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밀양에서 120리 정도 떨어진, 지금의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옛날의 결혼은 초례를 신부 집에서 지내고, 시집은 친영 날짜를 따로 정해서 갔어. 신부는 가마를 타고 신랑은 당나귀나 말을 타고 가는데, 이를 신행이라고 했지. 대개는 초례 뒤 해를 넘겨 신행을 치렀어. 나도 외가에서 태어나 어머니 품에 안겨 가마를 타고 밀양으로 왔다고 해.”

도동에는 조선 시대 해동오현(海東五賢)이라 일컫는 사림 중의 한 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사액서원인 도동서원이 있다.

1947년 7.27 전국적으로 벌어진 군중대회 직후 미군정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고,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가족을 데리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의 처가로 피신했다. 아버자의 외가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후손으로 서흥 김씨 집안이었다. 사진은 김굉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동서원. [사진 제공 – 안영민]
1947년 7.27 전국적으로 벌어진 군중대회 직후 미군정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고,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가족을 데리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의 처가로 피신했다. 아버자의 외가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후손으로 서흥 김씨 집안이었다. 사진은 김굉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동서원. [사진 제공 – 안영민]

“김종직 선생 문하에서 수학했던 김굉필 선생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연루돼 유배를 갔고, 다시 갑자사화로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됐던 분이야. 어머니의 친정이 바로 김굉필 선생의 후손인 서흥 김씨 가문이었지.”

2000년대 초반에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안내로 도동서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낙동강이 굽이쳐 돌아가는 마을의 구릉 위에 자리 잡은 서원은 한눈에 봐도 반듯하고 빼어났다. 마침 그곳을 관리하는 분이 아버지의 외가 친척이었다. 50여 년 전 아버지가 구지로 숨어들어온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던 그분은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도동의 큰집 외할아버지(외재종조부)는 함자가 김우식으로, 한민당 경북도당 위원장으로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 당선될 정도로 대구경북지역에서는 권세가 막강한 분이었다. 작은집 외손자인 아버지에 대한 정은 각별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도동의 큰집 외할아버지(외재종조부)는 함자가 김우식으로, 한민당 경북도당 위원장으로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 당선될 정도로 대구경북지역에서는 권세가 막강한 분이었다. 작은집 외손자인 아버지에 대한 정은 각별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의 외가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분이 있다. 아버지의 외재종조부인 큰집 외할아버지다. 함자가 김우식(1986-?)으로 큰집에 양자로 들어온 장손이었다. 그 덕분에 만석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한다. 큰집 외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대구의 사립협성학교(현재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1920년에 유림단 의거에 연루돼 투옥된 적도 있었지만, 주로 한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일제강점기를 보냈다고 한다.

“큰집 외할아버지는 해방이 되고 유림단체 활동을 하나 싶더니 난데없이 정치에 뛰어들었어. 한민당 경북도당 위원장과 감찰위원장을 맡으셨지. 미군정 시기 한민당 도당 위원장이면 권세가 대단했어. 외할아버지도 종형 덕분에 구지면장을 맡으셨지.”

큰집 외할아버지는 제헌국회 선거에 출마해 달성군 의원에 당선됐다. 6.25가 터지자 이승만의 서울 결사 수호 발언을 철석같이 믿고 서울에 남았다가 결국 북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의 소식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큰집 외할아버지는 지주 출신이었고 해방 후에도 교유하던 이들이 대부분 지주인지라 한민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분단정책에 동조는 했지만, 작은집 외손자인 아버지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큰집 외할아버지는 대구의 도청 관사에 살았어. 도정에도 막강한 영향을 끼쳐서인지 집도 으리으리했고 방문객도 많았지. 나도 외가 형들하고 관사로 인사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어.”

그때 큰집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거 할배는 요새 어찌 지내시노? 아직도 좌익 하나?”

그 질문에 약간 심통이 난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새 나라 인민정부를 세우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허허, 그놈 말하는 거 보게. 영판 그 할배에 그 손자네.”

큰집 외할아버지는 어이없어했지만, 아버지가 말대답한다고 화내지는 않으셨다. 그 뒤로도 아버지를 핏줄이라고 따뜻하게 감싸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식구들을 데리고 구지로 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민당 도당위원장인 장인의 사촌 형님과 구지면장인 장인에게 의지해 일단 몸을 숨기는 게 급선무였다.

아침 일찍 밀양에서 출발해 오후가 돼서야 구지면장 사택에 도착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본 할머니의 서모(庶母)는 깜짝 놀랐다. 급히 면사무소로 연통을 넣었다. 아버지의 외할아버지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죽은 줄만 알았다가 싱가포르에서 살아 돌아온 사위의 소식을 전해만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외증조할아버지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로 불러 조용히 물었다.

“요즘 야들이 좌익을 잡아 가두고 ‘서북청년단’을 시켜 테러를 해서 온 나라가 야단인데, 사돈은 좀 어떠신고?”

“그 때문에 장인어른 곁으로 왔습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신 지 연락이 없고, 저나 재구나 여러모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사돈이 밀양에 계시기 어려운 처지면 일로 오시라 캐라. 내가 내 사돈을 내 집에 모시겠다는데, 여기서는 어느 놈이 뭐라 할끼고. 아무 문제 없다.”

“장인어른 정말 감사합니다. 밀양으로 말씀을 전해 되도록 이쪽으로 오시라 하겠습니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눈물이 날만치 당신의 외할아버지가 고마웠다. 외증조할아버지도 이념보다는 핏줄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구지면에 중학교를 설립할 계획이었어.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구지로 오게 돼 더욱 반가웠지. 외할아버지는 학교 설립 문제를 아버지한테 맡기다시피 했고,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켜 9월 중순에 구지중학교를 개교했지.”

할아버지는 구지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게 됐다. 할아버지는 메이데이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의 징계를 밀어붙이던 교장을 비판하다 결국 사표를 내야 했던 손기용 선생님을 과학 교사로 초빙했다. 그 밖에도 밀양에서 여러 좋은 선생님들을 모셔 왔다.

아버지는 남의 이목도 피할 겸 구지중학교 1학년으로 다시 입학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한 가지 걱정뿐이었다. 바로 증조할아버지의 안위였다.

“어머니의 고종사촌으로 전평 밀양지부 위원장을 했던 이성학 아재도 도동으로 몸을 숨기러 왔어. 그 아재 편에 할아버지 소식을 듣게 됐지. 8월 대탄압 이후 남로당은 조직을 비공개 조직, 즉 지하조직으로 전환했어. 조직의 형태도 지역의 원로를 위원장으로 모시던 것을 청장년층을 앞세운 책임자제로 바꾸었다고 해. 그래서 할아버지도 남로당 밀양군 위원장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지역에서 조직 복구 활동을 하신다고 했지.”

증조할아버지가 하방한 곳은 밀양에서 멀지 않은 함안이었다. 물론 함안에도 일가들이 많이 살기는 했다. 하지만 조직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증조할아버지는 탄압을 피하면서 식의주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장날마다 약장수를 하며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아들과 손자의 소식을 전해 들은 증조할아버지도 구지로 와서 사돈에게 의탁하게 됐다.

“손기용 선생의 부친으로 밀양에서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해오신 손주헌 선생님도 탄압을 피해 구지로 넘어오셨어. 할아버지의 막내아우인 끝에 할배도 오셨고. 세 분은 면장 사택의 사랑방에서 지내셨지.”

해방 당시 민심을 알 수 있는 여론조사 내용.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내용을 정리한 결과다. [사진 제공 – 안영민]
해방 당시 민심을 알 수 있는 여론조사 내용.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내용을 정리한 결과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이때가 1947년 10월 무렵이었다. 미제와 그 앞잡이 이승만과 친일반역자, 친미사대 일당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파탄시킨 다음 남조선 단독정권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민주 세력을 말살시키는 일이었다. 1946년 10월항쟁으로 미군정 통치가 위기에 빠진 것을 경험한 뒤로는 더욱 탄압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1947년 7월 27일 미·소공동위원회를 지지하는 인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열린 직후 미군정청은 8.15 2주년을 맞아 좌익이 폭동을 준비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대대적인 예비검속에 나섰다.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민주인사가 체포당했다. 서북청년단을 앞세워 민주 진영의 지도자들을 테러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남로당과 민전이 준비한 8.15 2주년 행사는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꺾이고 말았어. 남로당과 민전은 간부들이 체포돼 조직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지.”

1946-47년 반탁 시위의 중심에 섰던 이승만과 김구. 오른쪽은 미군정 하지 사령관이다. 김구는 이승만과 미국이 남조선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이자 이에 반대하고 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46-47년 반탁 시위의 중심에 섰던 이승만과 김구. 오른쪽은 미군정 하지 사령관이다. 김구는 이승만과 미국이 남조선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이자 이에 반대하고 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미·소공동위원회를 무산시키고 민중의 저항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미제는 ‘조선 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갔다. 이로써 모스크바 협정은 사실상 파탄 났다. 미국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던 유엔은 미국이 주장한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결정했다. 소련은 1948년 연초까지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를 주장했지만 허사였다. 정세는 점점 남조선만의 단독정부로 흘러가고 있었다. 분단이 현실의 문제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긴박하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구지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증조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서든 분단 음모를 저지해야만 했다. 다시 전민족적인 대중투쟁을 일으켜야 했다. 그동안 반탁 운동에 앞장섰던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민족주의 12개 정당도 남조선 단독정부 반대와 미소 양군 동시 철수를 내걸고 투쟁 대열에 동참했다. 밀양에서도 민전 조직과 이들이 결합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먼저 구지를 떠나셨어. 1948년 정월이었지. 아마도 민전과 민족진영의 공동 대응을 위해 할아버지의 역할이 절실했던 거 같아. 나는 나대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었지.”

그때 밀양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에게 연락을 한 사람은 밀양을 떠날 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던 강성호 동무였다.

‘입학 결정 31일 속래.’

강성호에게서 온 전보는 딱 여덟 글자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입학 결정은 투쟁의 결정을 의미했고, 31일은 강성호와 접선하는 날짜였다.

“성호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누이동생으로 내게는 대고모인 활천 할매와 이웃에 살았어. 두 분은 모두 삯바느질로 외아들을 공부시켰는데, 늘 함께 의지하며 지내셨지.”

강성호는 결핵을 앓아 언제나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혹시나 병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길까 봐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독서회 성원이었지만 토론 모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를 따로 만나 학습을 이어갔다고 한다. 자치회 투쟁 때도 드러나지는 않아 퇴학 명단에서 빠졌지만, 이주형 교장에게 장문의 항의 편지를 보내고 자퇴했다.

“성호에게 연락을 받고 바로 밀양으로 갈 준비를 했어. 아버지에게는 밀양고등공민학교 2학년에 편입해 원래 학년을 찾아 공부하고 싶다고 둘러댔지. 내가 구지중학교 1학년 생활을 지루해하는 걸 알던 아버지는 마지못해 허락해주셨어.”

구지를 떠날 때, 아버지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다가올 투쟁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양상임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전체 인민들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미제와 분단 세력과 벌이는 거대한 투쟁, 이 투쟁은 구호가 아니라 모든 방법을 동원한 실력행사로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투쟁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인민들의 봉기가 전국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다시 투쟁 전선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가슴도 뜨겁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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