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말

새해부터 「아버지, 안재구」란 제목으로 통일뉴스에 연재를 시작합니다.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담겠다기보다는 그저 제가 겪었던, 들었던,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전 몇 년간 곁에서 간병하면서 제 마음속에 담은 아버지의 모습과 생각을 정리할 예정입니다. 아버지께서 바스러져 가는 기억의 조각을 붙들고 제게 들려주려고 하셨던 그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습니다.

「아버지, 안재구」는 아버지에 대한 저의 회상기일 수도, 간병기일 수도, 사부곡일 수도 있겠습니다. 곁에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내고 싶습니다.

2주에 한 차례씩 화요일에 내년 3월까지 예정합니다. 내년 7월이 아버지 5주기이니 그때쯤이면 책으로 출간해 뜻깊은 5주기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통일뉴스 독자들의 애독과 응원을 바랍니다.

띠리리링~~.
어둠을 깨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실 책장에서 휴대폰이 하얀 불빛을 반짝이며 얕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소파에서 선잠이 들었던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에 누구지?’
휴대폰을 집으러 가는 순간이 왠지 길게만 느껴졌다.

“여보세요.”
“안재구 어르신 보호자님이시죠?”
다급한 목소리가 거실을 무겁게 울렸다.
“요양원입니다. 지금 어르신 상태가 안 좋아서요. 산소포화도를 체크하니 위험수치로 떨어져 있네요. 빨리 응급실로 모셔야 할 거 같습니다.”
요양원의 남자 실장이다. 친절하고 나지막한 평소 목소리와는 딴판이다. 긴박한 상황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오히려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차분했다. 소파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집으러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이…….
“지금 바로 119를 불러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어느 병원으로 갈까요?”
“아버지가 예전에 다녔던 G병원이 낫겠네요.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구급차 오고 바로 이송하면 2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병원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휴대폰 화면에 시간이 나타났다.
01:30
“무슨 전화야? 아버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
안방 문이 열리며 어둠 속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나왔다. 조용히 통화했지만 잠을 깨웠나 보다. 아내가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거실의 불을 켰다. 정수기에서 냉수를 한 잔 따라 마셨다. 순간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식탁 의자를 잡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의자를 잡아 빼고 털썩 앉았다. 근심 어린 아내의 시선도 의자를 따라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놈이 간밤에 보던 책이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내 몸에 눌려 있던 소파는 아직 제 모양을 회복하지 못한 채 쭈그러져 있다.

“아버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냐니까?”
“지금 바로 나가봐야겠어. 요양원에서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모셔온다네.”
“어떤 상태이신데?”
“몰라. 가봐야 알지.”
“아주버님한테 연락드려야지.”
그렇지. 형한테 연락해야지. 전화를 거니 금방 받는다. 아직 안 자고 번역 일을 하던 중이었나 보다.
“아버지 상태가 안 좋아 응급실로 간다네. 오피스텔 앞에 나와 있어. 내가 바로 데리러 갈게.”

형을 태우고 군포역 사거리까지 신호 한번 걸리지 않고 단번에 왔다. 한 블록 건너 병원 불빛이 보인다. 차창을 여니 서늘한 밤공기가 몰려들었다. 응급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 차 한 대 주차할 공간이 보였다. 급히 집어넣고 응급실로 오니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아직 구급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보호자님, 이제 출발했습니다. 응급조치하느라 시간이 지체됐네요.”
한결 차분해진 실장의 목소리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생전의 아버지 안재구와 아들 안영민.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신 건 다섯 달 전이었다. 부모를 요양원에 모시는 건 자식들이라면 누구나 갈등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나는 하루하루 지쳐갔다. 아버지 집과 우리 집을 하루에 몇 번씩 오가며 챙기는 일은 단조로웠지만,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분노, 울분, 망상, 착각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기억이 사라져 갔다. 처음에는 기억의 단절이 비연속적이었다가 나중에는 뭉텅이로 지워졌다. 하지만 당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당신을 속인다고 생각했다.

특히 아버지는 당신이 살던 집을 교도소라고 여겼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내게 “보안과장 불러와!”라고 소리쳤다. 지인들이 찾아오면 면회를 왔다고 여겼다. TV를 틀어 놓으면 TV 속 사람과 대화했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창밖의 누군가와 끊임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누가 있나 보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2년, 3년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점점 활기를 잃어갔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스스로를 잃어가는 것이었다. 잊는다는 건 곧 잊히는 것이기도 했다.

삐뽀삐뽀~~.
정적을 깨는 사이렌 소리가 다가왔다. 뒤이어 어둠을 깨는 형광 불빛이 달려왔다. 구급차는 응급실 현관 입구까지 들어오더니 급하게 멈춰 섰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구급대원들이 익숙한 몸짓으로 베드를 내렸다. 벨트로 몸이 묶인 아버지 얼굴에는 산소호흡기가 달려 있었다.

굴곡진 역사를 살다가신 아버지 안재구( 1933.10.24~2020.7.8). [사진 제공 - 안영민] 
굴곡진 역사를 살다가신 아버지 안재구( 1933.10.24~2020.7.8). [사진 제공 - 안영민] 

“아버지!”
100일 만에 뵙는다. 2월 중순부터 코로나가 확산되자 요양원에서도 면회가 중단됐다. 그전까지는 매일 아버지를 찾아갔는데 어느 날부터 소식을 전할 길이 없어진 것이다. 전화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가능했다. 전화 통화를 한번 해봤지만 “이놈들이 나를 도청하고 감시한다”며 고함을 치는 바람에 포기했다. 그나마 요양원을 교도소 병사라고 생각했는지 가족이 보고 싶다, 집에 가겠다, 떼를 쓰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100일 만에 만난 아버지는 너무 말라 있었다. 형이 응급환자 접수를 하는 동안 만져본 아버지의 팔다리는 앙상하고 가냘팠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가쁜 숨을 내쉬는 아버지의 얼굴도 뺨이 옴팍 들어가고 광대뼈가 드러났다.

“어르신이 요새 통 드시질 않으셨어요. 저희도 이것저것 챙겨드린다고 애를 썼는데…….”
요양원 실장이 다가와 조심히 말을 건넸다. 아버지는 실장을 교도관이라고 여겼다. 그 통에 걸핏하면 아버지한테 욕을 얻어먹었다. 골치 아픈 환자를 맡아 신경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도 아버지의 살아온 이력을 알고는 더 잘 보살펴주었다.

“안재구씨 보호자 계세요?”
“네, 접니다.”
응급실 담당 의사였다.
“지금 위중한 상태입니다. 인공호흡기부터 장착해야 하는데, 동의서 좀 작성해주시죠.”
“위중하다면 어느 정도인지…….”
“언제든 돌아가실 수도 있어서……. 호흡기 달고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야겠습니다.”
볼펜을 쥔 손이 나도 모르게 떨렸다. 100일 만에 겨우 만났는데 돌아가실 수도 있다니…….

응급실 입구에 자리한 감압실에서는 아버지 입안으로 호스를 꽂아 넣으며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지 아버지는 몸을 뒤척였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이 안 갔다. 간호사와 의사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각종 장치와 호스들이 앙상해진 아버지의 몸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었다.

“보호자님, 저는 일단 요양원으로 복귀해야 해서…….”
“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따로 연락드릴게요.”
요양원 실장이 떠나고 감압실 창문 앞에 나와 형만 남았다. 유리창 너머로 아버지의 고단한 몸이 보인다. 뼈가 드러난 가슴이 아주 조금씩 들썩인다.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숨을 힘겹게 내쉬고 있었다.

“안재구씨 보호자님.”
“네, 무슨 일이시죠?”
“환자분 이제 중환자실로 이송합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인공호흡기로 호흡을 유지하면서 집중치료를 받아야 할 겁니다. 연세가 많으셔서 저희도 뭐라고 단정하기 힘드네요. 일단 코로나 검사 후 음성 판정이 나올 때까지는 격리병실에 계실 겁니다.”

각종 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아버지를 6층의 중환자실로 옮겼다. 시간은 새벽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구술 작업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건강과 활동력이 왕성했을 때만 해도 아버지는 스스로 회고록을 썼다. 해방 직후부터 대학 입학 때까지 이야기는 통일뉴스에 1년 이상 연재했고, 2013년에 『끝나지 않은 길』이란 제목으로 두 권이 나왔다. 고향인 밀양에서 겪은 어린 시절 이야기는 구국전위 사건으로 감옥에 계실 때 집필했고, 1997년에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이란 제목으로 펴냈다.

2016년부터 회고록 집필을 재개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건강 때문에 집필이 어려워진 것이다.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던 정용일 형과 같이 구술부터 받아놓기로 했다. 주권방송 스튜디오에서 후배들이 촬영해주었다. 하지만 녹화는 번번이 중단됐다. 아버지는 묻고 답하는 것을 자꾸 ‘취조’라고 여겼다. 중간에 화를 벌컥 내고 ‘진술’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나는 나대로 답답하고 속상했다. 결국 우리는 구술 작업을 포기했다.

그 뒤 내가 집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가며 조금씩 정리해나갔다. 하지만 이미 기억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 2000년대 기억이 없어졌다. 조금 더 지나니 구국전위 사건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재문과 남민전도, 여정남과 인혁당도 시나브로 잊혀 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책도 보여주고 사진도 보여주면서 묻고 또 물었다. 사람과 사건의 불연속적인 장면만이라도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때 뿐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감옥에 갇혔다. 바로 망각(忘却)의 감옥이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