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말

새해부터 「아버지, 안재구」란 제목으로 통일뉴스에 연재를 시작합니다.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담겠다기보다는 그저 제가 겪었던, 들었던,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전 몇 년간 곁에서 간병하면서 제 마음속에 담은 아버지의 모습과 생각을 정리할 예정입니다. 아버지께서 바스러져 가는 기억의 조각을 붙들고 제게 들려주려고 하셨던 그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아버지, 안재구」는 아버지에 대한 저의 회상기일 수도, 간병기일 수도, 사부곡일 수도 있겠습니다. 곁에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내고 싶습니다.

매주 화요일, 내년 3월까지 예정합니다. 내년 7월이 아버지 5주기이니 그때쯤이면 책으로 출간해 뜻깊은 5주기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통일뉴스 독자들의 애독과 응원을 바랍니다.

 

4.

1979년 10월 5일, 그해 추석을 우리 가족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추석 차례를 지낸 뒤 아버지는 볼일이 있다고 서둘러 나가셨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한 무리의 형사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렇게 우리들의 악몽은 시작됐다.

종가의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추석 전날에도 정신없이 바빴다. 음식 준비와 제수품 정리를 마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11시가 넘은 시각에 전화벨이 울렸다. 겨우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으니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교수님 좀 바꿔주세요.”

인사도 없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당돌한 학생이란 생각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네주었다.

“여보, 급한 전화인가 봐요. 받아보세요.”

그리고는 피곤해서 먼저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담배를 연거푸 피우고 있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했다.

“간밤에 전화 때문인 거 같았어. 혹시 학생한테 무슨 문제가 생겼나 물어봤어. 근데 너거 아버지가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을 돌리더라. 나도 차례 준비 때문에 더는 묻지 않고 부엌으로 나왔지.”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는 분주했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 작은아버지들이 도착했다. 우리도 어린 사촌 동생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음복을 마치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단 한 사람, 아버지만 안방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뒷정리에 한창일 때, 아버지가 급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여보, 나 잠깐 시내에 다녀오리다.”

“무슨 일인데요? 오랜만에 다들 모였는데, 오늘 같은 날 꼭 나가야 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너거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건넨 말이 마지막이 될 줄 꿈에도 몰랐어. 그 길로 나간 사람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으니…….”

그날 밤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학생들 문제로 바빠 집에 못 들어가니 기다리지 말고 당신 먼저 자요.”

어머니는 학생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구나 여기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이 어머니에게는 편하게 잠을 청한 마지막 밤이었다.

2022년 마석 모란공원에서 남민전 준비위원회 서기 이재문 선생의 추모제가 40년 만에 열렸다. [자료 사진 - 통일뉴스]
2022년 마석 모란공원에서 남민전 준비위원회 서기 이재문 선생의 추모제가 40년 만에 열렸다. [자료 사진 - 통일뉴스]

나중에 알았지만, 추석 전날 남민전 사건의 총책으로 발표된 이재문 선생의 반포 아지트가 발각돼 여러 사람이 경찰에 연행됐다고 한다. 간밤에 걸려 온 전화는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또 아버지가 급히 집을 나서고 1시간도 못 돼 우리 집은 완전히 포위됐다고 한다. 버스 정류장부터 골목 입구까지 형사가 배치됐고, 우리 집 주변으로도 형사들이 깔려 잠복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형사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추궁했다. 학교로 출근했다는 말을 듣고는 서둘러 집을 나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놓친 형사들은 우리 가족을 다그쳤다. 가택 수색으로 집안은 난장판이 됐다. 그들은 어머니에게 아버지 행방을 대라고 험악하게 몰아붙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안에 죽치고 앉아 어머니를 추궁했다. 우리는 영문을 몰랐다. 아버지가 무슨 일로 행방을 감췄는지, 왜 경찰이 이토록 집요하게 아버지를 찾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뭔가 큰일이 생겼구나, 짐작만 할 뿐이었다.

1979년 10월 9일 남민전 준비위원회 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 [자료 사진 - 안영민]
1979년 10월 9일 남민전 준비위원회 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 [자료 사진 - 안영민]

며칠 뒤, 우리는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 ‘반국가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적발, 조직원 대거 검거’라는 기사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사진과 이름이 서로 엮이고 엮인 도표와 명단이 실렸고, ‘해방 후 최대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 사건’이라는 무시무시한 내용의 해설도 실려 있었다.

신문을 집어 든 어머니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어머니를 통해 신문을 전해 받은 할아버지는 창백한 표정으로 말문을 잃었다. 곁에 있던 할머니는 끝내 혼절하였다.


5.

남민전 사건이 1차 발표된 10월 9일은 한글날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태극기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급히 밖으로 나가 태극기부터 사 왔다. 당신의 아버지와 아재들이 해방 직후 고초를 겪고 목숨을 잃은 일이 제일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집이 이념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걸 그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태극기를 대문 앞에 잘 보이게 달며 할아버지는 탄식하셨다.

“이런 업보가 내 평생에 또 남았구나.”

할아버지는 10.26이 터진 날에도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애비에게는 다행으로 좋은 소식이겠재.”

남민전 사건이 신문에 보도된 뒤 형사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수배 중인 아버지에게는 500만 원의 현상금이 걸렸다. 곳곳에 수배 전단도 붙었다. 저들은 어머니도 연행해갔다. 어머니는 매일 검은 세단에 실려 대공분실로 끌려가 아버지의 행방을 추궁당했다. 저들은 백지를 주고 ‘소견서’를 쓰게 했다. 살아온 일대기와 평소 남편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낱낱이 쓰게 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소견서’는 한마디로 고문이었다. 아버지를 못 잡은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저들은 옛날이야기까지 끄집어내며 어머니를 괴롭혔다. 한날은 전쟁 직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은 어머니의 삼촌 이름이 형사 입에서 나왔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온 집안이 잊고 살아야만 했던 존재가 30년 만에 다시 거론된 것이다. 전쟁 직전에 동생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던 외할아버지는 “내가 동생을 살린다면서 결국 죽게 했다”며 평생을 후회하셨다고 한다. 형사는 “우리는 당신 사상도 의심하고 있다”며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이제 그만하고 남편 있는 곳을 대요. 남편이 마누라한테 연락을 안 할 리가 없잖아.”

저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하루는 너희도 당해 봐라 싶어서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등산을 좋아하고 전국에 사찰도 많이 아는데, 거기에 숨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형사들은 황급히 나갔다. 실제로 저들은 아버지 책상을 뒤져 지리산 노고단 산장지기인 함태식 선생과 주고받은 연하장을 발견하고, 산장 일대에 잠복하기도 했다. 함태식 선생은 이런 내용을 훗날 자신이 쓴 책에 밝혀놓기도 했다. 형사들이 찾아와 안재구 교수의 행방을 추궁하다 지리산 일대를 뒤지는 헛수고를 하고 돌아갔다고.

저들은 아버지를 찾아 안 가본 데가 없었다. 아버지 친척들은 물론이고 어머니 친척과 친구들, 경북대 수학과 교수들과 제자들, 정말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니며 전국을 뒤졌다. 그러니 우리 주변의 지인들이 오랫동안 우리를 피하는 게 당연했다.

저들의 횡포는 우리 사 남매에게도 자행됐다. 형사들은 아침 등교 때마다 가방을 뒤졌다. 아버지한테 편지를 받은 게 있지 않냐고 추궁했다.

“아직도 연락 없는 거 보니 어디서 죽었나? 아니면 북한으로 도망갔나?”

매일 같이 찢어진 눈으로 비아냥댔다.

더욱 괴로운 것은 이웃의 눈길이었다. 이미 우리 집은 ‘간첩 집’으로 소문이 났다. 집 밖을 나서면 마주치는 이웃들이 고개를 돌렸다. 지나쳐 가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슈퍼에 가면 벌레라도 본 듯 슬금슬금 피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형사들은 이웃 사람들에게도 아버지의 평소 언행을 묻고 다녔다. 학교에 가니 같은 동네 사는 아이가 내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희 아빠 간첩이라며?”

그 아이는 작은누나가 다니던 피아노 집 딸이었다. 피아노 선생님은 평소 어머니하고도 친하게 지냈던 사이다. 그나마 앞집 아주머니가 우리를 보면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주었다. 그 집도 해방 직후에 좌익 활동을 하다 죽은 친척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웃으로부터도 철저히 고립되었다.

매일같이 어머니를 끌고 가던 검은 세단이 어느 날 오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수시로 우리 집을 드나들며 괴롭히던 형사들도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던 차에 작은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10월 28일 체포돼 남산 중앙정보부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가 저들에게 끌려간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저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새 어머니는 진이 빠져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건강을 해쳤다. 구속된 아버지가 남산에서 가혹한 수사를 받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결국 작은아버지 집 근처에 방을 얻어 이사하셨다. 당신들까지 며느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날은 연탄을 사러 간 어머니가 힘이 쏙 빠진 채 돌아왔다. 연탄 가게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간첩 집에는 연탄 안 팔아요. 그리 알고 그냥 가세요.”

잔인한 폭풍이 몰아친 그해 겨울은 정말로 추웠다. 30년 만에 찾아온 추위라고 언론에서도 난리였다. 너무 추울 때는 아버지 책을 연탄 아궁이에 태워 방을 덥혔다. 차마 아버지 수학책은 태울 수 없었다. 대신 창비를 비롯한 잡지와 소설책이 아궁이로 들어갔다. 나는 뒷산에 올라 태울 만한 나무 조각을 모아 왔다. 그렇게 다섯 식구가 한 방에 모여 혹독한 겨울을 외롭게 견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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