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어느덧 2주가 지났다. 그새 호흡이나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산소호흡기 없이도 자가호흡이 가능했다. 아버지를 검진한 담당 의사는 일반병실로 옮겨도 좋다고 했다.

“아직 의식이 완전하지 않은데 언제쯤 좋아질까요?”

“수치상으로는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곧 좋아질 겁니다.”

“퇴원은 언제쯤 가능할까요?”

“콧줄을 빼고 음식 섭취가 가능해야 하니 며칠 더 지켜보죠.”

그래도 중환자실을 벗어나니 한시름 놓였다. 6인실인 일반병실은 만실이었지만 조용했다. 대부분 거동이 어려운 나이 든 환자들이었다. 간호사들이 아버지를 침대에 반듯하게 눕혔다. 침대 곁에 앉아 아버지를 바라보는데, 아버지가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아버지, 이제 정신이 드세요? 저 영민이에요. 알아보시겠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살짝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눈길을 돌렸다. 가만히 천정을 응시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감았던 눈을 오래도록 뜨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무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시 “아버지!”하고 불러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아버지는 누워 있는 자세가 불편한지 한 번씩 몸을 뒤척였다. 중간에 잠깐 눈을 떠도 천정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긴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아버지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몇 번의 분기점이 있었다.

첫째는 해방이 되던 날, 산에서 내려와 청년들의 무등을 타고 밀양 읍내로 들어오던 증조할아버지를 만난 때였다. 그날의 기억은 소년 시절 아버지의 의식과 행동을 규정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줄곧 증조할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하지만 해방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식민의 압제는 그대로 남았다. 거기에 분단의 비극까지 겹쳤다. 그런 현실 속에서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길을 지켜내려고 애썼다.

그 다음이 소년 연락원 시절에 모든 선이 끊긴 뒤 총마저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 때였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유지한 아버지는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과 전선을 이탈했다는 죄책감으로 청년 시절을 보냈다. 대학에 들어가 수학을 공부하면서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은 끊임없이 아버지를 괴롭혔다. 아버지는 분단된 조국에서 미래의 전망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기에 그 기억은 잊고 싶은 상처였다.

그럴수록 아버지는 수학에 몰두했다. 상아탑의 바깥에서는 천둥이 치건 폭우가 쏟아지건 눈길을 주려 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학문 세계에 점점 파고들어 갔다. 아버지에게 수학은 도피처이자 의지처였는지도 모른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대구 2.28시위는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60년 2월 28일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대구 2.28시위는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이런 아버지의 인생에서 새로운 변곡점이 생겼다. 바로 1960년 4월의 봉기였다. 아버지는 ‘4.19’의 현장을 가까이서 직접 목격했다.

1958년 2월에 대학원을 졸업한 아버지는 모교인 영남고에서 계속 수학 교사로 근무했다. 수학과의 학부 강의도 맡았고, 세미나 교실도 일주일에 한 번씩 계속되었지만 생활 대책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대학 강단에 서면 좋겠지만 자리가 나지 않았다. 또 미루었던 병역도 마쳐야 했다.

아버지는 1959년 10월에 ‘교보병’(교직보유병)으로 입대했다. 교보병은 군 복무를 마치지 않은 교사들이 입대해 1년만 복무하면 조기 제대시켜 주는 제도였다. 제대 후에는 다시 몇 년간 교직에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는 했다. 부족한 교원 인력을 확보하려는 방편이었다.

아버지는 경기도 고양군 수색에 있는 30사단의 서무행정병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교직에 있다가 늦은 나이에 입대한 교보병들은 행정병으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침 본부중대 장교 중에 영남고 제자가 있어서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었다. 주임상사도 아버지 고모의 시댁 아재뻘이라 아버지에게 특히 잘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다소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하던 중에 1960년 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부대 내에도 전해졌다.

“부정선거는 군대에서도 대놓고 공개투표를 할 정도로 노골적이었어. 그런데 이승만과 자유당을 규탄하는 데모가 마산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 특히 중고등학생들이 시위대의 맨 앞에 섰다는 이야기도 나왔지. 그 소식에 교보병들은 마음이 뒤숭숭했어. 거기에 내 제자들도 있겠구나 싶었으니까. 우리끼리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누가 가서 현장을 직접 보고 오자는 말이 나왔어. 결국 내가 대표로 나가게 되었지.”

그날이 4월 19일이었다. 아버지는 아침에 제자인 장교에게 외출증을 좀 끊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제자는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선생님의 마음은 알겠지만, 바깥 상황이 위험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정했다. 교사인 내가 그 현장을 꼭 한번 봐야겠다고 설득했다. 결국 그 장교는 외출증을 끊어주었다. 대신 먼발치에서 잠깐만 보고 바로 귀대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4월 19일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의 시위는 마침내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냈다. 4.19혁명은 전쟁과 분단의 과정 속에 침묵하며 상아탑 안에서 수학 공부에만 몰두했던 안재구 교수의 인생에서도 큰 분기점이 되었다. 안재구 교수는 4.19를 통해 다시 변혁운동의 길에 뛰어들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사진 제공 – 안영민]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4월 19일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의 시위는 마침내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냈다. 4.19혁명은 전쟁과 분단의 과정 속에 침묵하며 상아탑 안에서 수학 공부에만 몰두했던 안재구 교수의 인생에서도 큰 분기점이 되었다. 안재구 교수는 4.19를 통해 다시 변혁운동의 길에 뛰어들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버스를 타고 서대문 부근에 도착했는데, 길이 막혀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어.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시내로 들어갔지. 도착한 곳이 효자동 부근이었을 거야. 현장에서 직접 보니 정말 참혹했어.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뒤쫓던 경찰이 곤봉으로 학생들의 머리를 내리쳤어. 그 바람에 머리가 깨져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지는 걸 똑똑히 봤어.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쐈다는 말도 들었어. 예전에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민중들에게 총을 쏜 것처럼…….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는 그때나 이때나 시위대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했지.”

오후에 부대로 돌아온 아버지는 동료 교보병들에게 본 대로 말해주었다. 다들 말문이 막혔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이승만이 누구인가. 미국의 비호 아래 자신의 정적들과 저항하는 민중들을 숱하게 죽이며 권좌에 오른 무소불위의 독재자가 아닌가. 그런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지 12년 만에, 해방됐다고 이 땅에 들어와 15년 동안 온갖 권세를 누리다가 민중의 거센 저항에 쫓겨난 것이다.

4월 19일 오후에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은 해오던 대로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하지만 군은 이승만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군 통수권은 미8군 사령관에게 있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이승만을 미국도 버린 것이다.

아버지에게 4.19는 호된 채찍이었다. 홀로 학문에 파묻혀 수학적 논리로 밤을 새워온 아버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4.19 이전까지 나는 단순한 월급쟁이 선생이었을 뿐이야. 미국과 이승만의 힘에 눌려 겁을 집어먹고 저항 의식을 완전히 상실한 채 비겁하게 살았던 거지.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일 따위는 이미 지나가 버린 아주 먼 시절의 일로 치부했어. 간간이 그 시절의 형제 같은 동무들을 생각하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상기할 때면, 북받쳐 오르는 슬픔이 가슴을 후벼 팔 때도 있었어. 그럴 때는 나의 생존이 그들에게 진 빚처럼 느껴져 술로 밤을 새우기도 했지.”

어찌 아버지만 그랬을까.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세상은 온통 이승만 세상이었다. 변혁운동은 씨가 말랐다. 전쟁 전에도 숱하게 끌려가 죽었고, 전쟁 중에도 또 숱하게 끌려가 죽었다. 이승만은 사람 죽이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개별적으로 흩어져 숨죽이고 살아갈 뿐이었다.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진보적인 학문과 생각은 모두 사라졌다. 졸업장 따서 취직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두렵고 침울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세상을 어린 학생들이 뒤엎은 것이다.

학생들의 희생과 헌신을 보면서 아버지는 십여 년 전 자신을 떠올렸다. 미군정을 반대하고 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투쟁에 떨쳐나섰던 밀양의 중학생들과, ‘이승만 물러가라’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온 4.19의 중고등학생들이 겹쳐 보였다.

“이때 깨달았어. 미국 놈이 만들어준 권좌도 민중의 힘으로 부숴버릴 수 있다는 걸……. 이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명확한 논리가 있었지. 아무리 강력한 외세의 힘도 민중의 단결된 힘을 이기지 못한다……. 4.19는 나를 일깨운 매서운 회초리였어. 4.19를 통해 나는 민중의 힘을 보았고, 민중의 힘을 믿게 됐어.”

1960년 9월, 아버지는 휴가증을 두 장이나 겹쳐 사용해 일찍 제대했다. 군에 있으면서 아버지는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했다. 이전과는 달라진 마음이었다. 다시 투쟁의 현장에 서겠다는 각오였다.

대구로 내려오자마자 아버지는 영남고에 복직 신청부터 했다. 당시 교단에는 교원노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4.19 이후 민중들은 민주개혁을 강력히 요구했다. 또 남쪽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쪽과의 교류 협력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청년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통일운동에 나섰다. 휴전선이 그어진 지 7~8년 만에 나온 구호였다.

“전국 곳곳에서 진보적인 단체와 정당들이 결성됐어. 교원노조도 그중 하나였지. 이러한 투쟁의 중심에 대구가 있었어. 6.25 당시 인민군은 대구까지 들어오지 못했어. 국방군은 낙동강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만약 인민군이 거쳐 갔다면 나중에 부역자를 색출한다고 또 난리가 났을 거야. 다른 지역에서처럼 끌려가 죽거나 북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많았겠지. 아무튼 그런 연유로 대구에는 진보적인 역량이 많이 남아 있었어. 그러다 4.19가 나고 그 역량을 토대로 전체 운동의 구심 역할을 했지.”

민중의 힘을 믿고 아버지가 다시 민족해방투쟁에 서기까지는 1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뒤로 꼬박 60년, 아버지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그 길을 헤쳐 나갔다. 그 길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100여 년을 이어온 민족해방투쟁의 길이었다. 아버지의 대를 거쳐 우리 대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끝나지 않은 길이었다.

4.19에서 남민전까지, 안재구 교수가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20년 속에 가장 강렬한 존재로 남아 있는 동지가 남민전의 이재문(왼쪽), 인혁당 민청학련의 여정남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4.19에서 남민전까지, 안재구 교수가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20년 속에 가장 강렬한 존재로 남아 있는 동지가 남민전의 이재문(왼쪽), 인혁당 민청학련의 여정남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어떻게 하면 과거의 좌절이 현재의 다짐으로, 미래의 낙관으로 바뀔 수 있을까.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찾아내는 힘은 동지에게서 나온다. 다시 투쟁의 길을 나선 아버지에게도 그러한 동지가 있었다. 바로 이재문과 여정남이다.

남민전의 이재문은 아버지가 모든 걸 바쳐 따르고자 했던 변혁운동의 지도자였다. 민청학련의 여정남은 아버지가 모든 걸 바쳐 책임지고자 했던 변혁운동의 후대였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던 두 사람은 끝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재문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1981년 11월 22일,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여정남은 1975년 4월 9일,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쳤다.

4.19에서 남민전까지, 아버지가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20년 속에 가장 강렬한 존재로 남아 있는 동지, 이재문과 여정남. 이제부터 아버지를 포함해 세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웠던 전사(戰士)들의 이야기, 가장 치열했던 그들의 투쟁을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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