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1953년 12월 11일, 새벽 4시였다. 당시 대학 2학년인 아버지는 아침에 부고를 받자마자 서둘러 출발했다. 구지로 가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아버지는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췌장염을 앓으셨어. 처음 병이 나신 건 1940년 가을이었지. 창씨개명도 안 하고 사상전향서도 안 낸다고 왜경들이 할아버지를 잡아가 버렸지. 그때 고생을 많이 하셨어. 그 때문에 발병하셨던 거야. 부산 부립병원(지금의 부산대병원)에 입원해 수술받으셨는데 경과가 좋았어. 의사도 앞으로 10년은 거뜬할 거라고 했지. 그런데 10년이 지나면서 재발하신 거야.”

증조할아버지는 피난에서 돌아온 뒤로는 점차 기운이 떨어지셨다. 전쟁과 분단으로 고통에 빠진 조국의 현실 앞에 몸과 마음의 상처가 점점 커졌다. 일가친척과 형제, 동지들의 억울한 죽음을 무수히 겪어야만 했다. 쫓겨나듯 고향을 떠난 뒤로는 상심이 날로 깊어만 갔다. 그것이 다시 병마로 돌아온 것이다.

“1953년에 구지중학교를 졸업한 재두(아버지의 첫째 동생)가 대륜고에 입학하면서 온 가족이 대구로 이사 왔어. 구지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숙모만 남게 됐지.”

새로 구지중학교 재단 이사장을 맡은 구지면장은 할아버지를 영어교사 자리에서 내쫓았다. 그 바람에 할아버지도 구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보다 세 살 많은 작은할아버지는 징집돼 군에 있었고, 작은할머니가 6개월 된 첫째를 데리고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곁에 남았다.

할아버지가 대구로 이사 온 다음 날, 아버지는 구지로 내려갔다. 증조할아버지가 걱정돼 도무지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학비를 벌며 대학에 다녀야 하는 처지라 구지에 자주 내려가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할매! 내 왔다! 재구 왔다!”

아버지는 크게 소리치며 활짝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어갔다. 큰방 대청의 미닫이가 열리고, 증조할머니의 여윈 몸과 반가워하는 얼굴이 나왔다. 바로 이어 건넌방 미닫이가 열렸다. 증조할아버지가 힘겹게 얼굴을 내미셨다.

“할아버지의 파리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만 숨이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어. 내 입에서는 그저 ‘할배, 할배’ 하는 울음소리밖에 안 나왔지.”

안재구 교수의 조부인 우정 안병희 선생(1890-1953).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해방운동에 나서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에는 밀양에서 건준 부위원장과 민전 부지부장을 맡아 반분단투쟁에 헌신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안재구 교수의 조부인 우정 안병희 선생(1890-1953).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해방운동에 나서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에는 밀양에서 건준 부위원장과 민전 부지부장을 맡아 반분단투쟁에 헌신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곁에 앉아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옥골선풍(玉骨仙風)이라고 했던 보얗던 얼굴이 누른빛으로 되었다. 병색이 완연했다. 근 1년 만에 뵙는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야윈 손을 잡았다. 눈물이 나고 목이 꽉 잠겼다.

“재구야, 누구에게나 다 이별이란 게 있다. 너무 상심하지 마라.”

그날 밤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 곁에 누웠다. 증조할아버지도 모처럼 손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기분이 좋아질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할배, 예전에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위해 평양에 가셨던 이야기 좀 해주이소.”

“그 이야기는 벌써 여러 번 안 했나? 또 뭐가 더 궁금하다는 거고?”

아버지는 구지에서 증조할아버지를 다시 만난 뒤로 그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연석회의에 참석한 대표단은 북에서 반일 민족해방과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를 보여주는 곳에 시찰을 다녔다고 한다. 보통강운하와 황해제철소를 둘러보았고, 후대들을 위해 세운 연필공장에도 가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이었다고 한다.

“김일성 수상의 항일유격대 유자녀들만 아니라, 독립군 사령관이었던 양세봉 장군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 유자녀가 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어. 임정에서 교육부장을 했던 이종익 선생이 원장을 맡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그 모습에서 우리 민족해방투쟁의 본류를 확인했다고 하셨지.”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에게 이런 질문도 했다.

“할아버지도 대의원에 뽑혀서 평양에 남을 수 있었잖아요?”

그랬다면 남쪽에서 온갖 험한 일을 겪지 않았을 테고, 고향 땅에서 쫓기듯 나와 이렇게 고생 안 하셔도 됐을 텐데, 하는 아버지의 솔직한 심정이 질문 속에 담겨 있었다.

“많은 이들이 대의원이 되고자 했지. 하지만 ‘모두 대의원이 되어 북에 남으면 남조선 혁명은 누가 하는가?’ 이런 말도 나왔어. 나도 그렇게 말하는 쪽에 있었고. 나는 다시 남으로 내려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부고를 받기 며칠 전이었다. 병간호를 위해 하던 일을 그만두고 먼저 구지로 내려간 할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증조할아버지가 며칠 못 버티실 거 같다고 했다. 아버지도 급히 구지로 내려갔다. 손자를 보고 기력을 조금 회복한 증조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당부의 말을 남기셨다.

“동지들과 함께 왜놈에 맞서 싸웠고, 그 힘으로 내 고향 밀양 땅에서 왜놈 권력을 몰아낼 수 있었지. 하지만 일제에 빌붙어 동족을 탄압하던 놈들이 다시 미국 놈을 등에 업고 38선을 그어 민족을 분단시키는 걸 막지 못했어. 반분단 투쟁에서 숱한 사람들이 죽어간 게 참으로 통탄스럽구나. 젊은 너희들에게 이런 세상을 남겨두고 떠나는 게 무척 마음이 아프다.”

증조할아버지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당신의 길을 따라온 손자를 남겨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리신 것이다.

“재구야, 공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의 도리를 공부하는 거다. 사람의 도리를 모르면 공부한 게 도리어 사람을 해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가, 언제나 이 공부를 잊지 말아라. 그리고 이런 세상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너도 자식들에게 올바른 세상을 물려주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한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잠이 드셨다. 그리고 며칠 후 세상과 영별하셨다. 이때 연세, 예순셋이었다.

1906년에 열여섯의 나이로 새로운 세상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뒤 국권 상실의 역사를 지켜보았고, 그 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본 놈에 맞서 줄기차게 싸웠다. 해방을 맞았으나 그것은 가짜 해방이었다. 인민이 주인이 되는 진짜 해방과 남북의 통일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다시 미국 놈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끝내 조국은 분단되었다. 그 과정을 통한의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던 증조할아버지는 분단의 휴전선이 그어진 그해 겨울, 마지막 눈을 감으셨다.

구지에서 발인을 마치고 증조할아버지의 운구는 밀양 성만마을에 있는 선산으로 모셨다.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고향 땅이었건만 넋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선산에 도착하니 일가친척들이 몇 사람 나와 있었어. 하지만 집안 종손인 증조할아버지의 위치와 밀양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살아오신 이력을 생각하면 너무도 조촐했지. 1947년 1월, 건준과 민전의 위원장을 맡으셨던 김병환 선생께서 세상을 떠났을 때만 해도 1만 명의 인파가 모여 영결식을 거행했지. 몇 년 새 세상이 허망할 만치 달라진 거야.”

성만마을 장지에는 밀양경찰서 고등계 형사들도 여러 명 나와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오가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자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이 행여 눈이 마주칠 새라 고개를 숙였다. 마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담벼락 아래로 머리가 쑥 들어가 버렸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여전히 두렵고 엄혹한 시절이었다.

안병희 선생의 후손들인 안재구 교수의 부모, 형제들이 1974년 안재구 교수의 어머니 회갑을 맞아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안병희 선생의 후손들인 안재구 교수의 부모, 형제들이 1974년 안재구 교수의 어머니 회갑을 맞아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내게는 증조할아버지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매년 12월 11일, 증조할아버지의 기일이 되면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엄숙하게 제사를 준비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사진에 겹쳐 떠오른다. 그날 아버지는 오래도록 생각에 잠긴 채 말씀이 없으셨다. 제상에 올리는 술 한 잔도 여느 때보다 간곡했다.

한번은 내가 증조할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신청하는 문제를 아버지에게 꺼낸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훈장을 수여하고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겠다는 정부 발표가 나왔을 때였다.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활동했던 분들 가운데도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분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분명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내 할아버지가 반쪼가리 나라, 그것도 미국 놈이 세운 나라에서 주는 훈장을 받을 분이겠나? 오히려 부끄러워하실 분이다.”

증조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아버지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만으로 스무 살을 막 넘긴 때였다. 큰 산이 무너져 내린 느낌이었다. 평생의 의지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연락선이 다 끊어지고 산중에 홀로 남았을 때와 같은 막막함이 몰려왔다.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니 이제는 정말 그 어디에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좌표도 분명하지 않았다.

소년 연락원 시절에 배낭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수학책이 아버지의 길동무였던 것처럼, 이때도 수학책이 아버지를 위로해 주었다. 수학은 아버지의 유일한 의지처였다. 아버지는 묵묵히 수학 공부에만 몰두했다. 한 번씩 당신의 할아버지가 그리워지고, 죽어간 동지들이 생각날 때면 술로 상심을 달랬다. 아버지의 20대 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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