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말

새해부터 「아버지, 안재구」란 제목으로 통일뉴스에 연재를 시작합니다.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담겠다기보다는 그저 제가 겪었던, 들었던,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전 몇 년간 곁에서 간병하면서 제 마음속에 담은 아버지의 모습과 생각을 정리할 예정입니다. 아버지께서 바스러져 가는 기억의 조각을 붙들고 제게 들려주려고 하셨던 그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아버지, 안재구」는 아버지에 대한 저의 회상기일 수도, 간병기일 수도, 사부곡일 수도 있겠습니다. 곁에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내고 싶습니다.

매주 화요일, 내년 3월까지 예정합니다. 내년 7월이 아버지 5주기이니 그때쯤이면 책으로 출간해 뜻깊은 5주기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통일뉴스 독자들의 애독과 응원을 바랍니다.


3.

경북대 수학과 교수 재직 당시 안재구 교수 부부와 어린 자녀들의 단란한 한때. [사진 제공 - 안영민]
경북대 수학과 교수 재직 당시 안재구 교수 부부와 어린 자녀들의 단란한 한때. [사진 제공 - 안영민]

내가 어렸을 때 참 많은 아버지 제자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제자들이 올 때마다 내가 문 앞에 딱 버티고 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맛있는 거 뭐 사 왔어?”
“오늘은 영민이 주려고 사브레 사 왔지.”

당시 새로 나온 사브레 과자가 인기였다. 이름처럼 프랑스풍의 최고급 쿠키였다. 값도 비싸 쉽게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 입맛에는 별로였다. 지금도 나는 사브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에이, 맛도 더럽게 없는 거 사 갖고 왔네.”

그러면서 못 들어가게 문 앞에서 딱 버텼다. 결국 제자 중에서 한 명이 급히 가게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양갱이나 뽀빠이 과자를 사 가지고 와서야 겨우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우리가 너 때문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깡패도 아니고 아주 막무가내였다니까. 오죽하면 제자들이 영민이 있냐고 물어보고 왔겠냐.”

형과 누나들은 아직도 나를 이렇게 구박하고 있다. 물론 당시 네댓 살 정도였던 나는 기억에 없다고 우긴다.

그런데 결정적인 증언은 내가 경북대 수학과에 입학했을 때, 교수님들한테서 나왔다.

“우리가 교수님 댁에 갈 때마다 너 때문에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알아?”

경북대 산악반 지도교수로도 재직했던 안재구 교수(오른쪽 두 번째)는 제자들과 자주 전국의 산에 올랐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경북대 산악반 지도교수로도 재직했던 안재구 교수(오른쪽 두 번째)는 제자들과 자주 전국의 산에 올랐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산악반 제자들도 많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경북대 산악반 지도교수로도 오래 재직했다. 산악반 제자들은 나와 몸으로 부대끼며 잘 놀아주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산악반 제자들과 등산할 때, 나도 종종 따라가기도 했다. 물론 이때도 중턱쯤 올라가서는 다리 아프다고 떼를 써 할 수 없이 제자들이 업어서 올라갔다고 한다.

“수학과 학생들이 다녀가면 다음에는 산악반 학생들이 다녀가고, 또 세미나 하러 대학원생들이 오고……. 언제나 너거 아버지 제자들로 집이 북적였지.”

반야월에 살 때 아버지는 안채의 초가집을 헐어서 직접 블록을 쌓아 널찍한 서재를 만들었다. 거기서 제자들과 세미나도 하고, 음악도 들었다. 당시 집에는 ‘전축’도 있었고, 수백 장의 LP판도 있었다. 산격동을 거쳐 대봉동, 파동으로 이사 가서도 제자들의 방문은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 제자들을 챙기는 일도 어머니 몫이었다. 통금에 걸려 자고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머니는 자고 가는 제자들이 있으면 아침에 도시락을 싸서 보냈다. 아버지 도시락은 못 싸도 제자들 도시락은 꼭 챙겼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날에는 무서움이 많은 어머니를 위해 제자들이 당번을 짜 서재에 머무르며 지켜 주었다.

그런 제자들 중에서 어머니가 특별히 잊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헌칠한 키에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는 수학과 제자도 아니고, 산악반 제자도 아니었다. 이 청년이 오면 아버지는 서재에서 오랫동안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도 뭔가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져 차만 대접하고 서재에는 일절 오지 않았다.

한날은 이 청년과 대화하던 아버지의 꾸짖는 소리가 서재 밖으로 들렸다고 한다. 한참 뒤에 상기된 표정으로 그가 나오자 어머니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대문 밖까지 배웅해주었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하지만 남편에게 물어보기도 그랬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무슨 일로 저 청년은 남편을 자주 찾아올까. 궁금하면서 한편으론 불안했다.

안재구 교수와 각별한 관계였던 여정남 열사의 생전 모습. 여정남 열사는 인혁당 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 사형당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안재구 교수와 각별한 관계였던 여정남 열사의 생전 모습. 여정남 열사는 인혁당 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 사형당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그러던 1974년 4월, 어머니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온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머리가 하얘지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유신독재에 맞서 전국의 대학생 시위를 주도해온 민청학련 조직과 이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런데 신문에 나온 조직도 중앙에 그 청년의 사진이 떡 하니 올라와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바로 여정남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도 위험이 닥칠까 두려웠다. 그간에 곁에서 본 두 사람은 각별했고, 뭔가 큰 뜻을 도모하는 관계로 보였다. 조심스레 아버지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봤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두운 표정만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1975년 4월 9일, 이날은 어머니에게 일생에서 잊지 못하는 날 중의 하나다. 그날따라 일찍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저녁 식사도 마다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갔다. 분위기가 너무 침울해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못 건네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잠시 뒤 방 안에서 소리 죽여 우는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사진 제공 - 안영민]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사진 제공 - 안영민]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정남이 학생이 사형선고를 받고, 바로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알았어. 나도 너무 놀라고 흥분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언제나 내게 씩씩하게 인사하던 정남이 학생 모습이 눈에 선한데……. 죽은 정남이 학생이 너무 안타깝고,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 있는지 분노도 치밀었고……. 너거 아버지한테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무섭고 두렵기도 했지.”

세월이 좋아져서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의 추모제가 열린 날, 어머니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8명 중에는 대구에서 활동한 서도원, 도예종 선생도 포함됐다. 두 분 모두 아버지를 만나러 여러 차례 집에 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냥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그랬던 분들의 사형 소식이라니……. 어머니는 분노와 슬픔이 드는 동시에 불안감도 생겼다.

이때부터 어머니의 불안은 조금씩 일상이 되었다. 아버지가 늦기라도 하면 걱정에 조바심이 일었다. 자꾸만 아버지가 학문이 아닌 다른 일을 하다가 큰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이듬해, 앞으로 닥칠 큰일의 전조인 양 16년간 공들여온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터졌다. 바로 아버지의 해직이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은 교수 재임용 제도를 시행했다. 명분은 연구도 안 하고 안일하게 자리만 지키는 교수들을 탈락시키고, 실력 있는 교수들을 새로 충원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교수들을 강단에서 추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 것이다. 여기에 아버지도 포함됐다.

아버지의 재임용 탈락은 경북대에서도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는 국내 수학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당시 경북대 수학과에서 발행한 《경북 매스매티컬 저널》은 세계 유수 대학의 수학과와 교류하던 학회지였다. 이를 책임지고 편집해온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경북대 학생들도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김영희 총장은 박정희와 대구사범학교 동기였다. 그는 실력도 없는데다가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학생들에게 가혹한 징계를 내려 악명이 높았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재임용 탈락을 강행한 것이다.

실력 없는 교수라고 하기에는 자신들이 보기에도 명분이 없었든지 아버지에게는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라는 사유를 갖다 붙였다. 아버지는 학생처장으로 재직할 때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징계에 반대한 적이 많았다. 그게 박정희 정권과 학교 당국에 밉보인 결정적 이유였다.

학생들도 학교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김영희 총장 명의의 졸업장 수여를 거부하며 항의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해직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는 대학원 시절부터 20년, 전임강사로 치면 16년 동안 강의해온 교단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났다. 1976년 2월이었다.

경북대에서 쫓겨난 아버지는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몇 군데 사립대학에 강사로 나갔다. 아버지는 대구로 다시 돌아올 상황이 못 됐다.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도 1977년 여름,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우리 가족이 새로 정착한 곳은 서울의 갈현동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며 8명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낯선 서울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전학 온 학교에서 대구 사투리 때문에 놀림도 받았다. 그러다 제일 센 녀석을 한바탕 두들겨 준 다음부터 놀리는 애들이 없어졌다.

그렇게 나도, 우리 가족도 서울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아버지도 1979년 9월 1일 숙명여대 수학과 교수로 정식 발령받았다. 우리는 빠르게 행복한 일상을 회복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는 갑자기 닥친 악몽 같은 현실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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