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선고 다음 날, 어머니는 아침 일찍 서울구치소로 달려갔다. 밤새 잠을 설쳤지만 피곤할 새가 없었다. 무서운 악몽에서 얼른 빠져나오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만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 손목에는 수갑이 단단히 채워져 있었다. 사형수에게는 24시간 수갑을 채우는 게 규정이라고 했다. 그 상태로 밥도 먹고 용변도 보고 운동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 앞에 닥친 현실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여보, 내가 열심히 구명운동을 할게요. 세계적인 수학자인 당신을 절대 함부로 못 할 겁니다. 우선 대구에 내려가서 당신의 선후배와 제자들한테 탄원서를 받아볼게요. 그러니 당신도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아버지에게 건넨 말은 곧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구명운동은 쉽지 않았다. 냉혹하고 살벌한 1980년, 과연 누가 나서서 도와줄 수 있을까. 더구나 국가가 ‘반국가단체’라고 낙인찍은 조직의 사형수를…….

아버지의 모교이자 16년간 재직했던 경북대 수학과 교수들은 어머니의 연락을 피했다. 어머니도 그들의 난처한 처지를 잘 알았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었다. 어렵게 만난 교수들은 어머니를 위로했지만, 서명은 끝내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허탈과 좌절의 고통만 고스란히 안고 돌아왔다.

1983년 명동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은 안재구 교수의 부인 장수향씨(왼쪽)와 작은딸 안소영, 작은아들 안영민. 김수환 추기경(가운데)도 사형을 선고받은 안재구 교수의 구명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을 했다. 오른쪽은 1975년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무기로 감형됐던 이철씨의 장모인 조만조 여사로 장수향씨의 가톨릭 대모이기도 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83년 명동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은 안재구 교수의 부인 장수향씨(왼쪽)와 작은딸 안소영, 작은아들 안영민. 김수환 추기경(가운데)도 사형을 선고받은 안재구 교수의 구명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을 했다. 오른쪽은 1975년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무기로 감형됐던 이철씨의 장모인 조만조 여사로 장수향씨의 가톨릭 대모이기도 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구명운동은 국내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어머니는 해외에 나가 있는 아버지 선후배와 제자들을 수소문했다. 그들이라면 부담이 좀 덜할 거라 기대했다. 몇몇 사람들에게 연락이 닿았다.

“안 그래도 교수님 소식을 듣고 저희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뭐든 해보겠습니다. 구명운동을 할 수 있게 자료를 좀 보내주십시오.”

어머니는 호소문을 보내 해외 수학자들의 서명을 받기로 했다. 호소문은 어머니가 직접 작성했고, 지인에게 번역을 맡겼다.

문제는 호소문을 해외로 보내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보내는 우편물은 정보기관에서 검열하고 차단할 게 뻔했다. 궁리 끝에 외국으로 나가는 인편을 통해 현지에서 직접 편지를 부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미국과 일본, 캐나다로 호소문을 내보낼 수 있었다.

“007 작전이 따로 없었지. 너거 아버지 선후배와 제자들이 힘써 주었기에 가능했어. 직접 서명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국내 교수들은 외국에 나가 있는 선후배들을 소개해줬고, 그렇게 연락이 닿은 분들이 동료 교수들한테 서명을 받았지.”

아버지는 경북대 재직 당시 《경북 매스매티컬 저널》을 발행하며 세계 여러 대학의 수학과와 교류했다. 그래서 외국 수학자들도 ‘안재구’라는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구명을 요청하며 대한민국 대통령과 법무부장관 앞으로 보내는 탄원서에는 세계 각국의 수학자 200여 명이 서명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각하

 

아래에 서명한 본인들, 세계의 수학자들은 한국 서울의 숙명여대 수학과 안재구 교수가 1980년 5월 2일, 1심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실을 알고 크나큰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중략)

 

안 교수는 1958년부터 저서를 통해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미분에 관한 그의 연구는 많이 읽혔고, 세계 수학계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지난날의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주저 없이 그의 지적 판단의 건전성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중략)

 

우리는 안 교수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에 대해 충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왜 한국 사회가 안 교수와 같은 헌신적인 학자를 없애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안 교수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수학적 공헌뿐만 아니라 1960년도 경북대학교에서 임명된 후부터 20년간에 걸친 교수 활동을 통하여 한국을 위해 지대한 봉사를 하였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중략)

 

우리는 학자를 없애고 국민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나라가 번영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발전과 국제 수학계의 발전을 위해 안재구 교수가 다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날을 볼 수 있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중략)

“그때 너거 아버지 선후배와 제자들이 정말 고생했어. 그중 한 사람은 한쪽 폐를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았는데도 혹시라도 재판 날짜를 놓칠까 치료도 미루고 서명받는 일에 앞장섰지. 우리한테는 생명의 은인이었어.”

어머니는 해외에서 몇 단계를 거쳐 인편에 전달받은 서명지를 들고 홍성우 변호사를 찾아갔다. 언제나 굳은 표정이었던 홍 변호사 얼굴이 처음으로 환하게 빛났다.

“정말 큰일을 해냈습니다. 제가 힘이 나네요. 좋습니다. 이걸로 한번 해봅시다.”

홍 변호사는 탄원서를 바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2심 선고 공판을 며칠 앞둔 때였다.

1980년 9월 5일 남민전 사건 2심 선고 결과를 다룬 신문 기사. 2심에서 안재구 교수는 무기로 감형됐지만, 이재문, 신향식 선생에게는 1심과 같은 사형이 선고됐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80년 9월 5일 남민전 사건 2심 선고 결과를 다룬 신문 기사. 2심에서 안재구 교수는 무기로 감형됐지만, 이재문, 신향식 선생에게는 1심과 같은 사형이 선고됐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80년 9월 5일, 드디어 2심 선고일이 됐다. 어머니는 하느님이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거란 믿음만으로 머릿속을 채웠다.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맞이한 아침, 어머니는 불안과 초조 속에 법정에 들어섰다. 아버지의 얼굴을 잠깐 봤지만, 눈을 마주치기 두려웠다. 어디에도 시선을 두기 힘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아버지의 이름이 불렸다. 순간 심장도 멈췄다.

“안재구, 무기!”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지난 시간이 존재한 것만 같았다.

“에미야, 네가 애 많이 썼다. 이젠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구나.”

곁에 있던 할아버지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네 사람 중에서 두 사람만 무기로 감형되고, 이재문, 신향식 선생에게는 다시 사형이 선고됐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법정을 나서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에도 기쁨의 눈물 위로 안타까움의 눈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아버지를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한 판사는 나중에 홍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도 어떻게 학자를 사형시키겠는가 고심이 많았는데, 세계 수학자들의 탄원서 덕분에 감형할 수 있었습니다.”

광포한 독재정권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세계 수학자들의 서명이었고, 세계 양심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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