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온 뒤 우리 가족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가장의 부재로 울적했던 집에도 웃음이 퍼졌다. 10년 동안 4남매를 키우며 구명과 석방에 매달렸던 어머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처음 아버지가 구속됐을 때 받았던 소외와 외로움도 석방의 감격 속에 모두 씻겨 내려갔다. 어머니는 다시 찾은 행복에 감사하고 안도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90년 3월이었다. 시위에 참여했던 내가 그만 경찰에 잡혀 구속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석방된 지 겨우 1년 3개월이 지난 때였다.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졌다. 잊었다고 생각한 상처가 다시 덧나는 느낌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대학생들의 데모가 심한 서울을 피해 대구로 나를 내려보낸 걸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대구교도소에 수감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한탄했다.

“천 길 우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남편을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간신히 끌어올려 놨더니……. 대구교도소가 어디고? 너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출감한 곳 아니가. 우째 감옥까지 대를 잇는단 말이고.”

어머니는 지긋지긋한 교도소에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며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 혼자서 면회를 온 날, 아버지의 첫마디는 이랬다.

“전에는 네가 나를 면회하러 왔는데, 오늘은 바뀌었구나.”

접견실의 교도관도 당황하고 민망해했다. 내가 있던 미결 사동의 담당 교도관은 예전에 아버지가 있던 사동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는 교도관 생활 20년이 넘도록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안타까운 일은 또 있었다. 내가 구속되어 있던 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1990년 4월 2일, 일흔여섯의 연세였다. 나는 할머니의 임종도, 장사도 치르지 못했다. 할머니는 자식의 한을 품다 못해 손자의 한까지 가슴에 담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에 이은 아들의 구속, 어머니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탓인 것처럼 힘겨워했다.

나는 넉 달 만에 1심에서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출소 이후 나는 학생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해 11월에는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991년 대구경북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대경총련) 의장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수배를 받았다.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학생운동의 최전선에서 뛰어다녔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그해 말에 시국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수배 해제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덕분에 나는 3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랜 수배 생활을 끝내고 1994년 3월에 복학했을 때, 어머니는 정말 기뻐했다.

“아들이 어디서 한뎃잠을 자고 떠돌아다니는지,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생각만 하면 피가 마르더라. 차라리 잡혀가는 게 더 낫지. 그러면 어디에 있는지 행방은 알 수 있잖아. 감옥에라도 들어가 있으면 찾아가 얼굴은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어머니의 기쁨은 불과 석 달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1994년 6월 16일 공안당국이 발표한 구국전위 사건 신문기사. 아버지는 이 사건으로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돼 석방된 지 5년 반만에 아들인 나와 함께 구속됐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94년 6월 16일 공안당국이 발표한 구국전위 사건 신문기사. 아버지는 이 사건으로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돼 석방된 지 5년 반만에 아들인 나와 함께 구속됐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94년 6월 14일, 어머니에게 두 번째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남편과 아들이 함께 구속됐다. 전날 밤 아버지는 서강대 근처 집필실에 들이닥친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됐다. 대구에 있던 나는 기말고사 준비를 위해 후배 자취방으로 가던 길에 경찰청 수사관들에게 연행됐다. 아버지는 안기부로, 나는 경찰청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아버지와 자주 만났던 청년들이 줄줄이 잡혀 왔고, 나와 학생회 활동을 함께 하다 군에 간 경북대 후배들도 기무사로 끌려왔다. 며칠 뒤 신문에는 이른바 ‘구국전위’ 사건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아버지는 1988년 12월 출소 후 집필과 강연 활동으로 늘 분주했다. 세상은 유신의 폭압 아래 남민전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저항했던 10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학생운동과 더불어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성장했다. 재야운동은 예전처럼 명망가 중심이 아니라 대중조직을 중심으로 활발히 움직였다. 남민전이 내걸었던 민족해방, 민주개혁의 강령은 이제 사회운동에서 기본 상식처럼 되었다.

아버지는 청년들을 만나 우리 운동의 진로와 전망을 주제로 토론하길 좋아했다. 1980년대 대중운동을 통해 성장해온 청년들이 우리 운동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자신이 경험한 것을 청년들에게 전수해 주고 싶어 했다. 장차 핵심 간부로 성장할 만한 청년들을 발굴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터진 사건이 바로 구국전위였다.

아버지의 두 번째 구속은 어머니에게 또 다른 회한을 남겼다. 남민전 사건 때는 갑자기 터진 일이라 아버지를 원망할 짬도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 목숨부터 살려야 했다. 그다음에는 감옥에서 끄집어내야 했다. 그것도 어린 4남매를 키우면서…….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간신히 석방시킨 남편이 5년 만에 다시 갇힌 신세가 되었다. 원망이 먼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막내아들까지 함께 잡혀갔다. 믿기지 않는 현실은 어머니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남겼다.

남민전 사건 때 어머니는 다른 가족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남편이 구속된 아내와 자식이 구속된 어머니 중 누구의 고통이 더 심할까. 어머니는 아내의 고통이 더 심하다고 강조했다. 가장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 경제 문제, 자식들을 올바로 키우는 교육 문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옥바라지, 이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아내의 신세가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어머니가 직접 당하고 나니 자식의 구속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살을 베는 듯한 아픔이 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속 창자를 저미는 고통이 뭔지 알 것만 같았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남편과 자식이 한꺼번에 끌려갔으니……. 아내와 어머니로서 겪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은 오래도록 마음속 깊이 상처로 남았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기사. 하지만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남북관계가 급속히 경직되면서 벌어진 주사파 논란에서 구국전위 사건은 대표적인 친북 주사파 사건으로 부각되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기사. 하지만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남북관계가 급속히 경직되면서 벌어진 주사파 논란에서 구국전위 사건은 대표적인 친북 주사파 사건으로 부각되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구국전위 사건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됐다. 다들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란 기대감에 들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반국가단체의 ‘수괴’를 만나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마당에 국가보안법이란 족쇄로 통일운동을 탄압하는 게 말이 되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긴박한 정세 변화에 수사관들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김영삼 정부는 국상을 당한 북에다 조의를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급변 사태를 언급하며 전군에 비상을 걸었다. 해빙을 준비하던 남북관계는 다시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언론에서는 때맞춰 ‘주사파’ 논란이 벌어졌다. 서강대 총장을 했던 박홍 신부가 총대를 멨다. 전국에 주사파 간첩 수만 명이 암약 중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였다. 덕분에 구국전위 사건은 대표적인 주사파 간첩 사건으로 부각이 됐다.

안기부에 구속된 아버지를 면회하는 가족들. [사진 제공 – 안영민]
안기부에 구속된 아버지를 면회하는 가족들. [사진 제공 – 안영민]

심신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어머니를 대신해 작은누나가 면회와 재판 준비를 책임졌다. 작은누나는 오전에는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아버지를 면회하고, 오후에는 큰누나와 번갈아 서울구치소로 와서 나를 면회했다. 그렇게 하루도 빼먹지 않고 아버지와 나를 챙겼다. 교도관들도 다들 대단하다며 놀랄 정도였다. 교도소를 오가는 사이에 변호사들을 만나 재판 준비도 협의했다. 15년 전 어머니가 했던 역할을 이번에는 작은누나가 대신한 것이다.

1년여의 재판을 거쳐 아버지에게는 다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1, 2, 3심 모두 같았다. 대법원 판결 직후 아버지는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나는 수배 해제 후 불구속으로 재판받았던 사건의 집행유예까지 합쳐 2년 4개월을 순천교도소에서 보냈다.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운명은 이처럼 가혹했지만, 세상은 예전과 달랐다. 남민전 때와 달리 격려와 지원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동시 구속은 국제인권단체인 엠네스티에서도 큰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와 나는 엠네스티가 지정하는 ‘양심수’가 되어 세계 각지에서 격려와 응원의 편지를 받았다. 김영삼 정부가 경직된 모습으로 주사파 파동을 벌이기는 했지만, 남북 화해의 거대한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똑같은 무기징역이었지만 어머니는 남민전 때처럼 10년씩 기다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역사적인 정권교체였다. 1987년 대선 당시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됐지만, 거대한 민주화의 요구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 결과 1988년 12월 아버지는 다른 양심수들과 석방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당선된 김대중 정부에 다들 기대를 걸었다. 특히 1988년 석방된 양심수들을 통해 비로소 존재가 알려진 비전향 장기수들의 석방 문제도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도 사형수이자 양심수 출신이었다.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가 조작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은 양심수 석방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었다. 1998년 8.15 특사 때는 양심수는 물론이고 비전향 장기수들도 대거 석방됐다.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30~40년을 살아온 이들의 석방은 큰 박수와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석방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런데 어머니는 서운해하기보다는 대통령을 이해한다고 하셨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는 민가협 회원들. 김 대통령을 만난 어머니가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는 민가협 회원들. 김 대통령을 만난 어머니가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얼마 전에 청와대에서 민가협 어머니들을 초대해 나도 다녀왔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께 ‘안재구 교수 아내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니, 대통령께서 내 손을 잡아주시며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시더라. 예전에 대통령님도 이희호 여사님도 민가협과 양심수들을 참 많이 챙겨주셨지. 이번에 너거 아버지까지 석방하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이었을 게다.”

1998년 10월 나의 결혼식 때 아버지는 특별외출을 허가받아 결혼식에 참석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98년 10월 나의 결혼식 때 아버지는 특별외출을 허가받아 결혼식에 참석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석방 대상에서는 제외됐지만, 아버지는 1998년 10월 나의 결혼식 때 외출을 허가받아 참석했다. 1999년 7월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도 귀휴를 허가받아 장례에 참석했다. 예전 김영삼 정부 때만 해도 불가능했던 조치였다.

어머니의 기대와 예상대로 아버지는 다음 해 8월 15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구속된 지 5년 2개월 만이었다. 무기수로는 이례적으로 빠른 석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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