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3월, 아버지는 긴장된 표정으로 강의실로 들어섰다. 대학원 첫 수업 시간이었다. 강의실에는 같은 신입생인 최태호 학형과 조용 학형이 역시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몇 살씩 더 많았던 두 사람은 모두 문리대 수학과 1기 졸업생이었다.
“최태호 형은 군대를 다녀와서 보결시험을 치고 경북대에 뒤늦게 입학했어. 조용 형은 대구의전을 다니다 연희대학교 수학과에 편입했지만 전쟁 통에 그만두고, 다시 경북대 수학과에 들어왔지.”
이윽고 문리대 수학과 강사인 서태일, 엄상섭, 배미수 선배가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수학과 주임교수인 박정기 교수가 들어와 교단에 섰다.
“여러분의 대학원 입학을 축하합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학문의 동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세 명의 신입생과 또 세 분의 선생님들, 그리고 저까지 포함해서 모두 일곱 명이 앞으로 경북대 대학원 수학과의 수학교실을 이끌어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연구하고, 또 그 연구 결과를 함께 토론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수학적 성과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학문하는 우리들의 기본자세입니다.”
나지막하면서도 힘이 실린 박정기 교수의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그랬다. 이날의 첫 만남은 학부 시절의 수업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아버지는 긴장감 속에서도 새로운 기대가 마음속에 넘쳐났다.
학부 시절에는 교수의 강의가 중심이었다. 교과서라고는 교수가 강의하는 책뿐이었다. 그것도 없어 강의 노트만 가지고 수업하는 때도 많았다. 학생들이 지식을 얻는 방법은 오직 교수의 말과 판서밖에 없었다.
이를 놓칠세라 학생들은 온몸으로 수업에 몰두했다. 귀는 설명을 듣느라 집중하고, 눈은 흑판의 판서를 따라다녔다. 손은 판서 내용을 연습장에 속기로 부지런히 옮겨 써야 했다. 질이 나쁜 연필은 자주 부러졌고, 연습장은 찢어지기 일쑤였다.
수업이 끝나면 필기 내용을 다시 강의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복습했다. 이 작업을 수학과에서는 ‘노트 정리’라고 했다. 노트 정리는 교과서도 참고서도 제대로 없던 당시에 유일한 자기 주도 공부 방식이었다.
“그런데 대학원에 오니 수업 방식이 전혀 달랐어. 학부 때처럼 교수님의 일방적인 강의가 일절 없었어. 각자 자신의 전공 분야를 정하고, 그것에 맞춰 교재를 연구하고 발표하는 게 전부였어. ‘수학교실’이란 이름으로 매주 수요일 오후마다 세미나를 하는 게 우리의 수업이었지.”
대학원의 목적은 해당 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연구할 역량 있는 연구자를 길러내는 일이다.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들은 지도교수에게 그러한 능력을 전수받고, 그 결과물로 자신의 논문을 창조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세미나 방식의 수업은 학습자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 꼭 필요한 방법이었다. 자기 머리로 이해하고 정리한 내용을 스스로 발표하는 것만큼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학습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경북대 대학원 수학과는 그때 이미 선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있었어. 나중에 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고 온 선배나 동료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가 하던 세미나 방식을 외국 대학에서도 똑같이 한다는 거야. 같은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토론하며 공부하는 것은 일종의 협동학습이라고 할 수 있어. 이러한 공동체의 힘이 인류문명을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었지.”
당시에는 해석학, 대수학, 기하학이라는 수학의 전통적인 갈래 외에 다양한 응용 분야가 등장하면서 수학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응용수학은 인접 과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로 다시 새로운 분야가 창조되고, 새로운 전공이 등장했다. 이러한 수학의 새로운 발전 추세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북대 수학교실은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신입생 세 사람도 제각기 전공 분야를 정했다. 최태호 학형은 대수학을, 조용 학형은 확률통계론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기하학으로 결정했다. 세 사람은 선배들과 함께 공동으로 세미나 팀을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신입생들은 선배들처럼 학부에서 강의도 했다. 아버지 역시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부터 사범대 수학과에서 좌표기하학과 사영기하학 수업을 맡았다. 그러니 1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수학교실의 세미나 발표 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아버지는 학비와 생활비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대학 1, 2학년 때는 주로 학원 강사와 그룹과외를 하면서 해결했다. 그러다 영남고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석종구 선생의 강력한 추천으로 대학생 신분임에도 영남고 야간부 수학강사를 맡았다. 사범대 졸업으로 교사자격증이 나온 뒤에는 야간부 수학교사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낮에는 경북대에 나와서 학부생 강의와 대학원 세미나, 저녁에는 영남고로 가서 야간부 수학 수업…….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 공부는 주로 늦은 밤에 했지. 공부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밤을 새울 때도 많았어.”
길동무가 되는 벗들과 길잡이가 되어주는 선배들이 있어서 든든했다. 특히 그 중심에서 이끌어 주는 스승의 존재는 큰 의지가 됐다. 공부하는 재미, 학습하는 보람이 절로 생겼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박정기 교수는 세미나를 마치면 종종 제자들을 데리고 대구 시내로 나갔다. 자주 가던 곳이 ‘녹향’이라는 음악감상실이었다. 이곳에서 스승과 제자들은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며 못다 한 토론을 이어가기도 했다.
당시 대구 시내 중심가인 향촌동과 동성로에는 음악감상실과 다방이 많았다. 전쟁 때 피난 온 서울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주로 여기에 모여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들은 떠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대구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됐다.
“다방에서 대구의 문인과 예술인들도 자주 만났어. 전쟁 직후의 심란한 사회 분위기에 다들 우울했어. 모더니즘 문학과 실존주의 철학이 이들을 위로해 주었지. 영남일보 주필이었던 구상 시인이 다른 이들과 어울리던 모습이나, 구석에서 조용히 음악을 듣고 있던 이중섭 화가의 독특한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네.”
박정기 교수는 장차 교수가 될 제자들의 소양을 위해 한 번씩 양식당이나 일식당에도 데리고 갔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접한 서양요리와 일본요리도 소개하고 식사 예절도 일러주었다. 그런가 하면 향촌동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열변을 토할 때도 많았다.
박정기 교수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학문은 대를 이어 발전해 나가는 거야. 선대가 이루어 놓은 터 위에서, 그 터를 딛고 올라서는 거지.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고, 그 제자가 또 그 스승보다 뛰어나야 발전이 있지 않겠는가? 자네들이 나를 밟고 올라서게. 나를 주춧돌 삼아 그 위에 기둥을 올리게. 그래야 나도 사는 보람을 느끼지 않겠나?”
아버지는 이 말을 평생 마음속에 간직했다. 선대와 후대의 중요성이 어찌 학문뿐이겠는가. 역사의 진보에서도, 혁명의 성패에서도 대를 이어 계승, 발전하는 게 핵심과제일 것이다. 제자들을 바라보는 박정기 교수의 눈빛에서 아버지는 무릉동에서 만난 박철환 지도원 동지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학문에서도, 변혁운동에서도 아버지는 그 눈빛과 정신을 잊지 않았다.
각자의 전공에서 연구 성과가 하나둘씩 쌓여 가자, 박정기 교수는 또 한 번의 ‘큰일’을 벌였다. 그것은 세미나에서 토론하고 연구한 결과물을 발표할 정기간행물을 창간하는 일이었다.
“처음 교수님에게서 그 제안을 듣고 다들 어안이 벙벙했어. 우리 실력이 그 정도 수준이 되는지부터 의문이었거든.”
하지만 박정기 교수는 배짱 있게 밀고 나갔다. 당시 경북대 수학과 도서관 책장에는 박정기 교수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수학 원서들과 고서점을 통해 어렵게 구한 수학책들이 그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만 꽂혀 있었다. 더 많은 책과 논문이 필요했다. 최신 연구 추세를 알자면 그러한 내용이 담긴 외국의 최신 수학책을 읽어야 했다.
고가의 그 책들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대학의 예산은 뻔한 수준이었다. 달리 지원받을 곳도 없었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아무나 달러를 취급할 수 없었다. 돈이 있어도 외국의 학술지를 구매하는 게 쉽지 않았다.
“상황이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학술지를 만들어 외국 대학과 당당하게 학술지 교류를 해보자는 것이었지. 아무튼 대단한 용기였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고 시도하지 못했던, 교수님다운 발상과 추진력이었지.”
박 교수의 추진력 앞에 불똥이 떨어진 건 아버지를 비롯한 세 명의 대학원생이었다. 학술지에 발표할 수 있게 석사학위 논문을 제대로 준비해야만 했다. 마침내 1957년 12월에 세 사람의 논문발표가 열렸다.
“조용 학형은 확률과정에 대한 논문이었고, 최태호 학형은 속공간에 위상을 도입하는 이론에 관한 논문이었어. 나는 비틀림을 가진 공간에 관한 논문(On the Projective and Conformal Transformations in the Metric Manifold with Torsion)이었지. 논문발표 날 우리보다 더 감격하고 뿌듯해하던 교수님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해.”
그리고 한 달 뒤인 1958년 1월, 세 사람의 석사학위 논문에 서태일, 엄상섭, 배미수 세 선배의 논문을 보태 《경북 매스매티컬 저널》(Kyungpook Mathematical Journal, KMJ) 창간호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국내 대학에서는 처음 발간되는 수학 학술지였다. 한국의 수학을 세계에 알리는 최초의 도전이자 역사적인 첫걸음이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