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되고 2학기 강의시간표가 나왔다. 아버지도 시간표를 보면서 2학기 수강 신청을 고민하고 있었다. 사범대 수학과 강의는 대부분 1학기 과목의 연속이어서 듣고 싶은 게 별로 없었다. 그런데 문리대 수학과 1학년 시간표에 ‘해석학’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담당교수란에 적힌 ‘박정기’라는 이름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영남고 3학년에 편입했을 때, 고등대수학을 가르쳤던 분이었다.

안재구 교수는 경북대 사범대 수학과에 재학하면서 모교인 영남고등학교의 입시반 수학을 강의하며 학비를 벌었다. 사진은 1954년(단기 4287년도) 영남고 졸업기념사진. 맨아래 줄에 앉은 교사들 중에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원안이 안재구 교수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안재구 교수는 경북대 사범대 수학과에 재학하면서 모교인 영남고등학교의 입시반 수학을 강의하며 학비를 벌었다. 사진은 1954년(단기 4287년도) 영남고 졸업기념사진. 맨아래 줄에 앉은 교사들 중에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원안이 안재구 교수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박정기 선생님은 전쟁 전에 서울대학교와 연희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전쟁이 터지면서 대구로 피난 오셨어. 당시 서울의 대학은 전시 휴학 상태라 강의가 없었지. 피난 온 교수들은 대구에 있는 몇 안 되는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생계를 꾸렸어. 그것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어 고등학교에도 강의를 나갔어. 그래서 나도 박정기 선생님께 수학을 배울 수 있었지.”

전쟁 통에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교실에는 군에 입대했다가 ‘빽’을 써서 후방근무를 배치받은 나이 많은 학생도 더러 있었다. 이들은 아예 군복을 입은 채 학교에 왔다.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졸업장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수학 시간에는 오죽했을까. 대부분 꾸벅꾸벅 졸거나 아예 엎드려 잤다. 그런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만이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었다. 덕분에 아버지는 박정기 교수에게 개인 과외를 받듯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다가 경북대학교에 문리대 수학과가 신설되면서 주임교수로 오신 거야. 선생님은 대구사범대학 수학과에서 강의할 때, 우수한 학생들을 따로 모아 세미나를 시작하셨어. 이들에게 진짜 수학이 뭔지 제대로 가르쳐주셨어. 그리고 당신과 세미나를 해온 제자들을 문리대 수학과 강사로 뽑아 강의를 맡기셨지.”

덕분에 문리대 수학과는 초창기부터 학문의 분위기가 올바르게 잡혀 있었다. 설렁설렁 교재만 읽어주는 다른 학과의 수업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소문은 아버지에게도 들렸다. 그래서 시간이 겹치지 않으면 문리대 수학과 수업을 들어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가 박정기 교수의 해석학 과목을 발견한 것이다.

신설 단과대학인 문리대 수학과에는 사범대 수학과와 달리 학생이 1학년 신입생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수학과에서 해석학은 2학년 1학기 전공과목이다. 해석학이란 미적분의 개념을 기초로 함수의 극한과 연속에 관한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다. 1학년 2학기에 해석학 수업을 한다는 건 좀 빠른 것이기도 했다.

“박정기 교수님처럼 실력 있는 분이 의욕을 갖고 공부시킨다면 못 할 것도 없었지. 나도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개설 학과가 다르더라도 선택과목으로 수강 신청을 하면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었어. 물론 그까짓 학점이야 신경 쓸 게 없었어. 안 되면 도강(盜講)이라도 할 생각이었으니까. 나한테는 오직 하나 제대로 된 수업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뿐이었지.”

박정기 교수의 해석학 수업 첫날, 아버지는 문리대 강의실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교실에 들어온 박정기 교수가 강의를 시작하려고 학생들을 둘러보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보던 박정기 교수가 대뜸 아는 체를 했다.

“어, 안 군이 여기에 웬일인가?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모든 학생의 시선이 일제히 아버지에게 모였다. 아버지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일어나 대답했다.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문리대에서 강의하신다는 걸 알고 선생님 강의를 들으러 왔습니다.”

“그런가? 그럼 앉게.”

박정기 교수는 그러고는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문리대는 신입생 수가 학과별로 20명이었다. 수업을 듣는 20명의 수학과 학생 틈에 아버지가 앉아 있으니 단박에 눈에 띄는 것은 당연했다.

강의를 마치고 박정기 교수는 아버지를 연구실로 데려갔다. 대학 생활은 어떤지, 공부는 할 만한지,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는지 세세하게 물어보았다. 그러고는 듣고 싶은 수업이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들어도 좋다고 했다.

그다음부터 아버지는 박 교수의 강의는 물론, 수학과에서 개설한 수업도 틈나는 대로 열심히 들었다. 재적은 사범대이지만 강의는 주로 문리대 수학과에 가서 들었던 셈이다.

“박정기 선생님의 해석학 강의는 참으로 명강이었어. 수학의 논리체계가 빈틈없이 짜여 있고, 그런 논리체계가 구성되는 역사적 배경도 상세히 설명해 주셨지. 손에 쥘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논리체계이지만, 선생님의 설명을 듣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아름다운 창조물처럼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어.”

박정기 교수는 열강으로 유명했다. 강의할 때는 무아지경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았다. 중요한 대목에서는 소리를 높였고, 판서하는 분필에도 힘을 주었다. 판자로 만든 교단도 신명난 구둣발에 짓눌려 소리 내어 울었다. 그 모든 게 하나의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들렸다. 칠판에 가득한 수식들을 수도 없이 쓰고 지우다 보니 강의가 끝날 때면 온몸이 분필 가루투성이였다. 또 칠판에 특유의 필체로 써 내려간 수식을 보면서 “역시! 수학은 예술이야!”라고 스스로 감탄사를 뱉곤 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수학은 정말 예술이었어.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진짜 수학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됐지. 나는 점점 수학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수학이라는 학문에 흠뻑 매료되고 말았어.”

2학년이 되자 박정기 교수는 아버지에게 『현대대수학』 책을 한 권 주셨다. 그러면서 1주일에 한 번씩 당신의 연구실에서 세미나를 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박정기 교수의 특별한 배려로 시작한 이 세미나를 통해, 수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 학문하는 사람의 인생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박정기 교수의 각별한 가르침 아래 4년 동안 수학 공부를 했던 아버지는 문리대 수학과 대학원에 응시했다. 박정기 교수를 따라 수학이란 학문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1956년 졸업식 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험난한 세월을 이겨내고 마침내 대학을 졸업한 아들 옆에 앉은 아버지(안의환), 어머니(김태숙)의 얼굴이 오랜만에 환한 표정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하지만 시험이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당시 대학원의 입학 정원에는 대학 당국 정원과 병사 정원이 있었다. 대학 당국 정원은 정부의 법령에 따라 정해진 입학생 수다. 일반적인 모집 인원이라 할 수 있다. 병사 정원은 대학원 재학 2년 동안 입영을 유예해 주는 것인데, 경북대의 경우 학과마다 1명만 선발했다. 아버지는 최대한 입대를 늦추려는 생각으로 병사 정원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시험과목은 제1외국어인 영어와 제2외국어인 독일어가 있었고, 전공과목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 과목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준비가 늦은 어학은 과락만 면하고, 대신 전공과목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원서접수 후 남은 시간은 딱 1주일이었어. 전공과목 책과 노트를 내 하숙방 책상과 바닥에 널어놓고 모조리 독파했지. 1주일 동안 거의 잠도 안 자고 공부에만 몰입했어. 국민학교 교원 자격시험 때도 밤샘 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되었어. 엄마가 항상 내게 ‘너는 잠 안 자고 책 읽는 데는 도가 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대로 1주일을 버텼지.”

시험날 아침 9시에 시험장에 도착한 아버지는 시험을 마치자마자 바로 하숙방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쓰러져 며칠을 잠에 빠졌다. 하숙집에서 죽었나 살았나 걱정할 정도였다. 1주일 후 합격자 명단이 발표됐다. 게시판에는 ‘안재구’라는 이름 석 자가 선명했다.

대학원 시험에 합격하고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 박정기 교수가 아버지를 찾았다. 연구실로 가니 아버지에게 『해석기하학』과 『좌표기하학』 책 2권을 주면서 말했다.

“안 군, 곧 방학이 되네. 방학 동안 이 두 권의 책을 보고, 자네가 학생을 가르친다고 생각하고 강의 노트를 한번 만들어 보게. 겨울방학이 끝날 때 그 노트를 내게 가져오게.”

아버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강의 노트를 만들었다. 방학이 끝나는 날에 두 권의 책을 정리한 강의 노트 4권을 박 교수에게 가져다드렸다.

그 이튿날, 교수님이 급히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다시 연구실로 갔다. 그때 박정기 교수는 기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노트를 만드느라 수고했네. 내가 노트를 만들어 보라고 한 건 자네에게 그 강의를 맡겨도 좋을지 알아보려고 그런 걸세. 이번 학기부터 꼭 그대로 강의를 해주게.”

박정기 교수는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박 교수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한 바로 그해, 1956년 3월부터 문리대 수학과에서 학부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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