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에 《경북 매스매티컬 저널》(Kyungpook Mathematical Journal, 이하 KMJ) 창간호가 나오자, 경북대 수학과에서는 미국, 일본, 영국 등 수학 학술지를 출판하고 있는 세계 주요 대학에 책을 보냈다. 학술지를 교환하고 싶다는 편지도 동봉했다.

다행히도 여러 대학에서 답장이 왔다. 그들은 동양의 한 작은 나라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대학에서 수학 학술지를 펴냈다는 데 놀라워했다. 학술지 상호교환 요청을 흔쾌히 수용하며 응원의 메시지도 보내왔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보내주는 학술지가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어. 우리는 박정기 선생님의 지도로 매주 세미나를 열었지. 각국의 학술지에 실린 수학 논문을 돌아가며 발제하고 토론했어. 그 덕분에 시야를 세계적으로 넓히고, 수학의 최근 연구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지.”

매년 두 차례씩 저널을 발간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단 필진을 구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국내에는 논문 원고를 부탁할 만한 수학자가 부족했다. 초창기에는 경북대 수학교실에서 주로 논문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각자 1년에 1~2편씩은 논문을 써야 했다. 덕분에 연구자들의 수준과 실력도 쑥쑥 올라갔다.

당시 대한수학회 세미나에서는 발표자의 절반 이상이 경북대 수학교실 멤버였다. 경북대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여한 안재구 교수(맨뒤). [사진 제공 - 안영민]
당시 대한수학회 세미나에서는 발표자의 절반 이상이 경북대 수학교실 멤버였다. 경북대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여한 안재구 교수(맨뒤). [사진 제공 - 안영민]

그 무렵 대한수학회에서 세미나를 열면 논문 발표자의 절반 이상이 경북대 수학교실 멤버였다. KMJ가 어느 정도 알려진 뒤부터 외국의 연구자들이 먼저 관심을 가지고 논문 투고를 의뢰해 필진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발간 비용도 만만찮았다. 당시는 나라도 대학도 가난했다. 수학과에 실험실습비가 있기는 했지만 쥐꼬리만 한 수준이었다. 달리 예산을 더 지원받기도 어려웠다. 박정기 교수가 먼저 사재를 털었다. 다른 연구자들은 교양학부 일반수학과 공과대학 공업수학, 고등학교 수학 참고서 등을 저술하면서 받은 인세를 끌어모았다. 어려운 사정을 알고 논문 게재비를 보내온 외국 연구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발간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편집과 인쇄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영어로 써야 하는 데다가 복잡하고 장황한 수식을 꼼꼼하게 검수하고 교정보는 일은 매번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그 당시 인쇄소에는 수학의 수식 관련 활자가 없었다. 따로 공장에서 수식 모양을 본뜬 활자를 직접 만들어 사용해야만 했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긍지와 보람이 더 컸다.

“창간호가 나오고 얼마 뒤 미국수학회(American Mathematical Society)에서 KMJ에 실린 논문들을 소개하는 글을 《아메리칸 매스메티컬 리뷰》에 싣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 당시 미국수학회는 서구의 수학을 총괄하면서 최신 수학의 연구 성과를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었어. 우리한테는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었지. 매번 발간될 때마다 리뷰에 논문이 소개되면서 KMJ가 널리 알려질 수 있었어. 학술지 교환 요청도 많아졌고, KMJ에 논문을 게재하고 싶다며 연락해오는 외국 학자들도 점차 늘어났지.”

당시 KMJ의 위상은 경북대 수학교실 연구자들의 유학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 초에 서태일 선생이 아시아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가장 먼저 유학을 떠났다. 대수학의 세계적 석학인 제이콥슨 교수가 있는 예일대학으로 간 서태일 선생은 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2년도 안 된 1961년 말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이콥슨 교수는 KMJ에 실린 서태일 선배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었어. 그래서 서 선배한테 ‘따로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으니 바로 논문을 쓰라’고 했다는 거야.”

배미수 선생도 1962년에 서태일 선생의 추천을 받아 예일대학에 장학생으로 유학을 갔다. 배미수 선생 역시 KMJ에 실린 여러 편의 논문이 《아메리칸 매스매티컬 리뷰》에 소개됐다. 그 덕분에 예일대학에서 현역 연구자로 대접을 받았고, 박사학위를 받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최태호 선생의 사연은 더욱 극적이다. KMJ에 실린 최 선생의 논문을 읽은 미국의 저명한 교수가 심사평을 《아메리칸 매스매티컬 리뷰》에 실었는데, 최 선생의 논문 중에 가정이 하나 빠졌다고 지적했다. 뜻밖의 지적에 낙심하는 최 선생에게 박정기 교수는 “그런 대가에게 수정을 받았으니, 자네도 국제적인 수학자가 다 됐어”라며 좋아했다. 다음 해 미국수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지에 그 교수는 최 선생의 논문을 인용하고 참고문헌에도 포함시켰다고 한다.

1964년 장학생으로 플로리다대학에 유학을 간 최태호 선생도 그때까지 KMJ에 발표한 13편의 논문 덕분에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2년 만에 바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 선생의 논문에 심사평을 달았던 교수도 최 선생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의 제자였다. 나중에 세미나 자리에서 만났을 때, 그는 KMJ에서 최 선생의 논문을 자주 봤다며 무척 반가워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많은 후배들이 미국과 캐나다, 일본으로 유학을 갔어. 그런데 하나같이 하는 말이 KMJ에 실린 논문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거야. 그만큼 경북대 수학과와 KMJ가 세계 수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

KMJ 덕분에 도움을 받은 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에 남민전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200여 명의 세계 수학자들이 한국 정부와 재판부에 구명 탄원서를 제출해 아버지는 무기로 감형받을 수 있었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 아래에서 국내의 수학자들은 나서지 못했지만, 외국에 있는 경북대 수학과 선후배와 제자들이 구명운동을 벌여나갔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대학의 수학자들에게 직접 서명을 받았고, 그들한테서 또 다른 수학자들을 소개받아 서명을 받아 나갔다.

안재구 교수의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이임학 교수는 자신의 성을 따온 ‘리군(Ree群)’ 이론으로 세계 수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수학자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안재구 교수의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이임학 교수는 자신의 성을 따온 ‘리군(Ree群)’ 이론으로 세계 수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수학자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특히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이임학 교수가 아버지의 구명운동에 나선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서울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953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이임학 교수는 1963년 40세의 젊은 나이에 캐나다 왕립학회 정회원으로 선출된 세계적인 수학자였다. 자신의 성을 따온 ‘리군(Ree群)’ 이론으로 수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이임학 교수는 일면식도 없던 아버지를 위해 직접 동료 수학자들에게 서명을 받아주었다.

당시 세계 수학자들은 ‘안재구(Jae Koo Ahn)’라는 이름을 또렷이 기억했다. KMJ에 실린 아버지의 논문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KMJ에 여러 차례 게재한 논문으로 미분기하학 분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것이 세계 수학자들이 아버지의 구명운동에 동참하게 만든 힘이었다. 그들은 안재구 교수처럼 능력 있는 수학자를 죽이는 것은 대한민국에도 큰 손실임을 강조했다.

1970년 8월, 안재구 교수는 만 37세의 나이에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수여식에는 은사인 당시 박정기 경북대 총장도 함께 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70년 8월, 안재구 교수는 만 37세의 나이에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수여식에는 은사인 당시 박정기 경북대 총장도 함께 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KMJ 발간은 경북대 수학교실의 가장 중요하고도 큰일이었다. 1962년에 정식으로 조교로 발령받고, 그해 8월에 전임강사로 발령받은 아버지는 이때부터 경북대 수학과 일에 전념했다. 경북대 수학교실 운영과 KMJ 발간을 위해 시간을 쪼개가며 일했다. 연이어 조교수, 부교수로 승진했고, 1968년에는 학과장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1970년 8월,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학위만으로도 교수 지위를 가질 수 있었던 당시에는 무척 젊은 나이의 박사였다. 1956년 대학원에 입학해 학문의 길을 걸은 지 14년 만에 이룬 결실이었다.

수학교실의 세 선배 중 서태일 선배는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경북대와 서강대에서 교수로 있다가 다시 외국 대학에 교수로 나갔다. 배미수 선배는 예일대학에서, 대학원 동기인 최태호 선생은 플로리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외국 대학에 교수로 남았다.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엄상섭 선배는 1970년대 초에 성균관대로 옮겨갔다. 동기인 조용 선생은 1967년에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합쳐 영남대학교가 설립될 때, 신설 수학과의 교수로 취임했다. KMJ의 창간호에 논문을 게재했던 사람 중에는 아버지만 경북대에 남았다.

“박정기 선생님을 보좌하던 내가 이제는 KMJ를 발간하고 수학교실과 수학과를 책임지는 위치에 서게 됐어. 그중에서도 후배들을 이끌고 제자들을 키워내는 게 제일 큰 역할이었지. 수학이란 학문에 왕도가 없듯이 그 일도 꾀를 부리거나 대충대충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그때부터 막연히 잠을 줄이자는 식이 아니라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집중력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나갔지.”

남민전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다들 알게 됐지만, 아버지는 4.19혁명 이후 다시 변혁운동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뒤 영남고에 복직하면서 아버지는 교원노조운동에 참여했다. 경북대에 발령받고 교원노조 활동은 정리했지만,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 때는 교수들의 서명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만난 평생 동지 이재문 선생을 통해 비공개 변혁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이때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수학과 교수로 학부와 대학원 강의는 물론이고, 수학교실의 세미나를 진행하고 논문을 발표하면서 KMJ 발간까지 차질 없이 진행한 것이다. 또 산악반 지도교수로 학생들을 이끌고 등산도 다녔다. 1인 3역, 1인 4역……, 수많은 역할을 도맡아 한 셈이다. 산악반 제자 중에는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학생도 있었고, 나중에 남민전에 참여해 구속된 이도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삶을 돌이켜 볼 때마다, 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토록 빈틈없이 쓸 수 있을까 궁금했다. 아버지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 아닌가 싶었다. 몸이 몇 개라도 감당할 수 없을 법한 일을 아버지는 혼자서 다 해낸 것이다.

경북대 수학교실 세미나에서 발표 중인 안재구 교수. [사진 제공 - 안영민]
경북대 수학교실 세미나에서 발표 중인 안재구 교수. [사진 제공 - 안영민]

인간의 삶에서 30~40대가 한창인 시절이라지만, 과연 아버지의 그 시절처럼 보낼 수 있을까. 어떤 신념과 확신이 자신을 그런 정도로까지 단련시킬 수 있을까. 인간은 목표가 확고하고 사상이 투철하다면 스스로를 불가능의 수준으로까지도 끌어올릴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나는 아버지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국립대라 등록금이 쌌던 경북대 수학과에는 가난한 농촌 출신 학생들이 많았다. 가난한 집안을 생각하면 대부분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런데 한 제자의 수학적 재능이 너무 뛰어났다. 하지만 오지 산골 출신의 그 학생은 대학원을 진학할 형편이 도저히 안 됐다. 부모님은 하루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라도 하여 가계에 보탬이 되길 학수고대했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버스를 몇 차례나 갈아타고 그 학생의 집을 찾아갔다. 부모님을 만나 간곡히 설득했다. 그 학생의 뛰어난 자질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공부는 제가 책임질 테니 고생스러우시더라도 조금만 참고 기다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머나먼 시골까지 대학의 선생이 찾아와 자식의 장래를 보장하며 확신하는 이야기에 시골의 부모님도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당사자와 부모님을 설득하여 계속 공부하게 만든 제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이 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너거 아버지는 제자들 일이라면 어디든 찾아갔고, 무슨 일이든 앞장섰어. 자신이 어렵게 공부해서인지 가난한 학생들의 처지를 잘 알아 수시로 형편을 묻고, 장학금을 챙겨주고, 학자금 대출에 보증을 서주는 일도 많았지. 밤늦게 세미나를 마치면 통금 때문에 집에 가기 힘든 제자들을 데리고 올 때도 자주 있었어. 아침이면 그 학생들 밥 먹이고 도시락까지 챙기느라 나도 정신이 없었지.”

그런 날은 아침에 눈을 뜨면 엊저녁에 잠든 우리 방이 아니었다. 간밤에 잠든 우리를 안방으로 옮겨 온 것이다. 잽싸게 달려가 건넌방 문을 열면 아버지 제자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처럼 왁자하던 날들의 기억이 내게는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제자를 키우는 것은 후대를 키우는 일이야. 후대가 없으면 학문도 혁명도 계승 발전할 수 없지. 당대에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중요한 건 후대를 키우는 일이고, 후대들이 내리는 역사적 평가야. 그것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진정한 힘이지.”

아버지는 후대를 키우는 일의 중요성을 일찍이 증조할아버지의 삶과 학문의 스승인 박정기 교수를 통해 터득했다. 밀양의 투쟁 현장과 경북대 수학과의 세미나실에서 생생히 배웠다. 그리고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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