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남산의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를 받았고, 한 달쯤 뒤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은 경기도경 대공분실에서 특별히 파견 나온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혹독하게 당했다. 특히 이재문 선생을 비롯해 초반에 체포된 사람들이 심하게 고문당했다. 아버지는 그나마 막판에 잡혀 덜 당했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할까.

구치소로 이송됐지만, 여전히 면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고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했다. 면회는 물론 편지마저 불허됐다. 하지만 어디에도 따질 수가 없었다. 붉은 딱지가 붙은 이들에게는 어떤 불법도 용인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수시로 구치소를 찾아갔다. 겨울을 견뎌낼 두꺼운 솜옷도 넣어야 하고, 속옷이며 양말도 챙겨야 했다. 부실한 식사를 보충할 간식거리도 구치소 매점에서 사 넣었다. 옷가지를 찾아와 집에서 빨아 다시 넣기도 했다.

“그렇게 영치품이라도 넣으면 너거 아버지도 내가 다녀간 걸 알겠지 싶었어. 그걸 보면 철저히 차단된 그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겠지…….”

처음 구치소에 갈 때는 할아버지와 함께 갔다. 겨울 솜옷이 부피도 컸지만 혼자 가는 게 엄두가 안 나기도 했다. 그때 할아버지의 한탄을 듣고 어머니도 마음이 아팠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한테 솜옷을 넣어주러 여기에 온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들한테 솜옷을 넣어주러 여기를 다시 오는구나. 이런 놈의 세상을 보려고 내가 여태껏 살아온 건지……. 에미야, 너도 마음 단단히 먹거라.”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항일투쟁을 하다 체포된 적이 있었다. 1926년 무렵이었다. 구속된 아버지에게 솜옷을 넣어주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서대문형무소를 찾은 할아버지는 당시 열네 살이었다.

1980년 9월 2일 열린 남민전 사건 1심 선고에서 관련자 4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는 동아일보의 기사. 안재구 교수도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80년 9월 2일 열린 남민전 사건 1심 선고에서 관련자 4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는 동아일보의 기사. 안재구 교수도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면회는 기소가 되고도 한참 지나서야 허용됐다. 1980년 2월 첫 면회 때, 어머니는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원망도, 슬픔도, 분노도, 애련함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왜 한 달도 피하지 못했어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어 남편에게 한 말이었다. 어렵게 쌓아 올린 학문도, 자식도, 아내도, 부모도 송두리째 버린 무서운 사람이란 원망이 들었다. 하지만 힘든 도피 생활과 모진 고문, 감옥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느라 수척해진 남편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덧 10분이 지나고, 면회를 마치라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때서야 어머니는 겨우 말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내일 또 올 테니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주시고요.”

편지는 그보다 훨씬 더 지나서야 허용됐다. 대상은 철저히 가족으로 한정됐다. 내용도 엄격하게 검열당했다. 우리는 아버지와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편지지에 담긴 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아내에게

 

불의의 일을 당하여 당신과 헤어진 지 벌써 반년이 되었구려. 그날 집을 떠날 때 이제는 영영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는 이별이라고 생각하니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느라고 무척 애를 먹었소. (중략)

 

만일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나의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하였으나 10월 27일 아침에 그러한 생각을 버렸소. 세상에 나의 심정을 바로 말할 기회가 반드시 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러나 자유 없는 상태에서 내가 무슨 도리가 있겠소. 당신에게 폐만 되는 신세가 되었소. 그렇다고 원망만 하고 지내지는 말아 주오. 차차 세상이 좋아지면 나에게도 반드시 자유의 날이 오리라고 믿고 있으며 당신도 이것을 믿어주오. 그리고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이것을 믿게 해주오. 캄캄한 어둠의 시기가 가고 이제 곧 새벽이 올 것이오. 여보,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봅시다. (중략)


1980년 4월 10일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당시 중학교 3학년인 형은 서대문중학교(현재는 한성과학고등학교)에 다녔다. 서대문중학교는 서울구치소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에서 보면 서울구치소가 빤히 내려다보였다. 아버지는 매일 형의 학교를 보며, “세민이가 오늘도 저기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구나” 생각하며 힘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둔 소년에게 서울구치소를 끼고 올라가야 하는 등교길은 활기찰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형은 꿋꿋하게 공부했고,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첫 공판을 앞두고 어머니는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쉽지 않았다. 박정희는 죽었지만, 뒤를 이은 무도한 전두환 집단의 서슬이 퍼런 시기였다. 게다가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다. 변호사를 구하기 힘든 게 당연했다.

아버지를 담당한 검사 중 한 명은 작은아버지의 고교 동창이었다. 그는 작은아버지를 통해 어머니에게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고 아이들이나 잘 건사하라”고 전했다. 가족이 애를 쓴다고, 유능한 변호사를 쓴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말이기도 했다.

법정의 검사석에 앉은 공안부 검사들. 맨왼쪽이 훗날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검사다. 그는 경북고 재학 시절 안재구 교수에게 수학을 배웠던 제자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법정의 검사석에 앉은 공안부 검사들. 맨왼쪽이 훗날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검사다. 그는 경북고 재학 시절 안재구 교수에게 수학을 배웠던 제자였다. [사진 제공 – 안영민]

또 다른 담당 검사가 나중에 ‘6공의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이었다. 그는 경북고 재학 시절 아버지한테 수학을 배웠다. 아버지는 대학원을 다닐 때 경북고에 강사로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인연이었다. 박철언 검사는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검사실에 따로 불러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 적도 있었다. 형장에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를 옛 은사에 대한 나름의 배려였다.

다들 재판 결과를 절망적으로 보았다. 통혁당(통일혁명당),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처럼 남민전의 핵심 관계자들에게도 사형선고가 내려질 것으로 예측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온 지 겨우 2년 만에, 아이들만 키우다 닥친 현실 앞에 어머니는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 알아보았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소개받은 분이 홍성우 변호사였다. 홍 변호사는 유신정권 때 여러 시국사건을 맡아 변론해온 능력 있고 훌륭한 분이었다. 어머니를 만난 홍 변호사도 희망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보자는 말만 했다.

법정에서 진술하는 남민전 서기 이재문 선생. [사진 제공 – 안영민]
법정에서 진술하는 남민전 서기 이재문 선생. [사진 제공 – 안영민]

재판은 짜놓은 각본에 따라 흘러가는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당시 공판이 열리던 서울지방법원은 서소문에 있었다. 공판이 열리는 날이면 가족들은 아침 일찍부터 법원 앞으로 모여들었다. 법정에는 직계가족 두 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가족들은 법원 마당에 모여 호송버스를 기다렸다. 차에서 내리는 이들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조차 힘들었다. 버스가 도착하면 가장 먼저 법원 경비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가족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벽을 치고 강압적으로 제지했다.

나와 작은누나는 머리를 썼다.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버스가 들어오는 정문 부근에서 기다렸다. 큰길에서 버스가 법원 입구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많다 보니 정문으로 들어가려던 버스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 우리는 버스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철창으로 가려진 창문 너머로 아버지를 찾았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수갑 찬 손을 흔들었다. 희미한 창으로 보인 얼굴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렇게 몇 달 만에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몇 시간을 기다려 재판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버지를 마찬가지로 차창을 사이에 두고 배웅했다. 불과 몇십 초의 순간이었다.

1980년 5월 2일, 이날은 남민전 사건 1심 선고일이었다. 앞선 결심 공판에서 박철언 검사는 아버지를 비롯해 무려 8명에게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며 사형을 구형했다. 잔혹한 논고는 옛 스승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재판은 판사의 결정권이 없었다. 권력의 의사에 따라 진행되는 재판이었다. 그래도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지는 않겠지……. 어머니는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마지막까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판사들이 입장하면서 소란스러운 법정이 조용해졌다. 판사들은 높다란 판사석에 앉아 날카로운 눈매와 굳은 표정으로 피고석과 방청석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들의 입에서 사형, 무기, 15년, 10년……, 무시무시한 형량이 아이들 이름처럼 쉽게 나오고 있었다.

공판 당시 안재구 교수의 모습. 갈무리 사진, KBS 인물현대사. [사진 제공 – 안영민]
공판 당시 안재구 교수의 모습. 갈무리 사진, KBS 인물현대사. [사진 제공 – 안영민]

“안재구, 사형!”

어머니의 마지막 기대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순간 맥이 풀리고 경련이 일어났다. 머리 위에 불씨가 붙은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발바닥을 통해 흘러나가는 듯했다. 공판이 끝나고 아버지는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하는 표정을 지으며 포승에 묶인 채 다시 끌려나갔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법정을 나오던 어머니는 기운이 다 빠졌다. 허공에 발이 뜬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너거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 반드시 살려야 한다, 나도 모르게 무서운 집념이 생기더라.”

세상 사람들이 다 남편을 포기하고 체념해도 나는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반드시 살려야 한다……. 어머니는 그 집념으로 새로운 날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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