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아침, 서울방송은 38선 일대에서 남북 군대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곧이어 이북의 평양방송에서도 남조선 국방군이 38선을 넘어 침략했지만, 인민군이 이를 격퇴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미 1949년 한 해만도 38선 일대에서 2,600여 회의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이 일어났다고 해. 구지에서도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세를 빠르게 알 필요가 있었어. 첫 월급을 받자마자 대구로 나가 양키시장(교동시장)에서 단파 라디오를 산 것도 그 때문이었지. 구지에 오신 할아버지도 조만간 전쟁이 터질 수밖에 없다고 예견하셨어.”

1950년 5월 30일에 치른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 격인 대한국민당은 24석을 얻었다. 이승만 지지 세력을 몽땅 합쳐도 210석 중 57석밖에 당선되지 못했다. 남북협상파와 반이승만파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 것이다. 이승만의 대패였다. 국회가 구성되면 이승만은 권좌에서 물러나야 할 상황이었다. 이를 뒤집어엎은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6월 17일에 남조선을 방문해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고 38선을 시찰한 덜레스(미국 국무장관 고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당신들은 외롭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어. 미국의 담보를 받은 이승만은 결국 전쟁을 향해 발을 내디뎠지.”

전쟁이 터지자 한강철교를 폭파시킨 뒤 제일 먼저 남쪽으로 피난 간 이승만(왼쪽). [사진 제공 – 안영민]
전쟁이 터지자 한강철교를 폭파시킨 뒤 제일 먼저 남쪽으로 피난 간 이승만(왼쪽). [사진 제공 – 안영민]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국회의원과 시민들에게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고 말해 대부분 서울에 남도록 한 다음,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다시 서울에 돌아올 때는 ‘부역자’ 문제를 걸고 나왔다. 전쟁 중에 후방 곳곳에서 양민이나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자행된 뒤였다. 서울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졸지에 ‘부역자’로 몰릴 위기에 처한 이들은 인민군이 후퇴할 때 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제헌의회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외가 큰집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국회에는 이승만 반대파가 크게 줄었다.

전쟁으로 이승만과 미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걸 손에 쥐었다. 전쟁을 구실로 남쪽에서 골칫거리 ‘좌익’들과 반대파들을 소탕하면서 식민지 독재의 탄탄대로를 닦은 것이다.

탄압의 칼바람은 아버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열흘도 안 된 7월 4일, 무기한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교무실에서 교사들끼리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드르륵 열렸다. 카빈총을 멘 경관 둘이 교무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안재구 선생이 누구요?”

“전데요. 왜 그러시오?”

“지서장이 부릅니다. 잠깐 지서로 갑시다.”

영문도 모른 채 그들과 같이 지서로 왔더니 다짜고짜 유치장에 집어넣고는 문을 잠갔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다.

“당시 지서장이 외가 큰집 할아버지의 호위 경관 출신으로 집안사람이었어. ‘할배요, 왜 이럽니까?’ 하고 물으니, ‘나도 모른다. 본서에서 너를 잡아 보내라고 연락이 왔다’고 하셨지. 뭔가 심상찮구나 싶었어.”

5.30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아버지의 외재종조부는 전쟁이 터질 때 이승만의 말을 믿고 서울에 남아 소식을 알 수 없던 때였다. 구지면장을 하던 아버지의 외할아버지도 이태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니 아버지를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서에 먼저 잡혀 와 있던 사람들은 똘똘 묶인 채 트럭에 실려 본서인 남대구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리고 뒤에 잡혀 온 사람들로 지서 유치장이 다시 차기 시작했다. 대부분 보도연맹원이었다. 아버지처럼 예비검속에 걸린 이들도 있었다. 모두들 쑥덕거리는 소리가 ‘골로 간다’는 것이었다.

곧 어두워졌다. 아버지는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2.7구국투쟁 이후 야산에서 활동하다 붙잡혀 죽은 동무들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가셨다. 투쟁의 길에 나설 때부터 언제 어디서건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길이었다.

자정이 넘어 유치장 문이 덜컹 열렸다. 지서장 할배였다. 아버지를 데리고 나가 자기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힌 뒤 말했다.

“니도 우리 집안 외손인데 우째 내가 니를 죽을 곳에 보내겠노. 본서에는 못 잡았다고 할 테니 여기서 나가는 대로 멀리 도망쳐라.”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준 월급으로 할머니가 사 모아둔 금붙이와, 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최신형 시계를 받고 지서장이 몰래 풀어준 것이다.

아버지는 바로 도망쳤다. 구지에서 십여 리 떨어진 유가면 한정리 원산마을에 사는 할머니의 고모에게 찾아갔다. 원산 할매의 시가는 곽재우 장군 형님의 후손이었다. 현풍 곽씨 집안의 큰집 종부가 원산 할매였다. 원산 할매는 아버지를 삼면이 대밭으로 둘러싸인 사당에 데리고 갔다.

“여기 사당에 모신 분이 12대조 할아버지로 망우당(곽재우 장군)의 종사관이셨다. 너도 우리 집안의 외손이나 마찬가지다. 그 어른이 널 지켜주실 거다.”

그러고는 사당 안의 신주함 밑에 있는 마룻장을 올리고, 그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아버지는 낮에는 마룻장 아래에서 꼭꼭 숨어 지내고, 밤에는 나와서 사당 안에만 있었다. 꼬박 한 달을 그렇게 보냈다.

8월이 되어 아버지는 원산마을로 찾아온 가족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그해 여름은 정말 무더웠다. 그리고 참담하고 끔찍했다. 곳곳마다 헐뜯긴 조국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아닌데도 골짜기마다 송장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피난민들의 고단한 행렬. 구지경찰지서에 붙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한 아버지는 가족들과 청도로 피난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피난민들의 고단한 행렬. 구지경찰지서에 붙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한 아버지는 가족들과 청도로 피난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구지를 떠나 청도까지 피난 내려온 아버지와 가족들은, 매전면 온막리 동창천변에 자리 잡은 피난민수용소를 그대로 지나쳤다. 증조할아버지까지 계시니 사람들이 많은 곳에 머무르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만 했다. 혹시나 알아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대신 금천면 오봉의 외진 산골짝에 있는 증조할머니 친정 조카딸의 시가에 의탁하게 됐다. 다행히도 거기까지는 전쟁이 미치지 못했다. 보도연맹 난리도, 극우 깡패들의 횡포도 피해 간 오지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5리도 채 못 되는 능선을 넘으면 밀양의 산내면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밀양으로 가는 고갯길은 절대 넘을 수 없었다. 그 길은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이었다.

한날은 전황에 대해 귀동냥도 할 겸 온막리 피난민수용소에 들렀다. 거기에서 아버지는 구지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을 만났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상황을 잘 모르는 듯 피난길의 만남에 반가워했다. 그편에 ‘전시수당’이 포함된 밀린 월급도 받았고, 교사에게 지급하는 전시요원증과 전시요원 완장도 수령할 수 있었다.

“경찰에서는 나를 잡아들이라 했지만, 교육청에서는 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어. 그만큼 기관들끼리 정보 공유가 제대로 안 됐던 거야. 전시요원증은 나중에 대구나 밀양에서 경찰의 검문을 통과하는 데 아주 요긴하게 쓰였지.”

피난살이는 10월 3일에, ‘10월 4일 복귀하라’는 복귀령이 나오면서 끝났다. 전쟁 발발 직후 태어난 막내 삼촌까지 열 식구는 다시 구지를 향해 떠났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삼촌들과 고모를 데리고 천천히 올라왔고,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와 함께 당일로 구지에 들어왔다.

교사가 불타버리는 바람에 임시로 천막교실에 수업을 하는 초등학생들. [사진 제공 – 안영민]
교사가 불타버리는 바람에 임시로 천막교실에 수업을 하는 초등학생들. [사진 제공 – 안영민]

학교는 10월 10일에 신학년 개학을 했다. 문제는 불타버린 교사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수업을 하는 동안에도 흙벽돌로 담을 세워 교실을 만들어 나갔다. 교실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학교 담벼락 밑에 학생들을 앉히고 흑판을 걸어놓고 수업을 했다. 한 달 만에 뚝딱 완성한 흙벽돌 울타리 교실은 겨울이 되면서 다시 천막 교실로 바뀌었다.

전쟁으로 조국의 분단은 고착되고 있었다. 1951년 봄부터는 전선도 교착상태에 놓였다. 전방에서는 전투가 지속됐지만, 후방은 일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청년들은 전선으로 끌려갔다. 징집을 연기할 방법은 대학에 가서 학생 신분을 얻는 길뿐이었다. 자식의 목숨을 하루라도 더 지키려는 부모들은 자식을 대학으로 보내기 위해 논 팔고 소 팔며 아우성이었다.

“나도 대학 진학을 결심했지. 당장은 징집을 면할 방편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잃어버려서 그런 것이기도 했어. 분단은 현실이 되고 있었고, 이를 막아낼 힘은 남쪽에서 더는 보이지 않았거든. 암담한 상황에서 일단 대학으로 가자, 이렇게 마음먹었지. 학교 일을 마치면 혼자서 새벽까지 고교 과정을 공부해 나갔어.”

대구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출발하기 위해 대구역에 모인 병사들. 당시 대학생은 징집을 면했기에 부모들은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애를 썼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대구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출발하기 위해 대구역에 모인 병사들. 당시 대학생은 징집을 면했기에 부모들은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애를 썼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51년 3월부터 학제가 개편됐다. 6년제와 4년제 과정이 혼재되어 있던 중학교는 3년제로 통일됐다. 대신 3년제 고등학교와 실업고등학교가 새로 생겨났다. 아버지가 대학에 진학하자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외가 아재의 도움으로 대구 영남고에 3학년으로 편입하는 걸 추진했다.

당시만 해도 전쟁의 혼란으로 위조 증명서가 난무했다. 초등학생 실력으로도 고교 졸업장을 따내 대학으로 들어가는 일이 허다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 없었다. 정공법을 택했다. 고3 학력이 되는지 직접 학교에 찾아가 테스트를 받기로 했다.

국어, 수학, 물리, 화학, 생물, 국사 등 다른 과목은 모두 통과됐다. 특히 수학은 “지금 당장 고등학교 교단에 세워도 좋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영어였다. 중학교 3학년 수준으로 합격을 주기 어렵다는 평가였다. 그러자 수학 선생님이 “지금 우리 학교에 안재구 학생보다 영어 실력이 나은 학생이 절반이나 됩니까?” 하며 아버지를 거들고 나섰다.

“그때 내가 선생님들께 약속했어. 통과만 시켜주신다면 졸업 때까지 영어를 고등학교 3학년 실력으로 만들어 놓겠다고. 그게 안 되면 낙제시켜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지.”

마침내 아버지는 영남고 3학년 2학기 편입을 허락받았다. 첫 실력고사에서 영어를 13점 받았지만, 6개월 내내 영어 공부에 몰두해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는 어느 학과를 지망할까 고심하다 증조할아버지와 상의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사람을 살리는 의과대학 진학을 바랐지만, 가정 형편상 학비 마련이 큰 부담이었다. 아버지는 내심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사회의 병 치료 이론이라 할 정치경제학에 관심이 많았다.

“재구야, 지금 같은 세상에서 사회과학은 진리는 고사하고 체제를 옹호하는 어용 이론만 남아 있게 될 거다. 그래야 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출세할 수 있을 테니까.”

증조할아버지가 권한 것은 수학이었다.

“니가 수학에 남달리 흥미를 갖고 있고 이해가 빠르더구나. 과학을 비롯해 모든 학문은 수학적 논리로 기초를 구성하고 있지. 수학은 어떠냐?”

증조할아버지의 제안에 아버지는 바로 결정했다. 어려서부터 수학을 좋아했고, 남다른 수학 재능을 가졌던 아버지에게 딱 맞는 전공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과를 지망했다. 1952년 1월 하순에 대학 시험에 합격했고, 3월에는 대학생이 되었다.

아버지는 대학의 문으로 들어가면서 수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살기로 작정했다. 전쟁으로 갈가리 찢긴 겨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렸다. 해방 뒤의 혼란기와 전쟁 통에 죽음으로, 행방불명으로, 잠적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동무들이 너무나 그리웠다. 혼자서만 살아남아 대학에 가는 게 그들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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