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무기형을 확정받고, 전주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기결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기결수에게는 면회도 편지도 한 달에 한 번만 허용됐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음의 늪에서 간신히 빼냈지만,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이별의 아픔보다 먼저 닥쳐온 게 있었다. 생활고였다. 혼자서 중고등학생 넷을 데리고 살아야 했다. 이웃과 친척의 발길이 끊긴 집은 사방이 적막강산이었다. 엄동설한에 허허벌판으로 내쫓긴 것만 같았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사한 집은 은행 대부를 끼고 어렵게 장만한 집이었다. 아버지가 잡혀가면서 우리 집은 수입이 끊겼다. 아버지 재판과 구명에 매달리느라 어머니는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대출 이자와 상환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은행의 독촉장은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왔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집을 팔기로 했다.

급매로 싼값에 집을 내놓았다. 하지만 보러 오는 이가 없었다. 세상을 뒤흔든 사건을 동네 복덕방인들 모를 리 없었다. 당시 <수사반장>과 쌍벽을 이룬 드라마로 <113 수사본부>가 있었다. 거기에서 특집으로 남민전 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다. ‘숙대 교수 안재구’ 역은 탤런트 김용건이 맡았다. 우리 가족도 도대체 어떻게 다뤘을까 궁금해서 봤다. 보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렇게 TV 방송까지 앞장서서 ‘간첩’으로 낙인을 찍는구나……. 그런 시절이었으니 집이 팔릴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남편 명의의 집을 막내 시동생 이름으로 바꾸었다. 대문에 붙은 ‘안재구’ 문패를 떼면서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이 집을 얻고 얼마나 희망에 부풀었을까. 하지만 이제는 그 어디에서도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처지였다. 집은 그러고도 몇 달이 지나서야 간신히 팔렸다. 우리는 갈현동을 떠나 이웃한 구산동에 아파트를 얻었다. 5층짜리 서민 아파트였다.

어머니는 화장품 행상을 비롯해 갖은 고생을 하면서 홀로 4남매를 키우고, 아버지 옥바라지를 해냈다. 1986년 무렵의 가족사진. [사진 제공 – 안영민]
어머니는 화장품 행상을 비롯해 갖은 고생을 하면서 홀로 4남매를 키우고, 아버지 옥바라지를 해냈다. 1986년 무렵의 가족사진. [사진 제공 – 안영민]

그런데 이사한 곳까지 경찰이 따라왔다. 경비실은 물론이고 옆집, 아랫집까지 들쑤셨다. 우리의 동태를 묻고, 협조를 요청했다. 집에도 불쑥 찾아오기 일쑤였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경찰들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못살게 굴 겁니까? 당신들이 우리 식구 먹여 살릴 겁니까? 온 동네에 간첩 집이라고 떠벌리니 당신들 속이 후련합니까?”

그 뒤로는 좀 뜸해지나 했지만, 경찰들은 여전히 정기적으로 우리 가족의 동향을 파악했다. 참으로 질기고 악랄한 집단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가자면 뭔가 고정 수입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자리를 얻기도 쉽지 않았다. 고심 끝에 어머니가 시작한 일은 화장품 행상이었다. 마침 친구 형부가 화장품 회사 상무였다. 어머니는 친구 언니를 찾아가 사정을 말했다. 명색이 교수 부인이었는데 보따리장사를 하겠다고 찾아온 어머니를 보고 친구 언니도 당황했다고 한다.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수향아, 정말 괜찮겠니?”

도와달라는 거듭된 부탁에 친구 언니는 대리점을 연결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비누와 샴푸를 비롯해 여러 가지 화장품을 받아왔다.

“안방에 물건들을 쌓아놓기는 했는데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걱정되더라. 서글프기도 하고……. 그래도 이걸 팔아야 우리 다섯 식구 먹고살 길이 생긴다고 마음을 잡았지.”

그날 밤 어머니는 잠든 우리를 보면서 각오를 다졌다.

‘아이들과 살아야 한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일이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아이들만 생각하자…….’

우리 가족이 외롭고 힘든 상황을 이겨나가는 데는 어머니 동창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 사진은 1970년대 중반 대구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모습.(왼쪽 두 번째가 장수향씨). [사진 제공 – 안영민]
우리 가족이 외롭고 힘든 상황을 이겨나가는 데는 어머니 동창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 사진은 1970년대 중반 대구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모습.(왼쪽 두 번째가 어머니 장수향). [사진 제공 – 안영민]

하지만 팔 데가 마땅찮았다. 밤마다 찾아갈 만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보았지만, 날이 새면 허물어지길 반복했다.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서투른 서울 길을 헤매며 화장품을 팔러 다니는 어머니 소식은 학교 동창들에게도 알려졌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연락을 해왔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까지 넉넉하게 사주었다. 때로는 아이들 맛있는 거 사주라고 따로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머니는 예전에 나의 담임선생님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달라고 한 게 생각났다. 몇 번을 망설이다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생님을 만나니 죄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떨렸다. 어머니는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며 어렵게 말했다.

“선생님 혹시……, 화장품은 필요 없으신지요…….”

선생님은 어머니가 학교에 온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아이들 데리고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했습니다. 학교에 여선생님들이 많으니 제가 챙겨보겠습니다. 공연히 힘든 걸음 하지 마시고 앞으로는 영민이 편에 이것저것 보내주세요.”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입학하고 며칠 뒤 선생님은 나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배치고사 성적도 우수하고, 덩치도 커서 내가 적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한 아이의 엄마가 학교로 찾아와 따졌다고 한다.

“그 애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요? 어떻게 그런 집의 애를 반장으로 뽑을 수 있어요.”

자기 아이가 반장이 안 된 것에 대한 항의도 담겼다. 덕분에 선생님은 우리 집 사정을 알게 됐다. 다음날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영민아, 아무래도 네가 반장을 맡으면 어머니께 부담이 될 거 같구나.”

나의 반장 임명은 취소됐다. 반장은 항의한 집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가 뽑혔다.

내가 다닌 대성중고등학교에는 19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된 조성우 선배의 부인이 영어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었다. 담임선생님은 같은 영어 선생님이라 그 선생님하고 친했다. 그래서 우리 처지를 더 안타까워했고, 도와주려고 애썼다.

나는 어머니의 심부름을 불평 없이 잘 수행했다. 화장품을 담은 쇼핑백을 들고 이삼십 분씩 걸어서 등교하는 길은 솔직히 부끄럽고 민망했다. 선생님은 내게 1층 양호실에 놔두고 가면 된다고 하셨다. 최대한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게 배려한 것이다. 나의 화장품 배달은 그렇게 중학교 졸업 때까지 계속됐다.

어머니가 췌장암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한날은 간병하는 내게 말했다.

“엄마가 살면서 너한테 제일 미안했던 게 학교에 화장품을 들고 가게 한 거다. 싫었을 텐데도 내색 안 하고 엄마 말 들어줘서 참 고마웠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도, 선생님도 참 따뜻했다.

어머니는 화장품 외에 알로에 같은 건강보조식품도 팔았다. 무거운 물건을 들고 다니느라 허리가 아프고 나서는 보험 영업도 했다. 당시만 해도 ‘사모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들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가난에 맞서며 우리를 키워냈고, 아버지 옥바라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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