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아이들이 있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았느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부분 '보았다'고 했다. 그땐 지각만해도 교문에서 귀싸대기를 맞았는데,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기 전에는 그것이 일상적인 학교의 풍경이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세상은, 더디지만 꼭 바뀐다고 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많아질수록 변화는 더욱 분명하고 빨리 온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면 2.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 보다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응답했다.

학교의 재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효율과 집중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거나, 엘리트를 제대로 육성해서 그들이 나라를 잘 이끌게 되면 모두가 좋아질 것이라는 제 나름의 이유도 댔다.

그럼 앞으로 선거하지 않고 전교 1등이 학생회장, 전교 2등이 부학생회장을 하는 것으로 하고, 공부잘하는 아이들로만 따로 특별반을 만들어서 더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하면 되겠다고 선생님이 말하자, 아이들은 그건 안된다고 일제히 아우성쳤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전해들은 교실의 실제 상황이다.

과연 아이들만 그럴까?

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포기와 좌절, 자신의 힘이 아니라 소수 지배 엘리트의 선량한 의지에 기대는 환상과 패배감은 2023년 대한민국을 휘감고 있는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그 길을 결심하고 나서는 많은 이의 발목을 오랫동안 끈질기게 잡는 후진 정치의 숙주이기도 하다. 

제 잇속을 차리면서 아닌 보살하는 위선과 권모술수, 줄서기, 배신이 모두 정치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게 눈뜨고 보기 힘든 현실이다보니 정치 혐오와 회의에 빠지게도 한다. 

굳어진 아이들의 생각을 바꾸려면 설명과 설득이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정치도 그래야 한다고 그 선생님은 강조했다.

장면 3.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산재로 죽는 사람이 일곱명이라는데 내가 좀 더 열심히 해서 좋은 세상이 단 하루라도 당겨진다면 일곱명을 더 살릴 수 있는 거다. 아니 최소한 세 시간을 당기면 한명을 살리는 거다. 나의 고생도 결국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윤경선 수원시의원
 

"밭일을 해 온 여성농민들은 어디가서 손내미는 걸 싫어하셔요. 일해서 투박해진 손이 부끄러울 때가 있는 거죠. 그런 분들이 '여성농업인 행복바우처'를 받았을 때 참 많이 기뻐하셨어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받은 거니까요. 그런 기쁨을 드릴 수 있어 저도 행복했습니다."-오미화 전남도의원
 

"이 조례(체불임금없는 관금공사 운영을 위한 조례-구청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을 발주한 경우, 해당사업의 하청업체까지 점검해 체불임금은 없는지 확인한 후 완공대금을 지급하도록 한 조례)가 만들어진 후 구청공사에서만큼은 체불임금이 발생한 사례가 없습니다. 이런 제도를 하나 만들어 놓으면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지자체에 꼭 있어야 하는 제도죠. 없었던 제도를 만들어 낼 때, 그래서 조금이라도 노동자 농민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 가장 뿌듯합니다. 그게 우리가 진보정치를 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국강현 광주 광산구의원
 

"농민분들이 공무원 한명을 만나는 것도 어려워 하셔요. 그런데 '내편' 의원 한명 생기니까 달라지는 걸 바로 느끼시는 거예요. 주민들과 같이 문제 보따리를 싸들고, 같이 군청으로 도청으로 다니면서 문제를 해결할 때 보람이 있고, 재미도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정치를 할수록 깨닫죠. 한명만 있어도 많이 바뀌어요.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습니다."-오은미 전북도의원
 

"이슈에 대해 주장하고 목소리만 내는 정치가 아니라, 지역주민 곁에 바짝 가까이 있어야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주민들은 자주 얼굴보이는 정치인은 편하게 생각하고 민원도 얘기합니다. 본인이 제기한 민원에 대해 피드백만 해드려도 너무 고마워하시고요. 민원해결도 지역에 있는 주민을 만나면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강진희 울산북구의원
 

"노동자들이 아플 때만큼은 쉴 수 있게 해드리고 싶어요. 대기업이나 정규직 노동자는 아프면 유급병가를 쓸 수 있는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조합이 약한 회사의 노동자는 아파도 무급이에요. OECD국가들은 이미 다 유급병가를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 현실이 낙후하죠. 제도의 빈구석을 구에서 채우자는 것입니다. 구청도 긍정적인데, 보건복지부에서 검토받아야 하는 사안이라 승인결론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최나영 서울 노원구의원

진보당 지방자치위원회 펴냄, 『진보정치는 살아있다』, 도서출판 민플. 279쪽 [사진-진보당 지방자치위원회 제공]
진보당 지방자치위원회 펴냄, 『진보정치는 살아있다』, 도서출판 민플. 279쪽 [사진-진보당 지방자치위원회 제공]

삶의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써 내려간 진보당 20명 지방의원의 이야기에는 세상을 바꾸는 '정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생동감있게 담겨있다.

진보당 지방자치위원회는 지난해 6월 지방선거 1년을 맞아 20명의 지방의원 인터뷰, 김종훈 울산동구청장과의 대담 등을 묶어 『진보정치는 살아있다』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그들은 '덤프트럭을 몰던 기사였고 지금도 건설노조의 조합원'(백성호 전남 광양시의원)이거나 '지역에서 반찬나눔과 김장봉사를 16년 넘게 해 온 동네일꾼'(손혜진 광주 북구의원)이고 '매주 일요일 동네청소를 혼자라도 빠지지 않고 2년동안 해온 행동파'(손진영 전북 익산시의원)이며, '지역에서 10년동안 지역주민들과 함께 직접 도서관을 운영하던 이웃'(김은정 광주 광산구의원)이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모은 아이스팩을 세척해 전통시장에 전달하는 아이스팩 재사용운동과 일회용기없이 알맹이만 파는 장터인 '화순용기내장''(김지숙 전남 화순군의원), '중, 고등학생이 교통카드로 100원만 부담하면 지역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중고생 100원버스'(최미희 전남 순천시의원), '고용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자영업자, 특수고용노동자, 예술인 등을 위한 고용보험지원 조례 통과'(강진희 울산북구의원)는 그들이 해온 여러가지 일중 일부이다.

지금 농촌에서 가장 재미없게 사는 사람, 소외된 여성농민들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만들어 교장선생님을 자처했지만 행여 그들이 불편해 하지 않도록 학교 이름도 한글학교가 아니라 '안남어머니학교'라고 했던 송윤섭 충북 옥천군의원은 면사무소 공무원들에게 자원봉사 교사를 해달라는 요청도 하고 먼 시골길을 오가는 어머니들을 위해 마을버스도 운행하도록 했다. 

아직도 정치인처럼 악수하는 게 어색한 송의원이 지난해 선거에서 옥천군 전체 득표 1위를 한 저력은 '방학은 싫다. 졸업은 더 싫다'고 말하는 어머니학교 학생들의 든든한 지지 덕분이다.

진보정치의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주민들속에 뿌리박고 그들의 입장에서 하는 현장정치, 지역밀착정치로 이룬 성과였다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책을 펴낸 장진숙 진보당 지방자치위원장은 이 책이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진보정치에 닥쳐왔던 시련에 두번 다시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서울에서 당선된 구의원 427명중 단 1명의 진보당 의원으로 주목받았던 최나영 의원은 담담하지만 옹골차게 진보정치의 대안은 주민속에 있다고 있다고 강조한다.

"진보정치가 초라했다면 그건 진보정치를 자임한 세력의 성적표가 그랬을 뿐, 주민은 진보정치에 대한 열망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정치의 대안을 격렬하게 찾고 싶어하시죠. 대안도 방법도 힘도, 주민속에 있습니다."

2014년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이후 '새로운 정당, 굳건하고 뿌리깊은 정당'을 생각하며 만든, 진보당 전신인 민중당 공동대표를 지낸 그가 뿌리내린 노원구에서는 2019년 봄 당원과 지역사회 단체들이 함께 하는 '주민에게 권력을! 제1회 노원주민대회'를 개최했다.

이후 주민대회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주민직접정치'를 표방한 주민대회는 진보당의 대표적인 활동방식이 되었다.

"'주민을 힘있는 존재로 내세우겠다, 365일 주민의 심부름꾼으로 살겠다' 이 마음을 한 순간도 내려놓지 않는 정치인이 되고 싶습니다. 주민의 힘이 커져가는 것이 느껴질 때 가장 뿌듯해요. 어렵고 힘든 길이기도 하지만 평생 멈추지 않겠습니다"라는 그의 각오에서 새로운 진보정치의 방향이 어떤 것인지 느껴진다. 

주민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요구를 모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을 키우는 정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 차근차근해야 할 일이라는데 공감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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