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동 군당 간부 양성반에는 주로 20대 청년들이 모였다. 청도군당에서 두 명의 동지가 왔고, 언양군당에서도 두 명의 동지가 왔다. 밀양군당의 아버지까지 모두 다섯이었다. 모두 아버지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형님이었다. 하지만 출신 지역이나 학교, 나이는 일절 서로 묻지 않았다. 이름도 조직에서 부여한 가명으로 불렀다. 이런 양성반이 밀양 북동부 산악지대에 몇 군데 더 있다고 했지만, 모든 게 보안 사항이었다.

영남알프스 지도. 무릉동은 표충사에서 사자평으로 가는 도중에 나오는 층층폭포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영남알프스 지도. 무릉동은 표충사에서 사자평으로 가는 도중에 나오는 층층폭포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무릉동 아지트에서 천황산 정상까지 3킬로미터 거리야. 천황산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가지산, 운문산, 억산이, 북동에는 고헌산, 동남으로는 간월산, 신불산, 영취산이 빙 둘러서 있지. 요즘에는 다들 ‘영남알프스’라고 부르더라. 이 일대는 옛 왕조 때도, 일제강점기 때도 권력이 미치지 못했어. 뜯기고 헐벗고 굶주리던 민중들이 더는 살 수 없을 때, 고난을 피해 들어갔던 곳이야.”

무릉동에서 다섯 명의 청년을 지도한 사람은 박철환 지도원이었다. 물론 그 이름도 가명이었다. 아버지는 석 달이 안 된 기간 동안 박철환 지도원으로부터 간부가 지녀야 할 이론과 실무는 물론 혁명가의 품성과 동지애를 배웠다. 박철환 지도원은 일제강점기에 중국의 북부 후방도시에서 공작원으로 투쟁하다가, 체포될 때 격투로 목뼈를 상했다고 한다. 기절해 쓰러진 그를 동지들이 목숨을 걸고 반격해 구해냈다고 한다.

“지도원 동지는 그때 입은 부상으로 목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어. 늘 삐딱하게 쳐다보았지. 불편한 몸인데도 나이 어린 우리에게 직접 모범을 보이며 지도해 주셨어. 연세가 아버지보다 더 많았지만, 당신과 우리가 서로 대등하고 평등한 동지 관계라고 강조하셨지. 상호 존댓말을 ‘동지어’라고 일러주신 게 아직도 잊히지 않아.”

다섯 명이 모두 모인 첫날 밤에 박철환 지도원은 학습 과제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산사람’의 체질을 갖추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목표로 무릉동에서 재약산, 천황산으로 해서 능동산, 석남재, 가지산, 운문재(아랫재), 운문산까지 왕복 34킬로미터를 5시간 안에 주파하는 걸 제시했다. 산악지대를 평지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놀라운 속도였다.

층층폭포 전경. [사진 제공 – 안영민]
층층폭포 전경. [사진 제공 – 안영민]

“지도원 동지랑 처음 훈련 나간 날 8시간 반이 걸렸어. 다들 산 타는 것만큼은 자신 있다고 여겼는데, 지도원 동지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지.”

둘째는 총기학이었다. 38식소총, 카빈소총, 45구경권총의 사격과 분해, 결합을 능숙하게 익히는 것이다.

셋째는 이론학습이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유물론, 모순론, 실천론 등 철학과 볼셰비키 당사가 커리큘럼으로 제시됐다.

“아침에는 도시락을 싸서 행군 훈련에 나섰고, 오후에 돌아오면 총기 훈련과 이론학습을 진행했어. 밤에는 2인 1조로 불침번을 섰고, 그다음 날에는 취사 당번이 되었지. 식량은 밀양과 청도, 언양군당에서 포스트를 이용해 10일마다 공급해줬어.”

지도원 동지의 헌신적인 지도 속에 훈련생들은 쑥쑥 성장했다. 총기도 능숙하게 다뤘고, 마침내 산악 행군도 5시간 안에 주파할 수 있었다.

그러던 4월 하순 어느 날, 지도원 동지는 군당에서 훈련생들을 소환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고 했다. 이별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이제는 각자 흩어져 다시 투쟁 전선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도원 동지는 ‘도당의 명령에 따라’ 5명에게 무기를 수여했다. 청도군당과 언양군당의 동지들은 보병총과 카빈총을 받았다. 나이가 가장 어린 아버지는 콜트 45구경권총을 받았다.

“총을 받으니 감회가 남달랐어. 총은 적을 쏘고 내 목숨을 지키는 도구이지만, 목숨까지 혁명투쟁에 온전히 바치겠다는 결의도 총구 속에 함께 담았지.”

언양군당과 청도군당의 동무들은 출발이 다음 날이었고, 아버지는 그다음 날이었다. 천황산 정상부까지 올라가 각지로 흩어지는 네 명의 동지를 배웅하고 돌아오니, 지도원 동지가 조용히 불렀다.

“동무의 조부께서 얼마 전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셨다고 하오. 밀양에서 함께 대표로 가신 분이 손주헌 선생과 이석기 선생이라고 들었소.”

뜻밖에도 증조할아버지의 소식이었다.

“지도원 동지는 내가 누구의 손자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전혀 내색을 안 하다 헤어지기 전날 아는 척을 한 거지. 손주헌 선생님은 밀양중학교 손기용 선생님의 아버님이셔. 이석기 선생님도 내가 할아버지를 만나러 민전 회관에 갔을 때 자주 뵌 분이고.”

지도원 동지는 아버지에게 증조할아버지 소식을 전하면서 당시 정세에 대해서도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미국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유엔의 임시조선위원단 감시 아래 5.10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분단을 반대하는 애국세력은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역량을 총결집해 ‘미소 양군 동시 철수’와 ‘남북 제정당 대표자회 소집’을 요구했다. 이의 결실로 1948년 4월 19일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린 것이다.

“할아버지는 민전 밀양지부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셨지. 할아버지는 38선이 지나가는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을 건너 북으로 가셨다고 했어.”

군당에 소환되면서 무릉동을 떠나게 된 아버지는 지도원 동지와도 헤어졌다. 그 뒤로는 무릉동도 지도원 동지도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김종원은 공비 토벌을 이유로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해 악명이 높았다. 사진은 이승만과 김종원. [사진 제공 – 안영민]
김종원은 공비 토벌을 이유로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해 악명이 높았다. 사진은 이승만과 김종원. [사진 제공 – 안영민]

“공비 토벌을 이유로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김종원이란 놈이 있었어. 일본 관동군에 자원입대한 그놈은 왜놈 군인일 때나, 해방되어 국군 장교로 있을 때나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지. 주로 경상도 일대를 휩쓸고 다녔는데, 그놈 때문에 밀양 일대 산간 지방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고 해. 무릉동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이승만은 그런 김종원을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며 총애했다. 김종원은 빨치산 토벌대장을 맡아 무자비한 양민 학살로 이승만의 총애에 보답했다.

아버지는 경북대 교수로 재직할 때 산악반 지도교수를 맡았다. 산악반 학생들과 ‘영남알프스’ 일대도 자주 다녔다. 표충사와 층층폭포, 사자평, 고사리분교를 오갈 때 무릉동도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무릉동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일대는 그냥 초원이었고, 숲이었다. 몽땅 불타버린 뒤 그렇게 변한 듯했다.

사자평 일대와 영남알프스 산줄기. [사진 제공 – 안영민]
사자평 일대와 영남알프스 산줄기.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는 그 뒤로도 혼자서 무릉동 일대를 자주 찾았다. 시국이 답답하거나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가 생기면 학교 일을 마치고 저녁에 혼자 밀양으로 내려갔다. 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묵묵히 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옛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답답한 심경이 풀리고 고민도 해결됐다. 특히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아버지에게 이재문 선생이 남민전 가입을 제안했을 때, 아버지는 천황산에 올라 목숨을 건 투쟁을 결심했다고 한다.

교육을 마치고 박철환 지도원 동지와 헤어질 때, 아버지는 당신의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다.

“내 역량이 부족해 동무를 훌륭한 빨치산으로 성장시켜 주지 못해서 유감이오.”

지도원 동지가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해준 말이었다. 아버지는 평생 지도원 동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그의 혁명적 풍모와 상대에 대한 배려, 이신작칙(以身作則)의 생활 태도까지 가슴에 품고 본받으려 노력했다.

무릉동에서 간부 교육을 받고 내려온 아버지에게는 밀양군당 연락부의 레포(연락원) 임무가 주어졌다.

“밀양은 산악지대 동북부와 평야지대 서남부의 지리적 환경이 크게 달라. 그 가운데 자리 잡은 밀양읍이 두 지역을 연결해주고 있지. 밀양읍은 교통의 요지였지만 검문의 지뢰밭이기도 했어. 그래서 연락 업무를 수행할 때는 밀양읍을 피해 산길로 이용하는 게 안전했지. 밀양의 구석구석 지리에 익숙하고 민첩한 연락원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었어.”

군당에서 아버지를 적임자로 뽑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임무와 함께 새로운 이름도 주어졌다. ‘최덕출’이었다. 아버지의 역할은 군당과 산하 조직의 연락선이었다. 연락은 주로 포스트를 통했다. 군당의 방침을 담은 문건 전달이 많았다. 실수 없이 정확하게 백 퍼센트 성공해야 하는 임무였다.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아버지는 바빠졌다. 5.10 단독선거 반대운동에 남로당과 민전의 모든 역량이 투입된 것이다. 아버지는 군당과 각 면당을 연결하면서 지령문과 보고문을 전달하기 위해 밀양 일대를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얇은 미농지에 프린트한 문건을, 호주머니를 이중으로 만든 조끼 속에 감추고 움직였어. 망태기 안에는 떡이나 감자, 미숫가루 같은 비상식량을 싼 보자기와 도시락처럼 보이게 권총을 싸서 감춘 보자기가 있었지. 만일 검문에 걸려 수색을 당하면 비상식량 보자기를 먼저 보여주고, 그래도 계속 뒤지자고 하면 권총 보자기를 풀어 보여주는 듯하다 재빨리 권총을 꺼내 장탄하고 ‘손들어!’ 하는 걸 수없이 연습했지.”

망태기 안에는 아버지만의 소지품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수학책이었다. 아지트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리거나 상부에 보고할 답변을 기다릴 때, 그 시간을 이용해 수학책을 펼쳤다. 아버지는 상급 학년의 수학책까지 혼자서 차례로 공부했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문제를 풀다가 막히면 혼자 땅바닥에 수식을 써가며 문제를 풀곤 했다. 그러면 두려움도 막막함도 금세 사라졌다.

아버지처럼 수학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 심정을 나도 조금은 알 것 같다.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나는 함께 구속된 아버지와 밖에 있는 선후배들에 대한 걱정으로 몸도 마음도 무척 힘들었다. 가슴 속에 갑갑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나는 독방에서 수학책을 펼치곤 했다. 수식을 들여다보고 문제를 풀다 보면 갑갑하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제헌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을 선출하면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됐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48년 8월 15일 제헌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을 선출하면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됐다. [사진 제공 – 안영민]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은 밀양에서도 거세게 확산됐다. 투표 반대운동은 사제폭탄으로 투표함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단계로 발전했다. 하지만 많은 인민이 투표를 거부했는데도, 어찌 된 셈인지 투표함에는 투표용지가 가득했다. 유엔 임시조선위원단은 93퍼센트의 참여로 무사히 선거를 치러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고 발표했다.

“온갖 부정과 날조의 결과물이었지. 선거에서는 친일 역적들이 대부분 당선됐어. 이런 자들이 남조선에서 국회의원이 돼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친미 친일 정부를 세운 거야.”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보고하는 김일성 당시 북조선인민위원장. [사진 제공 – 안영민]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보고하는 김일성 당시 북조선인민위원장. [사진 제공 – 안영민]

5월 10일 이후 투쟁은 선거무효 운동,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으로 전환되었다. 분단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1948년 6월 29일부터 7일간 평양에서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전 조선의 통일적인 입법기관 선거를 통해 헌법을 제정하고 통일민주정부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8월 25일에 남북 조선의 총선거가 거행됐어. 북조선에서는 선거로 212명의 대의원을 뽑고, 남조선에서는 선거를 공개적으로 할 수 없으니 이중선거로 대표를 뽑았어. 각 시군의 정당과 사회단체에서 추천한 대표자들이 해주에 모여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360명의 대의원을 뽑기로 한 거야. 이를 위해 이들을 지지한다는 인민들의 연판장을 지역마다 받기로 했지.”

그해 여름, 아버지는 각 면에서 연판장을 모아 정리한 뒤 제본한 책자를 아지트에서 건네받아 상부에 전달하는 일로 정신없이 바빴다. 5.10선거에서 친일지주들이 대거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걸 본 인민들은 연판장 서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자료에 의하면 전체 유권자의 77퍼센트, 670여만 명이 연판장에 날인했다고 한다. 그만큼 인민들의 분노가 컸기 때문이다.

“각 면에서 군당으로 모인 연판장은 강줄기를 건너고 산줄기를 돌아 38선 넘어 해주에 있는 선거지도위원회로 보냈어. 이때 수송을 담당한 이들이 ‘강동 사람’들이었어. 강동정치학원 동무들을 우리는 ‘강동 사람’이라고 불렀지. 당시 ‘강동 사람’은 군마다 2명씩 배치돼 있었어.”

연판장 투쟁을 통해 남조선에서 모두 1,080명의 대표를 선출했다. 이들 중 1,008명이 해주에 모여 다시 360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들은 북조선에서 선거로 당선된 212명과 함께 남북 조선의 ‘최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결과로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남조선의 모든 애국역량이 총동원돼 한 달 이상 진행된 연판장 투쟁은 기대한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후과도 컸다. 연판장 투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투옥당했다. 특히 조직의 ‘트’(아지트)와 ‘선’(연락망)들이 대거 노출되면서 일선 조직이 탄압에 그대로 방치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남로당 지도부는 인민대중의 역량을 보존하고 새롭게 묶어 세우기보다 대책 없는 전면 투쟁에 빠져 있었다. 레포로 활동하던 어린 아버지의 눈에도 남로당의 좌경적 오류가 보였다. 누적돼 온 남로당의 문제는 이내 심각한 폐해를 드러냈고, 남조선 운동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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