] 李亮載, 「安堅作 <夢遊桃源圖>의 新解釋」, 격월간 『한국고미술』 통권6호(1997년 5~6월호). p.101. 필자의 이 글은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550주년 일(1997년 5월 29일 = 음력 4월 23일)을 맞이하여 발표한 논고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