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지난 1994년 안견(安堅) 논쟁시에 세종조인 1442년부터 144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어진(御眞) 도사(圖寫)라든가 왕실의 초상화 제작에 안견이 깊이 간여하였음을 논한 바 있다. 이제 어진화사(御眞畫師) 안견을 다시 논하고자 한다.

1. 글머리 ; 안견은 산수화가라는 상대적 관념의 시작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과 인재 강희안(姜希顔), 그리고 근재 최경(崔涇)은 세종~세조조에 활약한 대표적인 화가이다. 이른바 이들을 조선초기의 삼대가(三大家)로 칭한다.

이들에 관하여 안 모 교수의 『한국회화사(韓國繪畵史)』에서는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15세기에 활동했던 화원(畵員)으로는 산수의 제1인자였던 안견(安堅), 인물화의 제1인자 최경(崔涇), 산수와 인물을 모두 잘 그린 배련(裵連)과 안귀생(安貴生)‥‥‥”[주1], “15세기의 화단에서 안견에 버금가는 비중을 차지하였던 것은 선비화가 강희안과 인물화를 전문으로 그렸던 화원 최경일 것이다.”[주2]

즉, 안 교수는 우리 회화사에서는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렸다는 이유로 인하여, 그가 산수만을 그린 양 축소 평가한 감이 있다.

반면에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은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초기에 있어서도 북화풍(北畫風)의 그림이 성행하였고, 중기 이후에는 남북화를 혼합한 화풍과 순남화계(純南畵系)의 그림도 행하였다. 안견 최경 강희안 이상좌 이정 김명국 같은 이는 북화산수로 유명하였고‥‥‥”[주3] “초기의 삼대가는 안견 최경 강희안이니‥‥‥(중략)‥‥‥ 이 삼대화가는 중국 북화파의 거장인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들이나 세 사람의 특색은 각기 다르다.”[주4]

회화사학계에 안견과 최경을 언급한 문헌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성현(成俔: 1439~1504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이는 단편적인 기록이다. 즉 “‥‥‥其後安堅崔涇齊名 堅山水 涇人物 皆入神妙‥‥‥涇晩年亦畵山水古木 而當讓於堅矣‥‥‥”, “‥‥‥그 후에 안견과 최경이 이름을 날렸는데, 견은 산수에 경은 인물에 신묘의 경지에 들었다‥‥‥ 경이 만년에 산수와 고목을 그렸는데 당연히 견에게는 물러나야 한다‥‥‥”.

안 모 교수는 이 문헌을 잘못 이해하여 안견은 산수화가로 최경은 초상화가라고 오독(誤讀)한 고정 관념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화가는 그림을 배우는 초기부터 산수는 배우지만, 인물화는 어느 정도 기본 실력을 갖춘 이후에야 배운다”는 점은 기본 상식이다. 당연히 최경도 산수를 배워 그렸을 것이고, 안견도 초상화를 배워 그렸다는 것은 당시의 화원들을 돌이켜 볼 때 당연하다.

『용재총화』의 이러한 평가는 당대에 선호되었던 회화에 대한 시각에서 화가 각자의 특장점을 비교 언급하여 만들어진 상대적인 평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안견의 장기는 산수에 있었던 것이고, 최경의 장기는 인물에 있던 것이다. 그러한 상대적인 평가를 잘못 읽은 결과 조선초기 화단의 평가는 빈약해졌다.

2. 안견의 위축과 4인의 조선초기 초상화가

현동자 안견은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과 매우 가까웠고, 세종이 매우 아꼈던 화사(畫師)이다. 세종의 붕어(崩御)와 안평대군의 사사(賜死)는 안견의 위축을 의미하며, 그는 도화원(圖畫院)에서 활동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다.

따라서 세조초에 이르러서는 어진(御眞)이라든가 왕실 초상화 도사(圖寫)의 주도권은 최경에게로 넘어가며, 이후 안견은 산수를 위주로 그린다. 이를 보면 산수는 안견, 인물을 최경하는 식의 상대적 관념은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린 훨씬 이후에 최경이 덕종의 어진을 그린 세조 초를 전후로 하여 발생한 상대적 관념이다.

한편, 필자는 지난 2월 5일자 ‘신 잡동산이’(49) 기고 「초상화가 최경(崔涇)과 신숙주(申叔舟) 초상화」에서 현전하는 「신숙주의 초상화」는 최경(崔涇)이 1453년에 그린 작품임을 규명하였다.

1994년 안견논쟁 당시 필자는 월간 『서화정보』 1994년 7월호에 기고한 글 「15세기의 다섯 초상화와 초상화가에 대한 일 고찰」에서 세종조부터 성종조 사이에 활동한 여러 초상화가(어진화사)와 전존하는 여러 초상화를 정리한 바 있는데, 이를 다시 정리하여 아래에 (표1)과 (표2)로 제시한다.

(표1) 세종조부터 성종조 사이의 초상화가

1) 안견(安堅) :
1442년 안평대군과 광평대군의 초상화를 그렸다.

2) 최경(崔涇) :
1453년 최경은 신숙주의 초상화를 그린다.
1456년 9월 이전에 최경과 안귀생은 덕종의 어진 초본을 그린다.
1472년 최경과 안귀생이 덕종 어진을 다시 그린다.
1472년에 최경 안귀생 배련이 세조와 예종 소헌왕후의 어진을 함께 그린다.

3) 안귀생(安貴生) : 전항의 ‘최경’ 참조.

4) 배련(裵連) : 전항의 ‘최경’ 참조.

 

(표1) 세종조부터 성종조 사이의 현전 초상화

1) 「최덕지 초상화」 : 1452년 / 작자 미상.

2) 「신숙주 초상화」 : 1453년 / 최경 작.

3) 「오자치 초상화」 : 1476년. / 작자 미상.

4) 「손소 초상화」 : 1476년 / 작가 미상.

5) 「장말손 초상화」 : 1482년 이후 / 작가 미상.

 

이러한 탐색을 통하여 안견논쟁시 필자는 「신숙주 초상화」와 「최덕지 초상화」는 안견의 작품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주장하였으나, 금년(2024년) 2월에 「신숙주 초상화」는 최경 작이라는 사실을 확정 발표하였다.[주5]

이제 필자는 “조선초기의 초상화 가운데 「최덕지 초상화」와 「오자치 초상화」 「손소 초상화」는 최경과 안귀생·배련 가운데 한두 사람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조선조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초기로 전해져 내려온 전신 사조법은 세종조에 들어서면서 화풍 면에서 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에 대해 조선미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의 초상화』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② 제2단계의 공신도상 ; 제1단계의 도상 형식은 15세기 중엽에 이르면, 그중 몇 가지 특징은 퇴화하여 버리고, 새로운 표현 양식이 이에 대체되어 점차 나타나서 15세기 말엽까지 지속된다. 따라서 이를 제2단계의 공신도상군(功臣圖像群)으로 묶어서 고찰해 볼 수 있는데, 공신 칭호로서는 정난공신(靖難功臣) 좌익공신(佐翼功臣) 적기공신(敵愾功臣) 익대공신(翊戴功臣) 좌리공신(佐理功臣) 상(像)이 포함되며, 현존하는 화상으로서는 신숙주 상(申淑舟像)을 효시로 하여 장말손(張末孫) 오자치(吳自治) 손소(孫昭) 상이 이에 속하는데 모두 원본으로 믿어진다.”

필자가 보기에는 고려로부터 조선으로 넘어온 “이러한 조선초기 초상화 화풍의 변화는 안견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안견은 전신법에 있어서 동국(東國)의 오도자(吳道子)가 되었네”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 이는 “안견이 초상화의 전신사조(傳神寫照)에 있어 한 전형(轉形)을 이루어 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초기 초상화의 한 전형은 최경에 의하여 발전한다. 더욱이 최경은 70세 때(1490년)에도 눈과 필력이 쇠하질 않아 화원으로서 계속 그림을 그렸는데, 이를 역산해 보면 그는 1420년생이므로 현전하는 「오자치의 영정」과 「손소의 영정」이 그려진 1476년에 그는 57세 때이고, 이 시기에 ‘최경은 능히 이 초상화들을 그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안견은 세조가 즉위한 이후, 늦어도 1470년을 전후로 한 시기 이후에는 작품을 남긴 것 같지 않다. 세조 때 여러 공신의 도상을 그리는 데 안견의 관여는 확인되지 않는다. 안견의 이러한 공백기에 최경은 산수화가로서의 활동을 재개한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1472년에 찬술한 『영모록기(永慕錄記)』에 의하면, 당시 경복궁 내의 선원전(璿源殿)에서 받들던 태조 어진이 무려 26축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세종~세조 때 상당량의 어진이 도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3. 안견 작 초상화

안견이 1442년에 안평대군의 초상화를 그린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같은 해에 안견이 광평대군의 초상화도 그렸다는 사실은 1994년 안견논쟁시에 필자가 밝혀낸 사실이다. 세종조에는 많은 어진(御眞)이 도사(圖寫)가 되는데, 특히 1442년부터 144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안견이 안평대군과 광평대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1442년이다. 어진 도사와 맞물려 대군들의 초상화 제작도 이루진 일이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초상을 그린 사실에 관한 전거(典據)는 『보한재집』 권16, 「비해당이십오세진(匪懈堂二十五歲眞)」이고, 광평대군의 초상을 그린 사실에 관한 전거는 『전주이씨광평대군파족보』에 수록된 안평대군이 1442년 9월에 쓴 화상찬(畵像讚)이다.[주6]

안견은 1442년부터 144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어진과 대군들의 초상화 도사의 공로로 인하여, 1445년 당시에 이미 정4품 호군(護軍)이 되어 있었다. 화원으로서 정4품 호군은 어진 화사가 아니고서는 오를 수 없었다.

『성종실록』 19권, 성종 3년(1472년) 6월 3일 무진 3번째 기사에 의하면 ‘대사헌 김지경이 최경·안귀생에게 당상관을 제수한 것이 옳지 않다’는 상소를 올렸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김지경(金之慶) 등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준(成俊)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여러 차례 최경·안귀생의 당상관(堂上官)에 오른 것을 미편하다고 아뢰었는데, 전하께서 전교하기를, “최경 등은 선왕께서 보호하신 바이며, 이제 또 어용(御容)을 그린 공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국가에서 화공(畫工)을 두는 것은 그림(繪畫)을 위한 것입니다. 어용을 그린 것은 그 직책인데, 또 무슨 공로라 하겠습니까? 그의 공로를 상주시려면 말(馬)을 하사하셔도 좋고 옷(衣)을 하사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만약 또 부족하시면 그의 실직(失職)을 올려서 녹(祿)을 후하게 주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세종조(世宗朝)에 화공(畫工) 안견(安堅)이 그림에 공교(工巧)하기가 최경 등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며, 세종께서 또한 일찍이 보호하였으니, 그 때에 어찌 어용을 그린 일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안견의 벼슬은 4품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臣等累啓崔涇、安貴生陞堂上未便, 殿下敎之曰: "涇等先王所護, 今又奉畫御容, 有功。" 臣等以爲, 國家之置畫工, 爲繪畫也。 奉畫御容, 乃其職耳, 又何功焉? 欲賞其功, 則賜之馬可也, 賜之衣可也。 如又不足, 則陞其實職, 以厚其祿亦可也。 世宗朝畫工安堅工於澮畫, 非涇等之比, 世宗亦嘗護之, 其時豈無奉畫御容, 而堅官不過四品。)라고 한 것이다.

이 상소에서 “세종조(世宗朝)에 화공(畫工) 안견(安堅)이 그림에 공교(工巧)하기가 최경 등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며, 세종께서 또한 일찍이 보호하였으니, 그 때에 어찌 어용을 그린 일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안견의 벼슬은 4품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언급에서 우리는 안견이 어용, 즉 어진을 그린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어진화사 안견과 적벽도

현동자 안견은 어진화사(御眞畫師)이다. 따라서 현전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안견의 전칭 작품 「적벽도(赤壁圖)」(덕수 2417)를, 안휘준 교수는 이를 “산수화보다 인물화에 뛰어났던 화가에 의하여 그려진” 작품일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안견도 어진과 초상화를 그린 세종조의 어진화사이므로, 그를 「적벽도」의 작가로 배제할 수는 없다. 안견은 산수나 그린 관념적인 화원이 아니었다. 현동자 안견은 어진화사이다.

「적벽도」, 안견(전), 견본수묵채색, 161.2×101.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적벽도」, 안견(전), 견본수묵채색, 161.2×101.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적벽도」는 북송의 문장가였던 소식(蘇軾)이 후베이성(湖北省) 황강(黃岡)의 성 밖에 위치한 명승지인 적벽(赤壁)에서 뱃놀이하고 지은 『적벽부赤壁賦』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적벽도」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널리 퍼져 있던 소식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반영한 것이다.

이 그림에는 소식과 생황을 불거나 퉁소를 든 채 뱃전에 기대앉은 인물들이 낭만적인 분위기에 싸여 술상을 앞에 놓고 있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전(前) 적벽부의 내용과 합치된다. 인물들의 표정은 살아 있으며, 옷주름도 변화 있는 선으로 개성 있게 표현되어 있어, 작가의 뛰어난 인물 묘사 솜씨가 잘 드러나고 있다.

산수에 있어 화면의 오른쪽 위에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며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산의 형태와 그 밑의 무성한 나무들의 모습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서 보여주었던 안견 특유의 필치와 비슷함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이 그림은 산수와 인물에 모두 뛰어난 화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조선초기의 인물로 안견을 지목할 수 있다.

그런데 안 모 교수는 안견은 인물에 뛰어나지 않다고 폄훼하여 이 「적벽도」의 작가에서 안견을 배제한 것이다. 안견은 어진화사였는데도 인물에 뛰어나지 않는다는 지적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적벽도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은 조선시대 인물산수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수준의 인물 묘사이다.

「적벽도」 부분, 안견(전). [사진 제공 – 이양재]
「적벽도」 부분, 안견(전). [사진 제공 – 이양재]
「적벽도」 부분, 안견(전). [사진 제공 – 이양재]
「적벽도」 부분, 안견(전). [사진 제공 – 이양재]
「적벽도」 부분, 안견(전). [사진 제공 – 이양재]
「적벽도」 부분, 안견(전). [사진 제공 – 이양재]

어진화사 안견이 그린 초상화가 발견될 수 있을까? 초상화란 그린 화가보다 그려진 피사체가 중요한 그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초상에 그려진 인물의 성명도 화면에 적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초상을 그린 작가의 이름을 화면에 적은 경우는 불과 몇 점 되지 않는다.

필자가 인터넷 통일뉴스에 2024년 2월 5일 자로 기고한, ‘신 잡동산이’(49)-「초상화가 최경(崔涇)과 신숙주(申叔舟) 초상화」에서 「신숙주의 초상화」는 어진화사 최경이 1453년에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규명해 내었다. 그리고 세종조에 안견이 그린 어진과 안평대군과 광평대군 등의 초상화(肖像畵)가 있었다.

그런데 위에서 제시한 (표2)의 “1) 「최덕지 초상화」”는 1452년경에 그려진 초상이다. 「최덕지 초상화」를 그린 화사(畵師)는 알 수 없지만, 세밀한 관찰력과 직관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희귀한 여말선초 초상화의 상용 형식, 복색, 필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시에 초상화의 본령이 형태를 그리는 데에 한정되지 않고 정신을 그리는 데에 있음을 대변해주는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주7] 이 초상을 그린 작가를 규명할 수 있는 전거가 나왔으면 한다.

「최덕지 초상화」, 74×53cm, 견본채색. 전주최씨문중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최덕지 초상화」, 74×53cm, 견본채색. 전주최씨문중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작가 미상의 이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초상화는 조선 시대 사대부 초상화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그려진 연도로 보았을 때 어진화사 안견의 작품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덕지 초상화」(74×53cm, 견본채색)는 유지 초본이 함께 현전하는데 1975년 5월 16일 자로 보물(제594호)로 지정되었다.

5. 기존의 안견론에 관한 비판(1)

기존의 안견론은, “안견은 산수화가이므로 인물화를 잘 그리지 못하였고, 그의 유일한 진적은 「몽유도원도」 한 점 뿐이라는 「몽유도원도」를 과대 포장한 바탕위에서 형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견이 어진 화사라는 사실은 무시된 것이다. 기존의 안견론은, 인물화 부분에서도 안견의 실체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였다. (2024.09.15.)

[주1] 안휘준, 『한국회화사(韓國繪畵史)』, p.127, 일지사 발행.

[주2] 안휘준, 같은 책, p.135.

[주3] 김용준,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 p.213, 범우사 발행.

[주4] 김용준, 같은 책, p.214.

[주5] 이양재, 통일뉴스, 2024년 2월 5일자 ‘신 잡동산이’(49)-「초상화가 최경(崔涇)과 신숙주(申叔舟) 초상화」.

[주6] ①전주이씨광평대군파종친회, 『전주이씨광평대군파족보』 4권4책, 권1 p.245., 1977년. / ②이건환·이양재 공저. 『안견-재조명』, p.231., 1994년, 한국미술연감사.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의 묘소는 1444년(세종 26) 대군이 세상을 떠난 뒤 경기도 광주군 서촌 학당현(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 부근)에 처음 마련되었다. 그러다가 51년 후인 1495년(연산군 1) 성종의 왕릉을 이곳으로 정하면서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광수산(지금의 서울 강남구 광평로31길 20. 수서동)으로 이장하였다(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 현재의 광평대군 묘에서 동남쪽으로 2km 지점에 안견의 본관인 지곡(池谷)이 있다.

[주7] 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 (崔德之肖像─油紙草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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