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본 연재의 제54회(3월11일), 제66회(6월3일), 제69회(6월24일), 제72회(7월15일), 제76회(8월12일)에서 이쾌대 및 리쾌대를 다루었다. 이번의 제78회가 여섯 번째 다루는 글이다.
처음에 쓴 제54회 한 편으로 끝 내려했지만, 기고하고 보니 무언가 크게 부족하였다. “리쾌대에 대하여 더 다루어야 한다”는 필연성이 나를 엄습해 왔고, 두 달 넘게를 갈등하다가 두 번째 글을 썼다. 처음부터 예상에 없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글을 쓰다보니 두서(頭緖)없이 비슷한 언급을 반복하였다. 여러 편을 쓸 의도로 시작한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분간 리쾌대에 관한 글은 더 이상 쓰지 않으려 한다. 그러한 만치 이번에는 리쾌대가 재북시절에 남긴 작품 분야 가운데 미처 소개하지 못한 부분을 한꺼번에 다루고자 한다.
리쾌대에 관한 글을 6번이나 계속 쓰게 된 이유는, 리쾌대의 재북시절 작품 수십 점을 사진으로라도 독자들에게 소개하면 앞으로 리쾌대의 말도 안 되는 위작은 남측의 미술시장에서 사라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서는 안 된다.
1. 인물화
전후 여러 재북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생활 주변 인물을 그린 인물화가 많다. 정치 주제화로 군중(群衆)을 그린 것도 적지는 않지만, 초상화의 경우 과거의 귀족적 취향을 벗어나,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나 농민을 그린 그림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자화상과는 또 다른 인물화이다.
리쾌대가 그린 재북시기의 인물화는 군중을 그린 인물화가 있고, 또한 특정 인물이 단독으로 들어가 있는 초상화가 있다. 군중속에 그려진 이쾌대 및 리쾌대의 인물은 표정이 사실적이다. 그러나 초상화는 어느 나라의 초상화든 대개가 얼굴 표정이 굳어있다. 그것은 증명사진적인 초상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리쾌대가 그린 그림 가운데 리재현이 한때 보관하였던 십여 점의 그림 가운데는 노동자를 단독으로 그린 그림이 두 점 있고, 부인 백의선과 딸 수봉이, 제자 리병효와 그의 셋째 아들, 우의탑 병사 등이 있다. 이번에는 기존에 소개한 그림 이외의 인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초상화는 조선화이든 유화이든 남에서든 북에서든 사실적으로 그린다. 리쾌대가 그린 초상화도 실존 인물을 그린 것이기는 하나 그려진 주인공이 확인되는 것은 몇 점되지 않는다.
리쾌대가 평양애서 활동하던 1956년에 그린 「로인 초상」은 누구를 그린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북에서 이 그림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법한데, 현재는 이 그림에 얽혀져 있는 내력이 사라진 것인가? 흰색 저고리를 입고 있는 초상화에는 그저 초상화라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확인되었으면 싶다. 1956년의 이 작품은 극사실주의적인 면이 나타나고 있다.
3년 간의 전쟁기간에 미군의 폭격으로 북은 초토화되었다. 전후 평양 시내에 남아 있던 건물은 단 두 채였다고 한다. 그런 초토화된 평양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여러 점 남한으로 유입되어 일부 수집가들이 소장하고 있기도 한다.
이러한 전후복구 3개년 계획을 끝내고 사회주의 기초건설을 위한 5개년 계획(1957년~1961년)을 눈앞에 둔 1956년 12월, 김일성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 건설에서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기 위하여」라는 연설을 했다. ‘현존 설비의 이용률을 높이고 노동생산 능률을 제고하며, 내부 원천을 동원하고 절약 제도를 강화하자는 내용’이었고, ‘새로운 투자 없이 내부자원을 최대한 동원해 생산성을 높이자’라는 이야기였다. 이것이 공업에서 천리마운동의 시작점이다.
이러한 공업에서 시작한 천리마운동의 사회적 선동과 추진은 농촌으로도 확산된다. 리쾌대가 1957년에 그린 「농장원」은 이러한 천리마운동이 진행되던 초기의 그림이다. 그려진 농부는 의복을 입는 격식을 차리고 있지 않다. 흰 셔츠를 입고 농모(農帽)를 쓴 농장원의 무표정한 모습은 농경지에서 막 돌아온 듯한 농부의 모습 그대로이다.
우리는 리쾌대의 1957년작 「농장원」은 당시 리쾌대가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평양 근교의 어느 농장의 농부를 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작품을 그린 연도와 당시 사회적 현실을 돌이켜보며 이 작품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그저 가늠해 볼 뿐이다.
리쾌대의 1962년 작 「선동원」과 1963년 작 「교환수」는 강계에서 그린 그림이다. 북에서 선동원과 교환수는 신분이 보장되는 당원이어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다. 당시에는 선택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선망의 직업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여성은 대체로 짙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 1960년대초의 북에서는 화장을 하지 않는 여성이 많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리쾌대는 「선동원」과 「교환수」를 그리면서 그림에서나마 옅게 화장을 시켰다. 그림에서 여성스러움을 다소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남한에서도 1960년대에는 화장품이 귀했고 사용하는 여성 수가 매우 적었다. 리쾌대는 이 그림에서 「선동원」은 하복(夏服)을 가볍게 차려입은 밝은 모습으로, 「교환수」는 동복(冬服)을 무겁게 차려입은 무거운 모습으로 그렸다. 직업이 주는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리재현이 한때 보관중이었던 십여 점의 그림 가운데는 두 점의 「로동자」가 있다. 하나는 전방(前方)을 웅시하는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전방을 내려다 보는 그림이다. 두 점의 「로동자」는 같은 캔버스를 쓰고 있고, 같은 물감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같은 시기에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북애서는 이 그림을 1963년에 강계에서 그린 것으로 본다.
리쾌대의 「로동자」①의 왼쪽 가슴 부분은 물감이 흘러내린 부분이 있다.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속사(速寫)하고 채 마르기도 전에 세워놨기 때문이다. 일련의 이러한 속사 작품에는 리쾌대의 서명이 없다. 리재현이 보관하던 작품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리재현의 처 백운선이 보관하던 그림이 아니라면 쉽사리 인정받을 수 없는 그림이다.
그러나 아직은 리쾌대의 재북시절의 중요 작품이 크게 흩어지지 않았고, 북측 출처는 분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필자는 리쾌대의 재북시 작품을 소개하면서 일부 작품의 캔버스의 뒷면이나 측면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그것은 20~30년내에 만들어진 위작을 리쾌대 그림으로 주장하기에, 진품의 캔버스와 비교해 보라는 의미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리쾌대 작이라 주장하는 어느 그림 뒷면에 캔버스라 찍혀 있는 모습이다. 리쾌대가 활동하던 시절에 북에서 이런 캔버스는 공급되지 않았다. 제66회 연재에서 언급하였듯이 “리쾌대의 작품에서 보이는 캔버스는 씨실과 날실로 짠 특성을 보아 당시 ‘혜산 아마천 생산공장’에서 나온 천으로 규명되어 있다. 천의 노화(老化)와 프린트 방법은 전문가들이 모든 공법(工法)에 따라 생산한 캔버스가 아니라 화가가 자체로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아래 사진의 캔버스는 북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해외의 공장에서 1980~90년대에 대량 생산한 것이다. 이런 캔버스에 그린 수준 미달의 그림을 리쾌대의 대표작으로 기만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는 그만 사라졌으면 한다.
북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없다. 북의 인민학교에 진학하면 곧바로 소년단원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1959년에 그린 「소년단원」은 소년단을 상징하는 붉은 넥타이의 여학생이 오른팔에는 이름표로 보이는 것을 달고 있다. 밝은 물감으로 이렇게 그리는 류(類)의 그림은 1960~70년대 북의 선전화에서 보여주는 보편적으로 형식화된 특성이다. 리쾌대의 이 그림은 그러한 특성이 나타나는 초기의 그림이다.
리쾌대의 작품 「푸른 옷을 입은 소녀」는 이 글을 쓰며 필자가 부친 작품 명칭이다. 필자 생각에는 큰딸을 그린 것 같은데, 기회가 주어지면 실물을 더 조사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림은 극사실주의적인 감각을 준다. 옷 차림새가 매우 세련되다.
2. 정물화
북의 당을 상징하는 것은 붓과 망치와 낫이다. 붓은 지식인을, 망치는 노동자를, 낫은 농민을 상징한다. 과연 이 그림을 이쾌대가 노동자를 상징하여 그렸을까? 이 그림 「망치」는 그가 건설성 산하의 중앙건축미술제작소에 있던 1956년에 그린 극사실주의적인 그림이다. 그려진 나무 망치의 모습은 ‘망치’라기보다는 ‘떡메’의 모습에 가깝다.
리쾌대의 정물화는 대체로 꽃을 그린 작품이 몇 점 남아있다. 그 가운데 1956년에 가을 꽃 국화를 그린 「꽃」①은 대표작이라 할만 한 그림으로 리쾌대의 후처 백운선이 보관했던 작품이다.
그런데 후인이 모작(模作)한 유사한 작품이 국내로 유입되어 있다. 원작과 국내로 유입된 모작의 차이는 색상과 선명성에 있다. 원래 북에서 모작에는 언제 누가 누구의 작품을 그렸다는 것을 명시한 종이 딱지를 붙여 나온다. 그 딱지를 해외로 반출한 후 중간 상인이 제거하고 원작으로 주장하여 유통시키는 경우가 있다. 국내에 유입되어 있는 유사작은 백운선이 보관했던 작품이 아니다.
「꽃」②는 여름꽃 붉은 나리를 그린 그림이다. 리쾌대의 작품 치고는 범작(凡作)이다. 「꽃」③은 홀로 핀 빈약한 흰 장미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리쾌대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리쾌대의 창작 노트라든가 그림에 관한 메모가 남아 있을까?
3. 추기(追記)
중국의 모 미술대학 교수가 제공한 리쾌대의 파일을 보면서, 제72회 연재의 끝부분에서 언급하였던 MBC와 SBS의 남달구(南達九, 1957~2023) 기자가 소장하였던 「춤」과 관련한 한 사진이 보였다. 그 사진의 배경에 춤의 또 다른 그림이 잡혀 있었다. 이번 연재에서 그 사진에서 공개할 수 있는 일부를 갈무리하여 아래에 소개한다.
갈무리한 사진의 중앙에 보이는 그림이 서울옥션에 출품되었던 그림으로 보인다. 그 오른쪽에는 농악의 부분도가 있고, 왼쪽에는 제72회 연재에서 소개한 「농악」 부분 습작 「춤」이 보인다. 서울옥션의 도록을 보고 싶다.
남달구 기자는 나보다 두 살이 어렸다. 1980년대말부터 그와 나는 서로 잘 알았다. 그러나 그를 만난 적은 많지 않다. 아마도 1990년대 초반에 몇 번 보았던 것 같다. 우리는 당시의 문화계에서 상호간에 너무 잘 알았다.
2021년인가 고 이건환 선생이 “남달구 기자 알아요?”하며 느닺없이 그를 말한다. 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기회되면 보자”고 했다. 금년 여기에 리쾌대에 관한 연재하면서 서울옥션 출품작이 남달구 소장품이었다는 것이 생각나 그를 수소문했더니 이미 지난해에 타계했다. 리쾌대를 생각하면 남달구의 열정이 생각난다. 유족에게 평안이 늘 함께 있기를 축원한다.
4. 맺음말
필자는 2019년에 황영준(黃榮俊, 1919~2002)전 「봄은 온다」를 경인일보와 공동 주최한 적이 있다. 남한에서 북조선 작가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회고전은 현재로는 황영준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한 작가가 평생에 그린 작품의 전모를 보면 그 작가의 예술세계가 드러난다. 이후 한국의 미술계에서 황영준 작품의 전모를 알았기 때문에 황영준 작품의 가짜 거래는 거의 중단되었다.
황영준전이 끝난후 나는 경인일보의 두 번째 전시로 남과 북의 이쾌대 작품을 모아 ‘이쾌대 작품전’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경인일보는 나의 제안에 수긍하면서도, 느닷없이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은 잡탕 전시로 변경 진행하였다. 초창장을 보낸다고 약속하더니 초청장도 없이 기습적으로 개막하였다.
아마도 출품자 정 모 씨가 자신이 출품한 미술품에 자신이 없어 나를 배제하도록 요구한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전에 정 모 씨가 소장한 북한미술품 도록을 살펴보니 게재한 그림의 절반 정도가 사진으로만 보아도 엉터리였다. 그러니 내게는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이다.
이번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리쾌대의 재북시절 작품 수십 점을 사진으로라도 독자들에게 소개하면 앞으로 리쾌대의 말도 안 되는 위작은 남측의 미술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미술계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면 사기꾼만 득실거리게 된다.(2024.08.19.)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