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6년 10월에 석방됐다. 2년 4개월의 형기를 꽉 채웠다. 김영삼 정부는 학생운동과 통일운동에 주사파 낙인을 찍으며 탄압했다. 양심수 석방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만기출소였다.

내가 출소한 뒤 작은누나는 1996년 12월에, 형은 1997년 1월에 연달아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출소할 때까지 기다린 셈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대학 입학을 위해 대구로 내려가면서 어머니와 떨어졌는데, 10년 만에 다시 함께 살게 됐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자니 생활 대책부터 마련해야 했다. 나는 대구에 내려가 복학하는 걸 포기했다.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대신 작은누나 선배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학원은 신림동에 있었다.

구산동에서 출퇴근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학원에서 가까운 동네인 난곡으로 이사했다. 거실은 없고, 방만 2개인 다세대 집이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나는 어머니 가슴속에 맺힌 상처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된 아버지의 석방 운동 당시 자료 기사. 남민전 출소 이후 구산동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된 아버지의 석방 운동 당시 자료 기사. 남민전 출소 이후 구산동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내가 남민전 사건은 이해한다. 너거 아버지도 청춘을 바친 경북대에서 쫓겨났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냐. 박정희 정권이 정말 미웠겠지. 그래서 유신독재 타도하겠다고 조직을 만들고 한 거 다 이해한다. 근데 구국전위는 왜 또 했을까. 그것도 환갑의 나이에……. 책 쓰고, 강연 다니면서 존경받는 재야인사로 살면 될 텐데 뭣 때문에 또…….”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 번째 구속을 두고 많이 속상해했다. 그 때문인지 기운이 없고 여기저기 아픈 데가 늘었다. 아버지가 5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의 기운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10년 만에 석방된 남민전 때는 생기가 돌고 웃음이 넘쳤다. 하지만 구국전위 석방 때는 달랐다. 물론 어머니의 나이도 있겠지만, 세월 탓만은 아니었다.

그런 어머니가 안타까웠는지 작은누나가 자서전 쓰기 강좌를 추천했다. 아버지가 두 번째로 출소한 다음 해, 2000년 봄이었다.

“엄마도 한때는 문학소녀였잖아. 이참에 엄마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번 써보면 어떨까. 수강료는 내가 다 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자서전 강좌의 담임 선생님은 이남희 소설가였다. 어머니는 강좌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과 함께 살던 수원 우만동에서 강의실이 있는 서울 종로까지는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가야 했다. 가는 데만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런데도 나의 아내가 사준 가방을 들고 여고생처럼 즐겁게 다녔다. 숙제도 열심히 했다.

어머니가 대학노트에 깨알같이 쓴 과제물은 형과 누나가 타이핑해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렇게 아내와 어머니로서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우리 4남매는 물론 사위와 며느리까지 어머니를 열렬히 응원했다.

어머니는 6개월의 강좌를 마치고도 계속 글을 썼다. 중간에 이남희 선생의 격려와 칭찬이 큰 힘이 됐다. 마침내 쓴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냈다. 제목은 『쥐어지지 않는 양산』이었다. 아버지가 구속된 뒤 어머니는 햇빛 쨍쨍한 더운 날에도 양산을 쓰지 않았다. 감옥의 독방에서 햇빛을 그리워할 남편을 생각하면 햇빛을 막는 양산이 차마 손에 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연이 담긴 제목이었다.

어머니의 책은 양심수 문제를 가족의 처지에서 풀어낸 소중한 기록이었다. 남편의 구속, 아버지의 부재 속에 어떻게 가정과 자식을 지켜냈는지 읽다 보면 현대사를 이끈 아내와 어머니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남희 선생이 쓴 추천사처럼 “역사의 전면에서 활동하는 남자들 뒤에 숨은, 어쩌면 더욱 고통받고 인내해야 했을 그 이면”에도 시선을 둘 수 있는 책이었다.

2003년 10월 24일, 우리는 아버지 칠순에 맞춰 어머니 출판기념회도 함께 했다. 지금은 대표적인 민중가요 노래패로 성장한, 당시만 해도 씩씩한 청년이었던 ‘우리나라’가 축가를 불렀다. 그렇게 살아온 길을 한번 정리하고 난 어머니는 마음이 좀 평안해졌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도 훨씬 따뜻해졌다.

2005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범민련 회원들과 금강산을 찾았다. [사진 제공 - 안영민]
2005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범민련 회원들과 금강산을 찾았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으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다. 나는 결혼 직후인 1998년 11월 입사한 말지를 거쳐 2001년부터 통일문제 전문 월간지인 <민족21>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남북관계가 발전하면서 민간의 교류협력도 활발해졌다. 나는 취재차 여러 번 평양을 방문했다. 아버지도 2005년 민간단체에서 진행한 역사유적참관단으로 평양에 다녀왔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금강산을 다녀왔다.

세상은 그렇게 좋아졌다. 남북이 만나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빨갱이, 간첩이란 낙인도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어머니 마음속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민족21 방북취재 내용을 묶어 펴낸 책 『행복한 통일이야기』. 공안당국은 2011년 민족21 사건 당시 이 책도 이적표현물이라 주장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민족21 방북취재 내용을 묶어 펴낸 책 『행복한 통일이야기』. 공안당국은 2011년 민족21 사건 당시 이 책도 이적표현물이라 주장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세상이 이렇게 좋아지고 있는데 엄마는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아요?”

“너거 아버지가 맨날 나한테 조금만 있으면 세상이 바뀐다고 했지만, 좀 좋아지는 거 같아도 금세 과거로 되돌아가 버리더라. 그때마다 사람들이 또 다치고 희생됐지. 그러니 아버지도 너도 신중하고 조심했으면 싶다.”

“엄마도 참……. 앞으로 우리 가족이 감옥 갈 일은 더는 없네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하지만 어머니의 걱정은 몇 년 후 고스란히 현실이 됐다.

우리 4남매는 결혼하고 다들 바쁘게 지냈다. 아이 키우는 일에 먹고 사는 문제까지 정신없었다. 자연히 어머니를 챙기는 데 소홀해졌다. 아버지도 집필과 강연, 모임과 집회 때문에 늘 밖으로 다녔다. 그렇다 보니 어머니 건강이 점점 나빠지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2008년 여름에 형이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어머니가 며칠 전부터 계속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 된다고 했다. 가까운 병원에서는 빨리 큰 병원에 가서 종합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왠지 느낌이 불길했다. 첫 번째로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어머니의 병은 췌장암으로 판정 났다. 이름난 전문의를 찾아 병원을 두 군데나 더 가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이미 손쓰기 힘들 만큼 진행된 상태였다.

어머니는 항암치료를 한 번 받고는 더는 치료를 거부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도 알았다. 담담히 삶을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이제 와서 너거 아버지를 원망하면 뭐 하겠노. 너거 아버지가 한편으로는 이해도 된다. 독립운동하던 할아버지 슬하에서 남다른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가졌겠지. 정의로운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한테 배려심도 많았다. 후배든 제자든 동지든 늘 먼저 챙겼지. 가족도 좀 생각했으면 싶었는데……. 너거 아버지는 그게 잘 안 되나 보더라. 그래서 내가 병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내게 대한 당부로 이어졌다.

“산이 애미도 나처럼 고생하면 안 된다. 그런 일이 안 생기게 해라. 꼭 유념해라. 엄마가 너한테 바라는 건 그거 하나뿐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근심만 하다 눈을 감았다. 2009년 1월 2일이었다. 어머니의 나이 일흔다섯이었다.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 스물여덟에 결혼하고, 4남매를 낳아 키우면서 남부럽지 않게 17년을 보냈다. 그 뒤로는 불안과 초조, 걱정과 기다림의 30년 세월을 견뎌내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여가 흐른 2011년 7월, 다시 사건이 터졌다. 어머니의 근심은 결국 현실이 됐다.

이명박 정부 때였다. 이명박 정부 등장으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의 남북관계는 무위로 돌아갔다. 남북 사이에는 예전과 같은 군사적 긴장과 충돌이 일상화됐다. 그 와중에 ‘종북 주사파’ 마녀사냥도 다시 시작됐다.

2011년 7월 조선일보가 “민족21(진보진영이 만든 월간지), 천안함 폭침 주도한 北정찰총국 지령받아”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한 민족21 사건 관련 도표. 북의 정찰총국과 225국 등 어머어머한 조직들이 등장한다. [사진 제공 - 안영민]
2011년 7월 조선일보가 “민족21(진보진영이 만든 월간지), 천안함 폭침 주도한 北정찰총국 지령받아”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한 민족21 사건 관련 도표. 북의 정찰총국과 225국 등 어머어머한 조직들이 등장한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이번에도 아버지와 내가 함께 당했다. 나는 국정원으로부터, 아버지는 경찰청 대공분실로부터 압수수색을 받았다. 혐의는 북의 공작원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간첩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협력사업이지만, 남북관계가 단절되면 간첩이 되는 분단체제의 악몽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부자 간첩’ 운운하는 기사도 다시 등장했다. 잔인한 세월은 남민전 사건 이후 30여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언론을 통해 혐의 내용을 흘려 낙인찍고 조리돌림하는 것은 그때와 같았다.

수사와 기소, 재판 과정은 7년을 끌었다. 전형적인 괴롭히기였다. 그동안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서 아이들을 챙기고, 아버지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최종적으로 아버지와 나는 집행유예 형을 선고받았다. 처음에는 대단한 간첩 사건인 것처럼 떠들더니 ‘고작’ 이적표현물 소지와 고무찬양으로 종결됐다.

어머니가 이 장면을 보지 않고 먼저 세상을 떠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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