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여전히 암울했다. 전두환의 폭정에 맞서 대학생들의 투쟁은 갈수록 고조됐다. 감옥은 잡혀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재야에서도 구속자 석방투쟁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특히 1985년 2월 12대 총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이 손잡고 만든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전두환 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다. 총선 결과 민주화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구속자 석방 요구도 높아갔다.

어머니도 마음이 급했다. 그동안은 기약 없는 무기수 신세라 석방운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민주화의 기운이 고조되는 속에서 아버지 석방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구속 학생과 재야인사의 석방운동 모임에도 열심히 나갔다.

하지만 남민전 가족들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다들 남민전 사건을 부담스러워했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을 했지만, 남민전은 다르지 않냐고도 했다. ‘간첩단 사건’이란 낙인은 민주화운동 내에도 남아 있었다. 이를 깨뜨려준 분들이 문익환 목사님과 김승훈 신부님이었다. 두 분은 남민전 가족들을 특별히 챙겼다.

문익환 목사님은 한빛교회에서 진행하는 시국기도회에 남민전 가족들을 자주 초대했다. 강론에서 남민전 사건을 언급하며, 남민전 구속자들을 석방하는 게 진정한 민주화라고 강조했다. 목사님 부인인 박용길 장로님과 어머님까지 진심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챙겨주셨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창립했던 김승훈 신부님은 별명이 ‘남민전 신부님’이었다. 독재정권에는 불호령을 내리던 분이지만, 남민전 가족들한테는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신부님의 어머님도 우리를 자주 사제관으로 불러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셨다.

“아무도 남민전 가족들을 반기지 않았을 때, 목사님과 신부님께서 제일 먼저 나서 주셨어. 그 덕분에 남민전 사건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고, 구속자 석방운동도 함께 할 수 있었지.”

어머니는 그런 인연으로 큰누나 결혼 때는 문익환 목사님께, 작은누나 결혼 때는 김승훈 신부님께 주례를 부탁드렸다. 1994년 문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또 2003년에는 김 신부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어머니는 참 많이 우셨다. 힘든 시절 큰 의지처였던 두 분의 존재는 우리에게 그만큼 각별했다.

본격적인 구속자 석방운동을 위해 1985년 12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결성됐다. 어머니는 남민전 가족을 대표해 민가협 공동의장을 맡았다.

“민가협을 결성하면서 제일 먼저 구속자라는 명칭을 ‘양심수’라고 바꿨어. 그전에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이라고만 여겼는데, 자유를 빼앗기면서까지 지키고자 한 양심과 신념을 부각한 것이지. 처음 양심수란 말을 들었을 때, 나도 괜히 당당해지고 자신감이 생기더라.”

민가협이 결성되면서 양심수 석방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내 자식이 혹여 불이익이라도 받을까 큰소리 한번 못 치던 어머니들이 이제는 정부와 교도소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당당히 싸웠다. 특히 교도소 측은 민가협 어머니들한테 쩔쩔맸다. 교도소 내에서 처우 개선이나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양심수들이 ‘빵투’(감방투쟁)를 벌이면 민가협 어머니들이 밖에서 지원투쟁에 나섰다. 교도소 앞에서 외치는 어머니들의 구호는 교도소 안에도 다 들릴 정도로 컸다. 민주화운동을 ‘빨갱이’로 색칠하는 조선일보에도 몰려가고, 민정당과 법무부로 쫓아다니느라 하루가 바빴다. 이러한 민가협의 투쟁 덕분에 양심수 석방은 민주화의 핵심과제가 되었다.

1987년에는 민주화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은 6월항쟁의 거대한 물길을 열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의 2인자였던 노태우는 6.29 항복선언을 내놓았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확정되면서 정권교체의 길도 열렸다. 어머니는 그해 12월 대선에서 정권교체만 이루어진다면 아버지도 석방될 거라는 기대에 들떴다. 하지만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민주화는 좌절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며칠이나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상심이 컸다.

민주진영은 대선 패배의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섰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우리 국민은 여소야대 국면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국회에서 5공비리 특별위원회와 광주민주화운동 특별위원회가 꾸려졌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몰려나왔다. 5공비리 책임자와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전두환, 이순자 구속과 양심수 석방을 외쳤다.

어머니와 남민전 가족들의 마음도 급해졌다. 노태우 정부는 격앙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11월에 전두환, 이순자를 백담사로 보냈다. 사실상 귀양 조치였다. 이제 양심수 석방은 민주화의 상징처럼 떠올랐다. 전두환 독재의 잘못을 인정한 이상 독재에 맞서 싸운 양심수들을 더는 가두어 둘 수 없었다. 정부와 야당이 양심수 석방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지 협의 중이라는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민전이 커트라인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의 석방 문제가 논란이 됐다. 노태우 정부는 안재구 교수만큼은 제외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어머니는 야당 국회의원들을 만나 아버지를 꼭 석방해야 한다고 매달렸다. 이때 일본에 있는 남민전 구속자 지원 모임에서 안재구 교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일본 수학자 700여 명의 탄원서를 보내왔다. 이게 막바지 결정에 큰 힘이 됐다.

성탄절 직전에 양심수 석방을 단행할 것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석방 여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대와 낙담이 엇갈렸다. 하루하루 초조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12월 20일, 양심수 석방 문제를 담당하던 야당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집으로 찾아왔다. 보좌관은 다른 말은 없이 어머니에게 의원의 인사를 전한 뒤 선물상자를 건네고 돌아갔다.

“그때 직감했어. 너거 아버지가 내일 석방되는구나.”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작은아버지들에게 연락했다. 대구의 친척들에게도 귀띔했다. 그러고는 바로 대구로 내려갔다. 우리는 그날 밤 친척 집에서 들뜬 마음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대구교도소를 찾았다. 이미 교도소 앞은 석방되는 양심수들을 기다리는 인파와 취재진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민중들의 양심수 석방 투쟁 덕분으로 아버지는 10년 만에 감옥 문을 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88년 12월 21일 오전 대구교도소 앞에서 모여든 환영 인파에 인사를 하고 있는 아버지. 머리띠를 맨 사람들이 이날 대구교도소에서 석방된 양심수들이다. 아버지 오른편으로 환영 나온 지금은 고인이 된 백기완 선생도 보인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민중들의 양심수 석방 투쟁 덕분으로 아버지는 10년 만에 감옥 문을 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88년 12월 21일 오전 대구교도소 앞에서 모여든 환영 인파에 인사를 하고 있는 아버지. 머리띠를 맨 사람들이 이날 대구교도소에서 석방된 양심수들이다. 아버지 오른편으로 환영 나온 지금은 고인이 된 백기완 선생도 보인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이윽고 10시, 육중한 교도소 철문이 열렸다. 먼저 젊은 학생들이 나왔다. 마중 나온 가족들과 여기저기서 얼싸안고 눈물을 쏟았다. 곳곳에서 외치는 함성과 구호가 교도소를 울렸다. 그렇게 석방과 환영의 축제마당이 펼쳐졌다. 맨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교도소 철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어머니와 우리는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함께 아버지를 껴안았다.

“그동안 당신이 정말 수고 많았소. 너희들도 잘 자라줘서 고맙다.”

10년 만에 자유를 되찾은 아버지의 첫마디였다. 1979년 추석날 훌쩍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는 어느새 흰머리가 내려앉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1988년 12월 27일 연세대에서 열린 양심수 석방 환영대회에서 남민전을 대표해 인사하는 아버지. 맨 왼쪽부터 이수일 선생과 이제는 세상을 떠난 고 김병권 선생, 고 김남주 선생, 고 박석률 선생. [사진 제공 – 안영민]
1988년 12월 27일 연세대에서 열린 양심수 석방 환영대회에서 남민전을 대표해 인사하는 아버지. 맨 왼쪽부터 이수일 선생과 이제는 세상을 떠난 고 김병권 선생, 고 김남주 선생, 고 박석률 선생. [사진 제공 – 안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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