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착하냐 악하냐, 혹은 착한 자본주의가 가능하냐는 물음은 공허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냥 자본주의일 뿐이다. 민중의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느냐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 윤리적 외피를 쓴 대안이 자본주의적 착취의 새로운 방식이 아닌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악한 면이나 악한 개별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필요하다면 넘어서는 것, 그것이 우리의 과제여야 한다. (본문 296쪽)

먼저 하나 묻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착한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지폐에 얼굴이 인쇄되어 있긴 하지)을 한 자본주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따뜻한 인정과 배려, 박애의 정신으로 이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의 해악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끔씩 언론에 등장하는 아주 가슴 훈훈한 미담을 보며, ‘역시 아직 세상은 살만 해’라고 눈물 흘리지는 않는가?

당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다. 당신 자유다.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정말 착한 자본주의, 나쁜 자본주의가 따로 존재할까? 그렇다면 착한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 그 방법 아시는 분?

지금 이 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정의감이 충만하다 못해 폭발하여 미쳐 버린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다들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 ‘정의롭지 못한 누군가’를 이 사회에서 삭제해버리지 못해 안달이다. 일종의 광기다. 과거였으면 해외 토픽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나 가벼운 가십거리로 다뤄질 이야기들이 버젓이 ‘뉴스’라는 이름으로 하루 종일 종편 등 시시껄렁한 방송에서 떠들어대고 있다. 그 뉴스 같지도 않은 뉴스에 등장하는 누군가가 만약 나의 ‘정의 기준’에 맞지 않다면, 순식간에 저주와 비난의 대상이 되어 매장되고 만다. 거의 매일 목격하는 참상이다.

여기에는 소위 말하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없다. 각자 진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불의하다면, 그것이 아무리 소소하든, 아니면 평생 자신과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은 이들의 행위라도 ‘죽어 마땅한’ 일이 되어버린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개판으로 했다, 식당에서 실컷 음식을 먹고 그냥 도망가 버렸다, 무인 판매점에서 몰래 똥을 싸고 도망쳐 버렸다 등등, 사건의 당사자들이 사과하고, 사과를 받고, 배상하고, 배상을 받으면 끝날 일들이, 전국의 모든 네티즌들이 들고 일어나 정의의 키보드를 두들기며 ‘응징’을 내려야 하고, 늘 화난 목소리로 작은 일을 마치 천재지변인 것처럼 침을 튀기는 기괴한 앵커, 그리고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작가가 써준 글을 앵무새처럼 읽어대며 오늘 일당이 얼마일지 계산하는 패널들까지(하다못해 그 방송에서 진행하는 트로트 쇼의 가수들까지 평가해야 한다).

한심함이 평범함이 되어 버린 시대에, 정의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정의를 간단하게, 가볍게 다뤄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런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며 살아가게 되었을까. 여기에 과연 자본주의 따위는 전혀 관련이 없을까?

대구시 어느 동네(굳이 정확히 지역을 말하고 싶진 않다)에서는 이슬람사원이 건립된다하니 결사반대하며, 심지어 그 앞에서 돼지고기를 구워먹는다. 왜 그럴까? 반 이슬람 정서, 혹은 중동에 대한 편견이나 매우 잘못된 혐오감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절대 아니다. 집값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아마 그게 제일 큰 반대의 이유이지 않을까.

우리는 어느 전직 국회의원 아들의 50억 원 퇴직금에 분노한다. 정당한 분노다. 권력층의 부정부패에 분노하고, 이를 정의의 이름으로 또한 정당한 방법으로 책임을 묻도록 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 그렇게 제대로 처리된 사례가 별로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50억 원은커녕 5천만 원을 보기도 힘든 평범한 사람들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는 그 아들에 대한 부러움과 시샘이 단 1%도 없었을까. 때문에 더더욱 분노가 치밀지 않았을까.

한형식, 『처음 읽는 공산당 선언』, 동녘, 2022. 1. [자료 사진 – 통일뉴스]
한형식, 『처음 읽는 공산당 선언』, 동녘, 2022. 1. [자료 사진 – 통일뉴스]

말이 길었다. 『처음 읽는 공산당 선언』은 「공산당 선언」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난해할 수 있는 선언에 대한 풍부한 해설과 두 저자의 전체 사상 속에서 선언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설명해준다. 또한 선언을 다시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1848년 이후 선언을 둘러싼 의견과 해석, 수용과 함의 등에 대한 논쟁과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소개함으로써 다시금 선언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언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오늘의 세계를 선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담은 저자의 덧붙이는 글 3개다. ‘「공산당 선언」의 영향과 오늘날의 의미’, ‘환대를 넘어 연대로’, ‘착한 자본주의의 허상을 넘어’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과연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잘못 인식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꽤 흥미로우면서도 또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글들이었다.

앞서 구구절절 쓸데없는 이야기를 떠든 것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자본주의의 틀 밖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점이 못내 아쉽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소 엉뚱한 대상에, 솔직히 말하자면 가난한 우리끼리 분노를 쏟아내고, 저주를 퍼붓고 있는 이유, 사회의 공기 역할을 해야 할 언론과 방송이 철저히 저질로 전락해버린 이유, 세계적인 재벌이나 기업가를 그가 단순히 돈이 엄청 많다는 이유만으로 존경해버리는 이유, 그러면서도 정작 우리 삶을 통제하고 있는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나 비판은 너무나도 소극적인 이유는 결국 현실에 대한 자포자기, 회의가 내면화되었기 때문은 아닌지 묻고 싶기 때문이다.

1848년 발표된 「공산당 선언」은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히 틀린 부분이 적지 않다. 세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측대로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뛰어난 학자이자 사상가였지만, 한계 역시 명백했다. 그것을 지금 비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대신 그들이 놀랄 만큼 뛰어난 통찰력으로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노동자들의 삶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예측했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아울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냉전의 종식 이후 어떤 이들은 ‘역사의 종말’을 떠들었지만, 보시다시피 다른 의미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더욱 효율적이고 광범위하게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자유주의, 이른바 ‘세계화’의 결과는 참혹했다. 그것이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치자, ‘We are The World’를 외치던 서구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각자도생이 길로 나아갔다. 가난한 이들이 가장 먼저 죽고, 가난한 국가가 가장 늦게 재앙에서 벗어나는 지옥의 악순환이 일상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자본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청년들이 얼마나 죽어나가든 상관없이 오늘도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왜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전쟁을 멈출 생각은 하지 않고, 고가의 무기들만 줄기차게 지원하고 있을까. 당연하게도 우크라이나, 러시아 청년들의 생명보다 자국의 이익, 자본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모른 척해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도대체 왜 지금 이렇게 화가 나는지도 모르는 채, 그리고 분노의 대상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분노를 쏟아내는 이유를 모르는 채 우리는 살아간다. 정작 우리가 분노를 표현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지, 그리고 내 삶의 변화를 위한 연대에 나서야 하는 이유는 알려 하지 않는다. 그저 피곤하고, 또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을 현실로 만들며 진화해 온 것이 바로 인간이다. 자본주의가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우리 삶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지구라는 별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아니 이미 그렇게 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다시 주위를 둘러봐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이번 생은 글렀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내 작은 행동 하나가 지금 당장은 그 무슨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혁명적 낙관주의를 가지고 연대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책은 선언에 대한 새삼 새로운 이해와 함께 나의 삶, 나의 행동, 나의 인식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그리고 미처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이를테면 박애 자본주의의 실상,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소액대출 그라민은행의 실체 등이다. 빌 게이츠가 과연 무작정 존경해야 할 인물인지, 그리고 우리 시대 이 땅의 얼치기 진보들이 서구 사상에 얼마나 무력한지 등도 새삼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책을 통해, 지금 내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고맙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자본주의 이후의 세상을 더 이상 꿈꾸지 않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사람이 아닌 돈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지극히 반성하고 또 반성할 일이다.

책을 읽은 후, 조만간 다시 선언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주변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화가 나는 세상이지만, 이젠 그 화를 ‘제대로’ 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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