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직암 윤사국이 짓고 쓴 완문

직암(直庵) 윤사국(尹師國, 1728~1809)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그는 서예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당대(當代)에 조정의 금보(金寶)·옥책(玉冊)과 당시 사찰·누관(樓觀)의 편액(扁額) 등이 대부분 윤사국의 솜씨에서 나왔다. 글씨는 송(宋)의 서예가 황정견(黃庭堅)과 채양(蔡襄) 서예의 정수를 얻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윤사국의 묵적(墨跡)이라 할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적다.

지금 소개하는 윤사국의 이 글씨는 강화부 유수(江華府 留守) 시절이던 계축년(1793) 12월에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시의 삼충신(三忠臣, 黃善身, 具元一, 姜興業)에 대하여 쓴 완문(完文)이다. 완문은 어떠한 사실의 확인 또는 권리나 특권의 인정을 위한 확인서, 인정서의 성격을 가진다.

「강충신댁(姜忠臣宅)」 표지, 윤사국 서, 1793년. [사진 제공 – 이양재]
「강충신댁(姜忠臣宅)」 표지, 윤사국 서, 1793년. [사진 제공 – 이양재]
「강충신댁(姜忠臣宅)」 내지, 윤사국 서, 1793년(65 세시). Ⓒ이양재 2024. [사진 제공 – 이양재]
「강충신댁(姜忠臣宅)」 내지, 윤사국 서, 1793년(65 세시). Ⓒ이양재 2024. [사진 제공 – 이양재]
「강충신댁(姜忠臣宅)」 내지, 윤사국 서, 1793년(65 세시). Ⓒ이양재 2024. [사진 제공 – 이양재]
「강충신댁(姜忠臣宅)」 내지, 윤사국 서, 1793년(65 세시). Ⓒ이양재 2024. [사진 제공 – 이양재]

표지에 「강충신댁(姜忠臣宅)」이라 쓴 것을 보면, 이 윤사국의 이 완문은 강흥업(姜興業) 자손들에게 써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황선신과 구원일의 자손들에게도 「황충신댁」, 「구충신댁」하며 각기 한 부씩 써서 주었을 것이다.

이 「강충신댁」 완문은 8면의 절첩(折帖)으로 되어 있다. 이 완문이 대부분의 완문처럼 낱장으로 만들지 않고, 처음부터 절첩으로 장황(裝潢)되어 있다는 사실은 윤사국이 작정하고 필첩으로 만들려고 썼다는 의미이다. 즉 이 절첩은 간찰이나 편액과는 달리 처음부터 자신의 유묵첩으로 만든 것임을 의미한다. 필치는 매우 정중(正中)하게 해서(楷書)로 쓰고 있다.

2. 직암 윤사국의 완문으로 보는 강화도 삼충신

황선신(黃善身, 1570~1637)의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자는 사수(士修)이다. 1597년(선조 30)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에 이르렀다. 그는 강화부중군(江華府中軍)으로서 강화도의 연미정(燕尾亭)에 주둔하여 적을 방어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갑곶진(甲串津)에서 전사하였다. 이때가 68세였다.

구원일(具元一, 1582~1637)의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자는 여선(汝先)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중용되지 못하다가 강화부(江華府)의 우부천총(右部千摠)이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에 갑곶진(甲串津)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순절(殉節)하였다. 이때가 55세였다.

강흥업(姜興業, 1575~1637)의 본관은 진주이며, 자 위수(渭叟)이고, 시호 충렬(忠烈)이다. 그는 임진왜란의 참화를 목격하고 무인의 길로 들어섰으며, 1596년(선조 29)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첨정에 이르렀다. 청나라가 강화도로 공격해 오자 우부천총(右部千摠)으로서 황선신(黃善身)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때가 62세였다. 이때 노장으로 분투하는 것을 본 적병도 ‘백수장군(白首將軍)’이라고 칭송하였다 한다.

이 삼충신은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이들을 강도삼충(江都三忠)이라고 한다.

3. 인조반정의 정사 2등 공신 김경징과 장신

이들 삼충신과는 정반대의 후대에 지탄을 받는 부끄러운 삶을 산 사람이 있다. 바로 김경징(金慶徵, 1589~1637)과 장신(張紳, ?~1637)이다.

김경징은 영의정 김류(金瑬, 1571~1648)의 아들로서 1623년 인조반정 때의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이 되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뒤에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 검찰사에 임명되어 강화도 방어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장으로,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부임하였다.

당시 강화도에는 빈궁과 원손 및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해 전직 현직의 고관 등 많은 사람이 피난해 있었다. 하지만 김경징은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하고 명령해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였다. 그는 강화도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만 믿고 청나라 군사가 건너오지는 못한다고 호언장담하며,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않은 채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그리고 김포와 통진에 있는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배로 실어 날라 정실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는 처사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그러다가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군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 계책을 세웠다. 하지만 군사가 부족해 해안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런데 백성들마저 흩어져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나룻배로 도망해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히거나 죽었다.

김경징(金慶徵)이 도망할 때 1636년에 강화유수로 전임되어 있던 인조반정 때의 정사공신 2등이었던 장신(張紳)도 왕실과 노모를 버리고 먼저 도망하여 강도가 함락되었다. 벼슬을 탐하여 인조반정 시 하룻밤 참여로 공신이 된 자는 나라를 지킬수가 없었다.

4. 직암 윤사국 서예의 평가

직암(直庵) 윤사국(尹師國, 1728~1809)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보다 58년이나 앞선 문신이자 당대 최선의 서예가이다. 그의 글씨는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기에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던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과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모두 칭찬하였다.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지은 윤사국의 신도비 명에 다음 기록이 전한다. "공이 서예에 있어 재주가 대단히 높았다. 그가 어렸을 때 상국(相國) 서명균(徐命均)이 글씨 한 첩을 쓰고 그 절반은 빈 채로 남겨두고 주면서 '자네가 스스로 쓸 때를 기다리겠다'라고 했다.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가 모두 글자를 써주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하였고 뒤에 유명한 서예가가 되었다. (神道碑曰 公於筆藝 才分 甚高 幼時 徐相國命均 書一帖 虛其半與之曰 待汝自書 白下 尹公淳 圓嶠李公匡師 皆贈字勉之 後成名家. 정원용(鄭元容)의 『경산집(經山集)』 14권, 「判敦寧府事尹公師國神道碑」)

직암은 나이 80이 넘어서 왕명을 받들어 지지대비문(遲遲臺碑文)을 써서 올렸는데 그 글씨의 자획이 살아 움직이듯 생동하였다. 지지대비는 1807년에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로서, 서영보(徐榮輔)가 글을 짓고 홍명호(洪明浩)가 전액(篆額)을 하였으며, 윤사국(尹師國)의 글씨를 새김으로써 당시 최고의 성가(聲價)를 올렸던 뛰어난 글씨 솜씨를 짐작할 수 있다.

윤사국이 일찍이 금강산 바위에 새겼던 “묘길상(妙吉祥)”이라는 세 글자는 중국인이 그 탁본을 보고서 대자(大字) 글씨 가운데 이렇게 잘된 것은 보기 어렵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직암 윤사국의 저술로는 「증대사헌칠평군공행장(贈大司憲漆坪君公行狀)」이 있고, 엮은 서첩으로 『육선생유묵(六先生遺墨)』이 있다. 남아 있는 묵적(墨跡)으로는 『근묵』에 행서로 쓴 서간문이 실려 있고, 금석문으로는 『지지대비』(경기도 용인시), 『윤공묘비명(尹公墓誌銘)』(1791), 『어제서시세손(御製書示世孫)』(1759), 『엄흥도정려비(嚴興道旌閭碑文)』(영월) 등이 있다.

편액으로는 백운루(白雲樓)·민충사(愍忠祠)·배견루(拜鵑樓)·창절사(彰節祠)·창절서원(彰節書院)·금강정(錦江亭)의 사액(賜額) 등등의 현판 글씨가 있다. 이번에 <통일뉴스>의 ‘신 잡동산이’에서 공개하는 윤사국 서 완문 「강충신댁」은 현전하는 직암의 작품 가운데 매우 드문 해서체로 썼지만 자획(字畫)에 정중한 기운이 생동(生動)하는 작품이다.

5. 직암 윤사국의 인물사적 접근

「윤사국 초상」, 작자 미상, 사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 – 이양재]
「윤사국 초상」, 작자 미상, 사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 – 이양재]

직암 윤사국(尹師國, 1728~1809)의 본관은 칠원(漆原)으로, 자는 빈경(賓卿)이고, 호는 직암(直庵)이다, 증조는 윤서적(尹叙績)이고, 할아버지는 윤지순(尹志淳, 1666~1690)이다. 부친은 관찰사 윤경룡(尹敬龍, 1686~1743)이며, 증좌찬성 윤경종(尹敬宗, 1680~1705)에게 입양되었다.

1759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간 후 여러 관청(官廳)의 요직을 거쳤고 1783년에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대사헌·대사성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도승지·공조판서·한성부판윤·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07년에 노인직으로 숭록대부에 올랐으며 80세인 1808년에 판돈령부사·상호군에 이르렀다.

「윤사국 간찰」, 윤사국, 을사년(1785, 57세시) 6월 초1일, 지본묵서, 34.2×49.1cm, 원주역사박물관 소장품. 윤사국의 간찰은 시중에서 더러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윤사국 간찰」, 윤사국, 을사년(1785, 57세시) 6월 초1일, 지본묵서, 34.2×49.1cm, 원주역사박물관 소장품. 윤사국의 간찰은 시중에서 더러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직암 윤사국의 삶을 탐색하여 보면 그는 “스스로를 불편부당(不偏不黨)한 문신임을 표방(標榜)하며 외골수 서예가의 길을 걸었다”라고 평할 수 있으며, 그의 그러한 곧은 삶의 의지는 「엄흥도정려비문(嚴興道旌閭碑文)」과 완문 「강충신댁(姜忠臣宅)」 등등의 충신들을 위한 글을 짓고 썼다는 데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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