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말

새해부터 「아버지, 안재구」란 제목으로 통일뉴스에 연재를 시작합니다.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담겠다기보다는 그저 제가 겪었던, 들었던,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전 몇 년간 곁에서 간병하면서 제 마음속에 담은 아버지의 모습과 생각을 정리할 예정입니다. 아버지께서 바스러져 가는 기억의 조각을 붙들고 제게 들려주려고 하셨던 그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아버지, 안재구」는 아버지에 대한 저의 회상기일 수도, 간병기일 수도, 사부곡일 수도 있겠습니다. 곁에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내고 싶습니다.

매주 화요일, 내년 3월까지 예정합니다. 내년 7월이 아버지 5주기이니 그때쯤이면 책으로 출간해 뜻깊은 5주기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통일뉴스 독자들의 애독과 응원을 바랍니다.

 

1장. 아내 장수향, 미안하단 말도 못 하고 떠나보낸 사람

 

1.

중환자실은 오전, 오후 30분씩 면회가 허용됐다. 그것도 직계가족 한 사람만 가능했다.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각종 의료기기의 전자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아버지.”

곁에 앉아 나지막이 불러봤다. 미동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인공호흡기로 간신히 숨을 쉴 뿐이었다. 손을 잡아보았다. 뼈가 앙상히 드러난 손은 차가웠다. 다리를 흔들어 보았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불 밑으로 드러난 발과 다리를 조금씩 주물렀다. 하지만 온기는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진 제공 - 안영민]
결혼 직전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습. [사진 제공 - 안영민]

12년 전 췌장암 말기로 병실에 누워 있던 어머니 모습이 겹쳤다. 2008년 늦여름 어머니는 암 판정을 받았고,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길 여유가 있었다. 제발 아버지에게도 그런 여유가 허용되길……. 온전한 정신으로 우리에게 유언이라도 제대로 남길 수 있기를…….

아버지의 모습에 어머니의 모습이 겹치면서 치매가 심해지던 때가 떠올랐다. 노인장기요양등급이 5급에서 3급으로 변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아침 식사를 챙겨드리려고 아버지 집 현관을 들어섰다. 방과 거실에 불이 훤히 켜져 있었다. 곳곳에 짐들이 어수선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아버지,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밥 차릴게요.”

“밥은 필요 없다. 도대체 너거가 내한테 이럴 수 있나?”

“아니 왜요? 무슨 일인데요?”

“너거 엄마 어디 갔노?”

“예?”

“너거 엄마 어디 갔냐고? 아니 너거가 엄마를 어디로 빼돌렸노?”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는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다 됐어요.”

“뭐? 너거 엄마가 죽었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가? 아내가 죽은 걸 남편이 우째 모를 수가 있노. 당장 너거 엄마 데리고 와라!”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버지의 망상과 착각이 이 정도로 심해졌구나 싶었다. 속상하고 슬펐다. 하지만 흥분한 아버지를 달래는 게 먼저였다.

“아버지가 잠깐 기억이 안 나서 그런 거예요. 흥분하지 마시고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그럼 기억이 나실 거예요.”

나는 휴대폰을 꺼내 저장된 어머니 산소 사진을 보여드렸다.

“여기 이렇게 엄마 산소가 있잖아요.”

“저리 치워라. 어디서 이상한 사진을 들고 와서 너거 엄마 산소라고 거짓말을 하노.”

아버지의 손사래에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럼 저하고 밀양에 한번 가시죠. 가서 직접 엄마 산소를 보면 기억이 나실 거예요.”

“자꾸 날 속이려 하지 마라. 내가 너거 엄마한테 꼭 할 말이 있다. 그러니 제발 한 번만 만나게 해도. 나도 안다. 나 때문에 고생만 하다 결국 집을 나간 거 아이가. 내가 너거 엄마 만나서 미안하다고 꼭 말해야겠다.”

결국 나는 어머니한테 모셔 드리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형에게 연락했다.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밀양으로 출발했다.

밀양 선영에 모신 아버지 안재구와 어머니 장수향의 산소. [사진 제공 - 안영민]
밀양 선영에 모신 아버지 안재구와 어머니 장수향의 산소. [사진 제공 - 안영민]

어머니 산소는 아버지의 고향인 밀양시 초동면 성만리의 선영에 있다. 아버지가 직접 자리를 잡은 곳이다. 평평한 작은 묘비석에는 ‘장수향 모니카’라고 새겨져 있다. 그 아래로 지아비 안재구, 소정 세민 소영 영민, 이렇게 우리 사남매 이름도 적혀 있다.

밀양 산소에 도착한 아버지는 무척 당황했다. 산소 전경도 낯설어했다. 어머니 묘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가 갑자기 산을 내려갔다. ‘아버지!’ 하고 불러도 황급히 내려갈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집에 도착한 뒤에도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살며시 문을 열고 보니 등을 보인 채 돌아누워 있었다. 그렇게 밤새 꼼짝도 하지 않았다.

2.

어머니는 아버지를 직장 선배 소개로 만났다. 당시 어머니는 경북도청 학무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인연을 맺어준 이는 경북도정 월보의 편집장으로 있던 여류 수필가였다. 공부하는 사람으로 집안도 좋고 장래가 유망한 청년이라고 소개했다. 뒤에 경제적으로 좀 어렵다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예전에 아버지 첫인상을 묻는 내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너거 아버지 첫인상? 글쎄, 소탈하고 텁텁한 학구파였어. 사람이 진실하고 편안했지.”

담담하게 몇 차례 만남을 이어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장 결혼할 상황이 아니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대가족의 장남으로 동생들도 많았다. 어려운 경제 형편이 결혼의 걸림돌이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뒤늦게 ‘교보병’(교직보유병)으로 입대했다. 당시 군 복무를 마치지 않은 교사에게 1년짜리 단기 복무 혜택이 주어졌다. 대학원에 다니며 고등학교 야간부 교사로 있던 아버지도 해당자가 됐다.

그렇게 아버지가 입대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도 끊어지는 듯했다. 당시로는 스물일곱의 과년한 나이였던 어머니는 몇 군데 선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성사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난 뒤 제대한 아버지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그렇게 너거 아버지를 다시 만났어. 졸지에 내가 군대 간 남자를 기다린 꼴이 되었지.”

1962년 10월 3일, 맑고 높은 가을 하늘 아래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혼식을 올렸다. 다시 만나 결혼하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다. 외할머니가 결혼을 반대한 것이다. 어려운 집안의 8대 종손과 결혼하는 딸의 고생이 눈에 훤해 만류했다고 한다.

“너거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열심히 설득했어. 공부하는 사람 뒷바라지하는 게 보람된 일이라고. 사윗감은 장래성 하나만 보면 된다면서…….”

실제로 결혼할 때 아버지는 스탠드 전등 하나 달랑 들고 왔다고 한다. 신혼 방과 살림살이는 모두 어머니가 장만했다. 어머니는 경주여고를 졸업하던 해 교원자격시험에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했다. 경북도청 학무과에 발령받아 10년 가까이 근무해왔다. 그동안 모아둔 돈을 결혼하는 데 모두 쓴 셈이다.

외할아버지 말씀대로 어머니는 아버지 뒷바라지에 헌신했다. 결혼하던 해인 1962년 봄, 경북대학교 수학과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던 아버지는 학자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아버지는 뭔가에 몰두하면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었다. 또 뭔가를 결정하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렸다. 당연히 성격도 강하고 고집도 셌다. 그런 기질은 집안 내력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억센 성격의 시댁 사람들 틈에서 마음고생도 많았다. 그래도 남편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믿고 인내하며 지냈다.

그 사이에 우리 4남매가 태어났다. 큰누나는 1964년, 형은 1965년, 그리고 작은누나는 1967년, 막내인 나는 1968년에 태어났다. 위로 연년생, 아래로 연년생이었다. 남편 뒷바라지에다가 줄줄이 엄마 손이 필요한 4남매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다.

1970년 8월 아버지의 박사학위 수여식 때 모인 가족과 친척들. [사진 제공 - 안영민]
1970년 8월 아버지의 박사학위 수여식 때 모인 가족과 친척들. [사진 제공 - 안영민]

1970년 8월 31일, 이날은 어머니에게 최고로 기쁜 날이었다. 아버지가 만 37세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박사학위 수여자 중에서 가장 젊은 나이였다. 전임강사로 시작한 남편이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정교수로 승진했고, 마침내 박사학위까지 받은 것이다. 결혼 후 8년의 고생이 한순간에 씻기는 듯했다.

1993년 아버지 환갑 때 모처럼 여섯 식구가 다 모인 날, 박사학위 기념사진을 보면서 우리 가족은 즐거웠다.

“아이고 시골에서 많이도 올라오셨네. 칠성동 할매, 불로동 할매도 있고, 밀양에 다원 할배도 있고, 성만에서 할배 할매들도 많이 올라왔네…….”

“할매 친정인 청도에서도 올라오고, 엄마 친정 식구들까지 참 많네. 다들 동네잔치 벌어진 줄 알겠다.”

“그날 학위 수여식에 온 사람들이 다들 놀라고 부러워했지. 다른 학위수여자들은 다들 머리가 희끗희끗했는데, 너거 아버지만 눈에 띌 정도로 젊었거든.”

“우리 장 여사님, 정말 수고가 많으셨네. 남편 뒷바라지에 4남매 키워내느라 진짜 고생하셨겠어.”

정말 그랬다. 어머니는 남편이 가정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제자들과 세미나를 하다 늘 통금시간이 임박해서야 집에 돌아왔다. 월급의 절반 이상이 제자들 뒷바라지로 나갔다. 이것도 모자라 출판사에서 청탁받은 교재 집필로 휴일도 없이 바빴다.

명색이 국립대 교수였지만 집안 살림은 어렵고 모자랐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았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자기 삶을 남편의 삶에 맞추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 힘든 내조 속에 얻은 남편의 박사학위였기에 어머니는 더욱 기뻤다.

박사학위도 받고, 정교수도 되면서 아버지의 앞날은 꽃길처럼 열렸다. 시댁에서도 친정에서도 모두 어머니의 노고를 칭찬했다. 이제 사모님 소리 들으며 편하게 살겠다며 부러워했다. 어머니도 당연히 그럴 거라 믿었다. 아이들 바르게 키우고 열심히 살아가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왠지 자꾸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 도대체 왜 이럴까? 어머니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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