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북선(北鮮)의 미술시기 구분, 리쾌대가 ‘중앙건축미술제작소’에서 근무하다

북의 현대미술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기본 서적으로 『조선미술사2』가 있다. ‘책임저자 조인규’와 ‘저자 김순영 리철 리임출 박현종 함인복 홍의정’이 관여하고 리재현이 심사하여 1990년 1월 30일 자로 북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이다.

이 책은 1945년부터 1982년까지 37년간의 현대미술사를 다루며 시기를 아래와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1. 1945~1953년 시기의 미술” - (이 시기는 해방되던 해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던 때까지의 기간이다.) / “2. 1954~1966년 시기의 미술” - (이 시기는 전후의 인민경제복구가 시작된 때로부터 북에서 종파분자를 몰아내고 김일성 체재를 굳건히 한 기간이다.) / “3. 1967~1982년 시기의 미술”- (이 시기는 북의 주체문화예술혁명의 제1차 전성기이다.)

이상의 세 구분에서 1953년 9월 포로 석방할 때 북송을 선택한 리쾌대가 활동한 시기는 “2. 1954~1966년 시기”이다. 즉, 전후의 인민경제복구가 시작된 때로부터 북에서 종파분자를 몰아내고 김일성 체재를 굳건히 한 기간에 작가로서 활동한 것이다.

리쾌대가 북으로 간 후 처음으로 배정받은 직장은 건설성 산하의 ‘중앙건축미술제작소’이다. 그는 북에서의 첫 직장에서 1953년 9월부터 1956년 말까지는 근무한다. 건설성[주1] 미술제작소 근무 당시(1956년 1월 30일) 리쾌대는 건설성 제1건설관리국 국장 정철우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는다.

건설성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리쾌대, 1956.1.30. [사진 제공 – 이양재]
건설성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리쾌대, 1956.1.30. [사진 제공 – 이양재]

표창장(북측 유족 소장품)에 “동지는 인민경제복구건설 사업에 헌신성과 창발력을 발휘하여 우수한 성과를 거두어 타에 모범이 되었음으로 이에 표창함”이라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리쾌대는 북의 전후 경제복구건설 시기의 건설사업에 동원되었던 것 같다.

1953년 휴전 이후 북의 ‘인민 경제복구 발전 3개년 계획’은 1954~1956년 집행되었는데, 이 3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 연초에 리쾌대가 표창장을 받았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리쾌대의 형 리여성이 북에서 숙청되었음에도 리쾌대는 평양에서 강계로 좌천되며 건재할 수 있었던 정치적 이유는 위의 포창장에 언급되어 있는 “인민경제복구건설 사업에 헌신성과 창발력을 발휘하여 우수한 성과를 거두어 타에 모범”이 된 것이 고려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리쾌대가 1953년 북송된 후 첫 발령 난 직장이 건설성 ‘중앙건축미술제작소’이다. 그러나 그가 언제까지 여기에 근무하였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필자의 생각에는 리쾌대는 평양에서 강계로 좌천될 때까지 이 직장에서 계속 근무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1958년에 2미터 높이에 13미터의 길이에 달하는 「조중우의탑」 벽화를 그리는데 리쾌대가 총괄 책임을 맡은 것도 그가 건설성 소속 중앙건축미술제작소의 대표적인 미술가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물론 그는 건설성 소속의 미술가이면서도 조선미술가동맹 평양시위원회 소속의 현역미술가이기도 했다.

2. 북선의 미술시기 구분과 리쾌대 미술의 복권

북에서는 “2. 1954~1966년 시기의 미술” ‘(2) 유화’에서 이 시기(12년간)를 “사회주의 미술의 전면적 건설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리쾌대(李快大, 1913~1965)는 이 시기의 8년여를 평양에서, 생애의 나머지 4년을 자강도 강계에서 보냈다.

리쾌대가 평양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조선미술가동맹 기관지 『조선미술』에는 리쾌대의 작품이 게재되기도 하였고, 그가 쓴 글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에 출판된 『조선미술사2』에는 리쾌대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는 1961년으로부터 30여 년간 북의 미술계에서 지워진 것이다.

이런 이쾌대가 북에서 다시 주목받은 계기가 된 것은 1988년 남에서 예술가로서의 이쾌대가 해금되고, 1991년에 그의 작품전을 개최한 것이 북의 미술계에도 알려진 것에 원인이 있다. 1990년대 중반에 북의 미술평론가 리재현은 이쾌대에 관한 남측 출판물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1994년에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초판본을 내면서 수록하지 않았던 리쾌대에 관한 항목을 김정일 위원장의 지도를 받았다는 명분으로 1999년 2월 5일 자로 재판본을 내면서는 포함시켰다.

즉 리쾌대는 1998년에 복권된 것으로 보이는데, 남한에서 해금된지 10여 년 만에 북선(北鮮)에서도 복권한 것이다. 1988년 남에서 이쾌대가 해금된 것은 1990년대 초반에 북의 후처 백운선이 리쾌대의 흩어진 대표작들을 찾아 나서는 계기를 준 것 같다. 그리고 후일 북의 미술학자 리재현과 모 씨도 리쾌대의 유족을 찾아 강계와 신안주를 간다. 리쾌대의 사망 이후 남북에서 재조명되기까지의 주요 상황을 연대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65년 2월 20일, 강계에서 사망. / 1988년 10월, 노태우 정권에 의하여 해금. / 1991년 10월 8일~27일, 월북작가 이쾌대전(40점 전시). / 1996년 3월 25일, 『이쾌대』 발행, 김진송 지음, 열화당 미술문고 210. (북의 미술평론계와 미술학계에서는 이 책을 입수한 것 같다.) / 1999년 2월 5일, 리재현이 편찬한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재판본에 수록.

이쾌대의 이러한 사후 상황을 보면, 그의 남과 북의 유족들이 인정을 하든, 인정을 안 하든, 그의 가족들은 언젠가는 작품으로라도 연결될 운명인 것 같다.

3. 이쾌대의 작품에 나타난 도시와 농촌

‘신 잡동산이’ 연재에서 나는 우리 민족의 현대 유화가 이쾌대가 한국전젱 이전에 남에서 그린 그림과 1953년 한국전쟁이 끝 난 이후 북에서 리쾌대로서 그린 그림을 비교 탐색하고 있다. 첫 번째 비교 탐색에서는 ‘자화상’을, 두 번째 비교 탐색은 ‘군상’-4와 ‘대대장고지의 방어전투’를, 이번 비교 탐색의 세 번째 글에서는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도시와 농촌의 풍경과 그 요소를 살펴 보고자 한다.[주2] 리쾌대의 재북시절 현전 작품을 미루어 보면 그는 1955년경부터 본격적인 창작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쾌대의 작품에는 인물화가 많다. 반면에 그가 그린 농촌이나 도시 풍경은 남북을 통틀어도 매우 적다. 이쾌대가 재남시 그린 작품 가운데 농촌 마을 풍경이 배경으로라도 들어가 있는 그림은 그의 대표작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72×60cm, 사진1)과 일련의 작품 「군상」 등등이 있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이쾌대, 유화, 1948〜9년. 세로72cm×가로60cm, 이쾌대 자화상의 대표작이다. 남측 유족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이쾌대, 유화, 1948〜9년. 세로72cm×가로60cm, 이쾌대 자화상의 대표작이다. 남측 유족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작품은 초가집이 있는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림의 왼쪽 중앙부는 머리에 물동이나 광주리 같은 것을 이고 있는 세 여성이 등장시켜 사람 사는 농촌 마을임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는 옅은 황토색의 한복 바지 위에 옥색의 고급 두루마기를 입고 있지만 머리에 중절모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 넣어 당시 유행을 따르는 신시대의 남성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누구도 자화상을 이렇게 그리지 못했던, 아니 흉내조차 낼 수가 없었던 이쾌대만의 독창적인 작품이다. 20세기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의 배경 농촌은 이쾌대의 고향이거나 아니면 이쾌대가 생각해 왔던 평화로운 나라를 형상화한 것 같다.

이 그림을 그린 1948~9년, 이쾌대가 살던 한반도는 혼돈의 시기였다. 1948년 8월 15일의 한반도 남쪽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월 9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특히 남에서는 5.10 총선거와 이를 반대하는 제주에서는 4.3이 발생하고, 10월 19일에는 여순-순천 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1949년 6월 26일에는 미군이 철수하는 가운데 백범 김구는 안두희에 의하여 시해당한다.

1948년 남북 분단의 고착화 시기에 이쾌대가 이러한 자화상을 그리면서 그 배경에 평온한 조선의 마을을 그렸다는 것은 민족주의적 눈으로 볼 때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 정치성이 없는 이쾌대의 본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반면에 리쾌대가 1957년에 그린 작품 「농악」의 배경에서도 농촌 마을을 그리고 있다. 원경으로는 산이 펄쳐져있고, 화면 중앙부의 나무 아래에는 초가집에 그려져 있으며, 오른쪽 중앙부에는 황금 들녘을 그리고 있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에 나타나는 이상향으로서의 농촌 마을과 「농악」에 나타나는 풍요를 상징하는 농촌의 실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의미는 정치 이념으로 풀 문제가 아니라 사람사는 민주 세상의 의미로 풀어야 한다.

「농악」, 리쾌대, 1957년. [사진 제공 – 이양재]
「농악」, 리쾌대, 1957년.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쾌대는 1957년작 「농악」에 앞서 1955년부터 1957년 사이에 여러 점의 「농촌 풍경」을 그린다. 1955년에 그린 「농촌 풍경」은 두 점이 있는데, 두 작품 모두 초가집을 그린 그림이다. 당시 남과 북에서 초가집이란 서민들의 농촌을 대변하는 생활 가옥이다.

리쾌대의 작품에서 이 초가집이 담고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쾌대는 경북 칠곡군의 대 지주집에서 태어났다. 근원 김용준이 『근원수필』 ‘오원질사’에서 언급한 오원 장승업의 병풍은 이여성-이쾌대 집안에 있었던 그림이다. 그러므로 이 초가집은 리쾌대의 고향집에 관한 향수를 표현한 것은 아니다.

당시 북은 전후의 복구시기였으니 복구 후의 장면을 것을 그린 것도 아니다. 이미 북에서는 생활 가옥의 구조를 개선을 해 나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그리던 시기 리쾌대는 건설성 중앙건축미술제작소 소속이었는데, 당시의 건설성은 생활 가옥의 구조를 개선을 해 나가던 매우 중요한 행정기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저 마을의 평온함을 그린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리쾌대의 「농촌풍경」①의 오른쪽 중상(中上) 부분, 길위를 가는 흰 옷을 입은 두 여성이 등장한다. 이쾌대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에 등장하는 세 여인과 똑 같이 이 두 여인도 무엇인가를 머리에 이고 있다. 매우 정적(靜的)인 분위기의 그림이면서도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듯한 모습의 사람을 그려 넣어 작품에 등장하는 초가집을 사람사는 안식처로 부각시키고 있다.

「농촌풍경」①, 리쾌대, 유화, 1955, 가로61.7cm×세로46cm. [사진 제공 – 이양재]
「농촌풍경」①, 리쾌대, 유화, 1955, 가로61.7cm×세로46cm. [사진 제공 – 이양재]
「농촌풍경」②, 리쾌대, 유화, 1955, 가로58.8×세로35.3cm. [사진 제공 – 이양재]
「농촌풍경」②, 리쾌대, 유화, 1955, 가로58.8×세로35.3cm. [사진 제공 – 이양재]

반면에 리쾌대의 「농촌풍경」②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농촌풍경」①과 ②는 모두 왼쪽 상단부에 초가집을 그려 넣어 그림의 무게감을 왼쪽으로 치우치게 한다. 그런데 「농촌풍경」②에서는 초가집 앞(전면부)에 밭을 그리고 있어, 그 밭으로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강하며, 사람들이 사는 농촌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쾌대나 리쾌대의 작품에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필수적 요소이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을 경우 사람이 있음직한 일터의 흔적을 그림에 남긴다. 「농촌풍경」②에 그려진 밭이 그러한 흔적이다.

1950년 6월부터 3년간의 전쟁으로 평양은 초토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초토화된 평양의 모습을 그린 북의 화가들도 있다. 1956년작 「농촌풍경」③을 보면 초봄을 맞이하여 새순을 낸 고목(古木)을 그림의 중앙에 배치하고 화면의 좌우에 주로 옛 모습의 전통적인 기와집을 그리고 있다. 즉 전쟁의 참화가 피해간 평안북도나 자강도의 어느 마을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농촌풍경」③, 리쾌대, 유화, 1956, 가로58cm×세로35.5cm. [사진 제공 – 이양재]
「농촌풍경」③, 리쾌대, 유화, 1956, 가로58cm×세로35.5cm. [사진 제공 – 이양재]
「탈곡장」, 리쾌대, 유화, 1957, 가로40,3cm×세로21cm. [사진 제공 – 이양재]
「탈곡장」, 리쾌대, 유화, 1957, 가로40,3cm×세로21cm.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쾌대의 1957년작 「탈곡장」은 추수한 벼를 탈곡하는 분주한 모습을 원거리에서 그린 것이다. 트랙터와 우마차가 보이며 닭이 낱알을 주워 먹는 모습도 있다. 「탈곡장」은 이쾌대가 남과 북에서 그린 여러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는 북의 선전화적인 요소가 발견된다. 그림에서는 1957년에 이미 농촌이 현대화되었고 풍요롭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북에서 만들어진 노래 가운데 「임진강」이 있다. 북의 시인 박세영이 작사하고 1957년에 고종환이 작곡하였다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남측에서도 많이 불리는 노래이다.

노래의 가사는 “(1절)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 내리고 /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 (2절)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 협동벌 이삭 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 /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인데, 여기 2절에서는 당시 북이 남보다 경제 사정이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북한연구가들은 분석한다.

리쾌대가 1957년에 그린 기계화된 「탈곡장」은 당시 북의 노래 「임진강」과 통하는 면이 있는 그림으로 보인다.

「가을풍경」, 리쾌대, 유화, 1958, 가로29cm×세로41cm. [사진 제공 – 이양재]
「가을풍경」, 리쾌대, 유화, 1958, 가로29cm×세로41cm.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쾌대가 재남시 그린 작품 가운데 풍경만을 단독으로 그린 풍경화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군상이라든가 인물을 그리면서 그 배경으로 풍경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리쾌대의 1958년작 「가을풍경」은 늦가을의 나무를 단독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 이미 리쾌대는 평범한 사회주의 사실주의를 표현하는 작가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작가의 화법이나 표현이 바뀐다는 것은 삶 자체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재북작가 리쾌대에게서 재남작가 시절의 이쾌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중섭이나 박수근의 재남작가 시절의 변화된 표현을 재북시절 작품에서 찾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재남시 그린 작품이든 재북시 그린 작품이든 있는 그대로를 보고 평가하여야 한다.

「산골짜기」, 리쾌대, 유화, 1961, 가로24.3cm×세로18.3cm. [사진 제공 – 이양재]
「산골짜기」, 리쾌대, 유화, 1961, 가로24.3cm×세로18.3cm.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쾌대의 1961년작 「산골짜기」는 자강도 강계로 좌천되어 있던 시기에 그린 그림이다. 아마도 강계의 어느 산 골짜기를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의 실물은 검토하지 못하여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사진으로 보기에는 유화라기 보다는 채색 스케치로 여겨진다. 그림의 크기는 B5 용지(25.7×18.2) 정도로 작다. 이 그림은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송아지」, 리쾌대, 유화, 1961.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쾌대의 유화 2등 상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송아지」, 리쾌대, 유화, 1961.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쾌대의 유화 2등 상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쾌대의 「송아지」(1961)는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상(1961년 12월 24일)을 받은 그림이다. 현재 이 그림의 실물은 확인되지 않고, 사진만 남아 있다. 이 그림은 송아지를 키우는 농촌 여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당시 북에서는 노동을 중요시하여 노동의 모습이나 노동자를 그린 많은 그림들이 그려졌다. 리쾌대는 그러한 노동의 모습을 농촌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

「3.1봉기(삼일운동)」, 리쾌대, 1957년, 유화, 세로150cm×가로227cm. [사진 제공 – 이양재]
「3.1봉기(삼일운동)」, 리쾌대, 1957년, 유화, 세로150cm×가로227cm.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쾌대의 「3.1봉기(삼일운동)」는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년축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크기는 세로가 150cm, 가로가 227cm로서 북의 『조선미술』 1957년 4호에 흑백으로 게재되어 있다. 이 작품의 왼쪽 편 상부에 나오는 산은 서울의 북악(北岳)이다. 즉 이 그림은 서울에서 1919년 3.1운동의 시위를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북악산과 기와집, 그리고 행진하는 넒은 길을 그린 것으로 보면, 아마 지금의 종각이나 시청 앞 쯤을 상상해 그린 것 같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리쾌대가 1938년에 그렸다고 전하는 이른바 ‘서울 남대문’이 북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서울 남대문’이 아니다. 그리고 이쾌대가 북측에서 그린 작품은 모두 1953년 이후의 작품일텐데, 어떻게 1938년 작품이 북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한때는 아마도 이쾌대의 제자나 지인이 한국전쟁 이전부터 소장했던 작품이 아니었나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이 그림을 북에서는 1938년 작품이라고 주장하는데, 필자는 1958년에 북의 누군가가 옛 사진을 보고 그대로 베낀 「광화문과 육조거리」로 판단한다. 1958년 기년 부분이 1938년으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북의 미술학자 최명수는 자신의 저서 『민족수난기의 회화』(2017년, 평양출판사) pp.125~133에서 리쾌대를 다루고 있는데, 그 130쪽에서 작품명이라든가 설명없이 이 그림을 흑백 도판으로 게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대한제국시의 사진 「경복궁(Kyung Bok Palace)」을 베낀 그림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진의 오른쪽을 10% 정도 덜 그렸고, 등장하는 사람의 수를 축소하였으며, 원색으로 그렸다는 정도이다. 그림에는 광화문 뒤에 있었다가 1993에 철거한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1916년 7월 10일 착공한 후 1926년 10월 1일 완공하여 개장한다. 그러니까 1913년생인 이쾌대가 1938년에 광화문에 갔다고 해도 ‘조선총독부’의 건물이 없는 이런 그림은 그릴 수가 없다.

위 사진은 구황실재산관리총국 윤우경(尹宇景)이 리승만 대통령의 미국인 지지자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1909~2000) 박사에게 증정한 사진첩에서 필자가 직접 사진 복사한 것으로, 이 사진은 대한제국 말기에 조선에 온 외국인이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리쾌대라 서명된 이 작품 「광화문과 육조거리」①은 실물 검토가 필요하다. 북측 가족이 소장한 작품①보다 더 손상이 심한 작품 「광화문과 육조거리」②가 1점 더 현전하기에 이 두 작품은 실물을 한 자리에 놓은 상태에서 세밀한 대비가 필요하다. 어느 것이 원작이고 어느 것이 후작인지? 아니면 둘 다 가짜인지를 구분하여야 할 것이다.

『로버트 올리버 사진첩』 증정 서명면. [사진 제공 – 이양재]
『로버트 올리버 사진첩』 증정 서명면. [사진 제공 – 이양재]

 

4. 맺음말

위에서 리쾌대가 재북시 그린 풍경화 가운데 북의 유족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이들 작품 가운데는 리쾌대의 작품이 아닌 것이 몇 점은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좀 더 세부적으로 관찰할 기회가 있으면 한다. 지금 필자의 이 글은 초고(草稿)이다. 기회가 주어지면 북의 미술전문가와 함께 남과 북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종합하여 검토하였으면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인터넷 상에 리쾌대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말도 안 되는 그림들이 상당수 떠돌고 있다. 대개가 중국에서 그린 모작이거나 작가미상의 그림에 리쾌대의 서명을 넣은 것이다. 지금 리쾌대의 재북작품론(在北作品論)이 정리되지 않으면 결국 리쾌대를 말살하는 것이 된다. 남과 북에 이쾌대의 친자들이 살아있을 때 서둘러야 할 일이다.

필자는 이쾌대 및 리쾌대의 통합작품전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었으면 한다.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지난 정부의 우유부단으로 인하여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의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닐까? (2024.08.08.)

[주1] 북의 내각에 소속된 ‘건설성(建設省)’은 국토 이용의 효율적 운용을 위한 종합적 계획의 수립과 그 실시와 관리, 조정 및 도시계획, 건축, 조경 관리 및 도시 재개발에 관한 사무, 국토 중 토지자원의 효율적인 이용에 대한 연구개발 사무를 관장하는 중앙행정기관이다. 일부 사업은 국가계획위원회와 중복된다. 도시계획, 건축, 조경 관리 및 도시 재개발에 관한 사무는 후일 도시경영성으로 이관되었다.

[주2] 필자의 이 초고에서 소개하는 그림들 상당수는 필자가 실물을 직접 보고 검토한 그림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소개하는 일부 그림은 실물 검토를 못하고 사진 만을 본 경우도 있다. 독자분들은 이 글을 세밀하게 읽으면 몇 그림에서 그러한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필자의 이 초고는 비망록(備忘錄) 성격의 글이므로 두서가 없다. 언젠가 제대로 된 논고를 쓸 수 있는 시기가 오기를 기다린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