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러시아가 단 하루만의 만남으로 새로운 관계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른바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입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19일 서명한 이 새 조약은 23조에 걸쳐 비교적 길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다름 아닌 제4조입니다.
제4조는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조항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양국 국내법을 언급했지만 사실상 ‘유사시 자동군사개입조항’을 부활시켜, 북한과 옛 소련이 1961년에 맺었던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을 연상시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9일 새 조약에 서명한 후 “우리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동맹관계라는 새로운 높은 수준에 올라섰다”고 선언하고는 “조로(북러)관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조약의 탄생”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을 정도입니다. 나아가 타스 통신에 따르면, 김 국무위원장은 이날 환영 공연 관람 후 이어진 저녁 환영 연회에서 새 조약에 대해 “조선과 러시아 동맹관계의 백년대계를 설계하고 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자평했다고 합니다.
24년 만에 방북한 푸틴 대통령이 19일 새벽 2시 넘어 평양에 도착해 당일 자정께 다음 행선지인 베트남으로 향했으니 북한과 러시아는 하루만의 만남으로 새롭고도 장기적인 관계를 이룬 셈입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은 격입니다. ‘지각 대장’ 푸틴은 평양에 늦게 온 만큼 발품을 팔았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숙소 금수산영빈관→낮 12시 김일성광장 환영 의식→양국 확대회담→2시간에 걸친 양국 정상의 단독회담→조약 조인식과 공동언론발표→선물 교환→금수산영빈관 정원 산책→아우루스 리무진 교대 운전→김일성훈장 수여식→해방탑 참배→평양체육관 환영 공연→환영 연회→평양 순안공항 김 위원장의 환송 받으며 베트남 출발’ 등의 일정을 당일치기로 소화한 것입니다.
북한과 러시아가 체결한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에 대해 우리 정부와 미국이 우려를 표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미국은 “어떤 나라도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촉진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유엔헌장을 위반하고 있으며, 국제 시스템을 훼손하려 하고 있다”고 성토했습니다. 우리 정부도 “엄중한 우려를 표하며, 이를 규탄한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기존 방침과 달리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문제는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톤을 바꿨습니다.
사실 북한과 러시아가 이같이 동맹적인 관계로 접근하게 된 데는 특히 미국을 비롯해 외부 세계의 책임이 큽니다. 러시아에게는 현실적 원인인 근인(近因)이, 북한에게는 근본적 원인인 근인(根因)이 작용했습니다. 러시아는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미국 등 서방과 대치 중에 있고, 북한은 한미동맹에 따른 확장억제와 한미일의 군사협력 강화 등의 압박으로 근본적인 위협받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누구라도 필요한 터에 북한과 러시아로서는 손을 잡을 수 있는 최선의 기회가 온 것뿐입니다.
이번 북러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두고 일부에서 한반도에 신냉전 구도가 도래했다고 평하기도 하는데 이는 섣부른 판단입니다.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고전적인 냉전 구도가 아직 성립되지 않고 있습니다. 북중러가 모두 미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지만 처방이 같진 않습니다. 북러는 손을 잡았지만 중국이 전선에 서 있지 않습니다. 미국과 전략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아직 눈치를 보거나 계산할 게 많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번 새 조약 체결로 북한과 러시아는 미국으로부터 한시름 놨다는 점입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