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산 아지트에서는 전위조직 논쟁 외에 또 한 가지 논쟁이 더 있었다. 바로 여정남의 거취 문제였다.

아버지와 이재문 선생은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등 각계각층으로 들어가 대중운동을 새롭게 키워내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경북대만 해도 정사회와 정진회가 정권의 탄압에 해체됐지만, 1971년 11월에 한국풍토연구회(한풍회)가 다시 조직돼 선배들의 뒤를 이어 투쟁을 이끌었다.

경북대는 특히 67학번부터 71학번까지 핵심 활동가층이 두터웠다. 1974년의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1979년의 남민전 사건에는 다수의 경북대 출신이 연루됐다. 그만큼 경북대에서는 매년 적지 않은 수의 활동가들이 배출되고 있었다.

1973-74년 무렵 자택의 서재에서 찍은 안재구 교수의 모습. 당시 대구 지역 혁신계 갈등의 여파인듯 표정이 어둡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73-74년 무렵 자택의 서재에서 찍은 안재구 교수의 모습. 당시 대구 지역 혁신계 갈등의 여파인듯 표정이 어둡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와 이재문 선생은 여정남이 이들을 사회운동으로 연계하는 일을 맡아주기를 원했다. 이재문 선생이 이를 여정남에게 제안했지만, 여정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갈등만 생겨버렸다. 아버지가 다시 여정남을 만나 이야기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자네가 지금처럼 학생운동에 계속 남아 있으면, 또 잡혀가고 더 큰 탄압을 초래할 걸세.”

“형님, 잡혀갈 걱정부터 하면서 어떻게 저놈들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다시 잡혀가면 자네만 다치는 게 아니야. 경북대 운동 전체가 타격을 받을 수 있어.”

“지금은 유신독재에 맞서 대학생들의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일으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당시 ‘인혁당 그룹’은 지역별로 흩어져 있던 핵심들을 물밑에서 만나고 있었다. 당장 전위조직을 결성하자는 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핵심들을 연결하는 과정에 있었다. 하지만 장차 전국적인 지도부를 세워야 한다는 방향과 목표는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대구에서 핵심 활동가들은 많지 않았다. 다들 인간관계가 겹쳤다. 여정남도 마찬가지였다. 제대 후 이재문 선생을 통해 아버지를 소개받아 만남을 유지한 것처럼, 여정남은 인혁당 그룹의 선배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인혁당 그룹은 여정남을 전국적 범위에서 학생운동을 지도할 핵심 중의 핵심으로 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이재문 선생은 이미 노출된 여정남이 학생운동을 정리하는 게 옳다고 보았다. 여정남의 역할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 속에는 정세를 바라보는 견해 차이가 존재했다.

10월 유신으로 박정희는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특히 자신의 기반인 대구에서 반정부 투쟁을 해온 혁신계 인사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박정희는 자신과 대선에서 맞섰던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시켜 일본 도쿄에서 납치해 바다에 수장하려고 했다. 사진은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김대중씨의 기자회견 광경. [사진 제공 – 안영민]
박정희는 자신과 대선에서 맞섰던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시켜 일본 도쿄에서 납치해 바다에 수장하려고 했다. 사진은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김대중씨의 기자회견 광경. [사진 제공 – 안영민]

1973년 8월 8일에는,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맞섰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된 뒤 미국과 일본에서 활발하게 반유신 활동을 벌였다. 그런 김대중을 박정희는 납치해 죽여버리려고 한 것이다.

“이재문 동지와 나는 갈수록 악랄해지는 탄압 국면에서 역량을 잘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어. 투쟁을 남발하면 취약한 역량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는 법이야. 치고 빠지는 효율적인 투쟁으로 역량 손실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인혁당 그룹과 여정남은 생각이 달랐다. 투쟁을 통해 탄압 국면을 뚫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돌파구를 학생운동에서 찾았고, 그 중심에 여정남을 두었다.

1973년 10월 2일 유신체제 등장 후 최초로 유신 반대 시위에 나선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 이 시위를 시작으로 서울의 대학에서 유신반대 시위가 잇따랐고, 한 달 뒤인 1973년 11월 5일에는 경북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73년 10월 2일 유신체제 등장 후 최초로 유신 반대 시위에 나선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 이 시위를 시작으로 서울의 대학에서 유신반대 시위가 잇따랐고, 한 달 뒤인 1973년 11월 5일에는 경북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양측의 의견 차이는 1973년 11월 5일, 경북대에서 벌어진 유신반대 시위 이후 확연히 드러났다. 당시 경북대 시위는 한 달 전인 10월 2일, 유신체제 등장 이후 최초의 반유신 투쟁이었던 서울대 문리대의 시위를 잇는 투쟁이었다. 시위는 여정남이 실질적으로 조직했고, 인혁당 그룹과 이재문 선생, 그리고 아버지까지 모두 힘을 모았다.

투쟁은 대성공이었다. 학내에서 시위를 시작한 학생들의 대열은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교문을 뚫고 거리로 나와 도청과 경찰청 앞까지 진출했다. 경찰은 기습 시위에 놀라 갈팡질팡했다. 박정희로서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대구에서 뼈아픈 일격을 맞은 셈이었다.

1973년 11월 5일 경북대 학생들의 시위를 다음날 짧게 보도한 매일신문의 기사.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구에서 벌어진 반유신 시위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이때부터 대구의 혁신계에 대한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73년 11월 5일 경북대 학생들의 시위를 다음날 짧게 보도한 매일신문의 기사.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구에서 벌어진 반유신 시위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이때부터 대구의 혁신계에 대한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 제공 – 안영민]

투쟁 이후 이재문 선생과 아버지는 “바람처럼 일어났으니 바람처럼 사라지자”라고 주장했다. 아직은 박정희 정권과 전면적으로 싸울 때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소모적인 투쟁보다는 역량 보존을 우선 생각했다. 하지만 인혁당 그룹과 여정남은 바로 다음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신독재에 일정한 타격을 준 만큼 전국적인 연대 시위로 계속 투쟁을 이어나갈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후퇴’인가, ‘전진’인가. 의견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 차이가 4.19 이후 10여 년간 대구에서 함께 활동해 온 두 그룹이 갈라서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1973년 11월 말에 아버지는 급히 여정남을 집으로 불렀다. 11월 5일의 경북대 투쟁 이후 진로를 놓고 여정남과 이재문 선생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아버지가 여정남을 만난 것은 이재문 선생과 다툰 것을 꾸짖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간에 누적된 의견 차이를 좁혀보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견은 해소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정남이, 이런 식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돼. 지금은 전면 투쟁을 할 때가 아니야. 희생이 너무 커.”

“희생 없는 투쟁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 때문에 위축되면 어떻게 투쟁합니까?”

“박정희란 놈이 뭔 짓을 할지 몰라.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어.”

“투쟁하다 죽으면 오히려 영광이죠. 죽을 각오도 없이 어떻게 저놈들과 맞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여정남! 자네가 우리한테 어떤 사람인가! 어떤 어려움이 따른다 해도 자네만은 절대 희생되어선 안 돼!”

끝내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여정남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여정남을 보며 어머니가 뒤따라 나갔다.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여정남에게 언성을 높이는 아버지를 보면서 무척 놀랐다고 한다.

“정남이 학생의 뒷모습이 애처로워 나가봤지. 그랬더니 문밖에서 울고 있었어.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럽더라.”

어머니는 여정남에게 다가가 말했다.

“교수님이 정남이 학생을 친동생처럼 여기는 거 잘 알죠? 오늘은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곧 풀릴 겁니다. 성격이 불같기는 해도 뒤끝은 없는 분이니 너무 속상해 말아요.”

이날이 아버지가 여정남을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 되고 말았다. 여정남을 그렇게 떠나보낸 뒤 아버지는 밤새도록 서재에서 생각에 잠겼다. 그 어떤 수학적 난제보다도 더 막막했다. 어디에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답답했다. 상심도 컸다.

며칠 뒤 서도원 선생이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왔다. 서도원 선생은 오래전부터 대구 혁신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정남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도원 선생을 만나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도원 선생은 정남이를 만났다면서, ‘그간의 오해도 풀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힘을 합칠 수 있을지 안 교수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라고 하셨지. 나도 좋다고 했어. 서도원 선생하고는 5.16쿠데타로 잡혀 왔을 때, 남대구서 유치장에서 한 방에 같이 있었어. 그때부터 인연을 맺어왔지.”

서도원 선생은 아버지에게, 현재 구상하고 있는 투쟁과 앞으로 어떻게 운동의 지도부를 구성해 나갈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또 여정남이 선배들의 의견 차이로 중간에서 많이 힘들어한다는 말도 꺼냈다. 같이 힘을 합치자고 아버지를 간곡히 설득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버지는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정남이도 만나지 않겠습니다. 정남이가 선배들 틈에서 눈치를 보느라 투쟁의 동력이 떨어져서는 안 되겠지요. 선생님하고 인연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서도원 선생과 헤어진 뒤 아버지는 오래도록 밤길을 걸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움직임을 보면 앞으로 큰 탄압이 닥칠 게 뻔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여정남은 1973년 연말에 서울로 올라갔다. 서도원 선생의 구상대로 대구와 서울을 연결해 대규모 학생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여정남은 서울의 혁신계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대학의 핵심 활동가들을 만났다. 이들과 함께 다가오는 봄, 유신독재의 심장을 겨눌 대대적인 투쟁을 준비해 나갔다.

이재문 선생도 급하게 와룡산 염소농장을 정리했다. 경찰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재문 선생이 떠나고 며칠 뒤,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염소농장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홀로 남아 있던 이재문 선생의 조카를 두들겨 패며 이재문 선생의 행방을 캐물었다. 하지만 이재문 선생은 이미 서울로 올라가 있었다.

1973년 겨울의 상황을 아버지에게 전해 들으면서 나는 여정남 선배의 심경을 떠올렸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1980~90년대 전대협 시절, 우리는 수만 명, 수십만 명이 모여 군사독재 타도를 외쳤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상황에서 투쟁을 접고 한발 물러서자고 한다면 나 역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동지가 끌려가고, 열사들이 숱한 죽음으로 항거하고 있는데,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20대의 나는 아마도 여정남 선배와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50대인 지금은 아버지의 판단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 뒤의 결과를 알고 있기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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