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중학교에서 퇴학당한 동무들은 다른 지역으로 전학 가기도 하고, 밀양에 남아 투쟁 대열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석방 후 몸도 추스를 겸 한 달쯤 달성군 구지면 도동의 외갓집에서 지내다 밀양으로 다시 돌아왔다.
5월 21일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국내 각 정치세력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속개된 미-소 공동위원회의 핵심의제는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를 확정 짓는 것이었다. 민주 진영은 공동위원회에 적극 참여했다. 우익을 대표하는 한민당과 한독당에서도 일부가 공동위원회에 참여했다. 이승만과 김구 추종 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가 공동위원회 참가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그러자 이승만과 반동 세력들이 ‘반탁’을 한다면서 온갖 훼방을 놓았지. 이들은 서북청년회를 앞장세우고 대동청년단과 깡패들을 동원해 민주인사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했어. 그 와중에 몽양 선생이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지.”
1947년 7월 19일이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을 총으로 저격한 자는 ‘백의사’(白衣社) 조직원 한지근이었다. 당시 한지근은 19세에 불과했다. 백의사는 월남한 청년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든 극우 폭력테러 단체로 중국 국민당 장개석 정부의 반공특무기관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한 조직이었다.
백의사의 총사령인 염응택(월남한 뒤 이름은 염동진)은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밀정이 된 자였다. 이북에서 암살, 테러 활동을 하다 이남으로 도망쳐 온 그는 폭력, 파괴, 암살 공작에 깊숙이 관여했다. 백의사에서 본부로 사용했던 집이 바로 10.26 사건이 발생한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다. 유명한 우익 깡패 김두한도 백의사의 고문이었다.
“김두한은 백의사에서 여운형을 암살할 결사대를 뽑을 때 자기가 한지근을 추천했다고 자랑했어. 한지근에게 일본군 장교용 권총을 건넨 것도 김두한이었지.”
여운형 선생을 암살한 의도는 명확했다. 인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을 추진한 여운형 선생이야말로 저들에게는 반드시 없애야 할 존재였다. 남조선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현실적인 방안으로 생각한 미제와 친미, 친일, 극우집단은 이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본격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터진 것이 여운형 선생 암살 사건이었다.
“할아버지는 여운형 선생과는 각별한 사이였어. 해방 전에는 여운형 선생이 조직하고 지도했던 국내 비밀조직 건국동맹의 밀양 조직을 만드셨고, 해방 직후에는 여운형 선생의 뜻에 따라 건국준비위원회 밀양군 지부를 조직하셨지. 여운형 선생이 조선인민당을 창당할 때도 밀양군당 대표를 맡으셨어. ”
1946년 2월에 남조선의 민주정당과 사회단체의 통일전선체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될 때, 남조선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신민당도 참여했다. 이들 세 정당의 통합을 가장 먼저 제의한 것도 조선인민당이었다. 3당의 통합 논의는 내부의 혼란과 우여곡절 끝에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 창당으로 결실을 이루었다.
“할아버지는 조선인민당에 속해 있으면서 합당을 처음부터 지지했어. 남조선노동당 밀양군당 조직 사업에도 열정을 쏟았지. 하지만 일제 때 조선공산당의 파벌싸움과 종파주의, 좌경 모험주의를 직접 겪어봤기에 남로당 내부에서 다시 그런 문제가 발생할까 고심도 많으셨어.”
증조할아버지는 10월 인민항쟁 이후로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테러 위험도 존재했고, 경찰이 언제든 구실을 붙여 잡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낮에는 민전 회관에서 일을 보고, 밤에는 청년들의 보위를 받으며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민전 밀양지부에서는 7월 27일 ‘미-소 공동위원회 축하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촉구를 위한 밀양군 인민대회’ 개최를 결정했다. 갈수록 확산되는 반탁 극우세력의 폭력에 맞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이 시급했다. 저들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다시 무산시키고 남조선만이라도 친미정부를 세우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를 막아내야만 했다.
7.27 인민대회 성사를 위해 민전 산하 청년단체인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소년학생부에서 ‘소년선전대’를 조직했다. 아버지는 하남면, 초동면 소년선전대 책임자를 맡았다.
“하남-초동 소년선전대는 내가 경찰에 잡히던 날, 용케 도망을 쳤던 이재우 동무와 수환이 아지매, 수환이 아지매와 단짝으로 밀양중학교 이주형 교장의 질녀인 이일성, 이렇게 네 사람으로 편성됐어. 우리가 맡은 역할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의의를 농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리는 일이었어. 임시정부를 신탁통치라고 반대하는 반탁이, 실은 남조선에 친일파, 친미파들의 반동정권을 만들겠다는 미제의 음모임을 농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자는 것이었지.”
하남-초동 소년선전대의 첫 번째 임무는 수산 장날에 맞춰 ‘아지프로’를 하는 것이었다. 아지프로(agitation propaganda)란 대중들에게 어떤 사안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일종의 선전선동이었다. 우리가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할 때는 줄여서 ‘아지’란 말을 사용했다.
대원들은 밀양 읍내에서 수산까지 50리 길을 걸어서 이동했다. 아버지는 발걸음이 상쾌했다. 투쟁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모처럼 가족들도 만나고, 고향마을의 여러 할배, 할매들도 뵐 수 있어서 마음이 설렜다.
당시 나의 할아버지는 수산 들머리에 있는 동명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일본군 군속으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하면서 익힌 영어 실력 덕분이었다. 싱가포르에서 귀환한 뒤 미군정에서 통역으로 일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 일도 있었다. 동명중학교는 하남면과 초동면 사람들이 함께 세운 사립학교였다. 고을의 유지들이 비용을 내고, 학부형들이 품을 내서 면에 있던 창고를 개조해 학교를 설립했다.
수산은 삼팔장이라 7월 23일에 장이 섰다. 오전 10시에 하남면, 초동면의 농악대를 선두로 민애청 회원들이 종이 메가폰을 들고 장터를 돌며 선동했다. 선전대 행사는 오전 11시 소전거리(우시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우리는 조직 군중과 호응하는 군중을 이끌고 장터거리와 신작로를 들락날락하면서 소전거리 행사를 선전하고 다녔어. 시간에 맞춰 소전거리에 당도하니 그 대열이 300명으로 늘어나 있었지.”
그렇게 해서 선전대회가 시작됐다. 대회장에는 탁자와 종이 메가폰밖에 없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성만과 두암 마을의 아재와 할배들을 여러 명 만났다. 다들 큰집 종손의 ‘아지프로’를 기대하며 밝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첫 번째 연사로 탁자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민전 산하의 애국청년 단체인 민애청 밀양지부 소속 소년학생부 선전일꾼입니다.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를 축하하고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밀양군 인민대회를 맞아 수산 장날에 하남과 초동에 계시는 아재와 할배들께 인민대회의 의의를 선전하러 나왔습니다. 이름은 안재구라고 합니다. (……)”
군중들 앞에 선 아버지는 마음이 편했다. 일가의 어른들을 뵈니 든든했다. 어려운 말을 쓸 필요도 없이 쉽고 간결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음으로 이재우 동무와 민애청 청년이 아지프로를 이어 나갔다.
“그날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집회를 열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어. 청중들의 질문이 나오면 거기에 맞게 대답도 하면서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냈지. 장에 나온 아재와 할배들도 내 등을 두드리며 칭찬해 주셨어.”
성만의 선산에 모신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에 갈 때, 나는 항상 수산에 들러 장을 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과 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게들을 보면서 70여 년 전 수산의 장날을 상상해 보곤 한다. 그럴 때는 어디선가 아재와 할배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고, 아버지의 ‘아지프로’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수산 장날의 선전대 활동을 마친 뒤 수산에서 5리쯤 떨어진 귀명동 마을로 들어갔다. 귀명동 마을에서는 ‘현지 학습’이 예정돼 있었다. 밤에는 마을 농민들과 시국을 토론하고, 낮에는 들에서 논매기 일을 했다.
“새벽부터 농민들 틈에서 일하는 게 너무 고돼 재우 동무나 나나 진짜 혼이 났다. 그래도 밥때 먹던 푹 퍼진 보리밥과 된장국, 새참에 나온 국수가 어찌나 달던지. 그 덕분에 이 악물고 버틸 수 있었지.”
1980년대 대학 시절 농활(농촌활동)과 비슷한 장면이다. 낮에는 농사일을 거들고, 저녁에는 농민들과 시국을 토론하던 농활의 유래와 역사가 여기에서 비롯됐구나 싶었다. 나 역시 농활 때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을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밤마다 온몸이 쑤셔 끙끙대던 기억이 난다.
다음 날에는 고향 마을로 현지 학습을 들어갔다. 18대조 할아버지가 솔가해 자리잡은 금포 동네에 우리 집안의 종가가 있었고, 두암과 성만 동네에 일가들이 퍼져 살았다. 아버지는 집집마다 다니며 인사를 드렸다. 두암에서만도 모두 여덟 집을 돌면서 절을 올리고 할배들의 말씀을 들었다. 가는 집마다 할매와 아지매들이 모여 ‘큰집 조카 재구’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렇게 4박5일 선전대 활동을 무사히 마치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7월 27일, 밀양읍 장날이 왔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아버지는 긴장이 됐다. ‘소년선전대’로 찾아간 하남과 초동에서 얼마나 올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대회장인 삼문동 공설운동장에는 행사 준비를 위해 전날부터 모인 민전 산하 조직의 회원들로 분주했다. 청년들은 마을 단위로 구역을 정해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었다.
“10시쯤 됐나, 한 친구가 종남산 쪽을 가리키며 말했어. ‘저기 저 하얀 줄이 뭐꼬?’ 자세히 보니 사람들의 긴 물결이었어. 전날 내가 넘어왔던 방동고개로 내려오는 고향 사람들의 끝없는 행렬에 내 가슴도 뛰었지.”
그렇게 밀양 전역에서 사람들이 밀물처럼 모여들었다. 대회 시간인 12시 가까이 되자 군중들은 흙바닥 관중석은 물론이고 운동장 밖 솔밭까지 가득 찼다. 밀양 읍내가 온통 사람들로 넘쳐났다.
“다들 7~8만 명은 모였다고 했어. 당시 밀양 인구가 10만이었으니 어린애들 빼고 몽땅 나왔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닐 거야.”
첫 순서인 입장식이 거행됐다. 전평과 전농의 밀양지부에 이어 민애청과 여맹, 상공인조합, 유림단체, 체육단체, 문화단체와 각종 친목단체까지 입장하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애국선열에 대한 묵념이 끝나고, 남조선노동당 밀양군당 위원장이자 민주주의민족전선 밀양지부 수석의장인 증조할아버지가 대회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안녕하십니까? 미-소 공동위원회 축하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촉구를 위한 밀양군 인민대회에 참가하신 여러분! 오늘 우리는 미제의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음모를 분쇄하고 반드시 남북조선의 통일 임시정부를 세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
연단과 멀리 떨어진 대회장 입구에서 행사장으로 입장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던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연설을 정확히 듣지 못했다. 귀를 쫑긋 기울였지만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박수와 함성에 묻혀버렸다. 하지만 그날의 장면은 아버지의 뇌리에 깊이 남았다. 수많은 인민 앞에서 연설하는 증조할아버지의 당당한 목소리는 팔십 평생 아버지의 정신을 일깨우는 죽비 소리가 되었다.
대회는 성대하게 끝났다. 전국적으로 인민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서울에서는 50만 군중이 모였다고 했다. 이에 놀란 미군정은 포고령을 내리고 친미 친일 우익세력과 함께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저들의 반격은 밀양에서도 벌어졌다. 형사들이 ‘서북 청년’ 여러 명을 데리고 다니며 집뒤짐을 해 민주인사들을 체포했다. 연계소 집에도 형사와 깡패들이 몰려와 할아버지를 찾으며 행패를 부렸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 당했던 일이 고스란히 되풀이되었다. 아니 깡패들까지 몰려와 마구잡이로 난동을 부리니 그때보다도 더 심했다.
“밀양 전체가 무법천지였지. 저놈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두들겨 패서 끌고 가고, 세간살이를 부수며 난동을 부렸어. 미제와 극우세력의 대탄압 앞에 남로당도 결국 조직을 비공개로 전환하고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
증조할아버지는 이미 지하로 잠적하셨다. 증조할아버지의 행방을 쫓다 보니, 아들인 할아버지한테도 감시가 붙었다. 아버지도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다.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기로 했다. 경찰이 집에 들이닥친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달성군 구지면 도동의 처가로 갔다. 그곳에 몸을 의탁하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도 밀양을 떠나야만 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