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사진출처-몽양기념관]
여운형 [사진출처-몽양기념관]

제22대 국회의원 총선을 40일 앞두고 맞이하는 3.1 독립운동 105주년이 씁쓸하다.

여·야당에서 공천 배제당한 후보들이 기존 소속 정당을 뛰쳐나와 상대 정당의 점퍼를 입고 카메라 앞에 나서는 일이 서슴없이 벌어지고 있다. 

정권심판과 운동권 적폐청산 프레임이 맞붙은 와중에 군사독재에 저항한 한때 학생운동 경험을 상대 공격에 적합한 이력으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적극 소비하는 일도 낯설지 않다.

그뿐인가. 선거제도에 따른 합법적인 행위라곤 하지만 민심의 왜곡이 이미 확인된 비례위성정당 설립도, 자신들만의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에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

국민의 대표임을 자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식과 태도이다.

급변하는 세계질서에 대한 고민과 현재 직면한 민주주의와 민생, 전쟁과 남북관계의 복합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모색이 보이지 않는 것도 큰 문제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북한이 제기한 '적대적 두개국가론'을 '통일포기론'으로 해석하면서 '자유민주진영이 통일 담론을 주도할 기회'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지금 우리는 105년 전 3.1운동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이규수 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장이 29일 페이스북에 소개한 3.1운동 105주년에 부치는 단상이 눈길을 끈다.

재일 역사학자인 강덕상 선생의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33인 민족대표에 대한 평가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준비한 여운형에 대한 재평가를 소개한 글이다.

먼저,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33인의 민족대표는 전체 조선인민을 대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일제에 전향했으며, 3.1운동으로 독립이 달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패한 역사라고 냉정하게 결론지었다.

아주 새로운 건 아니지만 3.1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이다.

민족대표들은 대중적 항일투쟁을 기피하여 이에 대한 지도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사대성과 대외의존성, 구 봉건귀족에 대한 환상, 민중 멸시와 투항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독립운동의 흐름에 역행했다고 단호하게 비판했다.

이같은 견해는 같은 재일 사학자인 박경식이 당시 조선이 처한 역사적·사회적 조건과 민족대표의 계급적 한계로 인한 의식과 사상을 감안하면 그들의 민족주의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도 대비된다.

이규수 센터장은 또 3.1운동이 일본 도쿄 간다(神田)의 YMCA에서 결행된 2.8선언에서 출발했다는 일반적 인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했다.

3.1운동은 사실은 중국 상하이에서 시작해 도쿄를 경유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여기에는 조선과 중국의 협력단체인 신아동제회를 바탕으로 결성된 신한청년당(1918.8)이 중심에 있었다고 지적했다.

더 중요한 건 여운형이 주도한 신한청년당이 미국과 도쿄에 파견원을 보내 유학생들(장덕수 등)을 만났고 이들이 현지 유학생들을 조직하고 조선으로 건너가 공작을 펼치도록 했으며, 제1차세계대전 후 전후 질서를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1919.1.18)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독립 청원서를 제출(3.13)하도록 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3.1운동은 제1차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그리고 러시아혁명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한 사회주의국가의 출현 등 국제질서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 일어났는데, 여운형은 그같은 국제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 독립 목표 달성을 위해 실행에 옮긴 지도자였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격변의 시대를 주의깊게 살펴본 역사가의 안목이란 이런 것이다.

3.1절 105주년에 여운형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렇다.

"어쨌든 여운형은 깊은 지식과 높은 인격으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연설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운형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매우 두드러진 인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민화 정책으로 인해 모두가 친일파로 변절할 수밖에 없을 때 민중이 고통 받는 조선의 한복판 담장 위에 섰다는 것입니다. 교도소 담장 위에 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형무소로 떨어지지요. 그런 사람이에요. 담장 위에 올라서는데도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지요. 자신은 일본에게 49%는 '나쁜 놈'이 아니라고 위장했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51%는 민족의 편, 조선인 편이었습니다."(『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 145~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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