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격월간 『한국고미술』 1997년 1‧2월호 pp.54~65에 기고한 글을 일부분 증보하고 정정(訂正)한다.

 

1. 『묵죽화책(墨竹畫冊)』의 발견

화가 이수문(李秀文). 그는 과연 명(明)나라 사람인가? 아니면 조선인(朝鮮人)인가? 그에 대한 문헌이나 전존작품(傳存作品)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없다. 1967년경 만해도 그의 이름은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 전혀 알려진 바 없었고,[주1] 현재에도 그는 잊힌 화가로 남아있다.

그러던 그가 조선초기의 명화가(名畵家)로서 우리들 앞에 성큼 다가섰다. 1967년경 일본에서 발견된 그의 작품 『묵죽화책(墨竹畵冊)』의 맨 끝장(제10장)에 쓰인 다음과 같은 관지(款識)에 의하여 그를 조선인이라고 일본의 미술사학계 일각에서 주장한 것이다.[주2]

“永樂甲辰二十有二歲次 於日本國來渡 北陽寫 秀文”, 즉 “영락 갑진 22세차에 일본국으로 건너와 북양에서 그리다. 수문”. 이 문장에서의 “永樂甲辰二十有二歲次”를 이수문이 20세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으로 오독(誤讀)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차(歲次)’란 간지(干支)의 차례를 말한다. 그리고 영락 갑진년은 영락 22년이다.

이를 제대로 분석하여 보면, 영락 22년, 즉 1424년(甲辰)에 일본국[주3]으로 건너왔다는 것으로, 수문이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묵죽화책』 제10장, 이수문, 1424년, 30.6×45cm, 일본 개인소장. 이 화책에 들어 있는 그림들은 이수문의 가장 확실한 작품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묵죽화책』 제10장, 이수문, 1424년, 30.6×45cm, 일본 개인소장. 이 화책에 들어 있는 그림들은 이수문의 가장 확실한 작품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990년대 이전의 일본 미술사학계 일각에서는 수문의 전존작품에 나타난 화풍이 조선화풍이고 1423년 11월 20일 주문(周文)이라는 화가가 사신들 틈에 끼여 조선에서 왔으므로, -이수문이 명인(明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문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주문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동행(同行)한 조선화가로 본 것이다.[주4]

그러나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이수문이 조선에서 건너온 화가라는 관점을 대체로 부인하며, 그가 명(明)나라에서 일본으로 귀화한 화가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미술사학자 안휘준(安輝濬)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회화사(韓國繪畫史)』에서 안견(安堅)이 주문(周文)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자신의 기존 논리[주5]에 묶여 이수문의 존재의미를 제대로 언급하지 못하고 있으며[주6], 또한 김원룡(金元龍)․안휘준 공저인 『신판 한국미술사(新版 韓國美術史)』에서도 이수문의 이름을 지나가면서 딱 한 번 언급한 정도로 끝내고 있다.[주7]

증보(增補) : 현전하는 『묵죽화책(墨竹畫冊)』은 모두 열 장으로 되어 있다. 그림의 소재와 내용을 보면, 제1장은 위아래로 배치된 큰 바위 사이에 밀집하여 있는 대나무밭, 제2장은 태호석(太湖石)을 배경으로 서 있는 풍죽(風竹), 제3장은 언덕 위의 대나무밭, 제4장은 큰 바위와 언덕 아래의 대나무 숲, 제5장은 개(介) 자형으로 늘어진 우타죽(雨打竹), 제6장은 비바람을 맞고 있는 풍우죽(風雨竹), 제7장은 벼랑 사이의 대나무 숲, 제8장은 거센 폭풍우를 맞고 있는 풍우죽, 제9장은 달밤의 대나무, 제10장은 태호석을 배경으로 서 있는 대나무와 죽순(竹筍)을 그리고 있다. 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그렸고, 각 장의 크기는 세로 30.4㎝, 가로 44.5㎝이다. 『묵죽화책』은 일본의 외교관 마쓰다이라 고토(松平康東, 1903~1994)가 구장하고 있었다.

2. 일본에서 이수문이 속한 화계(畵系)

이수문에 대한 문헌은 우리나라에 전혀 없다. 따라서 일본의 기록들 가운데 조강흥정(朝岡興楨, 아사오카 오키사다. 1800~1856)의 『증정 고화비고(增訂 古畵備考)』에 채록된 것들을 통하여 이수문이 관련된 일본의 화가 『명조(吉山明兆, 1352~1431)의 화계(畵系)』를 탐색, 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주8]

[자료 제공 - 이양재]
[자료 제공 - 이양재]

이러한 『명조의 화계』를 살펴본다는 것은 도일(渡日)후 이수문의 존재를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일본 미술사학계의 주장대로 이수문이 주문을 따라 도일하였다면 그가 일단 활동을 처음 시작한 곳은 주문이 있던 경도(京都)의 상국사(相國寺)일 것이고, 그곳에서 그는 여졸(如拙, 조세쓰)을 만났을 것이다. 따라서 이수문은 당시 일본의 화단을 주름잡던 여졸의 문하(門下)에, 더 나아가 『명조의 화계』에 입문(入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수문이 『명조의 화계』에 입문했다고 해서 실제로 이수문이 여졸에게서 그림을 배웠다는 의미는 아니며, 다만 이수문은 한동안 여졸의 인맥에 속하여 활동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수문이 일본에 와서 창작하였던 『묵죽화책』을 보면 아주 능숙한 필력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일본에 왔을 때는 이미 화가로서의 높은 창작 기량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이수문은 완성된 완전한 화가로서 일본에 입국한 것이다. 또한 이수문이 이 『명조의 화계』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그와 주문이 깊은 인연이 있음을 --즉 이수문이 주문과 동행하여 일본에 입국하였다는 관점을-- 사실상 정황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3. 조선에서 이수문의 존재

이수문이 도일하기 이전에 당시 조선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입지는 어떠했을까? 이수문은 조선에서 어떠한 신분이었으며, 그는 왜 일본으로 갔을까? 그때 그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점을 직접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문헌은 국내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1424년(세종6년)에 주문을 따라 일본으로 갔다는 전제조건에서 볼 때, 그때는 조선왕조가 출범한 지 겨우 3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시기이므로, 당시 조선국만의 30~40%는 고려말(高麗末)에 태어난 사람이었음이 확실하다.

필자가 앞에서 제시한 『명조의 화계』에서 살펴볼 때, 이수문은 여졸의 수제자들 가운데 상위(上位)에 기록되어 있음은 그가 뛰어난 그림 솜씨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하여 주며, 아울러 그는 주문과 동년배이거나 화업(畵業)에서 연상의 선배였을 가능성도 보여 준다.즉 이수문이 주문과 동년배라고 가정을 할 때 그는 고려말인 1385년경을 전후로 하여 태어나 40세경에 도일(渡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변옥집(辯玉集)』[주9]에는 이수문을 “……後圓融帝永和年中人”이라고 하였다. 일본에서 “후원융제 영화연중”이라고 하면 1375년부터 1378년까지의 시기이다. 흔히 무슨 연간(年間) 또는 무슨 연중(年中)의 사람이라고 하면 주로 그 시기에 활동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수문의 경우 이를 그 시기에 태어난 것으로 늦추어 보아도 이수문이 40대 말에 도일했다는 말이 된다.

이는 그가 후일 일본에서 결혼하였으며 한동안 활발히 활동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 약하다. 그러나 이 기록 이외에는 그가 태어난 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다른 어떠한 기록도 없다.

이수문은 고려의 멸망(1392년)과 더불어 가문이 기울어진 집안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만약 이수문이 고려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이나 조선의 건국에 항절(抗節)을 한 절신(節臣)의 후손이었다면 그는 자연히 조선인임을 항시 스스로 밝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명나라 사람으로 기록에 남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닌지? 물론, 이수문이 명나라 사람이라고 운운하며 일부 문헌에 기록된 것은 당시 일본에서 중화숭배사상을 반영한 기록일 가능성도 매우 크다.

어쨌든 당시는 교통편이 오늘날과 같지 않으므로 도일(渡日)이라는 것은 고향과 친지, 조국을 버리고 미련 없이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수문에게 가정이 있거나 친지가 많았고, 그가 당시 조선 사회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면, 그는 이를 모두 버리고 도일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도일은 그가 조선왕조를 시원치 않게 여기고 있었거나 아니면 조선왕조에 죄를 짓고 도피한 경우로 유추된다. 그러나 그가 주문과 동행하여 도일하였다면 조선왕조에 죄를 짓고 도피한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외빈(外賓)에 대한 접대로 이목이 쏠리고 특별 관리되는 일본사신들 틈에 죄를 지은 자로서는 끼어들어 밀항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수문이 조선인이라는 점은 그의 화풍이 조선화풍이라는 것 이외에도 그의 이름이 수문(秀文)이라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고 할 수가 있다. 수(秀)자와 문(文)자는 조선시대에 이름을 지을 때 비교적 널리 사용되었던 문자이며, 특히 문(文)자는 항렬자(行列字)로도 때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수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다른 사람으로 명인(名人)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년) 때 집현전 학사로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草稿)의 대부분을 쓴 남수문(南秀文: 1408~1443년)이란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즉, 수문이라는 이름은 그 숭문적(崇文的)인 의미 때문에 고려말부터 조선초기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이름이다.

어쨌든 이수문의 이름은 그 의미가 “문에 빼어났다”라는 것인데, 이는 그의 이름이 문인(文人)으로 기대하고 지어진 이름임을 알려 주며,[주10] 또한 그의 이름은 그가 문장과 예술에 뛰어났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여 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화업(畵業)을 천기(賤技)로 천시하지만은 않았고, 실제로 그가 『명조의 화계』에서 여졸의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올라가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문장과 회화를 익힌 것으로 유추된다.

어쨌든 이수문은 도일(渡日)했던 시기에 화가로서의 완숙한 화풍을 구사하고 있었고, 따라서 당시의 일본 화단에 고려말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조선초기의 화풍을 심어 줄 수가 있는 바로 그러한 능력과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주문(周文)은 누구인가?

이수문을 연구하자면 꼭 따라오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일본의 화승(畵僧) 주문(周文, 슈우분)이다. 그의 정확한 생졸년은 전하지 않지만,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는 그가 그의 제자 설주(雪舟, 셋슈. 1420~1506년)보다도 약 30~35세 정도 연상이며 문안연간(文安年間: 1444~8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즉, 주문은 1385년부터 1390년 사이에 출생하여 1448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주11]

「죽재독서도(竹齋讀書圖)」 부분, 주문(周文), 1446 이전. [사진 제공 - 이양재]
「죽재독서도(竹齋讀書圖)」 부분, 주문(周文), 1446 이전. [사진 제공 - 이양재]

주문의 별호(別號)는 월계(越溪), 춘육(春育) 등이 있으며, 그의 명(名)은 천장(天章)이다. 그는 일찍이 경도(京都)의 상국사(相國寺: 1382년 건립)로 가서 여졸(如拙)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고, 1423년 11월 20일 사신들 틈에 끼여 조선에 왔다가 1424년 2월에 일본으로 귀국한 바 있다.

그는 귀국 후 1430년경 상국사를 나와 족리막부(足利幕府, 아시카가 막부 = 무로마치 막부)의 어용회사(御用繪師)가 된다. 현재 주문의 전존작품들 가운데 「삼익재도(三益齋圖: 1418년)」와 「강천원의도(江天遠意圖)」, 「죽재독서도(竹齋讀書圖: 1446 이전)」, 「촉산도(蜀山圖: 1446년 이전)」 등이 그의 가장 확실한 작품으로 고증되고 있으며,[주12] 또한 수많은 전칭 작품이 전존한다.

“일설(一說)에 주문은 응영(應永) 21년(1414년) 1월 28일 스승 여졸로부터 화법을 비전(秘傳) 받았고, 장록(長祿) 2년(1458년) 3월 15일 당시 39세의 승려 설주에게 전했다”한다.[주13] 이에 따라 --주문이 1414년에 여졸로부터 화법을 비전 받았다는 언급으로 해서-- 그가 적어도 이 시기부터는 창작을 시작하였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는 주문의 최고년대(最古年代) 전존작품이 1418년 작 「삼익재도」임을 미루어 볼 때 일부 타당성이 있다. 만약 주문이 1460년경에 사망한 것이 아니고, 앞서 제시한 대로 문안연간에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면 주문이 설주에게 비전을 전했다고 하는 1458년은 이미 그가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난 시점이므로, 그러면 이 기록은 그 시기적 정확성을 제시하기보다는 마치 이수문을 의식하여 주문이 여졸로부터 화법의 정통성을 비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연도를 설정하면서 주장한 것이 아닌가 판단될 수도 있다.

현재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주문을 일본 수묵화(水墨畵)의 조(祖)로 평가하고 있는[주14] 것을 볼 때, 그리고 한편에서는 조선인 화가 이수문과 주문에 대하여 혼선을 빚게 하거나 이수문을 의도적으로 낮게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일본의 미술사학계가 수묵화의 조(祖)로서 주문에 대하여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가를 잘 알 수가 있다. 참고로 주문의 제자 설주(雪舟)는 일본이 유네스코를 통하여 세계적인 일본화가로 내세운 바로 그러한 인물임을 여기에 덧붙인다.

5. 일본에서 이수문의 존재

위에서 ‘조선에서 이수문의 존재’를 다루면서 일본에서 이수문의 위치에 대해 일부 언급한 바가 있다. 이제 일본에서 이수문의 입지를 다루고자 한다. 아니 일본에서의 입지라고 할 것이 없다. 우리 민족에게 철저히 잊혀 온 화가 이수문에 대한 모든 기록은 일본에 있으므로, 그의 화가로서의 구체적인 연구는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일본의 옛 문헌에는 그가 명나라의 귀화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전존작품에서 살펴볼 수가 있는 화풍은 이미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하였던 일본의 미술가 곡문조(谷文晁, 타니 부초오. 1763~1840년)가 간파하였듯이 중국화풍이 아니라 조선화풍이며,[주2 참조] 더구나 1967년경에 『묵죽화책』이 발견됨으로써 조선에서 건너온 화가로 오늘날에는 새롭게 고증되고 있다.

과거 한때, 이수문과 주문이 동일인으로 주장된 바가 있었고, 그 후에 이수문과 주문이 구분되어 지더니, 최근에 이르러서는 이수문과 주문 이외에도 명나라의 귀화인 이주문(李周文)이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되고 있기도 하다. 지난 세기말까지의 그러한 주장은 누가 뚜렷하게 논문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대략 다음과 같은 원인에서 주장되어 온 것이다.

첫째, 이수문(李秀文)과 주문(周文), 그리고 이주문(李周文)은 일본 발음으로 그 이름을 읽자면 다 같이 “슈우분”이 된다. 즉 이름상으로는 얼마든지 혼동될 수가 있다.

둘째, 근래까지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수문이 향록(享祿) 3년(1530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묵죽화책”이 발견됨으로써 그가 1424년에 일본으로 건너와 창작하였음은 절대불변의 사실로 입증되었고, 이에 그간 주장되어 온 수문의 1530년 사망설은 자연히 의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1424년에 『묵죽화책』을 그린 이수문과 1530년에 사망한 이주문을 다른 인물로 보는 관점이 형성되었다.

셋째, 수문에 대한 거의 모든 기록에서 그를 명나라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주문과 이수문, 이주문의 각기 행적이 혼합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이수문(李秀文)과 이른바 이주문(李周文)은 동일인으로 본다.

첫째, 현재 전존하는 수문(秀文)의 관지(款識)가 되어 있는 작품들은 모두 조선화풍을 보여 주고 있거나 조선화풍의 영향이 역력하다.

둘째, 주문의 화풍에는 동시대 일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여 조선화풍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수문의 「임화정도」와 「사계산수도」 6곡병 1쌍(2점)은 조선화풍이 다소 일본화되어 나가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더군다나 이수문과 주문의 작품을 비교하여 볼 때 주문은 이수문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만약 15세기 말부터 1530년 사이에 이주문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였다면, 그는 생존 연대상 주문에게 영향을 줄 수가 없다.

셋째, 만약 이주문(李周文)이 이수문(李秀文)과 별개인이라면, 이주문은 15세기 말부터 1530년 이전 시기에 창작하였을 것인데, 현재 주문(周文)의 전칭 작품들 가운데는 이주문(李周文)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 -(15세기 중반 이후에 창작된 작품으로 명나라 화풍이라든가 주문의 화풍을 보여 주는)- 작품은 현재 발견된 바가 없다.

넷째, 이수문은 후일 월전(越前, 에치젠 ; 지금의 福井県 동북부)의 지방군주인 천창가(淺倉家, 아사쿠라케)의 중신(重臣)으로 있는 증아씨(曾我氏, 소가시)의 사위가 되며, 그 후 일본의 증아파(曾我派) 화계(畵系)의 조(祖)가 된다. 그런데 증아파의 육 세손(?) 증아이직암(曾我二直庵, 소가 니지카안)은 “주문육세손(周文六世孫)”이라고 새긴 낙관을 최소한 두 과나 사용하였다. 이는 이수문과 이주문이 동일인임을 알려 주는 것이라 여겨진다.[주15]

따라서 일본에서 이수문의 행적은 철저하게도 명인(明人)으로 기록된 이수문(李秀文), 또는 이주문(李周文)의 행적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가 후대에 구전(口傳)을 기록한 것이어서 연대의 설정에서 상당한 오차를 드러내고 있다.

『비태후풍토기(斐太後風土記)』의 ‘대야군(大野郡) 탄향(灘鄕) 석포촌(石浦村)’ 조의 수문사(秀文社) 항목을 보면 이수문은……, “영록연중(榮祿年中:1558~1569년)에…… 귀화해 와서……백천향(白川鄕) 중야촌(中野村) 조련사(照蓮寺, 테라시 테라)에 다니며 여러 해 우거(寓居)하더니 그 후에 석포촌(石浦村) 자판구(字坂口)에 와서 우거하였다. 그림을 좋아하여 산수와 인물 야마(野馬) 등을 다름이 없이 그려내었는데, 필력이 탁월(卓越)하여 기운(氣韻)이 범상치 않았다. 세간(世間)에서는 그를 비탄수문(飛驒秀文)이라고 칭하였는데, 끝내는 판구(坂口)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영(靈)을 이곳(秀文寺 : 현재의 曾我神社)에서 제사 지낸다”라고 하였다.[주16]

이수문은 사망한 후에 그 묘소를 석포촌(石浦村) 판구(坂口)에 썼는데, 그곳은 현재 기부현(岐阜縣) 고산시(高山市)로서, 현재까지도 그의 묘소와 그가 만년에 거주하였다고 하는 집터, 그를 제사 지내는 증아신사(曾我神社) 등이 남아있다. 물론 이 유적이 이수문의 실제 유적인지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수문은 증아씨의 사위가 되었다. 그리고 일설에는 그가 낳은 아들이 흔히들 일본 수묵화의 명인(名人)이라고 말하는 증아사족(曾我蛇足, 소가 다소쿠)이라고 한다. 이수문이 증아씨의 사위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증아사족이 그의 아들이라는 일부 기록은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 대체로 부정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대표적인 미술사학자 원 풍종(源 豊宗, 미나모토 토요무네. 1895~2001)에 의하여 사족(蛇足)은 증아파(曾我派)에서 사용한 세습적(世襲的)인 호(號)라는 것이 이미 판명되어,[주17] 점차로 그가 이수문의 실제 아들임이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른바 흔히들 증아사족으로 이야기되는 수묵화가는 누구인가? 『증정 고화비고』에 따르면 그를 ‘증아사족헌종예(曾我蛇足軒宗譽)’[주18]라 하고 있어, 그는 증아사족종예(蛇足宗譽)이다. 그러나 이수문의 아들이 과연 증아사족종예인가 하는 것은 더 검토하여야 한다.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증아사족종예의 생존연대를 1510년부터 1570년으로 보기 때문이다.

6. 이수문의 전존작품에 대하여

이수문, 그는 일본 수묵화의 형성과 발전에 적잖이 영향을 주었다. 이수문과 주문은 오랫동안 동일인으로 알려져 왔고, 이에 그와 주문의 인생과 예술은 아직도 혼동되고 있다. 일본에 전존하고 있는 이수문과 주문의 작품을 통하여 조선시대 초기의 회화를 규명해 낸다는 것은 일본 수묵화에 영향을 미친 조선 수묵화의 존재를 규명해 내는 일이기도 하다.

현재 일본에서 이수문에 관한 연구는 의외로 은폐 내지는 왜곡의 단계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몇 분의 일본 미술사학자가 쓴 논문에서는 소극적이나마 이수문이 조선화 가임은 지적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미술사학자 금택홍(金澤弘) 등은 이 『묵죽화책』이 조선종이(朝鮮紙)에 그려졌음을 지적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수문이 조선에서 건너온 화가임은 이미 19세기 전반기에 지적된 대로 그의 전존작품의 화풍이 조선화풍이라는 점을 통하여 입증된다. 이러한 그의 전존작품을 연구하는 일은 그의 창작 분야를 연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수문의 관지(款識)가 되어 있는 그의 근래까지의 전존작품은 다음과 같다.

①『묵죽화책(墨竹畵冊)』 1첩(10점), 1424년, 30.6×45cm., 지본수묵, 일본 개인소장. / ②『임화정도(林和靖圖)』 1폭, 80.8×33.5cm. 지본담채, 일본 교토국립박물관(京都國立博物館) 소장. / ③『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 6곡병, 1쌍(2점),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소장. / ④『악양루도(岳陽樓圖)』, 1점, 102.3×44.7 cm., 지본수묵, 일본 개인소장(富田家). / ⑤『향산구로도(香山九老圖)』 6곡병, 1쌍(2점), 각각 145.5×312.6 cm., 지본수묵, 일본 평전(平田)기념관 소장. / ⑥『고목구도(枯木鳩圖)』, 1점, 동경에서 소실(燒失).

즉, 이수문의 전존작품은 묵죽(墨竹)과 산수, 인물, 화조(花鳥) 등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화공편람(畵工便覽)』과 『증정 고화비고』에 의하면 이수문은 “인물, 화조, 산수, 묵매에 능했다”고 한다. 이제 이상에서 제시한 수문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묵죽화책』은 이수문의 작품들 가운데 유일한 기년작품(記年作品)이다. 그리고 그가 1424년에 도일한 것이 확실하므로 이 작품은 그가 창작한 가장 완전한 조선화(朝鮮畵)라 할 수가 있다.

이 그림이 조선종이에 그려졌음은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 준다. 조선종이가 일본에 수출된 바 있는 교역물품 가운데 하나였지만 이수문은 화가로서 도일할 때 당연히 당분간 쓸 지필묵(紙筆墨)을 지참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다면 『묵죽화책』은 이수문이 자신의 필력을 다른 여러 화가나 당시의 어느(越前) 지방군주에게 과시하기 위해 도일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린 작품이 된다.

이수문이 이 작품을 그린 곳은 북양(北陽)으로서 이는 옛 지명의 이름이 북장(北庄)인 석천현(石川縣), 혹은 월전(越前:현재 福井縣)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주문의 별호가 월계(越溪)인 것을 미루어 보면 주문과 월전이란 지명(地名)은 어떠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수문을 월전의 조창가에 연결해 준 사람이 바로 주문일 가능성이 크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벽화 이외에는 이 『묵죽화책』 이전으로 올라가는 연대(年代)의 대나무 그림이 발견된 바 없다. 다만 고려시대의 청자라든가 불화(佛畵)와 판화, 그리고 고려 왕건릉 벽화에 대나무가 부분적으로 그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보면 고려시대의 문인들이라든가 화가들이 묵죽(墨竹)이라든가 묵매(墨梅)를 즐겨 그렸음은 잘 알 수가 있다.

이수문의 이 『묵죽화책』에는 1874년 여름에 타노무라(田能村直人 : 일본 南畵의 大家, 1814~1907년)가 경도(京都) 약왕자(若王子)의 자택에서 나무함의 뚜껑에다가 “수문필 십이화첩(秀文筆十二畵帖)”이라고 상서(箱書)를 쓴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이 화첩의 행처(行處)를 잃고 있다가 1967년경에 재발견된다.[주19] 이 화첩은 재발견할 때 12점의 묵죽이 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10점만이 남아있다. 이수문의 인생을 유추하는 데는 이 『묵죽화책』보다 더 중요한 작품은 없다.

하지만 이수문이 일본미술에 얼마만큼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점을 논하기에는 『임화정도』와 『사계산수도』 6곡 병이 더욱 중요하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주문(周文)의 전칭작품은 일본에 상당히 많다. 하지만 주문의 작품으로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 확실하게 고증된 작품은 적으면 1점, 많다면 4점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수문과 주문은 흔히 혼돈되어 왔다. 이는 두 사람의 화풍이 어느 정도는 유사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문의 전칭작품들 가운데는 실제로 이수문의 작품이 얼마간은 있을 수도 있다는 관점을 형성시킨다. 더구나 이수문의 전존작품은 주문의 고증된 작품보다도 훨씬 더 많은 6종 17점에 달한다.

이수문의 작품들 가운데 산수화로서의 기준 작품은 『임화정도』 1폭과 『사계산수도』 6곡병(2점)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이 두 종(種)의 작품은 조선화풍의 영향이 가장 적게 나타나는 작품[주20]으로, “수문(秀文)”이라 새긴 동문(同文) 동형(同型)의 인기(印記)가 들어가 있다.[주21]

아울러 이 두 작품은 주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조선화풍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바로 그러한 요소들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특히 이수문의 『임화정도』에 나타나는 수목(樹木)의 묘사와 주문의 『죽제독서도』라든가 『촉산도』 등에 나타나는 수목의 묘사는 매우 흡사하며, 이수문의 『사계산수도』 6곡병(1)의 3번째 폭에 나타나는 화풍적 특성과 분위기는 주문의 전칭작품들에 나타나는 특성과 분위기와 같다.[주22]

물론 이수문의 이 산수화 기준작품은 마하파(馬夏派) 화풍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고 있는데, 세부적으로 뜯어 보면 이는 당시의 보편적인 일본화에서 나타나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는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이수문의 화풍은 그의 아들 증아사족에게 그대로 계승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증아사족이 주문에게서 그림을 배운 것으로도 전하여 진다. 증아사족이 실제로 주문에게서 그림을 배웠는지 알 수가 없지만, 이는 이수문과 주문의 작품에 나타나는 화풍이 매우 유사하여 증아사족이 주문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구전될 수도 있었다는 관점을 형성시켜 준다.

왼족: 『악양루도』, 이수문, 1점, 102.3×44.7cm. 지본수묵, 일본 개인소장(富田家). [사진 제공 - 이양재] 오른쪽: 『임화정도(林和靖圖)』, 이수문, 80.8×33.5cm. 지본담채,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왼족: 『악양루도』, 이수문, 1점, 102.3×44.7cm. 지본수묵, 일본 개인소장(富田家). [사진 제공 - 이양재] 오른쪽: 『임화정도(林和靖圖)』, 이수문, 80.8×33.5cm. 지본담채,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수문의 『악양루도』와 『향산구로도』는 앞서 그의 기준작품으로 설정한 『임화정도』라든가 『사계산수도』 6곡병과는 그 화풍이라든가 분위기, 묘사력 등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악양루도』와 『향산구로도』는 조선화풍으로 그려졌음을 국내외의 미술사학계에서는 널리 인정한다.

화가의 화풍은 한동안의 기간을 두고 변화 또는 발전해 나간다. 따라서 만약 이 두 작품이 이수문의 작품임이 틀림없다면, 이는 이수문의 회화가 일본에서 나름대로 변화를 겪거나 발전해 나가기 이전에 그린 도일초기(渡日初期)의 작품으로 판단하여야 한다.[주23]

물론 이수문의 작품은 당연히 일본에서 변화를 겪거나 발전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를 겪은 그의 작품의 바탕에는 조선화풍이 상당히 남아있음을 『임화정도』와 『사계산수도』 6곡병에서 얼마간 찾아볼 수 있다.

『향산구로도』 6곡병, 1쌍(2점), 이수문, 각각 145.5×312.6cm., 지본수묵, 일본 히라타기념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향산구로도』 6곡병, 1쌍(2점), 이수문, 각각 145.5×312.6cm., 지본수묵, 일본 히라타기념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 6곡병, 1쌍(2점),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 6곡병, 1쌍(2점),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증보 : 일본 히라타기념관 소장의 『향산구로도』 6곡병 1쌍(2점)과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소장의 『사계산수도』 6곡병 1쌍(2점)은 이질적인 느낌이 들게 한다. 『향산구로도』는 조선산 저지(楮紙, 닥종이)이며. 『사계산수도』는 조선산 종이가 아니다. 향후 실물을 검토하여 어느 나라 종이인지를 규명하여야 하나, 두 작품에서 이질적인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은 화풍은 물론이고 그림이 그려진 재료가 주는 변색의 영향이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여섯 종의 이수문의 작품에서는 두 종류의 도장을 각기 사용하고 있다. 『묵죽화책』과 「임화정도(林和靖圖)」 「고목구도(枯木鳩圖」는 같은 도장이 찍혀 있고, 「악양루도(岳陽樓圖)」와 「향산구로도(香山九老圖)」는 또 다른 도장이 찍혀 있다. 이 각기 다른 도장으로 인하여 창작 시기의 선후(先後)를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악양’은 중국 후베이성에 있는 현(縣)으로, 악양루(岳陽樓), 동정호(洞庭湖), 군산(君山) 등 여러 이름난 유적이 있다. 악양루는 북송 때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를 비롯해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 712~770)나 이백(李白, 701~762)의 시를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그곳을 그린 것이다.

7. 맺음말

이상에서 이수문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탐색하여 보았다. 분명한 사실은 이수문은 조선의 화가였고, 그는 일본회화사에 있어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였다. 아울러 우리는 일본의 화승 주문에게 영향을 준 화가는 분명 안견(安堅)이 아니라 이수문(李秀文)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 이수문에 관한 연구는 새롭게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견이 주문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안 모 교수의 관점을 필연적으로 깨어 버려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이수문의 위치에서 본 주문이 아니라 주문의 회화에 몰입하여 이수문의 실체를 찾아내야 한다. 1997년도의 이 첫 글은 그에 대한 시도였다.

필자는 주문의 전칭작품 상당수가 이수문의 작품일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신념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미술사학계가 이수문과 주문에 관해 공동 연구할 것을 제의하며, 아울러 양국의 미술계에서 그를 위한 공동 기념사업을 발의하길 제의한다. 그리하여 이수문은 잊혀져서는 안되는 화가로서 그의 인생과 예술의 의미는 이제라도 다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증보 : 필자가 이러한 논리를 세운 1997년 이후 일본의 미술사학계서는 이수문이 조선인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하였다. 이수문이 조선인임을 인정하는 순간 일본 무로마치 시기의 회화사는 조선의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본 미술사학계는 이수문에 관한 공동연구를 거절한 것이다. (1996.12. 첫 원고, 2024.08.16. 일부 증정(增訂) 원고)

[주1] 이수문에 대해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 부분적으로라도 다루어 발표한 글은 다음과 같다.

李東洲, “수수께끼의 畵家 李秀文”, 『日本속의 韓畵』 p.p.64~77에 수록, 1974년, 瑞文堂 발행.

崔淳雨, “朝鮮王朝初期の韓日間の繪畵交流”, 『日本の 美術 No.207- 室町繪畵』 p.p.87-94에 수록, 1983년 8월, 至文堂 발행. 東京.

安輝濬, ①“朝鮮王朝初期의 繪畵와 日本室町時代의 水墨畵”, 季刊 『韓國學報』 제3집, 1976년 여름. 一志寺 발행. ②“秀文과 文淸의 생애와 작품”, 『讀書生活』 14호 p.p.152-168에 수록, 1977년 1월. ③“일본회화와의 교섭”, 『韓國繪畫史』 p.p.149~~154, 특히 151~152. 1980년, 일지사 발행.

필자, ①“안견화풍이 ‘일본회화에 미친 영향’의 비판”과 ②“이수문과 周文”, 『安輝濬敎授의 安堅論에 對한 批判 - 安堅 再照明』 p.p.215~225에 수록. 1994년, 한국미술연감사 발행. ③“안견화풍과 주문화풍의 관계는?”, 『‘안견신론’을 위하여』 p.p. 27~28., 1994년 7월, 안견연구회 발행.

[주2] 이미 19세기에 일본의 미술가 谷文晁(1763~1840년)는 그의 『文晁畵談』에서 “인물 산수 묵매 등 수 점의 작품을 수문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이 그림들은 조선화풍에 가깝다고” 언급하였다. 그후 1967년경에 『묵죽화책(墨竹畵冊)』 이 발견되자 일본의 미술사학자 松下隆章 역시 이수문(李秀文)을 조선인으로 단정하였다.

[주3] 이 그림의 기명(記名)에 이수문은 당시 조선과 중국에서 일본에 대해 통상적으로 비하시켜 부르는 명칭인 왜(倭)라 적지 않고, 일본국(日本國)이라 적었다.

[주4] 松下隆章, 『水墨畵』- 『日本の 美術』 NO.13, 1967년 5월호, p.p.40~41.
金澤弘, 『水墨畵- 如拙․周文․宗湛』- 『日本の 美術』 NO.334, 1994년 3월호, p.p.54~55.

[주5] 安輝濬, 『安堅과 夢遊桃源圖』 p.p.151~155. 1993년(개정판), 도서출판 예경 발행.

[주6] 安輝濬, 『韓國繪畫史』 p.p.151~152 참조, 1980년 일지사 발행.

[주7] 金元龍․安輝濬 共著, 『新版 韓國美術史』 p. 274, 1993년, 서울대학교 출판부 발행.

[주8] 朝岡興楨, 『增訂 古畵備考』 二十上, p.p.687~688 참조., 1904년, 弘文館 發行.
李秀文(李周文)이 주문을 제치고 수제자로 먼저 올라가 있다.

[주9] 이 책은 寬文 11년(1672년)에 편술되었다.
참조: 渡辺一, 『東山水墨の畵硏究(增補版)』, 1985년(초판은 1945년에 발행), pp.133~152 “秀文” 부문, 특히 p.133.

[주10] 수문(秀文)이라는 이름은 그가 도일(渡日) 후에 지은 이름일 수도 있다. 즉 그가 조선에서 사용한 본명은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즉, 아명(兒名)과 관명(冠名), 보명(譜名), 자(字), 호(號), 별호(別號), 당호(堂號) 등이 있었다. 때에 따라서 자나 호가 복수인 경우도 있다. 현재 이수문은 자나 호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수문이라 썼거나 수문이라 새겨진 인장(印章)만을 낙관(落款)하였다. 보편적으로 이렇게 이름 낙관만을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의외의 일이다.

[주11] 일본의 미술사학계 일각에서는 주문이 사망한 시기를 1460년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주12] 金澤 弘, 『日本の美術』 No.334- 『水墨畵- 如拙․周文․宗湛』., 1994년 3월호, 至文堂 발행.
한편, 金澤弘은 『日本の美術』 No.207- 『室町繪畵』에서는 주문의 확실한 작품이 한 점밖에 없다고 언급하였다(1983년 8월호).

[주13] 常石英明, 『古書畵の鑑定と觀賞』, p.63., 1993년(14판), 金園社.

[주14] 谷信一·野間淸一, 『日本美術辭典』 p.444 참조, 1990년, 東京堂出版.

[주15] 혹 수문(秀文)이 주문(周文)이라는 별명(別名)으로 한때 호칭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1530년에 사망하였다고 하는 이주문(李周文)이라는 인물이 실존 인물로서 이수문(李秀文)과 별개인이라면 그는 아마도 이수문의 어느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이는 임란(壬亂) 시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들 가운데 심수관의 자손들은 대대로 심수관의 이름을 물려 사용한 예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즉, 이수문의 이름을 이주문으로 변형하여 그의 자손들이 사족이라는 호와 함께 세습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이주문은 이수문의 오전(誤傳)으로 여기고 있다.

[주16] [주10] 참조.
『斐太後風土記』의 이 기록은 일본에서의 이수문 유적지를 알려주나, 그를 영록연중의 사람이라고 하는 등 그에 대해 큰 혼동을 일으키게 한 대표적인 문헌이다. 그러나 이 문헌은 하나의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왜곡되고 축약된 문헌으로 판단된다.

[주17] 源 豊宗, “曾我派と 朝倉文化”, 『古美術』 38, 1972년 9월, p.p.29~39, 특히 p.31.
필자는 이른바 증아사족(曾我蛇足)이 이수문에게서 그림을 배웠거나, 또는 그가 이수문의 손자나 양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때 추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족(蛇足)이 증아씨(曾我氏) 화가들의 세습적인 별호(別號)라면 그는 이수문의 아들임이 틀림없다. 또한 이수문의 자손들이 증아씨를 사용한 것을 보면 그는 증아씨의 데릴사위로 들어간 것으로 판단된다.

[주18] 朝岡興楨, 『增訂古畵備考』 十八, p.605.

[주19] 源 豊宗, 『日本美術繪畵全集』- “曾我蛇足”, 1977년, 集英社 발행.

[주20] 조선화풍의 영향이 적다기보다는 조선초기의 작품이 매우 희소하므로 이 두 작품에서 보여주는 화풍의 그림을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주21] 『사계산수도』에 찍힌 낙관은 『임화정도』에 찍힌 것과 같은 크기나 인문(印文)이 약간 굵어 보인다. 따라서 일본의 미술사학자 宮島新一은 별개의 인장으로 찍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참조: 宮島新一, 『日本の美術』 No.336.- “水墨畵- 大德寺派と蛇足”, p.p. 26~27. 1994년 5월호.

하지만 낙관은 찍는 압력과 사용한 시기에 따라 인문의 굵기 정도는 얼마든지 달리 찍힐 수가 있다.

[주22] 이수문과 주문의 회화적 연관성을 검토할 때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410년에 조선 사신 양유(梁需)를 따라 일본에 간 바 있는 어느 조선화공(朝鮮畵工)이 경도(京都)의 남선사(南禪寺)에서 그린 『파초야우도(芭蕉夜雨圖)』이다. 이 작품 역시 조선종이에 그려져 있는데, 이수문의 『임화정도』와 『사계산수도』 6곡병과 비교하여 볼 때 산수화에서 한 흐름을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가 있다. 즉 『파초야우도』는 조선초기의 화풍과 이수문의 『임화정도』와 『사계산수도』, 그리고 조선화풍의 영향을 받은 주문 회화의 여러 모습에서 지금 우리가 전존작품이 부족하여 명확하기 규명하기 어려운 조선초기 산수화의 실체를 유추해 볼 수가 있도록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주23] 필자는 이 『악양루도』와 『향산구로도』를 이수문의 작품으로 일단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미술사학계 일각에서는 『임화정도』와 『사계산수도』가 이수문의 작품임을 부정하려고 해야 부정할 수 없는 여건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우파적(右派的) 기류가 흐르고 있는 데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수문에 대해 계속 탐색하는 동안 이 두 작품 역시 이수문의 작품일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수문(秀文)이라 낙관이 되어 있는 이수문의 『임화정도』와 『사계산수도』를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부정하고자 하는 우파적 기류가 일본 미술사학계에 흐르고 있다. 첫째, 낙관의 크기나 형태는 같지만, 인문(人文)의 굵기가 다르다. 둘째, 도저히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볼 수가 없이 『향산구로도』나 『악양루도』 등과 화풍의 변화가 크다.

그러나 수문이라 낙관이 되어 있는 이수문의 전존작품은 일단은 이수문의 진작(眞作)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현재 전존하는 이수문의 작품은 ‘수문(秀文)’이란 낙관이 되어 있거나 화풍에 조선화풍이 유별나므로 주문(周文)의 작품으로는 전칭될 수가 없었던 작품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필자는 확실한 이수문의 작품이 아니고서는 일본에서 이수문의 작품으로 전존할 수가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인문의 굵기는 앞의 주(註)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얼마든지 달리 찍힐 수 있는 것이며, 화가란 하나의 화풍만 구사하지 않고 다양한 화풍으로의 창작을 시도하여야 작가정신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게 되므로 얼마든지 다른 화풍을 구사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이수문은 일본에서 미묘한 위치에 있었던 화가이므로 그의 전존작품이 서로 다른 화풍을 보여 준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부정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한편, 삼성출판사판 『동양의 명화(東洋의 名畵)』 ‘한국편(韓國編)’은 안휘준(安輝濬) 교수가 편(編)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이수문의 작품으로 『묵죽화책』과 『향산구로도』, 『악양루도』만을 소개하고 있으며, 또한 『한국회화사』의 이수문 부분의 주(註)(p.158)에서는 “秀文의 대표적 작품으로 『岳陽樓圖』와 『香山九老圖』 병풍이 전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임화정도』와 『사계산수도』를 이수문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서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회화에 조선화가 미친 영향을 규명해 내겠다는 것은 노른자위가 없는 계란을 규명해 내겠다는 것과 같다.

1990년대 중반에 와서 『향산구로도』와 『악양루도』가 이수문의 작품이냐 하는 문제는 일본 회화사학계의 일각에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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