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1964년 봄날의 늦은 오후였다. 누군가 아버지의 경북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에 몰두하던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은 벌써 끝났고, 학생들도 강의실을 떠난 지 한참 지난 때였다.
“누구십니까?”
연구실 문을 여는데, 누군가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안 선생, 저 기억하시겠습니까? 이재문입니다.”
“이재문 기자! 정말 반갑습니다. 안 그래도 어찌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어서 들어오세요.”
아버지는 이재문 선생의 손을 잡고 얼싸안다시피 했다. 아버지의 표정과 말투에서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쪽으로 편하게 앉으세요. 우리가 얼마 만입니까? 영남고에 교원노조 취재하러 오셨을 때 보고 처음이네요.”
“그렇지요. 한 3년 된 거 같습니다.”
“5.16 때 민족일보 기자들이 잡혀가면서 이 기자도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해 말에 수배가 풀렸습니다. 이듬해 국토건설대에 들어가 군대도 해결했고요. 매일신문에 다시 들어가 지금은 정치부에 있습니다. 안 선생은, 아니지 이제는 ‘교수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허허……. 5.16 때 잡혀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동안 어찌 지냈습니까?”
“저도 별문제 없이 풀려났습니다. 그 때문에 영남고에서는 해직되었죠. 다른 고등학교에 강사로 나가다가 1962년에 경북대 수학과에 자리가 나면서 이리로 오게 됐습니다. 올봄에 조교수로 발령받았습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에 대한 대학가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려고 대학 교원의 정원을 늘려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경북대 수학과에도 자리가 났다. 아버지의 경북대 수학과 발령에는 박정기 교수의 노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아버지가 사범대 수학과 출신이라는 점과 5.16 직후에 교원노조 활동으로 잡혀간 걸 시비하며 주위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기 교수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사범대 수학과든 문리대 수학과든 그게 뭐가 중요하노? 다 경북대 수학교실 멤버 아이가? 그리고 안 선생이 교원노조 활동한 게 문제라는데, 어차피 대학에 오면 교원노조 하고 싶어도 못 한다. 우리한테는 제대로 연구할 사람, 제대로 학생들 공부시킬 사람이 필요하다. 안 선생만 한 사람 어디에도 없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재문 선생은 정말 좋아했다. 대학교수, 그것도 국립대 교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앞으로 후대를 위해 큰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두 사람은 연구실을 나와 시내로 자리를 옮겼다. 모처럼 반가운 사람을 만나니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다. 함께 식사하면서 반주도 곁들였다. 그런데 술을 받아놓고 잘 마시지 않는 아버지를 보고 이재문 선생이 물었다.
“안 교수는 원래 약주를 잘 안 합니까?”
“예전에는 저도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렸죠. 그런데 4.19를 겪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정처 없이 살았구나,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부터 술은 절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도 취하도록 마시는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안 교수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군요.”
이날 아버지는 이재문 선생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 고향과 학창 시절 추억도 나누었고,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대한 인식도 공유했다. 주제는 다시 박정희 정권이 밀어붙이는 한일회담의 본질과 미국의 신식민주의 지배 전략으로 이어졌다.
이때의 만남은 아버지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이재문 선생에게서 무릉동의 박철환 지도원 동지와 밀양중학교 손기용 선생님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이재문 동지는 생각이 깊고, 심지가 곧으며, 학식도 풍부했어. 목소리는 신중했고, 자세는 겸손했으며, 언행에는 절제가 배어 있었지. 나는 이재문 동지를 만나고 너무 기뻤어. 이 사람이라면 변혁운동의 길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겠구나, 그런 마음이 절로 들었지.”
이재문 선생은 1934년 7월 9일, 경북 의성군 옥산면 전흥리 716번지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하지만 여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나 사실상 막내로 자랐다. 이재문 선생의 집안은 퇴계 이황의 후손인 진성 이씨 가문으로 엄격한 유교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사촌들과 함께 집안의 장손인 큰아버지한테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새벽 5시가 되면 큰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옛 선현들의 경전을 읽는 게 일과의 시작이었다. 한학 공부가 끝나야 비로소 밥을 먹고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큰집의 형님은 양조장을 했다. 여덟 살 많은 친형은 면서기로 일하다 해방 후 세무공무원이 됐다고 한다. 항일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의로운 선비정신과 유교적 도리를 강조한 집안 분위기 속에 이재문 선생도 대의를 중시하는 올곧은 성품을 지니며 성장했다.
의성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선산군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이재문 선생은 1학년 때 바로 3학년으로 월반할 정도로 공부가 특출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한학 공부로 다져진 학습 능력에다 책을 한 번 읽으면 줄줄 외울 정도의 명석한 머리를 지녀 공부만큼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았다.
1954년에 경북대학교 법정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이재문 선생은 3학년 때 외무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2차 시험을 앞두고 장티푸스에 걸리는 바람에 응시를 포기하고 말았다. 외교관 대신 기자의 길을 선택한 그는 1957년에 영남일보 입사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의식 있는 사람들이 언론사에 많이 있었어. 정치단체나 대중조직이 전멸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그나마 신문사 기자들이 높은 정치의식을 지녔고,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지. 언론이 거의 유일한 저항 세력이었어.”
영남일보 이순희 사장이 1958년 5월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자, 이재문 선생은 사표를 던지고 나와 대구일보로 전직했다. 대구일보에 재직하면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의 학생시위를 취재했고, 김주열 학생의 주검을 직접 보기도 했다. 4.19 현장에서 거대한 민중의 힘을 확인한 이재문 선생은 평범한 기자로만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때부터 이재문 선생은 자신의 삶을 변혁운동과 일치시켰다.
1961년 2월에 진보적 민족언론을 표방하며 민족일보가 창간되자 이재문 선생도 여기에 동참했다. 민족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혁신정당을 취재하던 그는, 4.19 이후 수면 위로 등장한 당대의 사회운동가들과 취재원 이상의 동지적 관계를 맺어 나갔다. 하지만 5.16쿠데타와 함께 민족일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들어왔다. 조용수 사장과 직원들이 줄줄이 잡혀가고, 민족일보는 강제 폐간당하고 말았다.
“이때 대구 대봉동의 형님 집으로 경찰과 군인이 들이닥쳤다고 해. 이 기자가 집에 없자 저놈들은 대신 형님을 잡아갔어. 형님은 동생의 행방을 추궁당하다 1주일 뒤에야 풀려났지.”
수배자 신분이 된 이재문 선생은 기약 없는 도피 생활에 돌입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 떠돌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4.19를 계기로 본격적인 변혁운동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하자, 변혁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 일이 절실했다. 이재문 선생은 엄청난 양의 독서를 통해 이 과제를 풀고자 했다.
“이재문 동지는 학습 투쟁이 운동가의 첫째 의무라고 강조했어. 목적지를 향해 갈 때 길을 잃지 않으려면 나침반이 필요한데, 변혁운동에서는 학습이 곧 나침반이라고 했어. 그 점에서 나하고 뜻이 통했지. 공부하던 주제와 내용이 비슷해 우리는 금방 의기투합이 됐어.”
이론학습은 아버지에게도 절실한 과제였다. 본격적으로 변혁운동을 하려면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했다. 그러자면 다양하고 풍부한 독서가 필요했다. 군에서 제대한 뒤 아버지는 읽을 만한 사회과학책을 찾아 대구의 헌책방을 뒤졌다. 그곳에서 일본어로 된 소비에트 철학책과 공산주의 운동사 책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부산의 서점에 일본에서 발행한 최신 사회과학책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려가 책을 구해 오기도 했다.
경북대에 발령받은 뒤에는 학교 도서관도 자주 찾았다. 도서관에는 식민지 시절 전문학교 도서관에 있던 책들이 많았다. 전문학교들이 경북대로 통합되면서 그대로 갖다둔 마르크스와 레닌의 일본어판 원전도 꽤 있었다. 먼지에 뒤덮인 채 서고 구석에 꽂혀 있던 그 책들을 찾아 읽었다.
아버지의 독서 방법은 남달랐다. 책의 핵심 내용을 대학노트에 꼼꼼하게 정리했다. 마치 수학 공부를 하듯이 노트 정리를 하면서 학습을 해나갔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등 분야도 다양했다. 매일 시간을 정해 두고 계획을 세워 읽어나갔다.
아버지는 평양방송도 꾸준히 들었다. 4.19 이후 북에서 내보내는 방송이 확 달라졌다고 한다. 그전에는 일방적인 선전이나 남쪽 사회 비판이 주로 나왔는데, 어느 때부터 강의식 해설 방송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혁명철학, 혁명사 등을 강의하듯이 천천히 읽어주는데, 이게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한다. 특히 소비에트나 외국의 사례가 아닌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피지배층이나 농민들의 투쟁 사례를 찾아 변증법과 유물론을 설명하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때 방송한 내용들이 나중에 북에서 『조선력사』와 『조선철학사』, 『항일민족해방투쟁』과 같은 책으로 발간됐다.
“전 세계의 방송 청취가 가능했던 단파 라디오는 일제강점기 때나 해방 직후에 지식층에서는 다들 하나씩 갖고 있었지. 해방 전에는 연합국의 방송을 들으며 전황을 파악했고, 해방 후에는 미소 공동위원회 소식이나 북의 민주개혁 소식을 북쪽의 방송으로 들었지.”
6.25전쟁이 끝나고부터는 단파 라디오를 구하는 게 까다로워졌다. 예전에는 양키시장(대구역 건너편의 교동시장)에 가면 일제나 미제 중고 단파 라디오를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신상 명세를 적어내야만 팔았다. 경찰도 수시로 전파상을 드나들며 단파 라디오를 사 간 사람을 파악했다.
아버지가 혼자서 해온 학습 과정을 흥미롭게 듣던 이재문 선생은 책도 빌리고, 정리한 학습 노트도 볼 겸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다음 약속을 정하고 이재문 선생과 헤어진 아버지는 흥이 났다. 큰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밤하늘의 별빛도 초롱초롱 빛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진 그 빛이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