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일제 식민지 시기, 1929년 6월에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에 의하여 창간 발행된 취미·시사 중심의 월간 종합 잡지였다. 그러나 이 잡지에서 1938년 이후에는 친일 잡지가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삼천리』는 일제 식민지 시기의 민족사상이라든가 항일투쟁의 편린(片鱗)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이 잡지는 당시의 문화예술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1940년 12월에 발행된 1941년 1월호(신년호)의 몇 기사는 그동안 특별히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1월호의 특정 기사 한 편은 국가보안법의 구설수를 피하여 언급을 자제하여 왔다. 필자는 그 1월호를 지난 11월 서울의 한 경매에서 입수하였다. 이제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삼천리』와 김동환의 변절

『삼천리』의 발행인 파인 김동환은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1925년)으로 유명한 시인이다. 1967년도로 기억한다.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읽으면서 많은 상상을 하였다. 첫 구절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이 시는 우리 근대 문학사상 최초의 서사시로서, 나는 이 시를 두만강을 건너 독립운동에 나선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애타는 심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 시는 “두만강의 겨울밤을 배경으로 밀수(密輸)를 떠난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애타는 마음을 통해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비운(悲運)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나의 이해에 착오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파인의 이 시에서 나타내는 민족의 비운은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비운이다.

김동환은 독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깊이 인지하였던 인물이었으나 1937년 이후로, 1938년경에 월간지 『삼천리』를 지속 발행하기 위하여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친일 행위를 참회하고 반민특위에 자수하였으며 『꽃피는 한반도』라는 책에서 ‘반역의 죄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친일에 대해 사죄하였다.

그런데 1982년 5월 21일 우리 고서수집가들은 ‘한국고서동우회(현재 한국고서연구회)’를 발족시켰고, 1990년 2월 24일 우리 애서운동가가 주도하여 ‘한국애서가클럽’을 발족시켰다. 1990년대 전반기에 김동환의 삼남 김영식은 여기 ‘한국애서가클럽’의 임원들과 간간이 교유하였다. 그는 여러 친일 문인의 후손 가운데 부친의 친일 행위를 공개적으로 사죄한 유일한 후손이다. 김영식은 부친의 참회를 진실한 참회로 재확인하고 나름대로 정화한 것이다.

2. 기존에 알려진 『삼천리』 1941년 1월호의 몇 기사와 영화(映畫)

『삼천리』 잡지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호(號)는 1941년 1월호(신년호, 제13권 제1호)이다. 친일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113면에 게재된 모윤숙(毛允淑, 1910~1990)의 「지원병에게」라는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는 친일시를 일찍이 주목하였다.

2004년 8월에는 당시 열린우리당 신기남(辛基南) 의장의 부친 신상묵(辛相默)씨가 일본군 헌병으로 복무하던 기간에 조선인들의 일본군 지원 입대를 독려하는 글을 여기에 기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라는 창씨 개명한 이름으로 ‘지원병 일기’를 기고했음이 밝혀지며 다시 한번 주목되었다.

1월호를 살펴보면 이 1월호는 일제에 복종을 강조하는 특집호 성격이 짙다. 이 친일 잡지에 손기정(孫基禎, 1912년~2002년) 선생의 ‘體育大祭典參觀과 朝鮮體育振興에의 展望’이라는 기고문도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손기정 선생은 그 기고문에서 “베를린 올림픽을 봐도 알 수 있듯이 4억 인구의 중국은 우승을 못 했지만 2,300만 인구를 가진 조선은 체육으로 세계에 기함을 토했다”라면서 “조선 선수들은 지도자와 선수와의 단결과 신사적인 행동으로 체육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라고 말하며, 친일 변절의 회유를 피하여 갔다. 그리고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9)의 기고문 「無事히 도라왔습니다, 東京帝國호텔에서」도 게재되어 있다.

『삼천리』 1941년 1월호, 「新體制와 映畫·演劇人心境記(監督·俳優諸氏)」. [사진 제공 - 이양재]
『삼천리』 1941년 1월호, 「新體制와 映畫·演劇人心境記(監督·俳優諸氏)」.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러나 필자가 1월호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부분은 당시의 영화계에 관한 기사가 다수 게재된 것이다. 김정혁(金正革)의 논설 「朝鮮映畵振興의 目標 - 眞實한 映畵精神의 樹立을 위하여」라든가, 「新體制와 映畫·演劇人心境記(監督·俳優諸氏)」, 「俳優生活十年記」, 「朝鮮各映畵社의 映畵製作表」가 기재되어 있다. 이 영화 관련 부분은 어찌된 일인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이다. 그리고 또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논설 「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206면~209면 수록)이다.

3. 논설 「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1941년 1월호는 주로 세 가지 주제로 편집되었다. 당시 신년(1941년)을 맞아 첫째로는 내선일체와 학도병 출정을 권유한 것이고, 둘째로는 당시 「海內 海外 朝鮮同胞의 現地報告, 朝鮮人發展策」을 다룬 것이며, 셋째로는 문화예술과 체육에 관한 것이다.

즉 논설 「김일성 등 반국가자에게 권고문, 재만동포 백오십만의 총의로」는 당시의 「해내 해외 조선동포의 현지보고, 조선인발전책」을 내세우며 시도한 일제의 심리전이자 선전전이다. 이 논설은 잡지 ‘삼천리사’의 공식적인 논설은 아니다.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東南地區特別工作後援會本部)’를 내세워 1940년 11월에 일제가 만주 일대에 뿌린 삐라 원문을 잡지 『삼천리』에 그대로 전재한 것이라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일제가 뿌린 이 삐라는 일반인들에게 만주 일대의 반국가자들을 중상모략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 삐라에서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의한 일제의 피해와 전전긍긍함을 엿 볼 수 있다.

삐라를 뿌린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의 고문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1938년 ‘만몽일보사(滿蒙日報社)’ 고문과 일본 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의 교수직에 임명되어 교수로 부임해 1943년 2월까지 역임했다. 그는 1940년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무장 세력을 상대로 귀순 및 투항공작을 전개한 동 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고문이라면 이름만 걸어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상무위원 서범석(徐範錫, 1902~1986)은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3.1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였으나, 1933년경에 변절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40년 당시에는 봉천(奉天, 지금의 瀋陽)에서 흥아협회 기관지였던 월간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의 주간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신경(新京, 지금의 長春)의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에 상무위원으로 있으면서 그 역시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귀순 권고문을 작성하는 후방공작을 주도하였는데, 그는 해방 후 6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잡지 『삼천리』 1941년 1월호를 입수한 필자는 책을 모으고 연구하는 애서운동가로서 이 근·현대사 자료를 아래에 전재한다. 독자분들은 일본을 정의의 국가로 미화하여 언급하는 이러한 기만 전술의 역사 자료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 행간에 담긴 뜻을 분석하시길 바란다.

4. 「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 전문(全文)

『삼천리』 1941년 1월호, 「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사진 제공 - 이양재]
『삼천리』 1941년 1월호, 「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사진 제공 - 이양재]

 

東滿一帶에 金日成을 爲始하야 相當한 數의 反國家武裝群이 橫在하여서, 國內의 治安을 어즈럽게 하고 있음으로, 그네들에게 日滿軍警에 依한 「今冬의 最終的인 大殲滅戰」에 前期하야 反省歸順하도록, 在滿同胞 150萬은 同胞의 愛情으로 蹶起하야, 이제 그네에게 勸告文삐라를 飛行機로써 多數히 뿌리였다. 이것은 그 勸告文의 全文이다.

荒凉한 山野를 定處없이 徊徘하며 風餐露宿하는 諸君! 密林의 原始境에서 現代文化의 光明을 보지 못하고 不幸한 盲信때문에 貴重한 生命을 草芥같이 賭하고 있는 가엾은 諸君! 諸君의 咀呪된 運命을 깨끗이 淸算하여야 될 最後의 날이 왔다! 生하느냐! 死하느냐? 150萬 白衣同胞의 總意를 合하야 構成된 本委員會는 今冬의 展開될 警軍에 最終的인 大殲滅戰의 峻嚴한 現實앞에 直面한 諸君들에게 마즈막으로 反省歸順할 길을 여러주기 爲하야 이에 蹶起한 것이다. 諸君의 無意義한 浪死를 阻止하고 諸君을 新生의 길로 救出하는 것은 我等 150萬에 賦與된 同胞愛의 至上命令으로 思惟하야 全滿 坊坊谷谷에 散在한 朝鮮同胞 150萬을 代表한 各地委員은 10月 30日 國都 新京에 會合하야 嚴肅하게 諸君의 歸順하기를 勸告하기로 宣言하고 玆에 그 總意의 執行을 本委員會에 命한 것이다. 民族協和의 實現과 道義世界創成의 大理想을 把持하야 燦然히 躍進하고 있는 我滿洲國에 있어서 150萬의 同胞가 忠實한 構成分子로써 國民의 義務를 다하야 光輝있는 繁榮의 길을 前進하고 있는데 一部에 文明의 光明을 보지 못하고 架空的인 盲信때문에 國家施設의 惠澤과 法律保護에서 全然 離脫된 不幸한 諸君들이 尙存하는 것은 民族的인 一大 汚點일 뿐만 아니라 피를 함께 한 諸君으로 하여금 이 世上 慘憺한 生活을 繼續케 한다는 것은 人道上 座視할 수 없는 重大問題로서 생각하야 이에 本委員會는 150萬이 總意를 代表하야 諸君이 한사람도 남김없이 良民이 되도록 즉시 歸順하야 同胞愛 속에 도라오기를 嚴肅히 勸告하는 바이다. 諸君은 이 勸告文이 150萬의 心血을 기우린 至情과 諸君의 身上을 燐愍하는 따뜻한 150萬의 愛情의 發露임을 깨닫고 同 胞愛를 離反함이 없이 이 機會에 飜然大悟하야 過去의 惡夢에서 깨여 新生의 大路로 나올 것을 期待하는 바이다. 諸君이 我等의 뒀°뜻한 溫情속에 돌아 오는 날은 本委員會는 諸君의 生命을 保障하는 데서 나아가 諸君을 安定한 生活로 引導하야 我等과 함께 男耕婦織하야 平和한 生活을 보내도록 할 生活安定策이 또한 諸君의 身上을 걱정하는 150萬의 慈愛의 結晶에 依하야 本委員會의 손으로 準備되어 있는 것이다.

  無批判的인 政治的 盲信때문에 人生의 꽃다운 時節을 殺伐的인 險難속에서 보내고 現世 모든 便益에서 隔絶하야 날마다 生과 死의 分岐路에서 彷徨하는 諸君!
荒野의 漂泊에 疲勞한 거름을 暫間 멈추고 虛心坦懷하야 我等 150萬의 至情을 다한 勸告에 귀를 기우리라. 눈을 감어 고요히 君等의 過去를 回想하여 보라. 또 다시 想念을 멀니 楊柳 느러진 그대들의 그리운 故鄕山川으로 또한 夢寐間에도 이즐 수 없는 그대들의 그리운 父母兄弟妻子에게 미처보라. 風露雪이 뼈를 어이는 듯한 이 滿洲의 酷寒에 定處없이 彷徨하는 君等의 身上을 생각하야 눈물로 歲月을 보내는 그대들의 父母의 悲歎을 君等은 무엇으로써 報慰하려는가? 이 不幸과 悲劇을 君等과 피를 함께 한 我等 150萬은 他人의 일로 알고 無關心하게 座視할 수 있도록 沒人情하고 無慈悲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我等은 이러한 不幸한 狀態를 絶滅시키기 爲하야 또한 이 悲劇을 超越하야 光明의 彼岸으로 君等을 救濟키 爲하야 蹶起한 것이다. 人生 不過 60에 順調로운 生涯을 보낸다 하여도 本來가 行路難인 人世의 不絶한 曲折은 自然 人生의 無常을 懷歎케 하거든 하물며 必要없는 波瀾을 이르켜 孟浪無意한 險難의 生涯를 自取하고 銃劒豺狼의 脅威下에 貴重한 君等의 生命을 내여던진다는 것은 이 얼마나 無謀한 愚擧리요. 勿論 이렇게 君等을 今日의 不幸에 誘導한 動因이 君等의 素朴한 共産主義에 對한 思想的 共鳴에 있는 것을 我等은 聞知한다. 그러나 今日의 共産主義란 諸君의 今日까지의 全人生의 犧牲과 諸君의 迷妄된 行動으로 因한 모든 慘禍를 賭하야서까지 此를 固持할 만큼 價値있는 思想이 아님을 徹底히 깨다러야 한다. 世界大勢가 一變하고 極東의 現實이 諸君의 過去 共産主義에 對한 流行的 盲目的 追從을 할 때 보담 全然 判異한 現在에 있어서는 이에 對한 識者의 見解도 스스로 달르게 된 것을 아러야 할 것이다 . 이에 끝으로 共産主義 蘇聯 밋 極東의 現勢에 對하야 正確正한 消息을 諸君에게 傳達하야 無批判的으로 一種의 精神上 痼疾이 되고 있는 君 等의 不幸의 原因인 思想上 迷妄에서 즉시 깨여 나오기를 150萬의 總意에서 다시 勸告하는 바이다.

赤禍의 絶滅과 東亞의 新形勢
共産主義라는 것이 人間의 物質的 慾望을 均等으로 充足시키는 것만을 人生目的의 第1義로 하는 唯物的인 器機的인 思想임으로 因하야 人間情神의 美德을 抹殺시키고 더욱이 政權奪取를 爲한 그 階段獨裁論과 目的을 爲하야는 手段을 가리지 안는다는 破壞的 方法論에 依하야 無用한 國內相剋을 釀成하고 民族的 平和를 攪亂하야 殘忍한 現代地獄相을 世界到處에서 演出한 罪惡은 正常한 人類文化의 一大 汚點이다. 그 本尊인 蘇聯에 있어서는 黨의 專制를 强化하는 것을 社會秩序維待의 最高目的임과 같이 强惡하는 殺伐的 唯物强權思想에 依하야 現在의 獨裁者 스탈닌은 네로 以上의 强力한 今日의 蘇聯政權을 獲得하였는데 이 過程에 있어서 彼는 壹同志로써 가장 重要한 역할을 演한 所謂 레닌 在世時 12巨頭라는 人物 中 칼리닌을 내 놓고는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等 元勳을 모다 順次 屠殺하였고 以外에도 數萬의 生命이 非人道的인 赤色暴君의 權力維持를 爲하야 犧牲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蘇聯은 現在 스탈린의 一國社會主義의 原則에 基하야 트로츠키의 積極的 世界赤化論을 斷念하고 오즉 赤色國家로써의 生存에 餘念이 없다. 오즉 外國의 共産勢力을 巧妙하게 그 國防外廓으로써 利用하기 爲하야서만 各國의 共産派에 援助를 줄 듯한 惡辣한 態度를 表示하여 폭력에 依한 國內秩序破壞運動을 助長하여 놓고는 한번 形勢가 不利하야지면 문득 不問不知에 付하기를 例事로 하야 無謀한 共産主義 盲從者들은 世界到處에서 悽慘한 被殺의 苦杯를 마신 것이다. 西班牙의 人民戰線派가 蘇聯의 煽動으로 國家主義者와 抗爭하다가 犧牲된 數는 37萬名에 達한다고 하는데 蘇聯은 이에 對하야 距離上 關係로 援助할 수 없다고하야 結局 無謀한 이들의 悲慘한 最後를 黙黙座視할 뿐이였다. 그 外에도 世界 各地에서 이른바 코민테른의 保障없는 煽動에 依하야 悲劇的인 最後를 마친 怨鬼는 數千數萬으로써 地下冥中에서 스탈린을 呪咀하고 있다. 赤色王座를 누르기 爲하야는 他의 犧牲을 不顧하는 煽動者의 甘言에 醉하야 貴重한 人生을 無價値하게 내던지는 群盲中에 가엾은 諸君들의 映像을 發見하는 것은 實로 想像만 하여도 戰慄할 일이라 할 것이다. 또한 最近 蘇聯은 그 國家主義的 政策에 則하야 相互國內秩序不干涉을 條件으로 하야 日本에 對하야는 그 威武에 順하야 着着國交를 調整하고 讓步를 하고 있는 現實을 아는가 모르는가. 이러한 觀點에서 150萬 同胞에서 完全히 隔絶된 諸君이 貧弱한 數百挺의 小銃을 가지고 空陸에 亙한 近代的 裝備를 가진 世界에 比類없는 精銳한 數百萬의 日滿軍에 抵抗을 試한다는 것은 實로 螳螂拒撤도 분수가 있는 일이라고 諸君의 愚 劣極함을 我等 150萬은 慨歎치 아니치 못하는 바이다.

日本帝國은 東亞諸民族을 이러한 殺伐的인 共産主義禍 뿐 아니라 一切의 個人主義的인 本能的인 唯物的인 西歐的 迷妄에서 警醒시켜 東亞諸民族의 아름다운 倫理의 本然한 姿態에 돌아가 精神的인 道義的인 國家의 利益을 本位로 한 東洋的인 理想社會의 新秩序를 樹立하기 爲하야 이에 協同치 않고 歐米白人의 傀儡가 되야 抵抗하는 蔣介石政權을 西蜀에까지 驅逐하야 그 威武를 世界에 宣揚하고 잇다. 滿洲國은 實로 이러한 東亞謠民族의 共存共榮을 實現하는 新秩序의 標本으로써 이미 國內五族의 一絲不亂한 協力에 依하야 世界에 자랑할 道義世界의 創建을 國是로 하야 着着國礎를 鞏固히 하고 있다. 諸君이 文盲에서 버서지고 密林에서 뛰여나와 白日下 滿洲國發展의 驚異할 眞姿를 接하고 이에 明朗한 氣分으로 建國理想을 實踐하는 한 分子로써 他民族과 倂行하야 前進하고 있는 同胞들의 和樂한 生活을 보면 現在의 君等의 生活이 얼마나 極東의 現實과 乖離된 無謀하기 짝없는 迷論妄想임을 應當 깨다를 것이다. 朝鮮內에 있어서는 2,300萬의 同胞는 日本帝國의 威光下에서 過去의 偏頗한 民族主義的 觀念을 最後의 1人까지 完全히 淸算하야 日本帝國의 臣民된 光榮下에서 隔世의 感이 있는 繁榮의 길을 걷고 있다. 하리하야 諸君과 같은 時代錯誤의 異端者가 아직도 浮洲의 密林에서 現實을 모르고 彷徨하고 있는 事實이 尙有한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常識으로 믿을 수 없는 怪異한 일로 알만큼 되어 있는 것이다. 日滿軍警이 從來 諸君을 總括的으로 集中討伐치 안는 것을 奇貨로 하야 겨우 山間密林地帶로 橫行하다가 朝鮮에서 살 길을 찾아 僻地로 移來한 가엾은 貧農同胞를 노려 그 가지고 있는 가엾은 最後襤褸까지를 빼서가지 않으면 안되도록 窮境에 빠진 諸君은 大體 누구를 爲하야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불상한 貧農同胞까지를 울게 하는가? 諸君의 今日의 情狀과 諸君의 掠奪로 因한 移住同胞의 哀切한 慘景은 實로 朝鮮人의 歷史에 남길 骨肉相殘의 一大悲劇이라 할 것이다. 諸君과 피를 함께 하야 諸君의 不幸을 我等의 不幸으로 알고 被害同胞의 슬픈 눈물을 함께 슬퍼하지 아니치 못하는 150萬 在滿同胞는 이 事態를 그대로 座視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嗚呼!! 密林에 彷徨하는 諸君!!
이 勸告文을 보고 즉시 最後의 斷案을 내려 更生의 길로 뛰여 나오라!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고 懺悔할 것도 懺悔하고 이제까지의 君等의 世界에 類例없는 不安定한 生活에서 즉각으로 脫離하야 同胞愛의 따뜻한 溫情속으로 돌아오라. 그리하야 君等의 武勇과 意氣를 新東亞建設의 聖業으로 轉換奉仕하라! 때는 늦지 않다! 只今 곧 我 150萬 同胞의 最後의 呼訴에 應하라. 最善을 다하야 諸君을 平和로운 生活로 引導할 本委員會의 萬般準備가 諸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東南地區特別工作後援會本部
(新京特別市 韓日通 鷄林會內)
△顧問 淸原範益 崔南善 中原鴻洵
△總務 朴錫胤 伊原相弼 金應斗
△常務委員 崔昌鉉(新京) 朴準秉(新京) 李性在(新京) 金東昊(安東) 金子昌三郞(營口) 徐範錫(奉天) 金矯衡(撫順) 金仲三(鐵嶺) 外 60名

5. 『삼천리』와 김일성

『삼천리』 1941년 1월호 이전에도 잡지 『삼천리』는 김일성에 관하여 두 차례 기사화 한 적이 있다. ①1937년 10월호(통권 제9권제5호)의 회고 수기에서는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가 게재되어 있고, ②1938년 11월호(통권 제10권제11호)에는 소식에서 「歸順한 女黨員과 金日成, 그의 運命은 장차 엇더케 될가」를 보도하고 있으니, ③1941년 1월호(통권 제13권제1호)까지 모두 3차에 걸쳐 기사화 한 것이다.

앞서 게재한 두 편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이 세 번째 게재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일제는 1940년 11월에 왜? 이런 중상모략하는 삐라를 만들어 만주 전역에 뿌렸고, 조선 내부의 최악의 친일 잡지 『삼천리』에까지 그 전문을 수록하였을까?

이 세 편의 기사가 부분적으로는 각각의 오류가 있지만, 이 세 편의 기사는 왜곡의 일관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행간의 흐름을 보면 1937년부터 1938년 1941년의 김일성과 해방후 김일성은 동일인임이 확실하며, 일제와 만주국에 크게 위협적이었음을 알려준다.

해방후 간행된 독립운동가를 다룬 여러 출판물에서는 김일성을 전설적 항일 투사로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제 식민지 시기의 친일 잡지 『삼천리』 기사가 해방후 김일성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감을 높여 주는 역효과를 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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